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의 죽음과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그리고 두 번째 화 (11: 6-14)

 


(
11:6, 개역)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11:7, 개역)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1:8, 개역)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11:9, 개역)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1:10, 개역)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11, 개역)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1:12, 개역)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1:13, 개역)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1:14, 개역)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오늘은 둘째 화 곧 두 번째 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증인의 죽음이 나오는데요

 

두 증인 곧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퍼부은 모세

 

(11:6, 개역) ****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리고 삼년 반 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한 엘리야

 

(11:6, 개역)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

 

(11:6, 개역)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두 증인 모세와 엘리야가 죽임을 당하는데요

그 죽임당한 장소가 곧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장소와 같다는 겁니다.

 

곧 소돔 또는 애굽인데 바로 예루살렘인거죠. 강도의 소굴 곧 짐승의 장소죠.

그러니 시편에서 다윗이 왜 자꾸 출이스라엘은 외치는지

다윗이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지 바로 오늘날 교회와 동일한 겁니다.

 

(11:8, 개역)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 두 증인이 스가랴서 4장에도 나옵니다.

 

(4:11, 개역)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4:12, 개역)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4:13, 개역)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4:14, 개역)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어머니께 이 두 증인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했는데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두 증인 중에 한사람인 엘리야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불마차 타고 하늘에 올라갔거든요.

그런데 오늘 계시록 11장에서는 죽는 것으로 나오니까

성경이 왜 이랫다가 저랫다 하냐 말이죠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내가 부활인거 믿느냐 라는 말을

그럼요 부활교리 믿습니다 라고 했는데

아니 부활교리 말고 내가 부활인 것을 믿느냐 라는 말에

부활 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주듯이 말이죠.

 

우리는 그 대신 부활신앙 가진 것으로 그것을 대처 대신 땜빵하는 거다 말이죠.

 

아무튼 엘리야가 죽게 되니 부활교리고 뭐고 다 날라가는 겁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들은 늘 지레 겁을 먹고 너가 엘리야냐 라고 묻는 이유가 그겁니다.
엘리야는 죽여봤자 다시 산다는 것을 그들도 알거든요.
괜히 성경지식을 박사수준으로 자신들을 높인게 아니니깐요

그래서 마음껏 죽였다 말이죠. 엘리야도 아닌 주제에 왜 까부냐고

(요 1:21, 개역)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그렇게 죽였는데 이제는 다시 세례요한이 살아난 줄로 알고
너가 세례요한이냐 라고 또 묻는 겁니다. 또.

(마 14:2, 개역)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침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막 6:14, 개역)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막 6:16, 개역)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눅 9:7, 개역)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1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구원전쟁 곧 간극에 말려들어
(얼마나 제대로 간극을 잘 벌렸으면 말이죠. 그 증상 효과가 팍팍 나타나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에 말려들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부활교리를 공격하니까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엘리야의 기능입니다.
한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딴사람이 아닌 믿는자들에게 딱 맞아 죽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딱 맞아 죽기 좋은 날씨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삼년반동안 기간이 아니라 시간이 아니라 장소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곧 사건이다 말이죠.

 

오늘 장소와 시간이 합쳐진 것이 사건인데 그 사건은 십자가 사건 뿐이다 말이죠.

 

이것에 대한 마귀의 반응입니다.

마귀는 십자가 사건에만 반응합니다.

그들이 반응해 줘야 십자가 사건이 의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 공격하지요.

엘리야가 삼년반 동안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함으로써 공격하지요.

 

그런 이유로 공격받은 소돔 또는 애굽 또는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소의 땅에 사는 자들이

이 두 증인을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두 증인의 운명입니다.

괜히 애굽을 괜히 소돔 강도의 소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것이 부르짖음인 기도인데

바로 십자가를 나타내소서 라는 기도인 겁니다.

기도란 구원전쟁이거든요.

자기 백성 빼내시기 이거든요.

주의 오른손에 일곱교회가 남은자 또는 전리품으로써 놓여지고

주의 발등상에는 원수가 놓여진다 말이죠.

이것을 이 삼일이라는 간극이 펼치는 겁니다. 두패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나타내소서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삼년반 이라는 겁니다.

시간이 아니라 한때 두때 반때 라는 사건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행함이 있는 믿음이 뭔가?

바로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거다 라고 했지요.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그럼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면 모조리 다 행함이 있는 믿음일까요?

 

요즘 같이 가뭄이 심할 때 이런 기도 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일까요?

 

아니지요.

삼년 육개월 동안만입니다. 그 뒤에 비 오기를 기도 했다 말이죠.

