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용과 여자의 해산 (12: 1- 6)

 


(
12:1, 개역)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12:2, 개역)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12:3, 개역)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12:4, 개역)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12:5, 개역)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6, 개역)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1, 새번역)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12:2, 새번역)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12:3, 새번역)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12:4, 새번역)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12:5, 새번역)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 2:9 또는 '보살필'

(12:6, 새번역)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은 정작 그림자이고

실상은 오늘 본문처럼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말도 안되는 이 장면이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 실상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런 사건을 격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 출애굽 사건은 다시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써

재현이 됩니다.

 

두 살 밑으로의 아기를 모조리 다 살해하는 장면 말이죠.

 

결국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사건이 그림자라면

그 모세가 바로 예수님의 등장으로써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모세를 따르른 자들이 반대한다는 겁니다.

 

두 살 밑으로의 아기가 죽는 장면과 모세는 연관이 되어도

예수와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존재 또는 역사 또는 시간은 이렇게 단절성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과거의 모세 때의 그 경험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린 겁니다.

기념비가 오히려 발목 잡게 되는 셈이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도 일천이백육십일 이라는 날수가 나옵니다.

3년 반이다 말이죠.

이건 시간이 아니라 간극입니다.

한때 두때 반때 말이죠.

 

여자가 해산하여 아이를 낳는데 있어서

붉은 용이 이 아이를 낳기까지 기다렸던 겁니다.

죽이고자 말이죠.

그런데 도망쳐서 광야에 숨어버립니다.

그 광야에서 머무는 기간인데

바로 주의 인자하심 이라는 간극이 되는 겁니다.

 

왜 도망을 쳤을까요?

왜냐하면 구지 도망칠 이유가 없이

이미 승리자로 태어난거다 말이죠.

그럼 그 승리를 그냥 바로 나타내 보이시면 되거든요.

그런데 숨어버립니다.

광야로 말이죠.

 

자신의 승리자 되심을 감추이신다 말이죠.

 

왜 감추실까요?

그래서 왜 광야로 도망치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아기를 해산한 여자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이 여자는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하늘에 속한 여자 곧 자유하는 자 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어느 정도로 자유하냐 하면

아빠 없이 아이를 낳는 겁니다.

 

이런 자유는 인간이 따라할 수가 없어요

역사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의 실상을 말하기 위함이지

그림자입니다.

예고편이다 말이죠.

진짜 영화 전체의 상영은 오늘 본문이다 말이죠.

 

그런데 구박받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아이가 말이죠.

이 아이를 중심으로 인해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럼 자유자 하늘에 속했기에 이미 승리한 채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승리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숨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간극 속에 한때 두때 반때에 거하게 됩니다.

주의 인자하심 속에 거하게 됩니다.

 

마침 곧 있으면 시편 141편을 올릴려고 하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시편 초반 즉 한 1편에서 한 70? 아니 거의 반 125편까지?

아니면 3분의 1 정도까지의 시편 100? 정도까지

다윗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후반에 이제 시편 141편 정도 쯤 되면 말이죠.

서서히 영화가 끝부분으로 마무리 단계가 되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시편 초반부처럼 살려달라고 외친다 말이죠.

 

도대체 언제까지 부르짖는 것일까요?

 

이것을 어느 유명 목사의 시편 141편 설교내용을 보고 느꼈는데

그 목사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안 들었나 보더라구요

 

탄원시 인데 왜 아직까지 그런가 하는 점에 의문점을 안 가지더군요.

 

시편 초반에 그렇게 부르짖는 것을 또 다시 반복하는데 있어서

초반과 이제 마무리 되어가는 후반과의 차이점을

그 목사는 차이점 없이 그냥 살려주세요 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봤습니다.

 

덕분에 차이점이 뭔가를 생각해 봤다 말이죠.

그 목사는 초반부나 후반부나 똑같은 탄원시로만 보던데

설마 같겠나 싶어 달리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시편 초반부의 살려주세요 라고 부르짖음과

후반부의 부르짖음의 차이가 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일천이백육십일 이라는 삼년반 이라는 기간

곧 고난의 기간이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은 얼굴 찡그리고

카톨릭처럼 계단을 억수로 많이 만들어서

무릎으로 올라가는 수행? 도닦기? 성화인내 뭐 그런거다 말이죠.

수녀들처럼 속세를 끊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불교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는 뭐 그런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파서 난리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속세의 시간에 빼앗기지 않고

산속 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 살면서 자아성찰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제도가 되어 오히려 성추행 등등 더 심해지는 겁니다.

티벳쪽에 여자를 단 한번도 못 보고 거기서 태어나서 죽는 땡중들도
남아 성추행이 얼마나 심한지
얼마전의 카톨릭 제도 자체가 남아동 성추행이 심한 것을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 (2016) 에서 나왔듯이

제어 금지 할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심해진다는 겁니다.

