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바닷가에 서서 부르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 15: 1- 8)

 

일곱천사와 일곱 재앙 그리고 그 재앙 속에서의 어린양 노래

 

(15:1, 개역)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2, 개역)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3, 개역)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15:4, 개역)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15:5, 개역)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15:6, 개역)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5:7, 개역)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15:8, 개역)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시편에서 다윗은 자꾸 출애굽을 외칩니다.

이 원수로부터 건져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애굽 이야기는 먼 옛날 이야기이다는 거죠.
십자가 고만 캐라 마이무따 아이가 이제는 부활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애굽이 바로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출 애굽하자 출 이스라엘 하자 라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다윗이 교회를 탈출하자 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즉 이말은 우리는 이 땅에 머무르는 자가 아니고

떠나야 한다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을 기초로 해서 참선지자들은 주의 자녀를 물에 빠뜨립니다.

등떠밀어 확 빠뜨려서 왜 건너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어떤 민족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들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만큼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다고 본향이 따로 있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머물러 버립니다.

 

땅에 정착 아니 장착해서 전혀 떠날 필요성을 못 느끼면서 살아가버리니까

그것을 알고 다윗이 떠나자 라고 외치니 듣기 싫은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떠나야 해 라고 출애굽의 상황을 재현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일곱 재앙이 펼쳐짐과 동시에

홍해를 건너는 유리바다를 통과하는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어린양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노래란 노래 악보가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그 노래를 악보보고 박자맞추어 노래한다 말이죠.

그러니 노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대상물이 되고 노래의 주체는 인간이 되겠지요.

입술에서 나오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윗이 노래하는 겁니다.

노래 곧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먼저 있고

그 노래에 맞추어서 이스라엘은 유리바다를 건너면서 이 노래를 아니 부르고는 못 배기도록

노래가 이스라엘을 장악해 버리는 겁니다.

 

노래가 주체가 되어버려서 그 가사의 내용대로 만들어 버리니까

이스라엘은 유리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여기서 일곱 재앙이라는 완벽하게 죄악을 심판하는 거룩이

저쪽에서는 심판이 작용하지만 그 심판을 통과 못하지만

떠나야 하는 툴툴 털어버려야 할 곳 말이죠.

이쪽 떠나게 됨을 당하는 쪽은 그 심판 속에서도 불이 붙지 않는 긍휼하심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오히려 불 속에서 예수님과 곧 어린양과 춤을 추면서

홍해를 건너듯이 유리바다를 노래하면서 건너는 겁니다.

 

바로 긍휼히 여겨주심이라는 어린양의 피 발라주심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그들 모두가 선지자가 된 겁니다.

떠나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떠날 뿐이겠습니까

들어가야 함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말이죠.

그러니 자력으로 이 광야를 통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일부러 못 통과하는 불 심판 물속 죽음속을 의도적으로 붙이셔서

이 불도 심판도 물도 죽음도 무사히 통과 함은 오로지 어린양의 피 때문이라고

노래하는 자들로 만드심 때문이기에

아니 노래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 모세의 노래가 아니죠.

구약에서 보면 미리암의 노래 아닙니까?

주인공이 바뀐거 아닙니까

아니지요

모세의 노래죠

미리암은 그 증상물입니다.

모세의 노래가 덮쳐졌으니 말이죠.

그럼 모세의 노래도 아닙니다.

바로 어린양 이지요

그러니 같은 인간이라고 동질성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도저히 동질성을 가질수 없는 이질적인 사건이다는 겁니다.

노래는 사건입니다.

실지로 홍해를 건너듯이 죽음을 통과하는 사건이 덮쳐진 자는

이 어린양의 노래 곧 십자가를 노래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 십자가의 용서가 덮쳐졌기에

그렇다면 노래하는 주체는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니까 말이죠.

그 노래 라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 자체가 노래 자체로써

우리에게 덮쳐지면 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아니 부르고는 못 배기고

그 사건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듯이 광야를 통과하고 죽음을 통과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전혀 그런 것과 전혀 맞지 않은 오히려 정반대인

겁쟁이 중에 겁쟁이고 무식한자 중에 무식한 자이고

죄인 중의 괴수며 비천한 자 중에 비천한 자이기에

전혀 안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차라리 애굽군사처럼 용맹하고 아이언맨 배트맨 슈퍼맨을 동원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통과하고 죽음을 통과하면

주님은 흥행 대박 날꺼다 말이죠.

그런데 왜 정반대로 할까요?

정의롭지도 않고

용맹하지도 않은 자

누가 봐도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자에게

왜 이런 일들을 펼치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노래는 바로 이런 자들을 세워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체적 보편성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의 밥상에서 긍휼을 베푸신다 말이죠.

 

애굽이 뭡니까?

지상천국 아닙니까?

다들 전쟁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더라도 저 지상천국인 애굽에서 살기를 원한다 말이죠.

모든 인간들의 최종 목적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애굽을, 저 지상천국을 떠나라굽쇼?