그럼 어차피 비오기를 기도할 것 같으면 왜 비오지 않기를 기도할까요?

그것도 삼년 육개월 동안이라는
기간이 아니 간극이 즉 사건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

 

이 기간! 아니 사건은 엘리야가 선지자로써 이스라엘에게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은

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돌이키는 기간 아니 사건이다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이다 말이죠.

그러니 심판을 퍼붓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니 말이죠.

즉 모세가 10재앙을 퍼붓고

출애굽 한 뒤에 광야라는 40년 기간과 같은 기간이다 말이죠.

이럴꺼 같으면 왜 출애굽 했냐 말이죠.

차라리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결국 들어간다 말이죠

약속의 땅에

비오더라 말이죠.

 

그 사이에 그 간극 사이에 뭔가 드러나더라 말이죠.

무엇이?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거부하면서 숨어있는 속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언약궤 증거궤에 담겨질 그 원망의 세가지 물증을 담는 것을 거부하는 숨어 있는 속성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즉 이 기간 이 간극은 바로 십자가를 나타내소서를 거부하는 마귀의 속성이 들추어지는 기간이다 말이죠.

 

우리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40일 금식 후에 마귀로부터 광야에서 세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주님은 마귀를 물리쳤거든요.

 

바로 이 운명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운명에 우리는 같은 운명으로 동참되었기에

비록 우리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권세를 받은 겁니다. 이미 승리한 채로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같은 운명에 놓여졌다는 이유로

마귀로부터 공격 당하는 기간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동시에 십자가를 나타내시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으로 합쳐진 시공간이 통합된 사건이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승리했으면 아무리 우리가 실패했어도 승리한 겁니다.

이것이 두 증인이 분명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11:10, 개역)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11, 개역)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다시 살아나니까

저들의 무기 곧 살인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통하지 않는 권세를 이 두 증인은 받았으니 말이죠.

그래서 저들이 두려워 떠는 겁니다.

두 증인의 죽음을 보고 즐거워 기뻐할때는 언제고

삼일 반 만에 다시 살아나니까 두려워 떨더라 말이죠.

 

바로 이 삼일 반 이라는 간극을 다들 무시했다 말이죠.

무시 하라고 삼일 반의 간극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무시했던 것이

도리어 두려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자신들의 사망의 권세라는 무기도 소용이 없으니깐요

 

그러니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결국 요즘 목사들이 교회 일을 하라는 식으로 사기치는 내용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나태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퍼붓는 겁니다.

그것도 성도에게 말이죠.

 

성도 아닌 자에게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퍼부을때에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퍼부을때에

삼년 반 이라는

한때 두때 반때 라는 간극을 통해서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자작극입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림 당하지 않았는데 넌 잃어버린 자야 라고

일방적을 퍼부음으로써 잃어버림을 당하고

그 잃어버림 당한자를 다시 되찾는 이 간극을 만듬으로써

주님 자신의 기쁨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우리 속을 채우시는 겁니다.

마치 일부러 요셉이 형제들을 뺑뺑이 돌리듯이 간첩으로 몰아 세우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고자 말이죠.

거기서 느닷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유다가 두 자식을 담보물로 내어놓듯이
십자가의 간극을 내어놓으니까 통과 패쓰 합격 했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며느리 다말로 인해 이 담보물때문에 나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이 부조리 스켄달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했듯이 말이죠.

배에는 쓰나 입에는 달다 말이죠.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자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말이죠.
주의 눈물 주님의 피희생으로 인해 구원받았다 라고 ...

 

거기에 어느세 숨어있던 마귀가 개입해서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한때 두때 반때 라는 간극에

숨어있는 마귀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개입함으써

이 간극에 말려들더라 말이죠.

 

일타쌍피 일석이조

 

십자가의 저주를 성도에게 퍼부으니까

마귀가 물개박수를 치면서 주여 참 잘하십니다.

저놈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나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라고

괜히 나서다가

괜히 목사 말 왜 듣냐 말이죠.

그래서 정작 성도는 주의 오른팔에 놓여지게 되고

마귀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이 간극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주의 책에 기록된 유일한 십자가의 영광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겁니다.

그러니 멀쩡히 있는 성도를 괜히 죽였다가 다시 삼일반 만에 다시 살려낼때에

얻어 걸리는 것이 마귀가 괜히 미끼를 두 증인이라는 미끼를 물다가 잡히더라 말이죠.

 

이렇게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애굽을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 공격하고

이스라엘 곧 소돔이 된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강도의 소굴 사단의 회 유대를 향해

비오지 않기를 삼년반 동안 공격하는 겁니다.

 

주 여호와 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말이죠.

