무조건적인 감사(목자와 양의 관계) (시편 100)

 

바벨론 포로 됨과 귀환(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 그리고 무조건적인 감사 (시편 100)


(살전 5:14, 개역)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살전 5:15, 개역)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9, 개역)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20, 개역)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개역)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 5:22, 개역)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3, 개역)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4, 개역)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골 3:17, 개역)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대상 16:34,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6: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9,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 개역)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3, 개역)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4, 개역)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5, 개역)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개역)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개역)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개역)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개역)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0, 개역)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1, 개역)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2, 개역)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3, 개역)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4, 개역)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5, 개역)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6, 개역)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7, 개역)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8, 개역)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9, 개역)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0, 개역)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1, 개역)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2, 개역)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개역)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4, 개역)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5, 개역)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개역)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사 12:4, 개역)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렘 33:10,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감사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주님 집에 거하는 자들아

주를 향해 서 있는 자들아 감사하라 감사하라


(시 134: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2, 개역)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3, 개역)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무조건적으로 감사하라 라고 하면

일단 기분이 나쁩니다.

우리가 뭐 로봇이냐?

우리는 엄연히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로봇취급하지 말아라 라고

당연히 반발성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우리의 육체입니다.

 

바로 그 육체성을 거쳐서

즉 조건적인 감사를 따지는 육에 속한 것을 거쳐서

그 차이성으로

왜 무조건적인 감사가 왜 옳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즉 조건적인 감사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육체가 뿜어내는 감사의 내막 말이죠.

그 엉터리 감사를 거쳐서 말입니다.

 

시편 100편의 배경이 여러 주장이 있으나

보편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서 그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지금 그런 기쁨의 환희 속에서

건방지게도 이 기쁨과 감사가

무조건적인 감사인가? 곧 부조리한 감사인가?

아니면 조건적인 감사 곧 합리적인 감사인가를

따져보고자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기쁘니까 감사함이 넘쳐난다 말이죠.

그것이 우리의 육체성입니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말이죠.

우리의 육체는 긍정적인 것에 감사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당연히 부정적인 것은 도저히 감사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육체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시편 100편의 감사 배경은

사실상 그냥 기쁨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의 기쁨이다는 겁니다.

즉 육체라는 조건에 맞는 긍정성에서 나오는 감사가 아니라

비록 육체로는 부정적이나

그 육체가 싫어하는 그 부정성 속에서 나오는 감사이기에

육체를 넘어서는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조건이 맞아서 감사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조건이 전혀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감사가 넘쳐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주도권을 쥔 감사가 아니라

감사가 나를 쥐고서 감사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감사를 또 인물로써 표현한 의인화 해서 말이죠.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 문에 못 들어가면 육체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그 문에 움직여서 나를 스캔하듯이

엑스레이 사진 찍듯이 통과 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되는 거죠.

감사가 나를 덮쳐서 나오는 감사이다는 겁니다.

감사가 나를 쥐고 있는 주도권을 행사한다 말이죠.

내가 감사한게 아니라

감사가 나를 감사케 만들어 버린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차이를 누리게 할려고

의도적으로 육체가 줄수 없는 감사의 차이로써

이 육체를 심판 속에 곧 죽음 속에 넣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홍해건너기 라는 물세례처럼 물에 빠뜨립니다.

죽음에 빠뜨립니다.

그 죽음 속에서 조건을 따지고 조건에 맞아서 감사하겠다는 육체의 죽음을 격고서

다시 물 위로 건짐을 받았을때에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게 되었을때에

과연 감사란 시선에 전혀 다른 시선이 된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라는 일종의 할례 곧 세례처럼

물에 빠뜨리기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었다 말이죠.

그런데 풍랑을 일으키자 그것을 보고 물에 빠졌습니다.

죽게 된 거죠. 주여 살려주이소 라고 말이죠.

