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 속의 간극과 여섯 번째 봉인 (6:12-17)

 

 

(6:12, 개역)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6:13, 개역)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개역)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개역)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개역)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개역)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앞의 글 시편 131편에서 지옥간 부자와 거지나사로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지옥 간 부자가 얼마나 지옥간 티를 팍팍 내는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나사로를 시켜서

아직 지옥에 오지 않은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우와 대단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거지 나사로의 반응은 무응답입니다.

아브라함 품에 싸가지 없이 그냥 안겨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대변인 인냥 나섭니다.

 

설마 부자 너의 말대로 선지자를 보낸다고 해도 들을 사람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은 원인에 따른 해석 또는 결과로 도출하는 인간의 해석입니다.

지옥이 세상을 보는 해석입니다.

(16:22, 개역)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개역)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개역)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16:25,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너 부자와 나 사이의 간극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아니 지옥 간 부자는 곧 모든 인간은

회개하면 구원 된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회가 주장하는 바 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는 단절입니다.

간극입니다.

회개케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를 찾는 겁니다.

이것이 졸지에 간극을 유발하는 겁니다.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30, 새번역)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16:31, 새번역)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즉 회개로 구원 되고 안되고가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긍휼의 그릇으로 진노의 그릇으로 나타남이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부자 말대로 되면 즉 회개해서 돌이키게 되면

창세전의 기록된 대로 되지 않게 되는 나쁜소식이 되는 것이다 말이죠.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게 아니니까 말이죠.

 

그럼 회개 하지 말라는 말이냐?

네 회개하지 마세요

제발 회개하지 마시고요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세요

 

즉 회개할려고 하는 자는 이 간극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도 어차피 무시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이 간극을 전하는 자이거든요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을 무시하거든요.

십자가를 무시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는자들 보다 십자가를 무시하는 자들이 없다 말이죠.

왜냐하면 십자가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반대방향입니다.

십자가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반발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마치 간극을 무시하고 나사로를 시켜서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케 할려는 모습이니 말이죠.

 

마치 절대로 우리 조상들처럼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로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지 않겠다

무시하지 않겠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것이 조상들이 했던 사고방식이니

그 아비에 그 자식

그 조상에 그 후손이니

역시나 똑같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란 간극을 벌리는 자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을 왜 무시하느냐 라는 겁니다.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6, 새번역)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16:26, 현대인) 이뿐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 싶은 사람도 건너갈 수 없고 거기서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 단절을 외치는 자들이 선지자인데 뭐 개방을 외친다굽쇼?

뭐 소통을 외친다굽쇼?

 

시편 131편에서 단절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지 올 필요가 없이

성령이 정직한 영이 없음을 느낄 필요가 구지 없이

선지자가 외칠 필요가 없이

어린아이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면 된다고 봤다 말이죠.

그랬던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꺼라 굽쇼?

천만의 말씀

 

간극이 여전히 무슨 의미인줄 모르는 겁니다.

 

회개 시키고 싶어도 단절이 되어서 아브라함 선지자는 다섯형제에게 못 갑니다.

또 반대로 다섯형제도 회개하고자 선지자에게 다가갈려고 해도 못 가는 겁니다.

? 간극이 있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있다 말이죠.

왜 이 주의 인자하심을 무시하냐 말이죠.

 

오늘 여섯 번재 봉인을 떼니까

큰 지진이 일어나고 땅과 하늘이 종이 말리듯이 진노 속에 놓이게 되는데

어떤 누가 그 진노 속에서 멀쩡하게 설수가 있겠냐 라고 합니다.

 

시편에 이런 내용이 생각 합니다.

주의 산에 오를자 누구랴 손 깨끗한 자

즉 없다 말이죠.

누가 손 깨끗한자 누가 설수가 있냐 라는 겁니다.

누가 성전에 올라가서 노래 부를수 있는자가 있겠냐 라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가 얼마나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을 무시했으면

주의 책의 봉인을 무시했으면

회개하면 올라갈수 진노 속에 설수

회개하면 손이 깨끗할 수 있다고 여전히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거지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있어서 더더욱 부추기게 된다 말이죠.

즉 여전히 거지나사로를 무시하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되자 라고 무시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는 선지자입니다.

즉 거지나사로 자체가 간극이다 말이죠.

큰 구멍이다 말이죠.

 

기능으로 못보고

여전히 존재로 보니까 거지 보단 자꾸 자신은 낫다고 본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이 거지나사로에게 말려든

단절로부터 말려든 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답을 알려줘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나와 나 사이에 오고가고 할 수 있는 소통이 안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너는 지옥을 말해야 할 기능이고

나는 거지나사로와 같이 천국을 말해야 할 기능이기 때문에

이 간극을 소통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지옥간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들이 소통하는 방식에 충실하면서 그 인간들의 법

곧 세상 법의 원칙대로 살았다 그것으로 소통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법에 이렇게 잘 소통이 되는 세상에서

세상이 거부하는 단절시킨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천국에서는 거꾸로 십자가만 소통이 되고

그렇게 세상에서 소통되던 것들은 통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지옥간 부자는 여전히 세상에서 통하던 안목으로 천국도 구원도 회개도 해석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먹혀들었고 교회에서도 먹혀들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이 진노 속에서는 다 거짓으로 드러나는 헛된 것이기에

통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단절되었다 말이죠.