즉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이다 말이죠.

 

여기에 이 주의 인자하심을 못 나타내도록 거부하는 세력인 마귀가 내어놓는 것들이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이 뭔가?

바로 번제와 제사라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단에 불 붙는 제사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기도로써 부르짖음으로 제단에 불 붙기를 바랬는데

불이 안 붙이니까?

고래 작게 불러가 듣끼겠나? 좀 크게 불러봐라 라고

 

(왕상 18:27, 개역)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왕상 18:28, 개역)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모습들을 저들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나타내는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똑같다 말이죠.

행함만 있지 믿음은 없다 말이죠.

 

 

(왕상 18:15, 개역)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왕상 18:16, 개역)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왕상 18:17, 개역)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왕상 18:18,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9, 개역)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왕상 18:20, 개역)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왕상 18:21, 개역)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2, 개역)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왕상 18:23, 개역)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왕상 18:24, 개역)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왕상 18:25, 개역)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왕상 18:26, 개역)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 18:27, 개역)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왕상 18:28, 개역)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 18:29, 개역)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왕상 18:30, 개역)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왕상 18:31, 개역)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왕상 18:32, 개역)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개역)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개역)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왕상 18:35, 개역)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왕상 18:36, 개역)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개역)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개역)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개역)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40, 개역)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왕상 18:41, 개역)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2, 개역)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왕상 18:43, 개역)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왕상 18:44, 개역)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상 18:45, 개역)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왕상 18:46, 개역)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는고 하니

행함을 없애는 행함을 펼치는 겁니다.


즉 오로지 약속만 바라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다 제거하는 겁니다
.

그것이 물 또랑을 만들어서 도저히 불 붙을 수 없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의 개입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크게 기도 드린다는 둥

아니면 자기 열심으로 땀을 내어서 또는 자기 학대로 피를 내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그런 요소가

아예 들어갈까 싶어서


그런 요소들을 다 제거하는


행함을 제거하는 행함을 펼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더라 말이죠
.

그래서 약속만 외칩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스라엘을 돌이켜 달라고

이것이 간극을 만드는 자 이다 말이죠.

그들 두 증인 자체가 간극으로써 사건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간극을 펼치는

이것이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야고보서에 나오는 그 예가

바로 부정적인 것을 앞세우는 겁니다.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구원을 성사하는 겁니다.

정작 참말은 구원을 성사 못시키는데 말이죠.

 

결국 주의 인자하심인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꾸 행함이 있는 믿음을 나타낼 생각 말고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이라고 그냥 고백하세요

목사에게 속아서 목사 지도 못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행할 생각 말고요

이것이 주님이 직접 벌리시는 일입니다.

반발 안하는게 오히려 다행일 정도인데

모두 다 반발하도록 되어 있으니

아예 시도 조차 할 생각 마세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오로지 예수님만 펼치시는 겁니다.
다 이루어 놓고서 너 참 행함이 있는 믿음 잘 했네 라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것이지
우리는 오히려 늘 방해짖 밖에 한것이 없다 말이죠.

 

또 기생 라합에 이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재물로 바쳤는데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비오지 않기를 삼년반 동안 이다 말이죠.

 

이것을 또 흉내내는 놈들이 있어요

과거 20년도 넘었는데 어떤 전도사가 그랬다 라고 하던 말을 들은적 있는데

지금도 저 산속 깊은 곳의 기도원들 분위기를 보면 그런데가 많아요.

 

흉내가 가능하다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니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이지요.

왜냐하면 아들을 이삭처럼 재물로 바쳤는데

십자가를 나타냄이 아니라


부모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 아들을 살해 하더라 말이죠
.
정작 그 반대인데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뜻인데 말이죠.

그러니 간극을 보여주고 다시 살려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못 살려내는 기라

그러니 가짜죠.

 

아브라함도 못 살려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개입하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때를 바라봤다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뒤집워 씌우는 식이다 말이죠.

두 증인도 못 살려내고 정작 본인들이 죽어요
즉 그들 또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그 죽은 두 증인을 누가 살려내냐 말이죠.

예수님이 살려냄으로써 간극

곧 삼일 반 이라는 간극이 의미가 있다 말이죠.

 

이것은 상징계에서 나타낼수가 없어요.

실재계의 침범

곧 묵시의 침범이 없으면 이 사건이 나타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흉내 낼 생각 조차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런 인간의 꾀에 넘어갈 주님이 아니십니다.
목사들이 사기치는 그런 인간의 꾀에 오히려 수작 부리지 말라고
목사를 정신차리라고 호통쳐야 한다 말이죠.
물론 그랬다간 쫏겨나는 거죠 뭐.
원래 목사란 지옥을 채우기 위해서 동원이 된 마귀자식들이니까요.
섬기는 자 없어요. 예수님 뿐입니다. 그저 등쳐먹는 삯꾼들입니다.

