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측량과 두 증인 (11: 1- 9)

 


(
11:1, 개역)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11:2, 개역)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1:3, 개역)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1:4, 개역)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11:5, 개역)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11:6, 개역)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11:7, 개역)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1:8, 개역)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11:9, 개역)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1:1, 새번역)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11:2, 새번역)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11:3, 새번역)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11:4, 새번역)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

(11:5, 새번역)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11:6, 새번역)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에,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몇 번이든지, 어떤 재앙으로든지,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11:7, 새번역)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아비소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11:8, 새번역)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11:9, 새번역)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 오늘 본문을 보니 도통 무슨소리인줄 모르겠습니다.

 

계시록에만 나오는 용어들이 막 막 나열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했지요.

즉 사랑의 관계성의 언어이지

역사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해석불가입니다.

도리어 역사의 언어는 깨어질 판국이다 말이죠.

 

그래서 외부에서 찾아 오셔야 합니다.

 

즉 성경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에서는

요한계시록은 더더욱 이건 사견 개인의견에 불과 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 개인 이야기입니다.

보편적인 사고와 맞는게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죠.

문제는 이 개인의 이야기를 하나의 영웅의 일기처럼 본으로 삼아서

지혜를 찾고자 할 때 해결해 줄수 있는 지혜의 책으로 활용할 수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누구에게는 있을수 있겠지요

그래서 뽑아와서 인간들의 보편적인 세계에 적용하고자 했다 칩시다.

마치 큐티처럼 오늘의 깨달은 지혜를 활용하기, 적용하기 처럼 말이죠.

아이들 큐티는 더 심하겠지요.

 

그런데 택도 없습니다.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고에

이 개인의 예수 이야기를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개인 세계에

인간들의 다수적인 보편적 세계는 먹혀들까요?

당연히 먹혀들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두 세계의 충돌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니는 니 대로 세계에

나는 나 대로의 세계로 구분 구별 해 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세계는 구원 안 시켜 주겠다이고

반대로 인간들의 세계는 구원 안시켜 줄꺼면 당신은 이 땅에서 나가라 라고 해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써 발생했다 말이죠.

 

지금까지도 유대인 곧 모든 민족의 대표성은

메시아의 조건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신학입니다. 철학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종교 곧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는 메시아의 조건에 안 맞다는 겁니다.

구원자의 조건이 아니다는 거죠.

 

당연하지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고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의인에게 안 맞다 말이죠.

종교랑 안 맞아요.

백날 따져보세요 메시아의 조건에 맞나

 

이유 없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지

내가 따져서 내 쪽에서 구세주 되어 주세요 라고

구원자가 되는게 아니다 말이죠.

결국 예수님의 세계를 일방적으로 퍼부음으로 인해서

이 땅은 이 인간의 세계는 허물어져야할 세상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이 내세우는 것에 뭐가 아쉬워서 들어주겠냐 말이죠.

오로지 주님의 세계만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 그럼 십자가는 무엇을 공격할까요?

예수님의 세계는 십자가를 밀어붙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세계는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요?

 

역사 속에 사는 인간은 자기 존재감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고 그것이 모여서 종교 곧 자기구원을 이룬다 했습니다.

 

이 자기 존재감 곧 자존심에서는 무조건적인 감사가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감사는커녕 화를 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가인이 그랬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기존재감의 확대입니다.

거기에 비해 제사 보다 나은 순종은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아벨입니다.

결국 주님은 예수님의 세계를 밀어붙임에 있어서

가인의 제사에 대한 적극적은 거부를

아벨을 통해서 나타내신 겁니다.

 

일체 양보가 없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의 세계인 곧 모든 인간의 세계는

이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제사에서도 나타났고

오늘날 성화론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제사는 화를 냄으로 결론을 이미 맺은

결과를 정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존재감인 자존심을 거스르는 십자가(주의 인애와 자비)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 세계이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는 무조건적인 감사 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영광 곧 주의 인자하심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것은 주의 인자하심 뿐입니다. 다른 것은 기록되지도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 거부 대상과 기록 대상의 차이를 두기 위함으로써

여기에 걸려드는 것이 마귀 곧 가인의 제사입니다. 무조건적으로 화를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화론자들이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성화론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시간(역사)관을 밀어붙이는 자존감 곧 자기존재감입니다.

