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맞은 십사만 사천 곧 어린양의 피로 씻겨진 흰옷 입은자 (7: 1-17)

모든 허물을 덮는 어린양의 피 찬양

 

(7:1,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7:2, 개역)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7:3, 개역)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7:4, 개역)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7:5, 개역)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6, 개역)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7, 개역)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8, 개역)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7:9,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개역)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개역)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개역)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7:13,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개역)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개역)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7:17, 개역)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앞의 글 시편 125편에서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칭칭 두루 두루 감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125:2, 개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그런데 이 결과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사실상 악인의 손에 칭칭 감겨져 있는 상태에서 빼내임을 받은 구원이기에

주의 인자하심이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으로써

원수 곧 보이지 않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이다는 겁니다.


그냥 느닷없이 구원이 아니라

반드시 누구 누구로 부터의 구원이기에

반드시 원수를 동원하시는 겁니다.

자신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 원수는 바로 다윗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로써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멸하심으로써 빼내심이기에

예수님은 고난 곧 눈물을 흘리셔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에만 이 예루살렘이 마귀에게 장악된 포로된 입장이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 홀로 이 예루살렘을 포로됨에서 자유케 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심으로 그 승리로 인해

예루살렘은 거룩으로 두루 두루 칭칭 감겨지게 되는

신부에게 주님의 거룩한 흰옷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로써 씻은 흰옷을 입게 되는 겁니다.

(계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 새번역)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계 7:14, 공동)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계 7:14, 킹흠정) 『내가 그에게 이르되,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자기 예복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이니라.』

(계 7:14, 한글킹)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 현대인) 『내가 모른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고난을 겪었고 어린 양의 피로 옷을 희게 씻은 사람들입니다.』

(계 7:14, 현대어) 『'모릅니다. 아시거든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내가 대답하자 그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심한 박해를 겪어 낸 뒤에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계시록 7장 전체를 하는데 있어서

인 맞은 자 십 사만 사천명이 나옵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여호와증인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 다단계 판매의 vip 판매왕 우수사원이 되고파서

전도하러 돌아다니는

그래서 십사만 사천에 속해야 한다는

그 모습을 우리는 많이 접해 봤습니다.

 

말만! 여호와 증인이지

정통 교단들의 성화론 이나 개혁주의 또한 마찬가지이고

또 신흥 이단들인 요즘은 한 참 되었던 간판만 자꾸 바꾸는

구원파 또는 신천지 아마 과거에 장막회 였었나요?

아무튼 이런 자들이 다 바로 여호와증인의 십사만 사천의 속임수와 똑같은 방식으로써

말씀 실천을 강요받고 있다 말이죠.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교단들 정통이든 이단이든
처음자리를 무시하는 모습은 완악한 수건을 쓴 유대인과 다를바 없다 말이죠.
누가 발전할려고 하지 
실패할려고 하겠냐 말이죠.
앞으로 나아갈려고 하지
처음자리로 돌아갈려고 하겠냐 말이죠.
좀더 발전할려는 모습을 추구하고자
십사만 사천에 속하고 싶어서
다들 속아 넘어간다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교회 존립 자체가 위기를 맞으면

어쩔수 없이 다 따라하는 겁니다.

 

대형 교회 목사들도 장로들에게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교인 수를 늘리던가 아니면 헌금 액이 늘어나던가 하지 못하면

쫏겨나는 식이기 때문에

차라리 여호와 증인이 제일 단순하게

종교적인 욕망을 가장 잘 보여줬듯이

이제는 정통이든 뭐든 다 따라하고 있는 판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칭칭 두루 두루 감기게 된 것이

인간의 노력 또는 예루살렘의 노력에 의한게 아니라

도리어 마귀에게 장악 당해서 포로되어 자력으로 빠져나올수 없다 말이죠.

오늘날 모든 교회가 삯꾼 목자들에게 장악 당해서

무슨 수로 자유케 되냐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 증인처럼 저런 꼴 나는 것처럼

다들 욕하면서도 다 따라하더라 말이죠.

그 자체가 갇혀서 포로된 상태인데

 

그 포로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갇힌 단절의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졸지에 외부에서

내부에서는 안되고 없어요.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천국이라는 예수님이 쳐들어 와서

침략하듯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희년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아무도 울지 않는데 말이죠.