인간의 개입 요소를 제거하는 행함을 제가하는 행함이다 말이죠.

진짜 행함을 저 묵시에서 벌리는 행함이다 말이죠.

그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사건은 반드시 마귀의 개입을 유도하는데

인간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할려고 하니

마귀 개입 없이 하는기라, 이룰려고 한다 말이죠.


목사 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하래
~~~~

병신 목사 말 말라꼬 듣냐 말이죠.

 

막 사세요 나쁜남자 되세요 라는 것은 사건의 의미이지
초자아의 외설적 명령이지

십자가를 나타내심이지

무식하게 행함으로 하게 되니까

도리어 미끼를 덮썩 물어서

미끄럼 판에 쭐꾸덕 미끄러지는

괜히 빈자리를 괜히 앉아서 괜히 자기가 채울려고 한다 말이죠.

견디질 못하도록 옆에서 부추기거든요.
주변에서 우쌰 우쌰 힘내라고 할수 있다고 응원을 하거든요.

빈공간을 채우고 싶어서 환장한다 말이죠.
거지 나사로 되자 라고 말한 자살한 목사가 그렇게 말려든 겁니다.
이미 거지 나사로 인데 뭘 되자 라고 말하냐 말이죠.
뭐 새삼스럽게 거지 나사로가 왜 되어야 하냐 말이죠.
이미 거지 나사로인데.

 

천국의 침노를 도리어 당해야 할 판국에

본인이 침노하고 있으니 사무엘이 숨었다가 요놈 잡았다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소돔 애굽 주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곳인 예루살렘에서

그 곳에서 죽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 곳에서 살인을 행해 버리니까

두 증인이 아니라

잃어버림 당한 자가 아니라

도리어 두 증인을 죽이는 자가 되더라 말이죠.

 

교회에서 죽기는커녕

교회에서 살해 했다고
그래놓고 교회에서 죽다 라고

라멕처럼 노래 부르고

두 증인이라는 아이디 닉네임으로 떠들고 다니니
자기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죠.

악령을 심으시지 않았다면 저렇게 못하더라 말이죠.

아무나 못해요.

성도만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니라

악령 쓰인 자도 원인 없는 결과이거든요.

 

악령 씌일 원인을 아무리 따져도 없어요.
누가 봐도 모든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거든요.
원인을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는 완벽한 믿음 좋은 사람이라 ~~~

그냥 원인 없는 결과 이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짐승이다 말이죠.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두 증인을 통해서 보여주는 삼일 반 이라는 간극도 있지만

그것을 덮썩 무는 마귀도 등장함으로써

십자가 곧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마귀는 이 간극만을 덮썩 물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성도에게 십자가의 저주를 퍼부으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은 자라고 덮썩 물더라 말이죠.

 

다윗은 주의 오른팔로 붙잡아 면류관으로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 수치로
벌려놓는 이 간극에 말려드는 겁니다.

 

(11:11, 개역)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에 생기를 부음으로써 살려내듯이

이 잃어버린 죽임당한자를 다시 되찾는 다시 살리는 간극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건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오늘날 목사들은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은 해놓고서는

거꾸로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흉내 자체가 불가능한 단절된 성령의 일이다는 거죠.

그러니 아예 흉내 낼 생각 조차 하지 말라 고라 고라

 

(37:4,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37:5, 개역)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37:6, 개역)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7, 개역)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37:8, 개역)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37:9,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37:10, 개역)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37:11,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37:12, 개역)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37:13, 개역)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7:14, 개역)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37:15,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7:16, 개역)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자 이렇게 두 번째 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이 주님의 십자가의 저주에 의해서

우리 성도는 잃어버림을 당하지만

이것이 성도에게만 있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이 진노가 이 심판이 주님이 베푸신 긍휼입니다.

 

이 십자가를 나타내심을 통해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성도에게만 보이는 주님의 전쟁이듯이 말이죠.
계시록은 그야말로 기쁨의 절정이니 말이죠.

그 예수님의 운명을 우리 속에 채우고자

이 십자가를 순대처럼

껍데기에 속을 집어넣듯이 십자가를 곧 주의 인자하심을 채워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원인 없는 결과로써

미래완료로 십자가의 다 이루심

곧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이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모든 피조물 천군 천사 모든 우주가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나의 독자적인 운명이나 인생 또는 삶이 없이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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