그것은 곧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이 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 이루심이란 미래완료에서 현재로 쳐들어 오는 침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이나 의를 쌓는 인도의 종교처럼 성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불교든 뭐든 모든 종교는 성화론이거든요.

인간의 실천력입니다.

이것으로 좌우 되는 구원관입니다.

인간의 신앙심인 오기와 신념으로 좌우 되는 구원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존재감을 더하기 위해서는 가인의 제사에 더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메시아의 조건을 따지듯이

염치 있게 말이지, 절대로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도록, 쪽팔리지 않도록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는 티를 내는데 있어서

구원자 메시아 만의 조건을 따지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구원 받는 자의 조건도 따지겠다는 것이 인간들이 내세우는 구원조건인 겁니다.

마귀가 내세웠듯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성전을 측량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의 함께 동거동락하는 동행관계입니다.

그러니 건물이 아닌 그 사람 자체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였다 말이죠.

그럼에 있어 성전을 측량한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에서 자신의 영광인 십자가를 밀어붙임에 있어서

십자가의 영광과 맞지 않은 것을 철저하게 가려내는

국수채로 걸러내는

걸러내는 작업을 성전 측량으로 표현 된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감을 기반으로 해서 행동하는 세계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세계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주 되심 곧 십자가의 승리만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이 둘의 충돌로 인해서 십자가의 승리 곧 주의 인자하심만 채워넣는 방식이 바로

성전 측량인데

걸러내심인데

이것은 오로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짖밟아 버림으로 오늘 본문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11:1, 개역)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11:2, 개역)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즉 나의 존재감을 바로 십자가로 지근 지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로 짖밟아버리는데 있어서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일곱 인을 떼든 일곱 나팔을 불든

이미 내어버린바 된 자들은 인식 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어버려 두사 라고 하니까 로마서 1장이 생각 나네요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9, 개역)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1, 개역)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개역)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1:23, 개역)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24,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1:25, 개역)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26, 개역)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7, 개역)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1:28, 개역)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29, 개역)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1:30, 개역)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개역)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개역)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사도바울이 손으로 우상을 만드는 이방인만을 염두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을 겨냥함이 더 심합니다.

즉 우상숭배자들은 오히려 유대인이 더 심하다는 거다 말이죠.

그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났다 말이죠.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 자여 라는 죄목으로 말이죠.

물론 이방인도 포함됩니다.

삼가 절기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니 꼭 우상을 손으로 만들어야 우상숭배가 아닌

탐심을 쫏는 그 자체가 우상숭배다 말이죠.

그러니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안식일을 지켰다는 둥

이 모든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4:9, 개역)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4:10, 개역)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11, 개역)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2:18, 개역)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2:19, 개역)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20, 개역)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결국 성도란 이런 탐심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성도에게만 자신의 십자가의 승리의 영광으로 채우시고자

지근 지근 짖밟음으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자기 존재감을 위하여 사는 삶을

주님께서 직접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이미 완료되었는데 누가 너를 꾀냐 라고

주님께서 꽉꽉 자신의 피로 이루신 영광을 채우시더라 말이죠.

결국 성도는 자기 쪽에서 행하는게 없어요.

주님 쪽에서 채우시는데 있어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십 두달입니다.

 

(11:2, 개역)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흔 두달을 한달 30일을 곱하니 1260이 나오더라 말이죠.

 

(11:3, 개역)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러니 이런 표현 마흔 두달 일천이백육십 일 은 계시록에만 나오니까 얼마나 어렵게 느껴지냐 말이죠.

그러나 다 이루심 의 입장에서 보면 숫자 또는 역사 또는 시간으로 볼게 아니라

관계성 사랑의 언어로 보자 말이죠.

비밀의 언어

즉 역사의 언어가 아니요

시간의 언어가 아니다 말이죠.