어디 갈지도 모르고 떠나라굽쇼?

그 애굽 하루 아침에 신기루 같이 일곱천사의 일곱재앙 곧 완벽하게 탈탈탈 털어버리는 그 재앙으로 사라지는 안개로 허무로 만들어버리겠다굽쇼?

 

그래서 이 세상 어디에도 지상천국이 없도록

그래서 늘 떠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세의 노래를 부르도록 해 주겠다굽쇼?

과연 이 모세의 노래를 부르고파 할까요?

 

절대로 부르기 싫어합니다.

그렇게 좋았던 지상천국의 애굽이 날 죽일려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그 지상천국이였던 애굽이

죽일려고 달려드니까 졸지에 살려달라고 외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상천국의 관광가이드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이 강퍅해져서 공격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말이죠.

지상천국건설을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죠.

아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을 마치 모세가 애굽왕 바로왕을 깨작 깨작 긁어대기 시작하니까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내 백성 내놔라 하니까

아니 누가 백성을 주겠습니까?

노예를 내어주면 피라미드 제일 하층구조가 싹 다 빠져버리면

그 지상천국의 삼각형 구조도 졸지에 무너진다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나라의 대통령도, 왕도 여러분 떠나야 합니다 라고 외치는 왕이 없어요

아무도 외치지 않으면 그야말로 참 좋은데

 

하필이면 떠납시다 라고 외치는 왕이 졸지에 나타나버린 겁니다.

다윗입니다.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이 이스라엘을 떠나자 라고 외치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죠.

 

오늘날 목사가 자신의 교회에서 그 교회의 목사로써 여러분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라고 외치면

저 목사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되었군 이라고 할꺼다 말이죠.

안그래도 헌금이 나오질 않아서 교회경영이 위태 위태 한데

저런 소리했다가는 장로들이 그 목사 놔두겠습니까?

짤라버리지

헌금 많이 내도록 유도하는 목사로 새로 교체 할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떠납시다 라고 외치는 목사는 없다 말이죠.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라는 진짜 현실에서는

저런 가짜교회들의 모습들이 거짓이라고 밝혀져 있고

저런 것을 뻔히 반복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 생태계에서 빠져나올 생각 조차 못할 정도로

세뇌 되어 있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한 마귀가 잠시 떠난뒤에

그들의 모습들이

가장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나듯이 말이죠.

 

인간은 철저하게 갇혔습니다.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말이죠.

누가 이런 거짓선지자들로부터 빼내주시겠습니까?

함량미달의 의문의 반복을 멈추고 빼내줄수 있는 것은

완벽한 심판을 행하는 완벽한 거룩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일곱 재앙입니다.

이 일곱 재앙이 아니면 저 원수들이 무슨 수로 허물어 지겠습니까?

무슨 수로 저 의문의 함량미달임을 볼수 있겠습니까?

다들 저 광면한 천사한테 속아서 마약에 취해

지상낙원이라고 애굽드림 어메리칸드림을 꿈꾸면서 떠날 생각 빠져나올 생각 조차도 못하는데

 

빠져나오면 또 뭐합니까 들어갈 곳도 없이 떠돌다가 죽는데

 

철저하게 갇혀버렸다는 겁니다.

 

그 갇힌 상황 조차도 모르도록 되어 있는 매트릭스이다 말이죠.

 

그래서 빨간약 어린양의 피만 믿고 다윗이 이 이스라엘이라는 허구에서 빠져나와서

이미 완료된 새이스라엘로 떠나자 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 출이스라엘 해서 입새이스라엘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모세가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약속의 땅을 외쳤을때에

이스라엘 조차도 아무도 안 믿었듯이

다윗이 그 아무도 안 믿겨지는 소리를 외치는 겁니다.

역시나 아무도 못 믿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열재앙이였듯이 일곱재앙 곧 완벽하게 작살내는 일곱을 퍼부어서 초토화 시켜야

그제서야 떠나듯이

다윗의 언약에 기초한 참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쫄딱 망하게 하니까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유리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그래서 노래 부르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나올 생각 떠날생각 아무도 없어요.

누가 교회를 탈출하고자 하는 자가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새노래 때문에

어린양의 노래 때문에

나와야 하고

모세의 노래를 불러야 하듯이

유리바다를 건너면서 어린양의 노래

곧 십자가를 노래하도록 태어났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였다 말이죠.

 

인간이 믿음을 부여하는 그 지상천국이라는 애굽을, 천국을 투영한 교회처럼,

출애굽 떠나듯이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다 박살내면서 유리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오로지 어린양의 피로 그 피만 노래하면서

그 피에 꼿힘을 당해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 사건 한쪽은 심판이고 한 쪽은 어린양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리고

 

이 엽기적인 상황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겁니다.
임금님이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 비유처럼 말이죠
.

 

종말파티 ~~~~

신나는 어린양의 피 잔치를 벌리면서 노래부르면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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