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는 영 과 일곱나팔


 

(8:1, 개역)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8:2, 개역)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8:3, 개역)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8:4, 개역)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8:5, 개역)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8:6, 개역)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지난 계시록 7장까지 일곱 인을 떼는 천사들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천사들이 활동한다는 말은

곧 사도행전을 앞의 글들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겁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찬양을 모든 어른들은 애들은 가라 라고 무시하듯이

잉여라는 무능한 어린아이를 무시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가 무시했던 그 잉여가 그 찌끄래기 부스러기가 사실은 우리를 살리는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무시하지 않을꼬야

왜 나는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이니까 신학박사이니까 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 자체가 이미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니 무시 하지 않겠다고 할게 아니라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그 허물을 덮는 모든 인간이 무시한 그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도록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친 예수님의 말씀을 누리게 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 됩니다
.

 

더 나아가 이렇게 모든 인간이 무시해도

뭐 그리 바삐 부랴 부랴 움직이는 그 기능을 살펴보자 말이죠.

곧 천사들의 활동

또는 간극의 활동

그 간극은 곧 주의 인자하심 즉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눈물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 라는 상한심령의 활약상을 보자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무시 무시 또 개무시를 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움직이는 그 목적성 그 방향성 그 끝을 보자 말이죠.

그 끝을 미리 앞당겨 보면 아 이거였었구나 라고

무릎을 치면서 그래 그거였군이라고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

그리고 또 앞에서 살펴본 일곱 인을 떼는 천사들의 활동

사실상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무시하는 내용들이다는 겁니다.

저는 절대로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십자가에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라고

베드로가 욕을 먹은 이유는

바로 베드로 라는 육체에

베드로 라는 존재에 이런 계시록의 내용을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존재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상이 되지요.

유대인들이 그런 짓의 달인들입니다.

안식일 지키기를 괜히 함으로써 안식의 주인을 거부하더라 말이죠.

차라리 안식일 안 지켰으면 안식의 주인을 봤을텐데

소경 아니다고 하니까 소경이더라 말이죠.

 

즉 오늘 본문 일곱나팔의 시작인데

이런 내용을 역사가 담지를 못합니다.

역사가 이런 내용을 담아버리면 그 부대가 찢어져요

옛부대에 새술을 담지못한다는 겁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이죠.

육체가 찢어져요

존재에 담을수가 없어요.

 

그래서 역사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계산을 막 했지요.

히틀러가 등장할때가 반떼 두떼 한떼 중에 언제인지

계산기 두드리고 말이죠.

그 계산기 뿌셔버려야 합니다.

 

그럼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으면 계시록이 전혀 공포스러울 리가 없다 말이죠. 오히려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생산과 같아요. 늙은이는 꿈을 꾸듯이 말이죠.
늙어 죽은 태에서 아기를 생산하는 순풍 순풍 처럼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다들 종말 종말 종말이라고 하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도록

사기치는 놈들이 등장함으로써 말려든다 말이죠

 

그럼 역사에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것들을 기록하느냐

사실은 이미 역사에 나타났습니다.

엥!! 또! 역사에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해놓고 역사에 나타나다니?

무슨 소리냐! 방금한 말 앞에서 해놓고 바로 뒤엎어 버리니

대놓고 모순되는 말을 하느냐

 

그러니 계산기 두들기지 말라 말이죠.

몇 년도에 지구종말이 오는데 성경의 계시록과 맞추어서 계산하지 말라 말이죠.

설사 그 년도를 알았다고 대비할수 있겠냐 말이죠?

다 죽고 혼자 노아방주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살아본들

그거 산 것 아닙니다.

그런 내용을 다룬 영화들이 많은데

지하 벙커에 100년 먹을 양식을 비축하고 농사지을수 있도록 갖추고서

지구 종말에 대비해 본들

그렇게 억지로라도 살아본들 그거 산거 아닙니다.

살아도 산게 아닌 이미 죽은거다 말이죠.

좀비 같은 삶을 살아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지구의 모든 자연이 다 사라져 죽었는데

지하에서 혼자 아닌 몇몇 살아봤자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남았다 손 치더라도 말이죠.

 

그러니 역사는 이 계시록의 내용을 못 담아서 찢어진다 말이죠.

그러니 이미 찢어졌음을 누리자 말이죠.