행함의 언어가 아니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삼년반 이다 말이죠.

난 계산을 잘못해서 26개월인디? 라고 1260일을 잘못 계산 했다 말이죠.

한때 두때 반때 이니까 말이죠.

아 그런디 약정 36개월이라는 일상적인 표현이 생각났구

그 뒤에 마흔 두달을 나중에 읽어보게 되니까

아 그럼 맞네 라고 물론 엉터리 숫자 계산만 하고 있었다 말이죠.

오히려 틀렸으니까 이게 숫자가 아니라

관계성의 언어임을 오히려 더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더라 말이죠.

 

그렇기에 물론 삼년반을 그냥 시간으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의미를 살펴보면

 

(7:25, 개역)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7:21, 개역)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7:22, 개역)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7:23, 개역)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밞아 부숴뜨릴 것이며

(7:24, 개역)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7:25, 개역)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7:26, 개역)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7:27, 개역)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

(7:28, 개역) 그 말이 이에 그친지라 나 다니엘은 중심이 번민하였으며 내 낯 빛이 변하였으나 내가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

 

 

성도들이 받게 되는 고난을 말한다 말이죠

 

첫 번째 한 때는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70년 포로됨입니다. 그러니 자기 죄로 고난 받을 때 아무나 징계를 받는게 아니라

아들만이 성도만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 속에 채우시는 기간인 겁니다. 관계성인거죠.

 

두 번째 두 때 는 자기 죄악으로 인함이 아닌 이유 없이 아무 연고 없이 받는 고난입니다.

자기 죄로 벌을 받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하기 그지 없지만

아무 연고 없이 고난 받는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이

아무 죄 없는 분을 죽였듯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는 모습이다 말이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기간입니다.

 

세 번째 반 때는 마치 두 번째 두 때를 주님 덕분에 이겼습니다 라고 해도

역시나 주님이 힘주셔서 내가 이겼다는 나의 공로 조차 허용이 안되는

세상으로부터 완전 밀려버림을 당하는 기간인 겁니다.

결국 구원은 이렇게 아무것도 한 것이 오로지 십자가의 용서로만 구원되지

성화로 구원되는게 아니다 말이죠.

 

세상이 성도를 왕따 시키는 버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성도를 밀어버림으로써

죽여버림으로써 자기들 땅에 아예 발 못 붙이도록 죽이는 겁니다.

우리는 마귀 등쌀에 등 떠밀려 주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식입니다.

그런식으로 십자가의 영광이 작용하는 겁니다.

 

우리의 속성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바 없습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 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우리를 자꾸 밀어냄으로써

주님 자신의 세계를 우리가 어쩔수 없는 속성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영광으로 채워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음이 좋아서 세상것의 유혹을 물려쳐서 이겨내서 구원되는게 아니라

주님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를 자신의 피로 발라버려셔

그 십자가의 영광으로 내 속을 채워버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아예 밀려버림을 당해서

밀리다 밀리다 낭떠리지 까지 밀려 결국 죽임을 당하는 식으로

아예 세상으로부터 단절 당하는 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웬걸 원인 없는 결과로 감사 뿐이다 말이죠.

 

나의 자존심 내가 어쩔수 없이 해결도 할수 없는데

 

마지막에 만난 강도처럼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무조건적인 감사 밖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자기 존재감으로만 채워사는 다른 옆의 강도는

주님의 낙원이 있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졸지에 인생의 종착역에서 주님을 만나버리고 말았다 말이죠.

 

종착역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ㅋㅋ


http://crosslamb.tistory.com/473

자기존재와 무관한 예수님이라는 인물 곧 기능을 만나버린 겁니다.

자신의 존재는 뭐 사형당해 마땅한 존재일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대박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니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이 덮쳐버리니까

그는 인생의 끝을 맞이한게 아니라

졸지에 새시작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신났으면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자기 혼자 김칫국을 마시듯이

새시작 하게 되었다고 출발을 외치더라 말이죠.

역사적 시선

시간적 시선은 오히려 옆에서 욕하는 강도가 제대로 보여줍니다.