그래서 풍랑을 꾸짓고 잠잠케 해서 베드로를 건집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감사에 의해서 물 위로 올라옵니다.

 

과연 기적이 뭔가 라는 거죠.

과연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거죠.

 

조금전까지만 해도 나도 물 위를 걸음으로써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세계를 누리고 싶었다 말이죠.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냐 말이죠.

물 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이 성경에는 베드로 밖에 없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도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사람 베드로인데

그 뒤에 물에 빠진다는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물에 빠져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은 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기적을 바랬는데 기적이 아닌

죽음을 격었으니까 말이죠.

 

이게 진짜 감사입니다.

 

자 똑같이 시편 100편에서 바벨론 포로 라는 죽음 곧 심판

곧 물에 빠지기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풍랑을 일으켜서 빠뜨렸듯이

이스라엘을 멸망케 해서 물 속으로 바벨론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건져내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나를 언제든지 죽일수 있는 말씀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감사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죽일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살려주시느냐 라는 역설을 보게 되니

이제 내가 죽냐 사냐? 나 구원인가? 버림인가? 라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나 라는 관심사에서

도대체 당신 누구기에 이런 일들을 벌리시나요 라고

주님에 대한 관심사로 옮기게 되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관계로 재설정해 버리는 감사이기에

무조건적인 감사와 조건적인 감사와의 차이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조건적인 감사는 어차피 또 의문의 반복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 보다

심판 보다

멸망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다 말이죠.

물에 빠져 죽는 판국에 이 보다 더 확실한 게 없다 말이죠.

 

그 죽음을 격는 물에 빠짐 속에서

말도 안되게 그 풍랑을 그 큰 파도를 잠잠케 해서

물에 빠져 죽은 이미 죽은 나를 다시 건져 살리심은

죽음 보다 확실한 그것보다 더 더 더 명료한 건지심이 있다는 것에

이것은 감사가 저절로 무조건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찾아가서 감사하는게 아니라

감사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벌린 사건을 누리는 겁니다.

 

그러니 바벨론 포로 라는 물에 빠짐

곧 세례

마음판의 할례를

그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할례를

손할례로 구원의 조건에 맞추었다고 우기는

그런 의문의 반복을

드디어 마쳐버리게 하는 또렷한 죽음과 더더더 또렷한 다시 살려내는 십자가에

이 부정의 부정에

그만 뿅가는 겁니다.

 

감사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감사한번 해 본적 없고

얼굴에 아예 불평 불만 이라고 써있는 그런 얼굴상에

저절로 감사함이 넘쳐나는 겁니다.

누가 묻습니다. 너 왜 안하는 감사를 얼굴에까지 피어나게 하니?

몰라 나도 왜 그러는지

본인도 몰라요

그 정도로 감사라는 것을 깨진 항아리에 붓는게 아니라

항아리 자체를 감사의 바다에 빠드려 버리는 겁니다.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런 의미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무슨 내용인데요

제가 어머니 한테도 자주 이야기 하고

만나서 복음을 나누는 분들에게 자주 이야기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인 불가능한 소리가 이해가 될거다 말이죠.

뭔데요 뭔데?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왜 신나게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 하는지를 말이죠.

분명 포로되어 잡혀 가는데

그 울보 선지자가 환하게 웃는 겁니다.

너무 너무 즐거워 하는 겁니다.

지금 포로 잡혀 가는 이스라엘에게 웃으면 그거 실례가 되는 행동 아닙니까?

예레미야 선지자 뿐만 아닙니다.

지금 어머니께서 읽고 있는 부분인 미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선지자들 다 그래요

얼마나 기뻐하는지 노래를 불러요 불러

오늘 시편 100편처럼 말입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슬퍼합니다.

마치 물에 빠져버린 자들처럼

거대한 풍랑에 큰 파도에 휩쓸려 난파된 다 부서진 배를 그 쫄딱 망한 이스라엘 땅을 뒤로하고

포로 당해 잡혀가는데

 

거기에다가 염장을 지르듯이

오히려 기뻐 춤추는 겁니다.

