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로 인한 죽임 당한 영혼과 다섯 번째 인 (6: 9-11)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증거(십자가 흔적)를 받은자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6:9, 개역)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개역)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7:12, 개역)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7:13, 개역)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7:14, 개역)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7:15, 개역)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7:17, 개역)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7:18, 개역)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7:19, 개역)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7:20, 개역)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침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7:21, 개역)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24, 개역)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7:25,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7:26,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7:27,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7:29, 개역)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7:30, 개역)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7:33, 개역)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먼저 사도요한이 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증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그 책 내용대로 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봉인이 되어 있어서 뗄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뗄자가 없어서

증거는 받았지 열쇠로 봉인된 자물쇠를 풀자는 없지

그 단절성으로 인해 크게 우는 겁니다.

 

(5:1, 개역)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개역)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5:3, 개역)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5:4, 개역)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그렇게 우는 자에게 꿀같이 단 말씀이 개봉 개시가 됩니다.

 

결국 어차피 열 것 같으면 왜 아를 울리냐 말이죠.

어차피 열어줄꺼면서

 

그런데 이 단절을 격지 않으면

이 간극을 느끼지 않으면

당연한 줄로 안다 말이죠.

 

단절을 통해서 죄인임을 아는 것이고

그 죄인 됨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증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닙니다.

단절을 모르는 의인은 피를 외치는 자가 아니고 증거를 받은 증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증인 곧 죄인됨이란 바로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모든 주도권을 예수님에게 빼앗긴 자

곧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잃어버림 당했다가 다시 3일만에 사는 그 간극을 누리는 자가

증거받은 자 증인이다는 겁니다.

어차피 열어쭐꺼면 왜 울겠냐 말이죠.

그 단절을 통해서 그 잃어버림을 통해서 바로 예수님 외에는 없다 라는 것을 외치는 증인이다는 겁니다.

아무도 못 여는구나 라는 것을 외치는 증인이다 말이죠.

 

다시 언급하자면

그럼 왜 구지 이 단절을 거치는 것일까요?

걸러내는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란 숭고함입니다.

즉 불편해요

 

그래서 아무도 이 거룩을 원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왔다고 했잖아요

즉 거룩을 지켜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을 지켜온 자기자신 부자청년에게는 이 거룩한 말씀이

전혀 불편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상상계 곧 자기동일시입니다.

실천하면 거룩이 된 것으로 보는 겁니다.

 

물론 날 때부터 소경이였던 실로암소경은 거룩한 말씀을 도저히 지킬수가 없지요.

그러니 이미 정죄를 받고 곧 저주상태임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불편하게 시리 부자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고뢔 ~~~~~~~~~~

그렇다면 너의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말이죠.

졸지에 거룩이 불편해 졌어요

 

거룩하다메 ~~

거룩을 지켰다메 ~~~

그럼 이까짓꺼 아주 쉽게 할 수 있지 않냐 말이죠.

 

그런데 도저히 도저히 할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상하죠 거룩을 지켰다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불편해 지니까 근심하게 됩니다.

근심하게 되니까 실족하여 돌아서게 된다 말이죠.

 

이것이 진짜 거룩이다는 겁니다.

가짜 거룩을 근심케 만들어 실족하여 등돌리게 끔 만드는 거룩

 

왜냐하면 거룩이란 주의 인자하심인데

아무리 봐도 부자청년은 이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도 안 보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에 눈낄 한번 준적도 없으면서 뭐 거룩을 지켰다고?

율법을 지켰다고?

아예 우리 마음에는 애초부터 주의 인자하심이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말이죠.

 

결국 거룩이 왜 불편한고 하니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는 즉 주의 인자하심이 없기 때문에

내 속에 없다는 실상을 들추어내기 때문에

상한마음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조치를 한다는 겁니다.

 

울게 만드는 겁니다.

아무도 이 영원한 주의 말씀의 봉인을 뗄자가 없다 라는 이 철저한 단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은 펼쳐져야 하고

나는 그런 능력 없고

거기서 오는 무능함으로 인해 오는 상한 심령

그래서 운다 말이죠.

 

제발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이죠.

 

그런 부자청년과 달리 실로암 소경은 뭘 지켰다고 들이대는게 아니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고자 한다 말이죠.