뭐 새출발! 웃끼고 있네

너 죽어 저 양반도 죽어

끝이야 끝

종착역입니다 내리세요

어딜 갈아 탈려고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이 오냐 너와 내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발 낙원이라는 클럽 빠 에서 춤춘다 말이죠.

새출발 한다 말이죠. 클러버 박수홍처럼 말이죠.

 

결국 반 때를 무지 어렵게 생각했는데

마침 구원받은 강도 생각하니까 무지 쉬워지네요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는 것을 어른들만 모른다 말이죠.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는 비밀이다 말이죠. 즉 어른에게는 감추었다 말이죠.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다 말이죠.

얼마나 그들은 독자적이고 자립적이냐 말이죠.

 

아무튼 한 때 두 때 반 때 기간 동안 성도는 짖밟히는 겁니다.
?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에게 채우시고자 말이죠.

피 바르는 겁니다.

 

이 간극 이 흔적 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원함도 아니요

세상을 좋아라 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의 영광을 일방적으로 채워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 기간에 아니 기간이라고 하지 말고

이 흔적 이 십자가의 흔적 이 간극 이 삼일의 간극이 바로 두 촛대로 표현되었고,

두 감람나무로써의 두 증인이다 말이죠.

 

두 증인은 계시록에만 나오는 표현이라서

평상시에 이 표현은 낯설고 전혀 모를 수밖에 없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의미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인물이 있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 이다 말이죠.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헛된 환상으로 꿈으로 몽상으로 취급해 버리지만 말이죠.

 

계시록 초반에 오로지 환상으로만 나타낸다고 했을때에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환상을 보는 사도요한이 아닌 자들에게는 비현실로 본다는 것을 전제로 깔 듯이 증거되니까 말이죠.

아무튼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본인

결국 시차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볼수 있겠냐 말이죠.

두 사람간의 시차가 무려 500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는 무려 1400(모세) 그리고 900(엘리야)이다 말이죠.

그야 말로 하루 만에 천년이 하루 같은 묵시라는 진짜 현실이 덮쳐졌다 말이죠.

이제 역사 곧 사람들이 시간관을 시시해서 못 본다 말이죠.

덮쳐버린 겁니다. 안 누리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는 기능입니다.

존재를 찢어버립니다. 역사를 찢어버립니다. 새술은 새 부대에

옛부대는 찢어지고도 남지요. 감당이 안 도비니다.

이것이 진짜 현실인 묵시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오히려 허구이다는 거죠.

묵시는 이 역사를 찢고서 등장하게 되니

시차를 극복할게 아니라

시차를 찢으면 됩니다.

누가? 베드로가 아니라

묵시가 말이죠.

그러니 행함 또는 실천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성전이란 거룩한 하나님이 더럽고 속된 인간 속에 어떻게 거하시느냐

어떻게 동행하시느냐 하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이라는 장치이다 말이죠.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관계성처럼 말이죠,

 

그러니 신랑이 자신의 흰옷으로 일곱교회된 신부를 자신의 거룩으로 꽃단장 시키듯이

흰옷을 입히듯이

거룩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곧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주어서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일방적으로 편파 거룩을 입혀버리는 겁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바로 이 십자가의 피 영광으로 인해 맺어진 관계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두 증인이 받은 그 권세가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세상을 이기는 권세를 보여준다 말이죠.

 

엘리야가 받은 권세는 삼년 반 동안 비오지 않는 권세를 받았다 말이죠.

 

(5:13, 개역)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5:14, 개역)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5:15, 개역)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5:16, 개역)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5:17, 개역)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5:18, 개역)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왕상 17:1, 18:1

 

 

또 모세는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퍼붓는 권세를 받았다 말이죠.

 

(11:6, 개역)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결국 세상을 이기는 권세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으로써의 권세이지

 

개인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럴꺼 같으면 말라꼬 광야에서 이렇게 힘들게 빼낸 자들을 다 탈락 시키냐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의 피 곧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을 채우기 위함이니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이 3일의 간극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사는 관계성을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룬 것에

미래완료가 거꾸로 쳐들어 옴으로써 성도의 현실로 채워지는 겁니다.