대신 눈물 흘리심으로

대신 매맞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니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제는 예루살렘 곧 신부죠

이 예루살렘이 그 포로됨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이죠.

그 원인을 아무리 우리 인간 쪽에서 찾아 볼려고 해도 없어요.

없다 말이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에 외쳤지요.

주여! 만약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안 멸할게

 

그런데 10명이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 다녀 보세요

믿는 자 10명 없어요.

 

그럼 좀 줄여서 그럼 5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안 멸망시킬께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무리 따져 봐도 5명 조차도 없다 말이죠.

 

그럼 셋 둘 하나

심지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본인도 해당이 되지 않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심판은 당연하다 말이죠.

 


오늘 계시록
7장을 보니

어떤 장면이 생각이 나는고 하니

여리고성을 쳐들어가는 장면이 생각 납니다.

 

마치 예수님이 천국 되심으로써 외부에서 침략하듯이

예루살렘을 탈환 하시고자 침노하듯이 말이죠.

 

여섯 번째 인까지는 심판을 퍼붓습니다.

마치 하루에 한번 씩 뺑뺑이 돌면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희들은 광야에서 주님을 열 번 원망했습니다.

그 증거물이 바로 이 증거궤에 담겨 있습니다.

깨어진 십계명 두돌판 꼬끼오

아론의 싹난 지팡이 꼬끼오

만나를 담은 항아리 꼬끼오

 

이 증거물이 담겨진 언약궤를 어깨에 매고서

난공불락이라던 그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번씩 뺑뺑이 돈다 말이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우리는 뭘 해도 죄 뿐입니다.

원수일 뿐입니다 라고 외치면서

 

그렇게 6일 동안 돌다가

갑자기 7일째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하루에 한번 돌던 것을

하루만에 7번 돌면서

이유 없이

원인 없이

용서 받았다고 뿌뿌뿌 나팔을 분다 말이죠.

 

이것이 그 어떤 무기도 총과 칼, 공성무기 등등
그 어떤 무기도 무너뜨릴수 없는 여리고성을

주의 이름만 외쳤을 뿐인데 아예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말이죠.

 

원수 마귀를 무너뜨리는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예수님 혼자 다 무너뜨려 놓고서는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이 무너뜨렸다고

이 군대가 3333 / 3333 / 3333 / 3333

찬양대로써 나팔을 분 것 밖에 없는데

나 용서 받았다 라고 노래한 것 밖에 없는데

그 난공불락의 요새가 순식간에 무너지더라 말이죠.

 

악인이 그렇게 죽을때도 잘 죽고

평탄한 길만 가는 것 보고

낙심을 했는데

 

주의 성소에 들어가서 보니

하루 아침에 쫄딱 망하더라 말이죠.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7, 새번역)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 73:17, 공동) 『마침내 당신의 성소에 들어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그 간극을 주님께서 직접 벌리시니까

그 부자가 지옥에 가고

그 거지 중에 상 거지

개도 무시하던 그 나사로가 천국에 가 있더라 말이죠.
처음부터 완료로써 나타난 증상이였던 겁니다.
먼저 있었던 약속이였다는 겁니다.

 

이 간극을 만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그 분이 흘리신 피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거지나사로와 같은 우리를

자신의 피로써

어린양의 피로써 씻어서 흰옷으로 거룩한 옷으로

칭칭 두루 두루 입혀서

자신의 피의 영광을 과시하고파서

예루살렘인 우리에게 그 영광의 옷을 입히시듯이

거룩으로 칭칭 감으시더라 말이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말이죠.
십자가에 다 이루심으로 말이죠.

그런데 왜 십사만 사천에 들어갈려고 여호와 증인처럼 전도할려고 하냐 말이죠.
모든 교회가 이 짖을 따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예루살렘은 공간 개념이 아니기에

사도행전에서는 이 예루살렘을 확 퍼트리시는 겁니다.

동서남북 3333 3333 3333 3333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퍼트리심으로써

이제 복음이 증거되는 그 어떤 곳이든 예루살렘이다 말이죠.

공간을 초월해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나 땅끝 곧 죽음의 끝까지

복음이 구석 구석 증거되는 거다 말이죠.

우리가 증거하는게 아니라

성령이 부지런히 부랴 부랴 바쁘게 전하심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우와 성령이 다 하셨네 라고 말이죠.