 

다시 돌아 오게 될테니 표시를 해 두라는 겁니다. 헨델과 그레텔처럼 말이죠.

 

그래서 바벨론 포로 이후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짖게 되니

그 참선지자들이 기분 나쁘게 놀려먹듯이 기뻐했던 그것이

이제야 드디어 같이 기뻐하게 되더라 말이죠.

말씀대로 되었으니 말이죠.

 

아니 독립운동 전쟁을 벌리기나 했었나요

이 약속의 땅을 다시는 추호도 밟을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나요.

전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큰 파도 큰 풍랑 큰 바벨론에 잡혀간 이상

거기서 죽는다 라는 이것 보다 더 또렷한 현실이 없는 겁니다.

본인들이 평생을 입을 모아 번제와 제사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다 라고

그 의문의 반복을 했다 말이죠.

그런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는커녕 싫어하는 일만 골라 했던 겁니다.

그럼 뭐를 기뻐하시는데?

자기 피를 바르는 일만 기뻐하시겠다는 겁니다.

자기 피를 바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바벨론 마귀 나라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가망 없습니다.

구원이고 뭐고

약속의 민족이고 뭐고

죽음 보다 더 명료한 것이 없다 말이죠.

큰 파도는 딱 봐도 베테랑 어부들의 경험 속에서

아 이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고 체념할 수 밖에 없는 큰 파도

큰 바벨론이다 말이죠.

거기서 빠져나올 길은 이제 없다는 겁니다.

길이 없어요.

 

그런데 길이 없는데 길이 있다고 외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참선지자들이 바로 이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자는 엉뚱하게도 죽음 속에서 만나는 겁니다.

 

십자가의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는

이 누추한 곳에

전혀 예상 못한

마지막 인생의 종점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만나고자 왔다는 것이

명료한 죽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저절로 외치는 겁니다.

감사가 나에게 걸어왔으니 말이죠.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 ~~~~

 

그야말로 성경은 말 되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막살면 안된다는 소리가 없어요

 

성경은 그저 말 안되는 소리 뿐입니다. 즉 막살아라 라는 소리 밖에 없어요.

불가능한 소리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바벨론에 한 번 담궈 빠뜨렸다가 다시 건지는 것 자체가

마음판의 세례

불가능한 세례였다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말씀을 이 불가능한 말씀을 띄엄 띄엄 봤으면

겨우 몇몇개 지켜서 말씀 지켰다고 우기는데

이 불가능한 말씀을 과연 지킨 것 맞을까요?

 

지키지 마세요

불가능을 누리세요

 

손할례 즉 세례 지키지 마세요.

불가능한 마음판의 할례를 누리세요

 

가능한 소리를 하는 자는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인간이 지킬수 있는 가능한 꺼리를 제시하는 자는 다 마귀자식들입니다.

사단의 회 라고 했지요?

 

불가능을 제시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지킬게 없다는 겁니다.

 

제 말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전 재산을 바치라 라는 사기를 치는 목사가

불가능한 전 재산을 바치라는 소리를 했을때에

그거 지키면 안된다 말이죠.

물론 가능한 전 재산 바치라 라는 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세요

목사가 예수님 보다 사모를 더 사랑하고

가족을 더 사랑하고

교회를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전재산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기 때문에

전 재산을 바치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마귀 자식이다는 증거이니까

그 목사 쫏아내버려라 라는 겁니다.

 

물론 쫏겨날 인간이 아닙니다

도리어 쫏겨남을 당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 보다 목사를 더 사랑하는

이제 목사가 아닌 목사의 밥풀떼기들이 너무 많기에

그런 자들을 다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죠.

 

그렇게 나오게 될 때에

휴 다행이다 저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저절로 감사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자 이렇게 왜 예수님은 우리를 베드로를 물에 빠뜨리듯이

자꾸 물에 빠뜨리시는 것일까요?

