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피 중심의 그리스도 나라 (계 11:15-19)

 

(11:15, 개역)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1:16, 개역)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1:17, 개역)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1:18, 개역)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1:19, 개역)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시편 133편에서

거룩 곧 기름이 위에서 내려오는데

이 기름의 기능이 바로 분리입니다.

단절입니다.

 

즉 차이입니다.

인간의 구원관은 정반대로 차이성이나 또는 어떤 기능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 개념입니다.

그래서 같은 존재가 되고자 동일성을 추구합니다.

차이성이 아니라 기능이 아니라 말이죠.

 

즉 내 존재가 먼저 있고 그 나의 존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자

그 천국의 조건을 갖추는 식입니다.

천국도 존재로 보는 거죠,

 

천국을 기능으로 본다면 천국이 어떤 일을 나에게 벌리는가를 볼텐데

존재로 보니까 천국은 멍청하게 가만히 있고

그 천국에 들어가고자 나의 존재는 조건을 갖출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이런 식입니다.

이데아죠.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불교처럼 말이죠.

 

그러나 바로 이런 인간의 천국관을 염두하고서

그 반대로 증거되는 것이 성경의 그리스도 나라는

기능 곧 차이성이라서

사건 개념입니다.

즉 시간이 거꾸로입니다.

미래에서 쳐들어와서 현재를 구성하니까

존재의 실천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존재를 무시하고

기능을 펼치는데 있어서

그 기능은 사건 오직 십자가 사건을 펼치는데 있어서

차이를 두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서 천국에 가고자 구원관을 펼치는 모든 인간의 속성을

다리걸어 실족케 만드는 것이 오히려 천국이 되는 것이다는 겁니다.

 

천국이가 멍청하게 있고 나는 미래에 죽어서 가는 곳 곧 장소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죽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멍청한 천국이 아니라

 

천국 자체가 미래에서 현재를 비집꼬 쳐들어 오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찢어지고 공간이 찢어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유기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유기가 바로 창세전에 유일하게 예정된 유기이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죠.

 

 

그러니 사건은 간극을 만드는 겁니다.

버림 받았는데 오히려 머릿돌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버림 받지 않은 자는 말을 말아라 라는 겁니다.

사건이 없으니까

피 뿌리는 사건이 없으니까

 

천국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천국이 이 언약궤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 언약궤에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며느리 다말처럼

시아버지 유다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릴정도로

도장 도장끈 지판이를 담보물로 획득했듯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것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원망한 그 증거로 획득한

세가지 물건이 있는 겁니다.

이 물건으로 주님은 인간과 약속했다는 겁니다.

어떻게?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담겨져 있는데

이거 일체 안 볼게 라고

뚜껑을 덮어버리고

피를 뿌렸다는 겁니다.

 

아무리 마귀가 베드로 너 예수님 세 번 부인했지

이 배신자야 라고 이 물증 세가지를 포획해도

정작 예수님께서 일체 묻지 않겠다고 뚜껑 덮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만 사랑할수 있겠냐고 물으신다 말이죠.

사실 그 물증도 예수님이 미리 언급한 겁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세 번 부인 할꺼다 라고 말이죠.

마귀 들으랍시고 하신 거다 말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그래도 너를 세 번 꽃단장 시킬 거야 라는 의미이거든요.

마귀는 그것도 모르고 결혼의 의미에 금가락지 신발 좋은 옷의 시기 질투하는 자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살진소를 잡는 잔치날에 벌어지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베드로야 너 나 사랑하니?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진짜가?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신다 아인겨.

정말 진짜제?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더 더 잘 아신다 아입니까

 

베드로가 마귀의 밀까부듯이 까부는 초정밀 조사에서 숨을수 없을 정도로 포로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주님의 용서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과잉되게 용서를 베푸신다는 겁니다.

그 용서에서 숨을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겁니다.