그 증상물로써 그 증거물로써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분명 여섯 번째 인까지만 해도 심판만 퍼부었다 말이죠.

뭘 해도 다 죄였고

우리는 뭘 해도 원수 짖 밖에 없었다 말이죠.

 

그런데 마지막 인은 이유 없이 무조건적인 승리의 나팔로써

그 어린양의 피 흘리심 곧 모든 인간이 다 무시했던

광야에서 10번 원망한 그 증거물을 어깨에 메고서

승리의 나팔을 불면서

나 용서함 받았다

나 어린양의 피로 나의 더러운 몸 더러운 옷 깨끗이 씻음 당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잘 아시면서

 

라고 승리의 나팔을 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리고성

곧 원수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 견고한 성이

찬양했을 뿐인데

예수님의 이름을 외쳤을 뿐인데

아 글쎄 그 어떤 핵 무기로도 부서지지 않던 그 여리고성이 무너지더라 말이죠.

 

다들 도대체 누가 했는고 라고 할 정도로

아무도 자기가 한 일이 아니다고 한다 말이죠.

도대체 누가?

언약궤를 메고 가는 자와 그 뒤를 따르는 백성들을 일부러 간격을 둡니다.
왜? 증거궤 혼자 싸운다는 겁니다.
백성은 떨어져서 왜 증거궤 혼자 싸우는지를 그것을 생생히 목격하라는 겁니다.

 

바로 다들 무시했던 그 어린양의 피가

다들 어린양의 피를 무시해서 10번 씩이나 원망했던

그 피가 세상에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정도였다니

새삼 부끄 부끄 머리에 숯을 얹은것처럼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총과 칼로 안되던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말이죠.

우리는 광야에서 쓸모 없다고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될 정도로

구체적 보편성인줄도 몰랐다 말이죠.

그러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물 위를 세발짝 걷게 한 뒤에

풍랑을 일으켜서 물에 확 빠뜨려 죽게 만들고 난뒤에

건져주시니까
베드로가 도대체 당신 누구요? 물위를 걷게 만드는 분이 아니다는 겁니다.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고
요나의 표적은 보여주는 당신 도대체 누구시죠?
죽음까지 주물떡 주물떡 가지고 노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무시했으니 말이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죽였다가 다시 살리심인 주의 인자하심인데
그것을 무시했다 말이죠. 그래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다 말이죠.

 

그러니 성령의 일은 이 무시 받는 간극인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마치 요셉의 꿈이 무시 받아야 그 버림받은 꿈이 머릿돌 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무시했던 그 꿈이 그 은사가 결국 머릿돌 구원의 돌이 된다 말이죠.

이것이 무시받는 성령의 은사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십사만 사천이라는 찬양대가 인 맞은 자로써 등장하는데

천사들로부터 인 맞았다 라는 의미는 무슨 의미 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찜 당했다 인데
도장 찍혔다는 것인데

결국 무시함 받는다는 겁니다.
주와 함께 무시 받는 겁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너를 미워한다는
이 세상에 대한 안목을 새롭게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정작 이 세상으로 부터 살아남을려고 아부하기 바쁜데 말이죠.

그런데 미워함을 받으라니?
그것은 우리 인간을 미워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새삼스럽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다들 무시하는 이 예수님을 말이죠.
그래서 우짜다가 우연스겁게 졸지에 성령을 받게 되니
어라 같이 무시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간극 입니다.
아브라함이 지옥간 부자에게 아무리 부자가 봐도 안 보이는 것을 알려주듯이

너와 나 사이에 구렁텅이 홀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왜냐하면 주의 인자하심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 홀 에서 주의 인자하심이 나온다 말이죠.

물론 그 자체도 우리가 아닌 성령이 임해서 비로소 보게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일부러 원망할만한 곳으로만 인도하시는 겁니다.

죄인 만들기입니다.

원수 만들기입니다.

뭘 해도 죄인이요 원수임을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저는 반드시 제대로 믿습니다가 아니라

이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는 채로

광야에서 10번 씩이나 원망하면서

도대체 이 어린양의 피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10번 원망할 수 밖에 없는거지? 라고

 

십자가의 피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기에

즉 처음부터 나기도 전에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와
태어나기도 전에 미워하기 작정된 자로 갈라버린
그 간극(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기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수밖에 없는

뭘 해도 다 죄 뿐인 모습 속에 놓여짐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철저하게 갇혀 있는

죄인임을 보여주신다 말이죠.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그 죄는 내가 책임 지는 죄이기에

그런 죄는 없구요

죄가 나를 다룬다 말이죠.