주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받는 분이 아니라 ~~~

이 단순히 받기만을 바라는 이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바리새인과 대조를 시켜서 한 세트를 구성해 버리는 겁니다.

 

? 아벨의 제사는 바쳤다고요? 천만의 말씀!!

아벨은 바친게 아니라 일방적인 편파해석으로 앞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결부시켜 버린 겁니다.

결국 아벨은 바친게 아니라 더 나은 제사인 십자가의 피를 도리어 발림당한 겁니다.

그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어딜 감히 바치는 제사에 왜 받는 제사를 주장하느냐 말이죠.

졸지에 주의 긍휼하심을 받아버리니까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증거를 받은 이유인 겁니다.

 

 

그런데 뭐 율법 거룩한 말씀을 지켰다고 라 고라 고라 ~~~

뭐 바쳤다 라 고라 고라 ~~~~

 

이렇게 불편한 거룩 실족케 하는 거룩을 평상시 느끼지 못했다가

즉 단절을 못 느끼다가

마치 자기동일시로 거룩한 말씀을 지켰다고 자부하다가

거룩한 말씀을 지켰으니 나 거룩하잖아 동일성 합일성 추구하다가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라는 그 한 방에 나가 떨어지는 겁니다.

 

 

앞의 천사 4종 세트로 인해서 네 번째 봉인 까지 뗏다 말이죠.

 

즉 전쟁 개시입니다.

일곱 봉인은 전쟁의 개시, 출발, 통보이고

일곱 나팔은 전쟁의 활성화, 경과이고

일곱 대접은 전쟁의 마침 끝났다 선언입니다.

 

즉 거룩을 퍼붓는데 있어서

거룩을 지켰다고 우기는 육의 대표성 곧 우리가 다들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이 부자청년이 얼마나 시온을 미워하고 주님의 거룩을 무시하는 지의 내막을 들통내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실족하여 넘어지게 되는

천사 4종 세트의 이런 육에 대한 공격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기 위한 육에 대한 공격 출발이

천사 네 생물의 네 번째까지의 인 떼기 이다 말이죠.

 

더러움에 대한 공격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육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격

저울에 달아 보고 함량 미달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심판이다 말이죠.

이 공격에 실족치 않고 살아남을수 있느냐 라는 거죠.

 

역시나 아무도 못 살아납니다.

거룩하지 못하고

입술이 부정하여서

시온을 미워한 것이 들통났다 말이죠.

 

이 부정을 누가 제거해 줄수 있겠냐 말이죠.

모든 인간이 심지어 24장로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죽이는 그 십자가 사건에 다 가담한 가해자로써 들통났는데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뭐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다고 ~~~~~~~

 

부자청년을 실족케 만들어 근심하여 등돌리게 하지 못하는 복음은

가짜복음이요 사람을 좋게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겁니다.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 되도다 라고 하신거다 말이죠.

누가복음을 오늘 계시록 본문과 연결해서 올렸는데

 

(7:21, 개역)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왜 이 기쁜소식이라는 희년선포가 왜 실족케 하는지

그 앞뒤가 당췌 연결이 되지 않지 않냐 말이죠.

 

아 그런데 부자청년 이야기를 연결하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희년이지

부자에게는 전혀 안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오히려 실족복음

아니 복음이라고 넣으면 안되니까

실족케 하는 소식 이다 말이죠. 실족음파(소리) 실족소식 나쁜소식이다 말이죠.

누구에게? 부자에게

그럼 누구에게 복음인데? 가난한 자에게

 

물론 여기서 즉 신약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는 소유물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소유물로 인한 부요함이다면 어릴적부터 율법 자체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말이죠.

그런데 부자청년 자체가 오늘날 성화론자들처럼 이 부요함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온

바로 그런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이기에

이 부요함을 유지함 자체도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에

그러니 당연히 마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 거다 말이죠.

 

이게 바로 육의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사단의 회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말이죠.

 

그럼 가난한 자란 무엇이냐?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당연히 이방인입니다.

즉 단절 되었던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에게 그런 잃어버린 자에게 다시 되찾은 바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애통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즉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이 단절을 이 심판을 직시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증거 받은 자입니다.