금지가 오히려 더 부추긴다 말이죠.

 

그럼 이 삼년반은 뭔가? 시간도 공간도 아니다 말이죠.

주님 쪽에서 죄악을 제거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쪽에서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다말처럼 확보 획득하시는 겁니다.

십계명 깨어진 두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포획하시는 겁니다.

이 세가지 물증이 뭔데?

마귀가 침범 할 수가 없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마귀는 어리석다 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거든요

마귀는 거리끼는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걸림돌로 여기거든요.

 

이 세가지가 바로 주의 인자하심 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님의 피 이다는 겁니다.

이 피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이 피가 바로 세상사람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거든요.

이 속에 피신 시키는 겁니다. 뒤로 빼돌리는 것이다 말이죠.

 

(2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개역)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개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개역)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개역)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곧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마귀 보란 듯이

코 앞에서

상을 베풀고

기름으로 힐몬산에서 내려오는 이슬처럼 온 몸에 발라 내 몸이 다 젓히듯이 내 잔이 넘칠정도인데

 

이것이 나의 평생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주의 성소에 들어가서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삼년반 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사건

한때 두때 반때 라는 사건은

주의 인자하심 속으로 피하도록 하시는데 있어서

 

왜 처음에는 살려주세요 라고 했고

시편 후반부의 살려주세요는

저는 일종의 연기라고 봅니다.

연기

 

캬 또 무슨 소리 할려고 이상하게 말을 펼치는가?

이것이 단절인데

성화론자들의 개방과 정반대인데

그래야 그들은 교인들에게 개방을 이야기 해야 밥 빌어 먹고 살수 있으니까 말이죠.

 

왜 단절인고 하니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요

거리끼는 걸림돌인 이유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냐 하면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로부터 창녀 연기를 해서라도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확보 하고자

불의한 청지기처럼 말세 곧 종말을 심판을 대비하냐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연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실제로 당했는데 그래서 살려달라고 아침에도 울고 밤낮으로 울었는데

이제 후반부에는 연기를 하는 겁니다.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자 말이죠.

그래서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 간극 이 단절을 만들려고

곧 주의 인자하심 곧 주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구원받을자 없도록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특징은 피만 자랑한다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자가 때려죽어도 못하는 이 십자가의 피를 말이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거든요.

 

질문하신 분이 앞 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시니까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 라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말이죠.

헹함의 문제로 말이죠.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기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 아입니까

그러니 베드로는 인간을 보고 개방적으로 나 같은 경험으로 해 봐라 가 아니라

단절적으로 너도 한번 당해 봐라 라는 식으로

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 라는 명령어를 제시하는 겁니다.

금기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부추긴다 말이죠.

그럼 뻔히 육신의 정욕을 못 이겨서 주여 안됩니다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베드로 자신과 똑같은 짖을 할꺼 아니냐 말이죠.

그럼 또 사탄아 물러가 가라 라는 예수님으로부터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욕을 먹는다 말이죠.

그런 과거의 경험이 있다면

너는 그런 나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라고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할텐데

베드로는 정반대로 그런 과거의 수치스러운 경험을 삭제를 할 생각은커녕

너도 함 격어봐 라는 식으로 오히려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자 하는 뻔뻔스러움과 당당함과 여유가 넘치는 겁니다.

 

그거 따라한다고 구원이라는 보장이 있는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지도 못 지킨 것을 남보고 지키라고 떡 던지면서

우리를 물에 확 떠밀어 빠뜨리는 겁니다.

주님이 건지시면 긍휼 곧 주의 인자하심 속으로 들어가는 자고

주님이 건지지 않으면 심판 받아 마땅하다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물에 확 등떠밀어 버리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죽일수 밖에요.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요나선지자가 주님으로부터 설복 당할때에

이 간극 이 요나의 표적을 요나 본인이 거부했던 그 사건을 격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 우리 백성 이스라엘은 안 돌이키시고

저 개같은 니느웨 백성을 돌이키시냐고

그렇게 따지다가 한 방 얻어터지고 나서는

본인이 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그 공격 무기가 바로 거리끼는 십자가 곧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요나는 격어야만 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고

왜 니느웨 백성이 구원 받을 수 밖에 없는지를

처음에는 오독 했는데

이제 그 다음에서는 정독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이의 갭을 바로 오늘 삼년 반이라는 간극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시편도 처음에는 오독한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독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부르짖음이

처음 때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이제 연기를 하면서

이 세가지 물증 이 삼년반이라는 간극을 벌리더라 말이죠.

전에는 그것이 안 보였는데

이제는 보여서 본인이 그 간극을 막 만들어 내더라 말이죠.

 

그래서 확 등떠밀어 물에 막 빠뜨리는 것이 바로 선지자의 일이다 말이죠.