그것을 보여주는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라는 간극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자꾸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그 까짓꺼 믿어주면 될 것 아니냐 라는 식으로

여전히 소통 가능하다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성령이 개방이라는 둥 외치면서 말이죠.

회개하면 구원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럴꺼 같으면 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냐 말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왜 카시냐 말이죠.

 

지옥간 부자의 해석대로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을게 아니라

기적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어야지요.

마치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번 유혹하는 내용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니 오늘날 목사들의 외침은 모조리 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번 유혹하는 내용과 같다 말이죠.

회개케 해서 구원 시켜라

돌이 떡덩이 되게해서 배고픔을 해결하는 구원을 베풀라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서 죽음에서 살려내는 구원을 베풀라

온 천하 만국의 권세를 줄테니 세상의 임금이 되어서 전 세계를 다스려라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과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즉 이것은 구멍이 없어요.

간극이 없어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가 없어요.

 

어딜 꾀냐 말이죠.

그런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자 그럼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이 종이처럼 말려서 파괴 되는

주의 진노를 보게 되면

아 이것이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심 곧

지옥과 천국이 서로 소통할수 없는 큰 구렁텅이를 보여주시는

주의 보좌에 주께서 계심을 나타내는

그 증상

곧 땅의 요동

하늘의 벌벌 떰이구나 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자가 얼마나 소통이 안되는 소리를 하는지

이 간극을 무시한채로

벌벌 떨기는커녕

주의 보좌의 주께서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을 보기는커녕

여전히 자신들의 식구만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말이죠.

주의 보좌를 안 본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라는 간극도 그 심판도 안 보이는 겁니다.

자나 깨나 구원 구원 내 다섯 형제 구원 받아야 할텐데 뿐이다 말이죠.

회개해야 할 텐데 뿐이다 말이죠.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땅에 있을때는 죄책감이라고 하고 즉 종교심 신앙심 신념 오기라고 하고

지옥에서는 원한 한풀이 후회 살인의지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회개 라고 여전히 지옥간 티를 내면서 회개라는 용어를 끌여들여서

다들 세뇌 시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거짓선지자들이 이것을 회개라고 가르치는 식이다 말이죠.

 

결국 이들의 회개는 십자가를 쳐다 보겠다는 말입니까 안 보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겁니까?

안 쳐다 보겠다는 말이다 말이죠.

 

십자가를 왜 쳐다 봅니까?

그렇게 되면 회개를 더더욱 못하게 되요

?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보라고 하니

한풀이가 가득차여 있어서 안된다 말이죠.

티가 나도록 강퍅함이 들어나기 떄문에

얼른 양의 탈을 써야 하지

천년 묵은 늑대가 하루만 지나면 인간이 되는데

하필이면 그 마지막 날에

양의 탈이 벗겨지면 안되니까 말이죠.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보라고 하는 것은

불뱀을 못 쳐다 보기 때문에 그런거다 말이죠.

?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간극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이다 말이죠.

니가 사랑한 것이 아니기 떄문에 다 단절 뭐든지 다 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소통했다고 우기니까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자가 되었을때에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알고보니 다 원수짖만 했습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그래서 불뱀에게 물리도록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불뱀을 쳐다 봐야 하는데

주여 저는 마귀 자식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해야 하는데

내가 왜 불뱀인데? 아니 내가 왜?

그때 하필이면 내 돈 띠 먹고 도망친 자를 눈 앞에 지나가도록 하게 하니

거지나사로를 눈 앞에 아른거리게 만드니까

저 놈이 진짜 마귀자식이다 라고 줘패서

주의 인자하심 곧 일만달란트의 용서를 무시하는

이 간극을 무시하도록 할 수 밖에 없는

이 간극에 말려들더라 말이죠.

 

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 지혜입니까?

 

누가 서리요?

제대로 설 자 있으면 나와 보세요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대로 설 자신이 있으신 분

 

주님께서 바로 그런 선지자

곧 거지 나사로 같은 내 돈 띠먹고 도망친 파렴치한 놈을 눈 앞에 아른 거리게 만들려고

수천명 7천명의 선지자가 대기 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 진노에서 벗어날자 있으면 말해보세요

 

없습니다.

 

성화론 또는 개혁주의가 옳다고 바르게 성경을 보는 자라고 우기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사기꾼들 강도의 소굴들이다 말이죠.

 

여섯 번째 인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말이죠.

 

없습니다.

 

이 없다는 것이 실로 실로 기뻐야 합니다.

 

있으면

 

졸지에

그 모호하고 의문의 흐릿한 회개를 우리는 해야만 합니다.

답도 아닌 것을 붙잡고 성화를 해야하고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설쳐야 합니다.

얼마나 나쁜 소식입니까?

 

왜 욥기에서 광야에 비를 내립니까?

왜 선인과 악인에게도 골고루 비를 내리시는 겁니까?