그렇게 되면 계시록 조차도 기쁜소식이지

겁주고 공포를 먹고 그래서 삯꾼들에게 돈 뜯기고 하는게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그런것들만 남아버렸다 말이죠.

그러니까 역사는 아예 담을 생각 조차 하덜덜 말아라 말이죠.

육체는 이 계시록을 담을 생각 말라 말이죠.

이미 찢어졌듯이

이미 역사속에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계산기 안 뚜드려도 됩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 계시록 마저도 다 이루어진 겁니다.

앞으로 이루어질게 아니라

미진하게 남아서 미완료로써 앞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남아있는게 아니라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내용은 다 이루어진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들에게만 감사로 덮쳐지는 내용이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그 살려주는 영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이 계시록으로 사기치는 공포에 의해서 삥뜯기는 자는

 

절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 미완료의 형태로써

결국 무시할 수밖에 없는 내용일 뿐이다 말이죠.

공포로 인해 겁을 먹는 것도 무시하는 것과 같고

아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자에게는 안 보이니까 당연히 무시할 수 밖에 없는

천사들의 활동이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천사란 십자가의 영이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엔젤은 아닙니다.

그런 엔젤은 성경에 없고요

 

인간의 시다바리 엔젤은 없고

인간 좋으라고 보이는 엔젤은 없고

그 반대로 인간으로부터 무시 당하는 천사들의 활동만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 만 있다는 겁니다.

 

결국 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들의 활동은 이렇게 부지런히 부랴 부랴 바삐 움직이는 천사들의 활동은?

 

맞습니다. 모든 인간들로부터 무시 받을려고 의도적으로 일부러 무시 받고자 안달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무시하는 내용들이 뭡니까?

바로 일곱입니다 일곱
즉 예수님이지요.
숫자의 묵시화 입니다. 즉 무시한다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지상에 있다가 가 버렸는데 어떻게 무시합니까?

있어야 무시할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영이 임한자들이 있는데 바로 지상의 일곱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는 숫자 7의 존재 개념이 아니라

기능 숫자 7로써 예수님을 무시했듯이

이 신랑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른팔에 사로잡혀 신부가 된 일곱교회가 바로 무시의 대상이 된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는 일곱교회가 아닙니다.

무시 받을까봐 서로가 믿는척 그리고 인정받을려고 한다 말이죠.

기능은 없고 존재만 우길 뿐이다 말이죠.

 

그러다 보니 일곱교회를 소개할 때 항상 상대적인 사단의 회를 언급하는데

아 이래서 일곱교회는 무시받는구나

누구로부터? 사단의 회인 유대인과 같은 자들로부터 말이죠.

이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말이죠.

 

그럼 무시받으면 다 일곱교회냐 아니지요.

일곱교회를 무시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이다는 겁니다.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일 3:13, 개역)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4, 개역)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5, 개역)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렇다면 일곱교회는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이 무시 당해서? 아니지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속내를 들추어 내시니까

여전히 주님은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살려주시는 영으로 부터의 그 혜택 그 배려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괜히 눈물을 주의 병에 담음으로써 유일하게 기록된 것으로만 기뻐한다고 할까요?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

이 무슨 메조키즘 환자도 아니고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끝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기 때문이다 말이죠.
미래완료를 즉 다 이루었다는 누리기 떄문입니다.

그 이유로 모든 이스라엘로부터 공격 받아서 쫏겨다니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주의 병에 기록된 것만 영원하고 나머지는 다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이다 라는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하다는 겁니다.

 

무시 당함이 영원한게 아니라

무시의 내용인 그 간극의 내용인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만이 영원하다 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가

모든 인간들이 다 무시하는 이 십자가가

사실은 살리는 영이다 기능이다는 겁니다.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다 말이죠.

 

무시받음을 존재화 하는게 아니라

무시받음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그 뿌리가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아 그래서 이 3일의 간극

세 번의 기능성인 간극
다들 무시하는 간극
아무도 귀히 여길수 없는 간극이

다 인간이 아예 깡그리 무시하는 내용들로만 채웠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의 활동들이다는 겁니다.

 

그저 인간은 존재 곧 산 영만 될려고 할 뿐이지

존재만 될려고 할 뿐이지
그 존재에 붙여넣기 할려고 할 뿐이지

 

살려주는 영을 못 보더라 말이죠.

기능을 무시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찬양하지 마시고 찬양자로 태어났음을 누리세요.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지킬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 존재는 기능을 무시하거든요.

안식의 주인을 거부해요.