왜 죽음 속에 자꾸 집어넣는 겁니까?

이리 떼 속에 집어넣냐 말이죠.

 

그럼 죽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죽음 보다 더 또렷한 것 없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게 그 죽음 보다 더 또렷한 것이 있는데

그 앞에서 나의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끼이는 죽음이다는 거죠.

결국 나는 죽어 마땅한 그런 권리 조차도

그의 죽음 앞에서 명함을 못 꺼내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만나기 위해서 죽이시는 겁니다.

 

물에 자꾸 빠뜨리시는 겁니다.

 

그렇게 나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그 불 속에서 바깥을 보게 되니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 속이 생명이 되고

룰루 랄라 신나게 춤추는 곳이고

 

예수님의 죽음 바깥이 오히려 생지옥이 되더라 말이죠.

 

그리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서

불 바깥으로 나가서 이 내용을 말하면서 외치는 겁니다.

까먹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감사합시다 라고

성령께서 확 등 떠밀어서 물에 빠뜨립니다.

내 혼자 막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누가 내 다리 붙잡고 딸려나와 살더라 말이죠.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이 내용을 서로 나누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 말이죠.

 

자 그러니 참선지자가 왜 물에 빠졌다고

죽음 속에

심판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바벨론 포로도 잡혀 간다고

왜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고 춤을 추느냐 말이죠.

 

전에는 감사의 조건이 맞아야 감사를 하는 인간이였는데

즉 이스라엘 이였는데

 

이제는 감사의 조건이 안맞아도 감사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누리는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 지금 이스라엘 해체라니깐?

이스라엘이 사라졌어

 

참선지자는 오히려 이제 드디어 새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진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손할례 라는 되도 않는 의문의 반복을 드디어 마침하고, 끝내고,

마음판의 할례라는 주님 쪽에서의 도장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는 그 도장에 깔려 죽게 된

죽었으나 산 자인

감사의 사람으로 아예 태어난 겁니다.

 

감사하지 마시고

감사의 사람이라는 것을 누리라 말이죠.

 

하나는 감사함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행복하기 위해서 감사를 지켜서 감사하는 자고 곧 손할례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감사를 지킬 필요가 없이

감사를 누리는 마음판의 할례를 누리는 자

도저히 손으로는 불가능한 그 할례 그 세례를 누리는 자로 태어났다 말이죠.

 

그런 자에게 감사하라 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린다 말이죠.

이미 감사인데 감사를 지키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자 그렇기 때문에 시편 100편에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즉 여기서 그 유명한 동화 미운 우리 새끼

참 아니다 미운 오리 새끼 ㅋㅋㅋ

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말이죠.

자기가 이미 거위로 태어났는데

오리로 살라고 하면 되겠냐 말이죠.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말이죠.

 

그래서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죽음이 묻지 않는 이스라엘이니까

오리 행세하는 버릇을 툴툴 털어버리라꼬

씻어버리라꼬 자꾸 죽음 속으로 집어넣더라 말이죠.

 

아이고 나 죽네 라고 고래 고래 고함쳤는데

알고 보니 물 속에서 수중호흡이 가능한 줄도 모르고

수중 호흡이 불가능한 자로 착각했었다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억지로 12분 숨참기를 했었다 말이죠.

 

그러니 오리의 탈을 탈탈탈 털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집어넣더라 말이죠.

이게 세례요 이것이 연합이요.

마음판의 할례이다는 겁니다.

 

연합이란 동질성 합일성이 아니라

구별 되었다는 거룩성이다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입니다.

거룩한지 아닌지 죽여보면 안다 말이죠.

 

그래서 참 선지자는 자꾸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 놓고 좋아라 하지요.

다시 되돌아 오게 될테니 말이죠.

 

그렇게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그 기쁨을 외치는 겁니다.