아무도 여리고성을 이길수가 없듯이 말이죠.

내가 죄를 짖는게 아니라

죄가 나를 다루고 있는 상황임을 주님께서 보여주신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얼마나 자신 만만 하시면

죄를 이길수가 없어서 갇혀있는 나 요
포로되어 있는 예루살렘이요
억눌려 있는 이스라엘인데

그런 예루살렘인데

자꾸 죄와 충돌케 만들어서

아주 아주 적극적인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시는 겁니다.

 

아니 죄가 나를 다루는데 있어서

죄를 못 이기는 것 뻔히 아시는데

왜 죄와 자꾸 부딧히도록 해서

죄가 나를 잠식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식케 하시냐 말이죠.

 

그 정도로 자신있다는 겁니다.
누가? 주님이 말이죠.
네 맞습니다. 예수님의 자작극 입니다.
십자가의 자작극 말이죠.

뭘 믿고 말이죠?

자신의 피 흘리심에 자신 있다는 겁니다.

이 피로 씻어주고파서

이 피의 기능
이 피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여줄까 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난리이다는 겁니다.
세탁기 광고를 보면 어떤 빨래든 다 깨끗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자랑하듯이 말이죠.

곧 의사가 자신의 의사의 기술 기능을 과시하고파서

일부러 우리를 환자 만들려고

일부러 광야에서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서 만들 듯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 곧 피흘리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잃어버림으로써 되 찾는 이 간극


모든 인간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또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걸림돌 곧 하나님의 저주라고 했던

이 간극 곧 십자가를 너무 너무 보여주고파서

자랑하시고파서

우리를 이 십자가의 피 용서의 혜택으로 칭칭 감고자

 

일부러 도저히 우리가 이기지도 앞으로도 이길수 없는  나 보다 센 죄를

그런 마귀를 그 멀리 멀리 있던 마귀를 아주 아주 가깝게 끌여들여

욥과 충돌 시키듯이

죄를 우리는 늘 멀리하고픈 죄를 아주 아주 가까이서 충돌케 하시는 겁니다.


붙이심의 전쟁입니다.

여리고성 말라꼬 허무냐 말이죠
.

어차피 못 이길꺼 뻔한데

삥 둘러서 돌아서 딴데로 가면 되는데

왜 구지 그 곳을 반드시 거쳐서 가느냐 말이죠.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원하는 바를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주님 혼자 신나게 저 이기지도 못하는 마귀와 충돌시키는 겁니다.

내 믿음이 아닌 내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를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죠.

욥처럼 우리는 밤새도록 이 마귀와의 충돌로 끙끙 알케 되듯이

불뱀에게 물려서 끙끙 앓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본인도 본인을 무시할 정도로

믿음이고 뭐고 다 날라가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못 나누어 주어서

근심하고 등돌려 가는 것과 족히 비교도 안될정도이다 말이죠.


그 부자청년은 마귀와의 충돌은 없잖아요

욥처럼 충돌 하던가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주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욥처럼 마귀의 손에 놓여져서

직사게 당합니다. 개 무시함을 당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자들의 특징입니다.
부자청년에게는 없는 충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은

베드로 본인이 죄를 짖는게 아니라

 

베드로야 죄가 너 베드로 보다 쎄단다 라꼬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마귀가 베드로 보다 쎄지만 그 마귀 보다 센 내 피가 있다고 피 자랑 하고파서
그 기쁘신 뜻댜로 즉 십자가의 피 용서의 자작극을 벌리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


죄인 만들어서 구원 시키겠다는 겁니다
.

이게 어디 방종을 조작하는 겁니까?
죄가 무섭습니까? 주님의 피가 더 큽니까?
주님이 직접 하시겠다는데 왜 딴지냐 말이죠.
주님이 자기 피 자랑하시고파서 그러시는데 말이죠.