괜히 안식일 지킬려고 하니까

괜히 찬양할려고 하니까

찬양자로 태어난 자를 무시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꼬 의논 하더라 말이죠.

실로암 소경을 누가 무시합니까?

모세의 제자라고 우기는 정통 정통 이라고 우기는 자들 아닙니까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세요.

누가 이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를 무시할까요?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에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토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누구를 무시한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했는데

정작 그 세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말이죠.

 

마치 지옥간 부자가 거지나사로를 무시하듯이 말이죠.

 

마침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 되어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고

타향에서는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말이죠.

왜 그러냐

형님이 자신있게 그거 안다고 이야기 했다 말이죠.

그거는 어릴적부터 그 선지자에 대해서 다 잘 알기 때문에

대접을 못 받는다고 말이죠.

 

맞습니다. 즉 존재로 본다 말이죠.

그러나 기능으로 못보기 때문에 대접하고 싶어도 못해요

 

어 예수? 요셉의 아들 아이가?

다 안다 말이죠. 잘 안다 말이죠.

작년 말 쯤에 예수를 다룬 영화가 나왔길래 봤는데

하나는 사막에서의 예수이고

또 하나는 어린 예수를 다루었는데

성경과는 무관하게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말이죠.

다들 존재로 보고 있지 마치 자기고향의 사람들처럼 목수 아들아이가 라고 말이죠.

기능으로는 안 봐요.


그런데 우연히 유투브에서 다큐 곧 외경 인지 위경인지 그런거 다룬 다큐를 보다가

아 그래서 어린 예수를 다룬 영화 내용이 그랬구나 라고


외경에 나온 내용이였다 말이죠
.


어린 예수가 시기심 때문에 한 아이를 떠밀어 죽였는데 그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좀더 더 나아가서 그런 예수를 변호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그려지더라 말이죠.

 

도마복음의 내용인지? 유다복음의 내용인지 하여튼 그런 내용을 영화화 했다 말이죠.

 

웃끼는 것은 내가 변호할 변증할 복음은 없어요.

도리어 그 반대로 나를 변호할 복음 뿐이다 말이죠.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 말이죠.

인간의 대상이 되는 복음이 없다 말이죠.

어린 예수를 변호할 생각 말고

그 어린 예수로부터 변호 받을 770번 용서 받아야할 판국인데

졸지에 종교가 되다 보니

존재가 되다 보니
종교라는 마약이 되다 보니

거꾸로 예수님을 변호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라 말이죠.

 

그러니 구원자를 구원할 생각 말고

도리어 구원자로부터 구원 받으세요
구원은 예수님의 기능이지

인간의 기능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죄인만 찾아요

환자만 찾아요.

 

결국 일곱나팔도 그런 취지입니다.

우리가 일곱나팔의 나팔소리를 들음으로 인해서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철거당해야만 하는 허구였다 라는 것을

나팔소리로 인해

어린양의 울음소리로 인해 무너뜨려 짐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말이죠.

 

그럼 무엇을 봐야 합니까?

승리의 나팔로 인해

여리고성의 허상이 무너지고

다들 무서워서 죽기 무서워 벌벌 떨던 그 여리고성
그 바벨탑의 권력에서 못 벗어남에 있어서
포로되었고 갇혔고 억눌린 우리를 자유케 하는 이 복음

그것도 유대인에게 처음 증거했는데 그들이 발로 차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이방인에게 이 희년의 복음이 넘어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그래서 그 허상이 무너지고 제대로 된 실상인

다들 무시했던 어린아이의 찬양

어린양의 찬양

곧 십자가가 옳았다 라는 그 실상인 십자가를

천군천사들이 노래하고 나팔불고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어머니께 이번주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과거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니무이다.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천사부대 귀신잡는 해병대

하나님의 군대로 보시면 되는데

신약으로 치면 이제 그 기능이 실제로 천사로만 나타나 보여진다 말이죠.

 

이 천사들이 여리고성을 나팔을 불어 허물어뜨리는 과정을 목격할때에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시원하고 사이다처럼 상쾌 통쾌 유쾌 할 정도로

얼마나 기쁘겠냐 말이죠.

 

마치 꿈만 같도다 말이죠.

 

그러니 계시록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냐 말이죠.