이것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베푸시는 은혜로 돌아가고 있지

인간들끼리 소통하는 회개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은혜를 무시해야만 인간 세상은 소통이 되지만

은혜의 세계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그 모호한 회개?

소통은커녕 단절이 됩니다.

거지나사로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말입니다.

선지자에게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 성령의 사람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겁니다.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 말이죠.

 

(16:7, 개역)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8, 개역)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9, 개역)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6:10, 개역)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6:11, 개역)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지옥간 부자처럼 죄를 생각해 왔고 의를 생각해 왔고(회개하면 된다고) 심판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성령은 그렇게 잘 못 생각하는 성도의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책망함으로써

무엇을 해도 다 죄요 무엇을 해도 다 의요 무엇을 해도 다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게 하심으로써

관계성을 주님께서 퍼붓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다 말이죠.

성령 외에는 소통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성령이 단절인데

단절로써만 소통하겠다는 겁니다.

 

죽음으로 생명을 증거하고

불임으로써 이삭을 증거하고

잃어버림으로써 다시 사는 것을 증거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다 이루심을 증거하고

죽은자와 방불한 자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심판으로써 구원을 증거하고

진노로써 긍휼하심을 증거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인데

 

반대로 인간들이 교회에 모여서 증거하는 내용을 보면

성령의 이런 일들을 무시하는 일만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망 받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했듯이

요나가 책망 받는 이유가 이러합니다.

 

뭘 해도 다 엉터리임을 십자가라는 주의 인자하심을 기준으로 책망받는다고 말이죠.

 

그러니 비록 이 여섯 번째 인으로 인한 큰 지진으로 인해 진노 속에 들어가지만

큰 물고기 입 속으로 들어가지만

바벨론 포로 속으로 들어가지만

 

이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아 뭘 해도 다 엉터리였었구나 라고 책망하시는 성령의 일하심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주께서 보좌에서 앉으셨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이 간극이 또렷하니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또렷하니 말이죠.

십자가 밝히 보이니 말이죠.

 

그런데 이 간극을 무시하고

소통할려고 달려들고

회개할려고 달려들고

 

세상임금이 이미 멸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임금이 원하는 소통방식을 들이댈려고

이 간극을 무시하니까

이 거지나사로라는 선지자를 무시해서 거지 처럼 부려 먹을려고 하는 겁니다.

왜 거지 라는 기능인줄 몰랐던 겁니다.

거지는 결국 무시하라고 놓여진 올무의 기능에 말려들 수 밖에 없도록 한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뭐 우리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안 죽이겠다고?

천만의 말씀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바울이 오던

모세가 오던 예수님이 오던 죽이도록 되어 있어요.

 

저와 여러분도 똑같다 말이죠

못 벗어나요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이거든요.

이것이 먼저 있었기에

아무리 절대로 난 선지자를 죽이지 않겠다고 해 본들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긍휼을 바라보라는 취지이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만 기록이 된 것이다 말이죠.

 

불뱀에게 안 물리겠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불뱀을 쳐다보라고 벌리신 일이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써의 십자가 지혜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인 겁니다.

 

무시하라꼬 이 간극을 무시하라꼬 증거되는 것이다 말이죠.

 

오늘날 유대인에게 모세가 오면 결국 죽입니다.

소위 모세교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모세를 죽이도록 되어 있어요.

? 모세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예수님을 증거할테니깐요

 

오늘날 천주교인에게 바울이 오면 바울을 또 죽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 바울이 십자가를 증거함으로써 다 수셔댈테니 말이죠.

즉 완악한 수건을 벗겨댈테니깐요.

 

오늘날 개신교인에게 예수님이 오면 예수님을 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예외가 될수 없어요. 뭘 해도 다 죄 이니까 말이죠.

왜 죽이냐고요? 예수님이 모든 성전 다 허물어 버릴테니 말이죠.

교회에 미친 자들이 예수님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자 이렇게 성령은 성도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엉터리로 해석했다고 말이죠.

뭘 해도 다 죄인줄도 모르고 자꾸 의를 세울려고 할테니 말이죠.

 

그 엉터리를 여섯 번째 인을 뗌을 통해서 다 깨부수시는 겁니다.

이 엉터리 해석과 전쟁을 벌리심으로써

물론 전쟁 자체가 이미 승리했기에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기에

우리는 이 진노 속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나 보다 먼저 있었던 주의 인자하심 말이죠.

 

그들은 이 간극 곧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을 무시하니까 말이죠.

 

그러나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기에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 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는

 

선지자의 노래

파수꾼의 노래를

 

여섯 번째 인을 떼는 이 사건을 통해서 누리는 겁니다.

 

아니 없는데 왜 기쁠까요?

주의 인자하심이 그 십자가의 은혜로만 소통되는

 

우리 인간의 열심과 회개와 믿음이 전혀 통하지 않는

오직 십자가만의 은혜로만 다 이루어진 나라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더 이상 모호하고 의문의 미흡하기 짝이 없는 흐릿함이 아닌

또렷하고 명료하고 명확한 완료로써의 십자가라는 간극이기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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