이 고래등 싸움에

마귀와 여호와의 내기 장기 땜에 욥이 식겁을 하듯이

베드로 식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앞으로 미래에 우애 우애 잘하고 이게 아니라

애초부터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된 주의 인자하심이기에

너 베드로르 도장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들을 주의 피를 나타내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발생하는 거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야 너 베드로 보다 죄가 너를 다루고 있단다

마귀가 너를 다루고 있단다

 

그런데 걱정마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너를 위해 눈물 흘렸단다

마귀가 아무리 밀까부듯이 너를 초정밀조사해서 너를 고소하고 송사해도

내가 너를 위해 모든 허물을 덮고자 죄 값을 이 피로써 치렀단다 라고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 혼자 신나서 자신만만 하게

베드로에게

다른 것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 나를 사랑하니? 사랑하니? 사랑하니?

라고 묻는 것이다 말이죠.

 

그가 불러주니

나는 아무리 개 맞습니다 개 맞고요

그러나 그 개도 주께서 불러주시면

나는 그에게 꽃이 된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 이라는 시처럼

이 노랫말이 이미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다른 것은 일체 기록되지 않았기에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만 외치는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죠.

존재 보다 앞선 당위 곧 기능으로써 말이죠.

 

그러니 웃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미 웃음이 먼저 있었기에 우리는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 마저 너끈히 넉넉하게 이기셨다 말이죠.
그래서 
노래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근심 대신 찬송을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희락을 노래 아니하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사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4, 개역)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 61:5, 개역)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사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사 61:7, 개역)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그러니 인 맞은 십사만 사천명은

여호와증인들처럼 전도 많이 해서 전도왕

보험왕 암웨이의 VIP우수사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와 정 반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았기에

저절로 찬양이 나오는

꿈만 같도다

눈물로 씨앗을 뿌린 예수님의 피흘리신 덕분에

더러운 옷을 흰 눈 보다 더 희게 꽃단장하게 된 신부로써의

신랑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찬양하는 자가 바로 십사만 사천명이다 말이죠.

십사만 사천명 속에 들어갈려고 전도 했던 여호와 증인이나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다 지옥가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냥 무조건 도장 찍힌 자만 천국 간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 코 앞에서 개같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숫자가 아니다 말이죠.

그런 수를 세아리고 있는 계산기 두드리는 손가락 다 부러져야 합니다.

770번 용서는 손가락 세는 개념이 아니다 말이죠.

그냥 무조건 그냥 무한대 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남을 7번 용서할까요? 라고 내가 세고 있는 그 숫자는

엉터리 개념이다 말이죠.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여호와 증인 즉 모든 정통교단 뿐만 아니라

신흥 이단들 포함해서 모든 교회가

이 십사만 사천 안에 들어갈려고

열정페이 노예들처럼 행동하더라 말이죠.

동서남북 천지사방 새 때까리 라는 무한대 개념인데

손가락을 세고 있으니

그 숫자를 세고 있는 그거 부서버리는 숫자인줄 모르는 겁니다.

숫자를 거부하는 숫자이다 말이죠.
앞의 숫자는 셀수 있는 숫자이고
뒤의 숫자는 셀수 있는 숫자를 깨는 불가능한 숫자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입니다.

 

묵시가 숫자화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숫자를 깨부수는 식으로 전개된다는 거다 말이죠.
항상 상대적인 차이 개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주님 혼자 신나서 벌리시는 주의 기쁘신 뜻대로 펼치시는

피 자랑이다 말이죠.

 

? 예수님 세 번 부인했다고?

천하의 이런 죄가 없다고?

그런 어마 어마한 죄도

내가 용서해 주마 라고

주님 쪽에서 자신만만해서 벌리시는

 

마귀 보다 센 주님의 사랑이고

죄 보다 큰 주님의 은혜이고

여리고성 보다 더 높은 주님의 지혜였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라고 어리다고 놀렸다 말이죠.

무시했다 말이죠.

쓸모 없다고 말이죠.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고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스쳐가는 얘기 뿐인걸 ~~
누가 노래 불렀더라! 승철? 