단절이지요. 물에 빠뜨려 죽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 보세요 단절을 커녕 물에 빠진자를 건져 줄려고 환장하잖아요.

성령이 필요가 없어

 

보통 육의 사고방식인 모든 종교가 외치는 물에 빠진자를 건져라 라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의 일은 확 막 기냥 등떠밀어서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다윗 본인이 처음에 그렇게 누구한테 등 떠밀려서 물에 빠졌다 말이죠.

그런데 원인 없이 건짐을 받았다 말입니다.

그럼 보통 같으면 딴 사람이 그렇게 당하면 나는 도와줘야지 개방 열린사고방식 뭐 이런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단절입니다. 그래서 너도 이 원인 없는 결과 누리라고

다윗은 선지자로써 이스라엘을 출애굽사건을 강제소환시켜서 역주행으로

출애굽사건의 배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아니 왜요?

주의 인자하심을 보라 라는 겁니다.

이 간극을 반복하겠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 민족 국가를 물에 확 등떠밀어 빠뜨리는 겁니다.

그럼 원수가 등장하죠

곧 애굽이죠.

그리고 그 원수 목전에서 잔치를 벌리죠. 곧 유월절 어린양의 살진소 잡기 잔치죠.

그 출애굽 사건의 실상이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이 오늘 계시록의 내용을 출애굽기에 기록해 보세요

아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억수로 억수로 봐줘서 낮추셔서 낮아지셨듯이

애굽도 그림 영화장면처럼 보여주시고

홍해도 보여주시고

광야도 보여주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법궤 언약박스도 보여주시는

사물을 직접 보여줬지만 역사 속에서 말이죠. 물론 그림자죠.

묵시의 세계의 진짜 실상은 오늘 본문이다 말이죠.

그러니 거꾸로 미래에서 역사 속으로 침범해서 나타난 사선이 출애굽이였듯이

그 출애굽의 진짜 실상은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모세가 태어날때에 두 살 밑으로 아기가 다 죽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때에 두 살 밑으로 아기가 다 죽는 그 장면들이

이것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육체의 아빠 없이 태어난 아기가 졸지에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을 가르는 표적 기준이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원수 마귀이 이 아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기가 피해요

여자가 아기를 낳고 광야로 피하더라 말이죠.

마귀가 설사 그 죽음의 장소에 설마 피했겠어 라고

태풍의 눈에 피할 리가 없다고 봤다 말이죠.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호랑이 굴에 숨을 리가 말이죠.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잖아요.

 

아무튼 이미 승리한 채로 등장한 아기인데

왜 숨길까요?

이것이 긍휼입니다.

자신의 승리를 혼자 다 차지해도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의 감격을 함께 누리자고

나누어 주시는 그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는 이 삼일이라는 간극 곧 주의 인자하심 속에 숨겨진채로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담보 잡힘으로써

원수에게서가 아닌

주님이 이 죄악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원수에게는 수치로

다윗에게는 면류관으로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으로

성령의 놀라운 탄식 속에 집어 넣음으로써

주의 인자하심을 반복케 하시는 거다 말이죠.

 

우는 자가 복이 있도다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주의 인자하심 속에 피신 시키시는 겁니다.

자신이 흘리신 피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말이죠.

 

이것이 주의 집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다윗이 죄사함을 받았듯이

다윗은 연기를 하는 겁니다.

이제는 마귀 귀에다 대고 우는 겁니다.

슬피 슬피 우는 겁니다.

주여 구원해 주소서 라고 말이죠.

주의 눈물을 담아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그 눈물에 이스라엘을 확 등떠밀어 물에 빠뜨리고서

누가 저 죽어가는 자를 건져내랴 라고

출애굽 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 이라는 삼일의 간극

곧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이 붉은 큰 용이 두 살 밑으로의 아기를 다 죽였는데

이 하나 만큼은 못 잡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 밖으로 쫏겨다니는 나그네 신세 속에서

이스라엘 왕으로써 세워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태양을 입은 여자의 모습처럼 말이죠.

다윗은 아비 없이 태어난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이듯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써 또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이 원수 문제를 해결 하신 분이다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 왕입니다.

결국 다윗은 해결 못했다는 것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원수 문제 해결로 인한 혜택을 입은 자로써 증거하고자

선지자로써 확 등 떠밀어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편 141편을 지금 이 내용으로 해도 되겠네요 ㅋㅋㅋ

겹치도록 하죠 뭐

 

(12:1, 개역)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곧 원수 잡는 자 이다는 겁니다.

원수를 어떻게 잡을까요?

 

마귀가 침범할 수 없는 이 삼일의 간극에서

곧 주의 고난 주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주님이 대신 눈물을 흘리셔야 했던

그 십자가의 고난이 이 마귀의 실체를 들통내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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