최절정의 하이라이트 기쁨인데

이 기쁜 소식을 협박용으로 만들어 돈 뜯어낼 생각만 하고 있으니 원 ㅋㅋㅋ

 

이제는 하도 속다 보니 그런 기쁜소식 땡땡회 로 부터의 사기는 더 이상 안 당하죠

이단들도 계시록으로는 사기를 잘 안칩니다.
왜? 겸손해서? 아니지요.
자기들이 하고팠던 짖을 이미 앞에서 다 해서 다 들통나 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어차피 달리 다른 해석을 할 줄 모르니까 그냥 덮어버리는 겁니다.
괜히 열어서 끄집어 내면 돈 장사를 할수 없다 말이죠.
앞의 선배들이 이미 들통나니 그 사기술로는 한계에 부딧힌 겁니다.

금방 들통나니까 말이죠.


지도 모르고 남도 모르니 언제 들통날줄 모르는 것에 전전긍긍할 빠에


자신있는 전공만 살리는 겁니다
.

그게 바로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한 집착이다 말이죠.

 

아무튼 다들 지적 수준이 높아졌다 말이죠.

뒤돌아 보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에 속아 넘어갔냐 말이죠.

성화론도 교회론도 다들 그런식으로 사기술이다 말이죠.

존재에 집착토록 만드는 그런 사기이니 말이죠.

 

또 그런 삯꾼들이 활동해줘야 지옥이 꽊꽉 차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 이단들의 모든 활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제발 무시받는 자가 되지 말자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인정에 빠지도록하는 집단 마취를 넣어버려요


이것을 철학자들이 무지 공격해요

종교는 마약이라고

더 웃끼는 것은 그렇게 마약이라고 공격하는 그 철학자들의 내용 조차도 마약이다 말이죠.

강땡주 라는 들뢰즈 철학으로 집단 체면을 걸어요

 

인간이라는 존재에 집착토록 만듭니다.

그런 거짓선지자들은 인간을 구원시켜주고 싶어서 안달이예요 안달나 안달나.

그런자들로부터 즉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자 말이죠.

 

물론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의 대상물이 되는 구원은 없어요

진리를 찾는 철학자가 아무리 진리를 찾을려고 해도

인간의 대상물이 되는 진리란 없다 말이죠.

진리로부터 대상이 되는 인간 밖에 없다 그런 기능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이 없으면 그들은 기능을 모르도록 되어있고 안 보이고 무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의 은사란 결국 무시받으라고 주어지는 것인데

아무도 사실상 원치 않아요 성령의 은사를 말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기드온인데

이스라엘 중에 가장 겁쟁이 중에 겁쟁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사는 정반대로 용사 중에 용사

이스라엘 중에 가장 용감한 자라고

언발란스한 정반대의 기능을 부여한다 말이죠.

이게 성령의 은사 입니다.

 

본인은 겁쟁이인데

하나님은 용사라고 사용할려고 기능을 부여하니까

 

이 겁쟁이가 머리를 굴리는데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려고 시험한다 말이죠.

그저 기드온은 산 영으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말이죠.

그러니 산 영으로 살다가 죽고프지

뭐 하나님의 용사니 뭐니 그런 것은 전문가 군인한테 하라 말이죠.

왜 농사꾼에게 농사일 안 시키고 군인의 일을 맡기냐 말이죠

 

그래야 무시 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본인이 무시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말이죠.

 

그래서 하지 않을 려고 자꾸 뺍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가마니채로 주니까

안 묵을랍니다.

묵으라

안 묵을랍니다.

묵으라

내가 깨끗케 했다 묵으라 라는 장면과 같아요.
유대인으로써 몸에 배인 부정한 짐승을 무슨수로 먹겠냐 말이죠. 속이 울렁거리는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계시록을

안 받을랍니다.

받아라

안 받을랍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받아라 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머리 굴려서

양털 솜에 이슬이 맺혀 젖게 되면 내가 항복하고

만약 양털에 이슬로 젖지 않고 땅에 젖게 되면 하나님이 항복하이소 마

 

양털에 기름끼가 있어서 젖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그때도 당연한 이치이다고 본 거다 말이죠.

물과 기름은 서로를 밀쳐 내니까

 

아 그런데 아뿔사 자신의 꾀가 먹혀들지 않는겁니다.

그럼 더욱더 지혜를 모아서 자신의 꾀를 펼치면

그 반대로 해 달라는 겁니다.

이제는 양털에 절대로 물이 묻지 않고 땅에만 적시면 내가 항복

만약 양털에 젖고 땅이 마르면 하나님이 항복


OK?
 