아무도 이 봉인된 책을 열자가 없다는 사실에 우는 자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어서 상한 심령이 되는 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그저 받기만을 바라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자

 

이런 자에게 행복 곧 죄용서함을 받은 자의 행복이

바로 이 3일의 간극인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증거 때문에

십자가 증거 때문에 벌어졌어야만 했었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쳐다보는 자가 증인 목격자가 증인이다는 겁니다.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죄 용서 받았어요 라고 증인석에서

그 증거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남의 아내 밧세바 동침, 우리야 장군 죽이기, 이름 없는 아이의 꺽으씬 뼈

도장 도장끈 지팡이

이 부정한 3가지 물건이 나를 구원하더라 말이죠.

내 거룩행함이 구원하는게 아니라

 

졸지에 구원을 인간들이 해석을 할수 없는 판국에 놓여졌다 말이죠.

이것을 증거물로 내세우는 것이 증인이다 말이죠.

누가 이것을 증거물로 내세울까요?

전 목격했습니다.

니 부정한 물건이 나를 구원했다니깐요 라고 말이죠.

그럼 당연히 역사라는 세상은 이런 증인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런 구원이 형성 되면 안되는 곳이 세상이다 말이죠.

 

세상은 비천한 계집이 왕후가 되는 꼴을 배 아파서 못 봐요

온유한 자 복이 있다 라고 했잖아요

온유함을 받았는데

졸지에 모세의 온유가 모세 누나 미리암이 배 아파 죽는다 말이죠.

저 새깜디 구스여인을 아내로 삼으면 안된다 모세야 ~~~~

 

이 온유를 무시하는 바람에 졸지에 너도 단절을 격어 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 문둥병이 걸려서 놓여지게 됩니다.

 

모세가 온유함으로 즉 주의 인자하심을 바람으로써 다시 피부가 깨끗하게 되더라 말이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온유한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온유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을 받아서

그 주의 온유를 다시 퍼 날라서 나도 이렇게 주의 온유하심을 받았단다 라고 외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나 이런 단절이 아닌 자들은

죽은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펄펄 살아있음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부자청년처럼 되게 해 달라고

역시나 사람을 좋게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교인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 사단의 회가 되어달라고 사단의 회가 요구를 해요 글쎄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의 소통 방식이다 말이죠.

안 그러면 소통할 수가 없다 말이죠.

 

죽은자가 되는 것은 소통이 아닌 단절이 되는데 무슨 수로 죽은 자가 소통이 되냐 말이죠.

눈도 귀도 입도 다 닫혀버렸는데

 

그러니 여전히

세상이든 종교세계든 뭐든

인간은 소통하기 위해서 돈을 자본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돈 없으면 소통이 안되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너희는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매도를 해 버린다 말이죠.

그들이 얼마나 근검절약하면서 모범으로 사는 자들인데

부자청년처럼 말이죠.

그런데 왜 돈을 사랑하는자 라고 매도하실까요?

돈이 없는 가난한 바리새인일지라도 돈을 사랑하는자로 매도하시는 이유는

바로 인애와 자비가 아닌 제사와 번제로만 소통할려고 하니까 그렇다 말이죠.

그게 물질 아닙니까?

 

자꾸 뭘 바치겠데 ~~~

 

그러나 단절인 자는

죽은 자는 물질이든 뭐든 드릴께 없어요

그저 받기만 할 뿐이다 말이죠.

받기만 하는 단절된 자인데

진짜 소통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다른 강도가 외친다 말이죠. 니가 뭐 한게 있다고 낙원갈 생각 하느냐 말이죠.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어라 예수 당신도 똑같은 자이네

뭐 한것도 없는 놈을 받아주다니????

 

세상의 소통은 뭐를 주고 바쳐야 소통이 된다 말이죠.

그렇기에 문둥병자

날 때부터 소경

장애우

이런 자들은 그저 시한부 인생처럼 취급받는 그저 죽은자일 뿐이다 말이죠.

세상의 소통 방식에 배제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원은 단절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라고 말이죠.

애통하는자

목마른자

의에 주른자

심령이 가난한 자

 

다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 단절된 자들이 바로 천국에서는 유일한 증인이다 말이죠.

 

앞의 글에 주여 저 개 맞습니다. 라고 했다 말이죠.

개란 인간 사회에서 인간으로 취급할수 없는 개 돼지 등등의 짐승으로 취급하는

저 바닥을 기어야 하는 존재이다 라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은 개 보다 상층 위의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 치고 자신을 개 라고 여기지 않는다 말이죠.