이것이 두 증인이 받은 권세로써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영광을 채우고자 하는 권세이다 말이죠.

 

자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이 자꾸 옛과거의 출애굽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인 겁니다.

옛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실이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곧 잃어버림을 당하고 한때 두때죠

그리고 다시 되찾음바 되는 반때를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피 영광으로 채우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성전 곧 자기 신부 삼기를 펼치는데 있어서

성전을 이렇게 거룩과 속됨을 철저하게 구분시킵니다.

성전 제일 바깥을 이방인의 뜰

그 다음 안쪽을 향해서 구역을 설정하면 여자의 뜰

그 다음 안쪽은 남자의 뜰

그 다음 안쪽은 레위인의 뜰

그 다음 안쪽은 제사장의 뜰

그 다음 하나님과의 독대의 장소인 지성소 곧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로 구분된

철저하게 구별시키는 겁니다.

더러운 것 일체 못 들어온다 말이죠.

 

그러니 이 지성소를 찢고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은

이제 인간 쪽에서 거룩을 갖추어서 다가가는 방식을 철회하시고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으로만 넘어오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성전 되시는 예수님의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짖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는 그저 성전 건물만 생각했지

신랑 신부의 관계성 또는 동행 또는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관계성은 오히려 거부했던 겁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고

건물 성전은 그림자일 뿐인데

그림자 섬기겠다고 실상을 거부한 거죠.

안식일 괜히 지키는 바람에 안식의 주인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구약 그림자 성전에는 원래 한 개의 촛대 였는데

이제 신약에서는 두 개의 촛대로써

원래 이스라엘과 접붙임 당한 이방인이 두 촛대로 표현된 겁니다.

즉 교회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원래 이스라엘을 참감람나무로 표현 되었고

접붙임 당한 이방인을 온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습니다.

 

(11:4, 개역)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개역)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7, 개역)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11:8, 개역)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11:9, 개역)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1:10, 개역)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1:13, 개역)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1:15, 개역)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1:16, 개역)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7, 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11:28, 개역)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11:30, 개역)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11:31, 개역)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1:32, 개역)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11:33, 개역)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겠습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채우고자

가장 더럽고 비천한 구스 여인을 온유하심으로 신부 삼고자 하심을 말이죠.

 

거기에 인간의 제사 곧 자신의 자존감을 위한 제사를 추구하는 자들이

이 구스 여인과의 결혼을 못 마땅해 하는 겁니다.

? 나는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웬걸 주의 인자하심은 오히려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고

인애와 자비를 원해서

바로 그렇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하는 그 세리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피를 바르시더라 말이죠.

탕자에게 말이죠.

손 할례와는 족히 비교도 안되는 거룩 곧 십자가의 영광을

마음판에 아예 거룩을 새겨버린 겁니다.

그 흔적으로 그 십자가로 채우시는 겁니다.

 

그래야 탕자의 형이 반발할꺼 아니겠습니까?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탕자를 받아주는 주의 인자하심에

맏아들은 반발하는 겁니다.

마귀의 세계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탕자를 죽여버리는 밀쳐버리는

그래서 죽임 당한 아벨

이 아벨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 끝까지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다 이루었다는 유일한 완료인 승리라고

이 승리를 우리 속에 채우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인 언약입니다.

 

이 언약대로 밀어붙이십니다.

세상이 불타고

또 세상은 정작 성도를 아무리 죽여도

우리는 무조건 이유없이 새출발이요

오늘밤 주님과 함께 낙원클럽빠에서 무조건 막 춤추고 막 마시고 막 노래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권세 곧 십자가의 피의 영광으로 신부된 일곱교회에게 채워버리셨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뭘 해도 감사 뿐인

이 원인 없는 결과인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함으로 증거하는 겁니다.

 

저들! 뭘 해도 화를 낼 뿐인 가인의 세계인 저 세상 저 허구들이 보란 듯이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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