즉 주님 본인이 말이 뒤바꾸듯이 바꾸면 안될끼라고 본 거다 말이죠.

 

결국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든 거부와 반대, 무시이다는 겁니다. 내뺄려고 말이죠.

난 군사가 아니예요 난 더 이상 군인이 아니예요

군인 한테 가서 카세요 나한테 카지말고

 

그렇게 내뺄려고 하는 목적인데

 

은사가 과연 그러라꼬 해줄까요?

 

여기서 더 나아가

기드온이 자원하는 심정으로 군인을 뽑는게 아닙니다.

에이 어차피 안되는 게임 그냥 죽었구나 라고

전쟁해야 한다고 모으니까

 

32천명이 모였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너무 많데요?

그래서 전쟁 하기 싫은자 나가라 가라 가라

그래서 22천명이 떠나니까 딸랑 만명

 

만명으로 135천명과 싸워 이겨야 하니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은 다 마찬가지이지요.
2만 2천명이 떠난다고 해서 살수 있을까요?

어차피 다 죽는데

 

좀 전에는 41로 싸워야 하는데 이제는 101

 

어 그런데 이것도 너무 많데

 

그래서 고르는 방법이

호수에 물을 마시도록 하라 해 놓고서는 구별 구분 차별하시는 겁니다.
즉 차이를 내시는 겁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말이죠. 존재에서 기능으로 말입니다.

 

(7:5, 개역)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7:6, 개역)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그래서 물 마실때에 혀로 먹는자 따로

무릎 꿇고 마시는 자 따로

 

이것을 어떤 기도원의 여전도사가 해석하기를

손으로 움켜 입에 대는 모습의 자세가 거룩한 자세인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고

 

그냥 머리 쳐 박고 마시는 것은 부정한 모습이다고 하던데

 

사기치는 거죠.

성령이 임한 자는 거룩한 행동을 한데요 글쎄
이게 무슨 거룩한 행동입니까?

지지배 같은 모습이고

머리 쳐 박고 마시는 모습은 남자 같잖아요

이런 자들이 글쎄 전쟁을 하는 군사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그런 목적이 아니다 말이죠.
성령은 차이나는 곧 누구든지 무시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전도사의 그 사기를 눈치채고 어떤 목사는 숫자 적은 쪽으로만 했다 라고 하는데

왜 숫자 적은지는 또 본인이 무시하더라 말이죠. 박목사라꼬 서울에 유명한 목사 있어요.

 

그 숫자가 쪽팔려서 성화를 한다나 어쩐다나

그러니 결국 자기가 욕한 여전도사의 사고방식과 결국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교회가 졸지에 강도의 소굴 곧 존재가 되어버렸지
기능으로써의 교회가 아니더라 말이죠.

 

숫자를 적게 해야 다들 무시한다 말이죠.

누구 조차도 기드온 조차도 말이죠.

그러니 살길을 찾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첩자로 적군의 동향을 살펴보다보니 적군 병사의 꿈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말이죠.

 

자 그런데 막상 전쟁할때에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했는데

칼 있습니까?

칼 없어요.

그런데 왜 칼이라고 하냐 말이죠.

 

계시록의 숫자가 그래서 동원되는 것과 같아요.

숫자를 막 언급해 놓고서는 숫자 있던가요?

없어요.

그런데 숫자로 표현되요

숫자의 묵시화

즉 이 말은 이미 인간에게 전제가 되어 있는 숫자의 역사화를 깨 부시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연히 무시하는 숫자죠.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은 절대 모든 인간이 무시하지 않아요

권유 합니다. 서로 그렇게 하자 라고
서로 소통할려고 해요


그런데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자이다고 하면

다들 무시합니다.
아무도 공유하자 라고 안 합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 난다고 오히려 차단 시켜버리죠.
단절시켜 버려요.

세상에서는 도저히 소통 시킬수 없는 것이다 말이죠.
다들 무시하거든요. 그것 받으면 무시 당해요.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말이죠.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가 바로 그겁니다.

무시 받는 용서가 진짜 용서이다는 겁니다.