 

마귀가 밀까부듯이 따지는 그 조건 보다 더 더 더

더 나은 예수님 자신의 일방적인 자기 목숨 내어주심 때문에

그 목숨 내어주신 피의 기능을 과시하고 싶어서

가장 적절한 베드로

마귀에게 포로된 그 베드로에게 퍼붓는 겁니다.

 

얼마나 타이밍이 기가 막힙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기가막히게 타이밍 죽이게 나타나는 겁니다.

즉 마귀들은 곧 막살지 않는 자들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잡고자 함이 아니였다 말이죠.

저 지나가는 예수님에게

메시아 조건을 갖추는지 보자 라는 겁니다.

 

조건 맞춰주면 안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불법을 저지르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오로지 십자가의 피

곧 예정된 것은 유기 곧 버림 밖에 없다 했지요.

그 버림이 십자가이거든요.

 

이 십자가 만큼은 마귀가 자신만만한게 이율배반적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순이 된다는 겁니다.

율법을 어긴 자를 어떻게 구원할수 있겠냐 라는 겁니다.

 

이 싸움에

이 둘 곧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에

우리가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동원이 된다 말이죠.

 

즉 마귀는 의인을 부르러 온 자가 구원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참 믿음 디기 좋지요.

디기 복음적이지 않나요?

성화론자들이 다 이런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반발자로

마귀는 배치되는 겁니다.

 

즉 언약궤에 담긴 그 물증을

그 세가지 물증을 통해서 묻고 따지고 하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둘의 싸움이다는 겁니다.

 

이 땅은 마귀가 바로 저 법칙을 주장함으로써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 법칙을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지진이지요.

번개도 우박도 말이죠.

 

요즘 비가 안오니까

기우제를 드리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서 보게 되는데

그렇게 신이 화났는가 본데

이 정성을 받고 화 풀어라 라고 드리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반대입니다.

이 땅은 원래 망해도 상관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저주 받아도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저런 천국관을 가지고 있으니

마귀로부터 세뇌 당해서 저런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니

지옥 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지옥 가도 싸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궤 중심의 천국은 오로지 접촉점은 십자가의 피 뿐이니까

다른 모든 것을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것이 번개 지진 우박이다 말이죠.

막 흔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흔들리는 땅을 보시면

주께서 보좌에서 좌정하고 운행하신다는 증거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감사가 넘치는 거다 말이죠.

오늘은 또 무슨 은혜를 주실려고?

아 비 안주시는 은혜

감사합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

 

즉 이미 미래 완료에서 펼치는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인간은 죄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안 흔들릴자 있겠냐 말이죠.

주님께서 광야같은 인생에서 물없는 곳 양식 없는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하심에 있어서

원망 안 할 인간이 과연 있겠냐 말이죠.

 

마귀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니깐요

그러니 마귀는 아는 겁니다.

원망 안 할 인간이 없다는 것을

세 번 부인 안 할 인간이 없다는 것을

 

그러니 욥아 원망했뿌라 라고

욥을 놓고서 마귀는 예수님과 내기를 하는 겁니다.

원망했제? 게임 끝 인줄 알았는데

 

마귀는 욥을 확실히 잡았는데 욥을 이겼지만 예수님을 못 이기는 겁니다.

마귀는 베드로를 확실히 잡았는데 베드로를 이겼지만 예수님을 못 이기니까

소용 없는 헛짖만 한 거다 말이죠.

 

마구에게서의 문제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베드로와 내기를 한 적 없다 말이죠.

예수님 하고 게임했지 베드로 이긴들 무슨 소용있냐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실패 하는 것이 도리어 은혜입니다.

더욱 더 더 낮게 실패하자 말이죠.

 

이 둘의 싸움을 보는 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반칙을 벌린다는 겁니다.

베드로를 미끼로 물지 않으면 될텐데

미끼를 안 무는 마귀를 본적이 없어

 

예수님의 반칙에 안 말려드는 마귀가 없다니깐요

베드로 너 나 세 번 부인할 줄 알고 그럴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십자가의 피 라는 겁니다.