그런데

 

우리가 다들 무시했던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저주라고 예수님을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던 그 십자가가

나의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큰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앞에서 다 무릎 꿇게 만드는

창세전부터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던 주의 인자하심이였다 말이죠.
곧 유일한 구원이요 사랑이였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얼마나 사도바울이 뻔뻔하냐 말이죠?
십자가 형을 제일 총괄 지휘했던 그 당사자가 얼마나 뻔뻔하게 말이죠.
이게 바로 구체적 보편성 진리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목숨 걸어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의 죄의 죄책감에

주님께서 모든 허물을 덮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대신 눈물 흘리심을 못보고

 

죄 보다 더 큰 용서

죄책감 보다 더 큰 대신 눈물 흘리심을 모르고

 

자살을 한다는 둥

못 살겠다는 둥

자 사도바울 보세요 얼마나 뻔뻔하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저런 자도 용서 하실 정도로 모든 허물을 다 덮는다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도 뻔뻔하게 만들고자 하신거다 말이죠.
그 정도로 예수님 자신이 흘린 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자신만만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책감을 커녕

그럴 때 마다

주님께서

 

지옥간 부자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선지자를

성령 받은 자를 허락해 주셔서

무시 받는 성령을 허락하셔서

 

선지자들이 대신 매맞는

우리 손에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말이죠.

 

아니 왜?

그래서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는게 아니라

죽고 나니까 일부러 3일 땡땡이 치다가 가셔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너희를 위해 기쁘시다고 하시면서
이제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부활 교리 믿으라고 하신게 아니라

내가 부활이야 라고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신다 말이죠.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무시했듯이
부활교리 지키는 자들이 부활을 그 동안 얼마나 무시했었던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무시받는 가운데서 부활을 길을 진리를 생명을 증거하심에 있어서

꼭 무시받는 모습으로써 주의 인자하심을 증거하심으로써
인정반고자 달음박질 하는 육의 소욕과 반대되는
무시받는 성령의 소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몰랐던 우리를 가두고 있는 저 숨겨진 원수 마귀의 실상과

그 마귀와의 차이로써 에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 너무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술람미 여인 앞에서의 솔로몬 왕처럼

 

이 마귀라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곧 예루살렘에게

신부된 일곱 교회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칭칭 두루 두루 감겨주고파서

거룩한 흰 옷을 입혀주고 싶어서

 

마귀라는 부정 에
그 부정 보다 더한 부정으로써의

마귀 보다 센

죄악 보다 센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사랑을 얼른 얼른 빨리 자랑하시고파서

이런 천사들을 동원해서 일곱 인을 떼시는 겁니다.

 

여기에 감히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찬양하기 바쁜데?

 

공기가 왜 무시 받습니까? 당연한 줄로 알고 떄문에 무시하는 겁니다.
귀히 여기겠다고 나는 공기를 고맙게 마실꺼야 라고 마시는자 없습니다.
그 정도로 너무 너무 흔해 빠져서 무시할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것을 먼저 누렸던 유대인조차도 그 처음자리 처음사랑을 무시해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래서 십자가를 무시하는 겁니다. 걸림돌이 된 겁니다.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 되게 만드는 이 간극
이 십자가를 무시해서 말이죠.

 

지옥간 부자에게 평상시 무시했던 물 한 방울!! 두 방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한 방울이 없어서 지옥인 겁니다.

그 동안 이 한 방울의 물을 무시했던 것처럼 주님의 인자하심을 무시했던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무시했던 겁니다.

그 무시했던 짖을 여전히 지옥에 가서도 하더라 말이죠.

 

공기가 흔해 빠지다 보니 다들 무시했다 말이죠.

그런데 황사와 미세먼지로 때려부으니까

서서히 죽어나가는 겁니다.

아이들 까지 막 죽습니다.

애굽의 열재앙처럼 말이죠.

 

왜죠?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의 등장 때문이다는 겁니다.

요셉의 꿈을 무시하는 자가 왕이 되니까 말이죠.


요셉을 무시하는 왕들은
7번 용서 하기 바쁘고

숫자를 역사화 행함화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벨탑과 같은 피라미드
곧 국가이다 말이죠. 짐승 입니다.
바로 세상 국가와 상대적인 완료된 주님의 나라와의 차이 때문이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으로 세워지지 않는 것은 다 허물어지는데
그 의문을 왜 세우냐 말이죠.

그 역사를 깨는 것이 바로 묵시 곧 무시받는 요셉의 꿈 곧 성령의 일이듯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무시받는 십자가를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죄책감 가질 겨를이 어디있어요 찬양하기 바쁜데!!!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어도

난 여호와롤 즐거하고 기뻐하기 바쁜데?