누가 상좌 라는 자신의 자리 식탁의 자리가 뻔히 있는데

그 상 위에 앉지 않고 밑바닥 바닥에 기어서 개처럼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라고

개 밥그릇 앞에 자신을 낮추겠냐 말이죠.

 

이것은 겸손함과 다르다 말이죠.

뭐 보통 다들 이렇게 표현합니다.

특히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이 말이죠.

낮은 자세로 섬기겠습니다 라고 인간답게 표현하지

저 개 입니다 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 정도의 표현을 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짜 자유자입니다.

나머지는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이라고 우기는 마귀자식들 뿐이다 말이죠.

 

? 그런 표현은 세상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죠.

 

모든 인간은 부자청년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치를 걸고서 거기에 미달되지 않으면

서로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부자

소유물로 인한 부자가 아니라

복 받은자 라는 부자의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육입니다 육

저주 받은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한자는 소유물로써의 가난이 아니라

아예 나는 거룩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죄인이다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이 뭔 거룩을 알겠습니까?

그저 사망의 그늘에 폭 삭 주저 앉은 앉은뱅이일 뿐이고

흑암의 백성인 지옥 백성일 뿐인 눈 먼자인 소경일 뿐이고

개같은 이방인이라서 임금 없이 정체없이 떠돌아 다니는 고아일 뿐이요

거룩의 거 짜도 모르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심령이 가난한 더 더 더 더 나은 가난한 자로써 예수님이 오셔서

불쌍히 여겨주심을 입어버림으로써

 

증거를 받아 버렸다는 겁니다.

 

이미 실족해서 살고 있는데 실족치 않는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보고 심판 받아 마땅한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 주를 만났다고 기뻐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심판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것들이 깝치는 것에

저주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지만 죽이지도 못하면서

심판자 노릇을 하는 거짓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 주

나의 죄를 제대로 해결하는 내 죄 대신 심판 받은 분을 보고 기뻐하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냐 말이죠

이 십자가가 증거인데

이 증거를 받은 자가 가난한 자이지

 

어머니 성가대처럼 마음이 가난한자는 이라고 울면서 노래하는 자가 아니라

소유가 적은 자가 아니라

 

인간 쪽에서의 가난함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증거를 주심으로 인해

졸지에 가난하게 여김을 받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가 바로 가난한 자이고

즉 주님의 온유 때문에 온유함을 받는 거지

주의 구원자 되심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오심이지

주의 의사 되심 때문에 환자 됨이지

 

독자적으로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일부러 짖는 죄인은

자기 쪽에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음녀와 같다 말이죠.

그런 트릭 속임수는 안 통하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필요로 인한 신부된 증인만이 가난한 자요

이 가난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희년이다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해당 되는 의사요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희년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의인에게는 나쁜소식이다 말이죠.

? 의사가 필요가 없기에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할 판국이니

얼마나 나쁜소식이냐 말이죠.

즉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기에

증거를 받지 못한 거다 말이죠.

 

그럼 증거 받은게 뭔데?

바로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함을 찬양자로 태어난 증거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증인이다는 겁니다.

 

그까짖거 주의 인자하심? 그거 우리가 심심하면 찬양하는 것인데 그거할 줄 모를까봐 뭐!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고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라 다 지키겠소이다.

 

이봐요 이봐! 이러니까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뭔지 몰라요

위에서 말한 육의 사고방식을 증거라고 우기기 할 뿐이다 말이죠.

마음이 가난함이 뭔지 모른다 말이죠.

 

자꾸 지키겠데~~~

자꾸 뭘 바치겠데~~~

 

이게 완악한 마음이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이다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 것은 내 쪽에 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진짜 가난한 자가 이렇게 외칩니다.

느닷없이 몇천년 수십백년 만에 나타나서 주여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네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이 고백이야 말로

진짜 가난한 자이다 말이죠.

즉 주님만이 부요하신 분으로써 저에게 주실수 있는 분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증거하고 바로 사라진다 말이죠.

 

이게 무슨 증인입니까?

주여 제발 죽어주세요 라는 소리를 하는 자가 증인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까

 

네 맞습니다. 이게 진짜 증인입니다.

진짜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주님만이 주실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무엇을 받는데?

주의 인자하심 말이죠.

십자가의 피 흘리심

죄 값을 대신 치르심을 받는 것이 증인만이 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하고 증거로 삼습니다.