맞네 맞았어 그때 그 참선지자가 왜 그렇게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기뻐 감사했는지 말이야

 

아무도 그 이상한 행동에 그 어떤 공감이 가지 않았는데

불 속에

죽음 속에

바벨론 속에

물에 빠지듯이

세례하듯

한 번 들어갔다 나와보니까

 

우리 예수님이 달라졌어요

우리 이스라엘이 달라졌어요 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답게 행동해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미 벌써 이스라엘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손할례를 왜 하냐 말이죠.

왜 의문의 모호함을 왜 반복하냐 말이죠.

막살지 않기를 왜 하냐 말이죠. 그 의문을

 

자 이렇게 말하니까 무할례를 지킬려고 해요

그것도 역시나 지키는 겁니다.

막살기를 지킬려고 한다 말이죠.

 

그것 역시 의문의 반복입니다.

인간들은 웃끼게도 이 두가지 길 밖에 못해요

제 삼의 길이 있습니다.

길 없는 길

바로 마음판의 할례입니다.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용어가 나온 겁니다.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말이죠.

이 마음판의 할례를 주님이 실행하신다는 겁니다.

 

졸지에 예수님의 대상물로써 나는 마음판의 할례를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내가 하는, 내가 지키는, 내가 달성해 내는 마음판의 할례가 아니라 말이죠.

 

마음판의 할례가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벌어지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럼 신약은 전부 바뀌는 겁니다.

세례는 뭐 교회에서 세례를 한다는 둥 그런거 다 그림자일 뿐이다 말이죠.

내가 세례를 받듯이 어떤 기관에 찾아가

그 행사식에 따라서 하는 그런 세례란 없어요.

 

그와 정반대로 세례의 대상물로써 나는

세례가 벌리는 사건에 휘말리는 대상물이기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례의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미운 오리 새끼처럼

오리들에게 미움 받는 겁니다.

미움 자체가 세례가 벌리는 사건이다 말이죠.

그래야 탈탈탈 털어버리는 사건에 의해 거위인줄도 모르고

오리 행세 한 것에 대해

회개(마음판의 할례)를 하는 겁니다.

 

세례 곧 연합은

아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다시 보여주는 사건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물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불평불만 할 수 밖에 없는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로써

수건을 벗기게 할려고

껍데기를 벗기게 할려고

넌 오리가 아니라 거위야 라는

그 음성에 확 등떠밀려서

물에 빠지는 겁니다.

 

물에 빠져보니 죽는다고 고래 고래 외쳤는데

알고보니 자기가 물 속에서만 사는 물고기였는줄 몰랐다 말이죠.

 

땅을 진동케 하는 복음 이라는 글에서

 

이스라엘은 진동하는 땅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요동 그 자체라고

 

일본 보다 더 한 지진 속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는 자가 성도라고

지진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못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라고 말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손할례 속에서는 못 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오로지 마음판의 할례 속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되니까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라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가 아니라)

말씀 속에서 누리게 되니까 (깨진 항아리 자체를 물 속에 빠뜨려 버리니까)

이건 뭐 안 기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런 바벨론 포로의 경험 자체가

잃어버린 자를 되찾음 때문에 격어야만 했었던

주님의 사랑이였다는 것을

내가 내 발걸음으로 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이 나에게 걸어와 통과해 버리니까

앉은뱅이인 나에게 그 문은

도저히 그 문을 들어갈 수 없는 그 불가능한 문은

오히려 나에게 걸어오는 감사의 문으로써

그 감사의 문에서 태어난 자로써

앉은뱅이 되게 하신 주를 찬양케 만들어버리시니

안 누리고는 감사치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앉은뱅이인데도 말이죠.

감사의 문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러니 감사의 문은 오히려 두 발이 멀쩡한 자는 피해가는 겁니다.

아무리 들어갈려고 발걸음을 옮겨도 들어갈수가 없어요.

 

졸지에 이 감사의 문이 하나의 사물이 되어서

두 패로 갈라버린다는 거죠.