다들 싫어버린바 되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구원자가 진짜 구원자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구원자가 진짜 구원자이다 말이죠.
사람들로 부터 대접받는 구원자는 가짜 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드온 곧 어중이 떠중이들이 사사가 되는 겁니다.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는 선지자의 기능이다 말이죠.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무시꺼리들
산적두목 오른손잡이 부정한 자
여자 부정타는 여자
또 기생 오라비 삼손 등등
다들 무시하는 자가 구원자로 세워지는 거다 말이죠.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자여 왜 너는 남을 구원하면서 너 자신을 구원 못하니? 왜 왜 왜?

라고 무시받는 조롱당하는 비아냥거림을 받는 비방받는 표적으로써 말이죠.

 

기드온 용사 기드온 칼

결국 언발란스한 안 맞는데도 불구하고 붙이는 이유는


다들 무시하라고


그래서 전쟁도 희한하게 합니다
.

칼은 없고 횃불들고 항아리 들고 나팔 준비해서

항아리 깨뜨려 횃불 불 붙여서 나팔을 부니

그것도 뒷 걸음질 해서 말이죠.

앞으로 싸워야 진짜 싸움 아니냐 말이죠.

뒤돌아 서서 싸움을 하니 다들 비웃음꺼리인 전쟁 아니냐 말이죠.
마치 전쟁 코 앞에서 일부러 할례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런데 자다 깨니 불이 났죠 나팔을 불었죠 정신을 못 차려요

그래서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되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고 그냥 막 찔러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딸랑 300명으로 135천명을 다 죽인다 말이죠.
단 한명도 죽지 않고

 

그래서 누가 이긴다?


순 뻥 같다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 뿐입니다. 성경은
말 되는 소리는 절대 성경에 있지 않아요.
말 안되는 소리만 있기에 다들 무시하는 겁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 같으면 잊혀집니다.

역사는 잊혀져요
빨리 빨리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묵시는 아예 몸에 새겨집니다.

마치 칼로 새겨서 문신처럼 말이죠.
그러니 잊고 싶어도 못 잊어요.
트라우마 보다 더 심한 최고의 트라우마이다 말이죠.
새겼으니까
흔적이니까
홈패임이니까 말이죠.

존재는 금방 잊혀지면서 지워지지만
기능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또렷해 집니다.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니 그냥 이기면 자극적이지도 않고
금방 다른 수 많은 전쟁이 있기 때문에 
다 잊혀지지만


이런 특이한 전쟁은 잊혀지지 않고 트라우마처럼 몸에 영원히 새겨진다 말이죠
.

흔적 얼룩이 되어요

그 얼룩이 우리를 구원하듯이
얼룩이 이 간극이 우리를 생산 합니다. 다시 태어나게 한다 말이죠.

 

다들 무시하는 역사의 시선에서
역사로 부터 무시 당하는 묵시는 도리어 영원히 새겨진다 말이죠
.

 

이 이야기를 흥분해서 막 하고 있는데

다 듣고서는 어머니께서 기가막힌 질문을 하시더라 말이죠.

 