 

그럴줄 알고 이삭 제물 대신 여호와 이레 준비해둔게 있다는 겁니다.

그럼 왜 이 짖을 하느냐?

그 사이 간극 곧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가지 물증을 잡은 자는 마귀가 아니라

예수님이다는 거죠.

 

예수님이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잡은 겁니다.

왜 그 위에 피 뿌릴려고

 

그것도 모르고 마귀는 뒷 북 치는 겁니다.

항상 그래요

 

그렇다면 마귀는 누구에게 안색이 변하여 분노케 될까요?

 

그럴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십자가

즉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유일한 예정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 버림 유기인 십자가의 피 라는 겁니다.

그것을 필살기 흙기사 감추어둔 히든 카드로 쓰시는 겁니다.

 

에이 반칙 순 엉터리

이게 마귀가 무조건 처음부터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을 한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지는 이 게임에 마귀는 말려들까요?

마귀의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고

둘 로 아기를 갈라서 둘 에게 나누어 주자 라는 겁니다.

그 판결을 마침맞게 솔로몬의 지혜가 펼치고 있으니

물개박수를 치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은 마귀를 승리케 해주는 듯이 하다가

확 꺽어버리는 대반전을 펼치는데 있어서

 

히든 카드 곧 십자가의 피를

유일한 예정인 바로 유기 버림받음을 히든카드로 내미시는 겁니다.

 

그래 내가 대신 버림 받을께 라고 말이죠.

 

졸지에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건드리게 되는 꼴이 된 겁니다.

 

이것은 베니스 상인이라는 영화에서처럼

살점을 떼어가긴 가는데 피를 흘리지 않고 살점을 떼어가야 하니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도리어 예수님의 지혜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말이죠.

 

솔로몬의 지혜가 바로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음에 있어서

무조건 처음부터 승리였고

실패했다 손 치더라고 이미 용서 받기로 되어 있는 지혜였기에

여기에 더더욱 풍성케 함에 있어서 마귀가 동원이 되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십자가를 더더욱 높이는데 동원이 된다 말이죠.

마치 애굽왕과 애굽 군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더욱 높이는데 있어서

빛을 빛 다움의 백배 천배 만배나 빛나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으로 동원이 되듯이 말이죠.

대 낮에 빛을 비추이면 구별이 안되거든요.

캄캄한 칠흙같은 어두운 밤일수록 빛은 아주 아주 영롱하게 빛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정된 것은 딱 하나 밖에 없다 말이죠.

유기입니다.

 

버림받음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죽음에 뛰어드는 자기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만 예정된 겁니다.

 

기존의 예정론이 다 엉터리가 되는 거죠.