 

마치 구약으로 치면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증거로 내밀면서

거 봐 나 증인 맞잖아 라고 이 부정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 증거물로 천국 가게 되었다고

천국선물 받았다고

믿음이라는 선물 받았다고 뻔뻔스럽게 외치는 것이 증인이다 말이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는 완벽하게 반대로 설명하죠.

사단의 회 또는 부자청년과 똑같은 사고방식만 가르칠 뿐이다 말이죠.

 

뭘 자꾸 바치래

행하고 말씀을 지켜야 한데 ~~~~

 

내가 지킬수 있는 말씀이란 없어요

말씀이 나를 지켜버립니다.

말씀이 다 이루었다고 일방적으로 나에게 선언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 선언에 무릎 꿇어야 할 판국 뿐이다 말이죠.

증거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목격한 증인입니다.

 

말씀 지킬게 이제는 없어요.

 

이것 때문에 졸지에 죽임 당하는 겁니다.

이 증거를 받아서 말이죠.

 

괜히 받았어 아벨은 말이죠.

괜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 받는 바람에

 

번제와 제사를 지키는 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세상은 그런 자들을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뿌리를 짤라 버립니다.

 

이제 그들은 죽어서 더 이상 소통이 안 됩니다.

메시지도 다 차단 당했다 말이죠.

문자도 날릴수가 없어요.

통신망을 다 짤라 버렸다 말이죠.

 

아 그런데 실족케 하는 예수님이

졸지에 이 죽은 아벨을 소통시키겠다고 합니다.

 

이갓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로 세상으로부터 단절 된 것만을 소통하는 세계가 믿음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반대로 믿음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절이거든요.

세상은 오로지 행함으로만 소통이 되는 겁니다.

 

믿음과 행함의 차이입니다.

 

바로 예수님만 아니면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었을텐데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다 망했다 말이죠.

 

예수님이 글쎄 죽은 아벨을 소통시키겠다는 겁니다.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인간들은 이 아벨을 죽여버림으로서

사가랴를 죽여버림으로써

더 이상 죽음으로는 단절이 되었기에

소통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이 아벨의 사고방식만을 소통시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필요없다고 버린 돌인데

예수님은 그 버린 돌을 머릿돌로써

믿음의 중심으로 삼아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오늘 다섯 번째 인을 떼는데 있어서

증인들이 그 증거 곧 십자가 라는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 죽음을 신원하는데 있어서

이 죽음만이 소통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말이죠.

 

아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훈 재훈 여기 이 요한계시록 6장 이상해 이상해 재훈 재훈 이상해 ~~~~

 

이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말이죠.

죽음을 소통시키겠다니??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또렷한 밝히 보이는 명확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다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천사들을 통해서 봉인된 인을 뗄떼 마다

심판을 퍼부음으로 인해서

구분 구별 하겠다는 거룩을 펼치는 겁니다.

함량 미달인 자는 지옥으로

함량 초과인 자는 천국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 다섯 번째 인을 뗌으로 인해서

성도의 죽음을 소통 교통 유통 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무엇은 단절 시키겠다?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은 단절 시키겠다? 즉 자동적으로 무엇은 소통 시키겠다? 선지자의 죽음

증인들의 죽음은 너희들이 단절시킨줄 몰라도 오히려 그것이 소통되는 것이고

 

반대로 단절 되는 것은 지옥갈 자들

곧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 독사의 자식들 인데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수가 있는데 바로

 

우리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절대로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않았으리라 라고 말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과 동시에

조상의 영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 때에 조상들이 바로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러니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사고방식과 똑같다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난 절대로 선지자를 죽이지 않을테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죽이겠다는 선언이다 말이죠.

그것은 바로 선지자가 어떤 기능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자기 자신의 행동만 염두한 거다 말이죠.

 

행함은 믿음을 이길수 없어요.

 

자신이 아무리 행함을 단속해도 그 행함을 믿음을 죽일 수밖에 없다 말이죠

선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려고 왔다 말이죠.

실족케 할려고 왔다 말이죠

자꾸 죽고자 안달이 난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난 안 줄일테야 라고 자신의 행동 행함에 신경 쓴다는 자체가

도리어 선지자에게 말려든다는 겁니다.

믿음은 그런 행함 다짐 다 깨부셔 버리거든요.