그런데 왜 기드온의 아들들은 왜 그렇게 되었냐고

~~~ 뿅갔죠 뭐

 

사무엘 선지자 아들이라고 해서 바르게 제대로 사느냐

아닙니다 개판입니다.


즉 아들도 자식들도 아무리 아버지가 선지자 라고 해도 무시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게 기능이다 말이죠 기능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세습이 안되요
존재이면 세습이 가능한데
기능은 때려죽어도 세습이 안되는 겁니다.


기능은 육체를 따라 세습을 못합니다
.

기드온 본인도 이 기능을 무시하는 판국에

세습은 무슨 ~~~~~~

오히려 가족이 원수인데

너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고향에서 선지자가 대접을 받을 리가 없다 말이죠.

아무리 아버지 라고 해도
아들은 무시해 버린다 말이죠.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에게 죽임 당합니다

자식에게 아들에게 가족에게 말이죠.

 

예수님도 자기 백성에게 말이죠

이게 묵시가 뚝뚝뚝 끊어지는

세습이 될 수 없는

무시 받는 모습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성령의 일을 개방이니 소통이니

그런 소리를 할수 있냐 말이죠.

그래서 막 떨어져 나가더라 말이죠.
무시 당할까봐 싶어서 겁이 나니까
저거들끼리 또 모여서 결국 조직을 형성하더라 말이죠.
존재를 백날 형성해도
소통을 백날 형성해도

단절을 그들은 못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기능을 못 형성해요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기록된 대로 되는데
어떻게 기능을 형성하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천사가 말라고 필요하냐 말이죠.

인간이 직접 일곱인을 떼면 되는데

 

아무도 열자가 없어서 우는데?????

사도요한이 말이죠.

울 필요가 없잖아요

천사 필요 없이 예수님이 먼저 열어주시면 그 다음 사도요한이 직접 하면 되는데

왜 울고 불고

그리고 천사들이 왜 활동하냐 말이죠.

단절이기에 그들은 무시하는 겁니다.


인간도 할 수 있다 라고 보는거다 말이죠
.

 

그러니 사기치는 거죠.

 

결국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은 7번 남을 용서 할수 있다고 본 겁니다.
교회도 인간의 믿음으로 할 수 있다고 본거다 말이죠.
그런 교회가 바로 사단의 회였던 유대인 모임이였다고
계시록이 일곱교회를 그들과의 차이로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 사단의 회의 모임의 특징은 우리 서로 무시하지 말자 라는 거죠.
인간의 모임의 특징이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의 일은 서로 무시받는 겁니다.

아무도 그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 버리는 싫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 되게하는 이 구체적 보편성의 일인

성령의 일을 성령 혼자 하시는거다 말이죠.

 

성령의 은사로 이 불가능한 것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늙은이는 꿈을

젊은이는 환상을

남종 여종에게는 예언을

그래야 십자가 사건 곧 출애굽 사건인 구원사건

다들 무시하는 이 십자가사건을 매일 매일 벌리신다 말이죠.

 

애굽왕이 여호와가 누군데? 나 그따위 신 몰라!!

 

요셉? 누군데? 출애굽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의 등장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1:8, 개역)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7:18, 개역)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가버나움에 동성애자가 단 한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한 저주를 퍼붓겠다고 하시는 이유는

많은 은혜를 가버나움에 베풀어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이다 말이죠.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자를 심판한게 아니라

의인 단 한 명이 없어서 망한 거다 말이죠.

 

다들 무시 받기 싫어서 그 환경 곧 원수들이 만든 환경에 푹 젖어 사는 겁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이 더 심해요 심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말이죠.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호수도시인 셈인데

결국 유대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스라엘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하다는 겁니다
.

오늘날로 치면 교회가 즉 기독교 국가가 소돔과 고모라 보다 견디기 더 어려울 것이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고 사단의 회 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남 용서 7번 할게 아니라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 아니냐 말이죠.

일곱나팔을 통해서 우리가 또 무엇을 무시했고

그 무시를 통해서 어떻게 주님은 다 이루심인 십자가를 어떻게 우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 이루셨다를 달성하셨는가를 보여주시고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살려주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입을 찢으셨다가 다시 고치시는 그 주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이 계시록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속이 후련하게 사이다처럼 뻥 뚫어주는 계시록이냐 말이죠.

그 동안 우리를 올가메고 가두고 포로로 삼았던 그 엉터리 되도 않는 거짓된 것들이

와르르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깨 부수는 나팔소리를 듣게 되니 말입니다.

일곱이란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세우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겁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 입니다.
이것만 책에 기록이 되었거든요.
그러니 책 내용대로 그대로 실시하는 겁니다. 천사들이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죽이심에 의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심에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죄인이라는 기능으로써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죄인인 겁니다.

죄인이라는 존재 곧 골프 치는 것이 죄인이 아니라

그건 존재이고요
성령과 무관하게 지 혼자 독자적으로 노는 것이고요.
인정받을려고 죄인 되는 식이고요.

 

그렇기에 무너뜨리고 일곱 그리고 다시 세우는 일곱 이라는 이 간극인 주의 인자하심에 반발하는 원수들은

 

곧 사단이 회는 영원히 그 허물어뜨리심에서 다시는 세워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말이죠.

이 나팔 소리를 듣지 않을려고 하고 거부하고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우리 자신 마저도 다 허물어 버리시는

답답한 속을 다 뚫어버리는 이 나팔소리에

깨어나서 허물어지는 가짜현실을 제대로 직시해서 보고

진짜 현실인 십자가의 용서 만을 외치는 이 나팔소리를 듣고 기뻐 춤을 추는 것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허구의 세상이 허물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나팔소리를 듣게 되겠냐 말이죠.

허물어 져야 이 나팔소리가 고맙게 느껴지는 겁니다.

 

내 죄를 깨끗케 하신 분이 저 분입니다 뿌부뿌

 

나의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는 이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꼬기오 꼬끼오 꼬끼오 ~~~~~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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