 

인간이 자기 발걸음으로 감사의 문에 들어가봤자

두 패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슨 놈의 약속이며 복음입니까?

그게 무슨 거룩이냐 말이죠.

 

그러니 감사의 문이 움직여서 활동하게 되면

처음에 언급했듯이

감사의 조건을 갖추어서 감사하는 자와

무조건적으로 감사가 덮쳐져서 감사를 누리는 자로

두 패로 나눈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저 세리는

천국에 가고

 

누가 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처럼 토색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지옥에 가는

 

이렇게 두 패로 나누시는

감사의 문이다는 겁니다.

 

곧 이 문은 예수님이다는 거죠.

그 성전을

그 성전되신 예수님을 재건해서

그 약속을 재건해서

(재건 하니까 또 하도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에서 회복이라는 단어로 사기를 치기 때문에

그런 의미가 아니라 회개의 의미입니다. 거위인줄 모르고 오리로 착각한 그 착각을 회개하는 것으로써 거위로 제대로 보게 된 실상을 보게되는 시선이라고 보자 말이죠.)

왜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줄 누리자 말이죠.

왜 궁전이 나에게 덮쳐져서

그의 이름을 찬송케 하는지를 말이죠

 

(100:3, 개역)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5, 개역)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

 

이 소유성, 이 연합성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심을 누리는 겁니다.

 

그와의 관계성이니

내가 맺은 관계가 될수 없고

그가 벌리신 사건으로서만 맺은 관계이다는 겁니다.

 

어떤 사건관계?

죽음 속으로 막 집어넣음으로써 말이죠.

매일 매일 넘기움을 당하면서 말이죠.

인자 되신 예수님이 넘기움을 당했듯이

선지자들도 넘기움을 당하고자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맺은 관계인

십자가 관계 말이죠.

 

이 관계성을 연합 곧 세례라고

넌 거위이지 오리가 아니야 하고 죽음에 넘기우는 겁니다.

오리털을 탈탈탈 털어버리고 씻겨버리게 할려고 말이죠.

 

그 속에서 끄집어냄을 당해서 이렇게 감사를 외치는 겁니다.

 

당신 도대체 누구시죠? 전 분명히 오리인데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한번 들어갔다나 나오니 거위가 되어있는데 도대체 당신 누구시죠?

이런 일을 벌리시는 당신 도대체 누구요 라고

그 당신과의 관계가 저쪽의 당신이 벌려서 만든 사건에 휘말려서

외치는 감사이다는 겁니다.

 

당연히 감사가 안나오는 자가 발생하게 되는 거죠.

 

십자가 상의 두 강도에서 반드시 하나는 완악한 모습을 계속 고집하고

다른 하나는 감사의 문이 걸어오게 되니

자기를 통과해버린까

감사의 문에 들어간적도 없던 앉은뱅이와 같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가

세상에나 당신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해 달라고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냐 말이죠.

 

그의 궁전에 무슨 자격으로 들어간 것 같이 기억해 달라고 말이죠.

마치 이미 들어와버린 것처럼 외치고 있으니

감사가 넘치는 겁니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 더러운 곳에까지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을려고 십자가에 복종하시는 저 어린양을 보라고 말이죠.

 

한 쪽 강도는 너무 너무 감사가 넘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찾아오시다니

그 감사의 문이 나에게 걸어오다니

그 궁전이 나에게 걸어오다니

 

그 이름을 송축 아니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감사가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되돌아와서 감사합니다.

마치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 감사함을 외친 한 쪽 강도와 같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 같은 놈도 기억을 해 주시다니

다시 돌아와 성전을 짖고 감사케 하고 찬송케 해 주시다니

 

이야 이것은 바벨론 포로 격지 않으면 나올수 없는 감사이다는 것을

새롭게 그 감사의 바다에 풍덩빠져 물짱구를 치는 모습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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