그 다짐을 차라리 안했으면 안죽일텐데

자꾸 다짐을 하고 자신의 행동 행함을 단도리 하니까

더더욱 죽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죽고자 들이대거든요.

죽을려고 환장한 자들이 바로 선지자이다 말이죠.

 

선지자를 마치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본 겁니다.

 

선지자는 인간이 아니라 증인 곧 증거물입니다.

기능으로써의 기계이다 말이죠

 

남들은 다 배신해도 저는 절대로 예수님 부인하지 않습니다 장 지지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말했다 말이죠.

 

인간 쪽의 주장들은 소통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진심이고 누가 봐도 진리이다고 해도 인간의 주장은 소통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해서 그런 주장을 펼쳐도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화목제물만 소통시키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정의 사랑 믿음은 차단당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오로지 선지자의 죽음만을 소통 시키겠다고 하는데

여기 선지자의 노선에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덮쳐지는 겁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의문의 모호한 것으로 소통하겠다고 하냐 말이죠.

 

이것이 기능으로써 존재 보다 앞서서 먼저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뒷북치듯이

난 절대로 선지자를 죽이지 않을 거야 라고 해 버리면

그것이 소통이 되겠냐 말이죠.

단절이 된다 말이죠.

그럼 소통 되는 것은?

선지자의 죽음 이다 말이죠.

그러니 도리어 이 선지자의 죽음에 말려들어 참예를 더더욱 할 수 밖에 없도록

맞물려 있는데

그래서 그 맞물려 있다는 그 증거가

더더욱 난 절대 선지자를 죽이지 않을 거야 라고 외치는 그 자체가

뭐가 소통이 되는 것인지?

뭐가 소통이 되지 않고 단절이 되고 차단 당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말려든다는 겁니다.

 

왜 모세가 예수님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외쳤냐 말이죠.

그것만 소통 되는 유일한 천국에서 소통되는 교통이다 말이죠.

교통 하면 사도신경 밖에 생각이 안나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란 증거받은자 곧 십자가의 피 발린 자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이 발린 것만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말이죠.

천국에서는 그것만 소통 되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걸림돌 곧 실족케 하는 나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로만 소통하겠다는데

 

오히려 절대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껍니다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한

 

절대로 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더러운 물증 3가지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그 더러운 물건으로 구원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악마적이다 라는 겁니다.

 

자 다섯 번째 인은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구별 구분 차이를 벌려놓는 겁니다.

지옥갈자와 천국갈자로 말이죠.

바로 증거로 인한 죽음 곧 십자가 사건의 무한 반복 말이죠.

상대적으로 난 절대로 나의 조상들처럼 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반드시 조상의 양을 채우도록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천사들이 다섯 번째 인을 떼면서 채우도록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에서는 나기도 전에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야곱은 나기도 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듯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양을 자손들은 반드시 채우도록 되어 있고

선지자의 죽음처럼 성도들은 죽음으로써 증거를 받은 증인으로써의 그 수를 채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

목 베인 영혼의 수가 찰 때 까지

 

(6:11, 개역)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우리는 바로 사랑받는 야곱이 되고 싶겠지만

그 자체가 이미 에서의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우리는 에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야곱이 되고 싶어도 안되요

 

그냥 차라리 주여 저 에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이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증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아입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포함 되었구요

거기에 24 장로들도 포함이 되었다니깐요

우리는 벗어날 수 없어요

그것을 감안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지혜죠

그런데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라

무지 무지 자랑스러워 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찬양 한다는 겁니다.

찬양은 그야말로 기쁘기 짝이 없다는 거죠.

즉 상대적으로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찬양이기에

그야말로 죽고싶어 환장한 것과 마찬가지인 사건인 거죠.

거봐요 얼마나 어리석나요 미련하나요

그런데 이것이 영광이다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성 이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야곱의 사고방식이고

? 남들이 거리껴서 걸림돌이 되는데 자랑하고 있고

남들은 미련하고 어리석다 하는데 지혜롭다고 노래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반대로 에서의 사고방식인

때려죽어도 난 야곱처럼 되어서

나는 절대로 저 사람들처럼, 선지자를 죽이는 조상처럼 되지 않을꼰데 라고

꼰데들처럼 조상들처럼 조상의 양을 채우도록 하는

 

그 일을 다섯 번째 인을 떼면서

천사들이 퍼붓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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