 

그런데 이 계시록의 기쁨을 찬양을 노래를

계시록을 설교해서 겁주어서 돈이나 삥땅치는

공포 협박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십사만 사천이 졸지에 강박증으로 심더라 말이죠

숫자를 묵시화 한다는 말은

역사화 된 숫자를 깨부순다는 말입니다.

 

3일 이라는 간극이라고 하니까

손가락으로 세고 계산기로 두드릴수 있는 그런 3 숫자로 본다는 그 자체를

깨는 것이 묵시의 숫자화입니다.

 

한떼 두떼 반떼 3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대접 3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3

도장 도장끈 지팡이 3

이런 삼일의 간극은

숫자 3이 아니라

무한대이다는 겁니다.

즉 간극 입니다. 차이 구별 차별 거룩이다 말이죠.

두 패로 갈라놓겠다는 겁니다. 곧 영원히 말이죠.
이 영원성 곧 무한대를 말하는 겁니다.

일만달란트는 금을 기준으로 하면 20조 이고
하루 품삯 기준으로 하면 한 40조 정도 계산이 되는데
이 둘을 함쳐도 최순실 박그네 보다 적다 말이죠.
요즘 현 시점 세계 10대 부자가 전 인구의 재산 50%를 다 차지하고 있다던데
거기에 비하면 얼마나 작냐 말이죠.
그런데 그런 계산법이 아닙니다.
무한대이다는 겁니다.
갚을수 없는 빚이다는 겁니다.
누가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냐 말이죠.
누가 용서를 돈으로 환산하냐 말이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인데?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숫자는 역사개념으로 계시록에 나오는게 아니라
관계 개념 입니다.
10대 부자들이 돈 갚을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영원히 갈라버리는 관계 개념이 바로 묵시의 숫자화 입니다.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2:2, 새번역)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화목제물(주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가르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 곧 이 간극은 영원히 갈라버리기 위함이다 말이죠.

일만달란트는
3일은 
영원히 무한히 가르는
너와 나 사이의 구멍 내기 입니다. 간극 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있는 그 배후세력을 깨겠다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채로 그런 손가락 즉 역사를 깨면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시 받는 의미이지

셀수 있는 계수 가능한 의미가 아니다는 겁니다.

 

결국 그 정도로 오로지 너무 너무 안달이 나서 십자가만 자랑하시고픈 겁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라는 실상은
눈에 보이는 역사와 반대로

실상은 주님께서 자신의 피흘리신 그 십자가의 용서를 만방에 구석 구석 자랑하시고파서

이런 도장 찍기를 감행하시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때에 천사들이 모조리 다 죽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곳을 건드리지 않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에 인 맞은 자는 안 건드리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찬양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말이죠.

동서남북 세계 우주 방방 곡곡에
이 무시받는 십자가를 찬양해야 하기 때문에
이 어린양의 피를 찬양해야 하기 때문에 안 건드리고 패쓰 통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날입니다.

한 쪽은 이를 갈고
다른 한 쪽은 그날에 오히려 찬양 하는 겁니다.

마치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린 임금 비유처럼 얼마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비유이지 않더냐 말이죠.


그런데 한 날에 그렇게 찬양자와 이를 가는 자로 둘로 나누는 겁니다. 


결국 마귀가 아무리 설쳐대 봤자

나의 죄악이 아무리 허다한 허물로 뒤범벅 되어 있어 봤자

 

주님의 십자가 용서 보다 센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겠냐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노래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다들 무시하는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비록 우리도 눈이 어두었을때에 무시했던 십자가였는데
싫어했던 십자가라서 다들 고개를 돌렸는데
이제는 자랑거리가 되어서 너무 너무 안달이 나서
신나게 찬양을 하는 겁니다.
그것도 무시받는 자들 속에서 말이죠.
그러니 더더욱 신나게 찬양하는 겁니다.

왜? 피 발려서 찬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찬양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말이죠.

이것이 다 주님이 대신 눈물 흘리심 덕분입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죽음 곧 피 흘리심 입니다.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0:12, 새번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벧전 4:8, 현대어) 무엇보다 먼저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 10:12)

 

(벧전 4:1, 개역)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개역)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3, 개역)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4, 개역)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벧전 4:5, 개역)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벧전 4:6, 개역)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4:7, 개역)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 개역)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벧전 4:10, 개역)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개역)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2,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개역)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4, 개역)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5,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전 4:16, 개역)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7, 개역)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8, 개역)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9,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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