십자가 라는 유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이 예정 되었다면

우리는 백부당 만부당 십자가에 내가 달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 천국 ~~~~~

~~~~~~ ~~~~ 소는 누가 키우냐 말이죠.

 

창세전에 예정 된 것은 딱 하나 뿐이다 말이죠.

유기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지옥이다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당연히 지옥입니다.

 

이 법칙을 마귀는 고수하는 겁니다.

그래 모든 인간은 다 지옥이야 맞아

그런데 유기는 유기인데 십자가라는 유기입니다.

이 비밀은 마귀는 못 푸는 겁니다.

 

마귀가 멍청이가 아니거든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법칙을 예수님께서 깨는 겁니다.

불법을 저지르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불법이 율법의 완성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율법 실천자가 없는데 말이죠.

 

완성이 되어버리니까 마귀도 군말 못하는 겁니다.

 

그 불법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흘리심이다는 거죠.

 

자 충격적인 것 두가지 말했습니다.

예정은 유기만 예정 되었다 라는 것

불법이 율법의 완성이다는 것

 

이 둘 곧 유기와 버림이지요. 불법이 바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이다는 겁니다.

유기와 불법은 곧 하나죠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에 발린 피입니다.

이 언약궤 중심으로 천국이 돌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것들은 배척하고 단절시키는 겁니다.

 

이 피 가지고 와라 라는 겁니다.

 

이 피 없으면 통과 못한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들어올려고 하냐 말이죠.

 

결국 오늘 본문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장면인데

첫 번째 두 번째 점점 불면서

한꺼플 두꺼플 그 속의 내용을 하나 하나 바깥으로 내 뱉으면서

그 속내용이 하나 하나 펼쳐지면서 바깥으로 나오는 드디어 밝혀지는겁니다

 

사도요한이 몸에 참 좋은데 뭐라 말할 수가 없는데

인을 뗄자가 없어서 울었다 말이죠.

빨리 빨리 한꺼플 두꺼플 그 속 알맹이를 개봉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열쇠를 열자가 없었는데

그래서 울었는데

드디어 개봉 박두 하게 되니 얼마나 감개무량할까요

 

결국 어린양의 피 중심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이 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흔들어 버리는 지진이 일어나는 거다 말이죠.

 

은혜 중심으로 창조한 세계인데

선악의 법칙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진멸하겠다는 것이

한꺼플 두꺼플 벗기면서 그 속의 내막인

이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펼친다 말이죠.

 

그러니 마치 이것은 무에서 유로 창조한 그때의 모습과 같다 말이죠.

결국 주님이 뭐가 아쉬워서 지옥같은 지구에 집착하겠냐 말이죠.

지옥은 바로 저런 선악의 법칙을 고수하는 자들이 고집하는 세계인데

즉 죄 죠

죄가 있는 곳은 지옥이다 말이죠.

그러니 의인이 없는 지옥에서 천국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옥을 진멸한다 말이죠.

이것이 언약의 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처음 창조때처럼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이

처음되시고 나중 되시는 예수님이 창조주로쎠 완성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피 중심이 아닌 것은 다 배제되는 겁니다.

 

결국 그 피를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이 되는게 아니라

사랑하시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펼쳐지기에

피 마음대로입니다.

 

피가 피 스스로 자신의 피를 바르고 싶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피의 가치를 눈치채서 임금 삼고자 한다고 해서 임금 되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가치를 위해 임금 삼고자 피 믿어주겠다 는 것 밖에 안되는 거죠.

피 중심의 언약과 무관한 겁니다.

 

오로지 자신의 피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피의 증상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탕자 베드로 그런 인간들 말입니다.

인간 말쫑들 말입니다.

 

오히려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은 바리새인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저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자에게는

피는 무관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

곧 구약의 어린양의 피는 우리에게서 기여이 기여이 세가지 물증을 담아내어서

피를 뿌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깨에 메고 세상은 모든 제일 강한 군대들과 싸웁니다.

총과 칼도 없이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만 메고서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실패한 채로 싸우고 있습니다.

오직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더 잘아십니다 라고

이제는 육의 싸움이 아닌 영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만 외친다 말이죠.

독자적이 아니라

주님이 물으시고

너 날 사랑하니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 합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이 기능입니다. 관계입니다.

존재는 독자적이라서 이 관계성 곧 사랑에

무조건 무릎 꿇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백날 베드로 잡아봐라 말이죠.

소용이 없는 의문의 짖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더 이상 이것 보다 더 또렷한게 없기 때문에

누가 나를 꾀는지를 봐야 합니다.

 

십자가가 아닌 것을 가지고 들이대는자

십자가 비스무리 한 것을 가지고 설쳐대는 자를 말이죠.

 

그들과의 차이성을 벌리시는 것이 바로 언약 중심의 그리스도의 피 천국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 지옥에서 건지시니 말이죠.

 

백번 만번 지옥 가도 마땅한

지금 당장 죽이셔도 할 말 없는 자인데

원인 없이

아무 연고 없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피의 공로로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 많은지

족히 비교도 안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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