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어질까봐 두려워 벌벌 떠는 새노래 (시편 149)

 

탈출하는 새노래, 도망치는 새노래, 싫어버린바 된 새노래, 완악케 만드는 새노래(십자가)

14-149 도망치는 새노래 (시편 149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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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49:1, 개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149:2, 개역)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지어다

(149:3, 개역)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4, 개역)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5, 개역)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149:6, 개역)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149:7, 개역)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149:8, 개역)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149:9, 개역)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149:1, 새번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 앞에서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49:2, 새번역) 이스라엘아, 창조주를 모시고 기뻐하여라. 시온의 주민아, 너희의 임금님을 모시고 큰소리로 즐거워하여라.

(149:3, 새번역)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고 수금을 타면서 노래하여라.

(149:4, 새번역)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눌림받는 약한 사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

(149:5, 새번역) 성도들아, 이 영광을 크게 기뻐하여라. 잠자리에 들어서도 기뻐하며 노래하여라.

(149:6, 새번역)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께 드릴 찬양이 가득하고, 그 손에는 두 날을 가진 칼이 들려 있어,

(149:7, 새번역) 뭇 나라에게 복수하고, 뭇 민족을 철저히 심판한다.

(149:8, 새번역) 그들의 왕들을 족쇄로 채우고, 고관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149:9, 새번역) 기록된 판결문대로 처형할 것이니, 이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할렐루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인이라는 의미가 성경에서는 아주 특이하게 나타납니다.

즉 주로 홀로 백성을 규정하지

백성이 주인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주 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인은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데 있어서

즉 흩으셨다가 다시 모으시는데 있어서

반드시 주 라는 기능이 어떻게 작용케 되는고 하니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삼일만에 다시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 라고 합니다.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주라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어떤 기능이 있는고 하니

바로 너희가 죽였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죽인

녀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가 주 라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 주가 되신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즉 앞의 너희가 했던 일과의 정반대입니다.

너희 라는 우리가

남이 아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다 라는 의미에서 주의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말이죠.

 

이것이 존재 이전의 기능으로써 주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가능한 행함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믿음 조차도 불가능한 것이 믿음입니다.

즉 도저히 말도 안되는 믿을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말이죠.

그러니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다 가능하다 말이죠.

그렇기에 존재는 다 탈락입니다.

동시에 존재는 자신의 존재성을 투영 반영 투사를 하기 때문에

자기 믿음을 집어넣어서 자기 투영 투사를 해서 믿기 때문에

자기 믿음을 자기가 믿는 겁니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바로 우상을 꺠뜨리는 것이 바로 주 라는 기능입니다.

존재를 깨는 것이 바로 기능이다 말이죠.

 

그래서 주는 반드시 우리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기능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 정도로 믿음이다는 거죠. 믿음의 주 이시거든요.

 

믿음의 주란 소위 믿는자들로부터 버림 받는 주 가 믿음의 주입니다.

안믿는자들로부터 버림받는게 아니다 말이죠.

반드시 믿는자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믿음의 주 라는 기능입니다.

그러니 존재로 파악하는게 아니라 기능 곧 사건을 통해서 이 주 라는 의미를 알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주

교회의 주인

생명의 주인 등등 이 주 라는 의미는 기능은,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주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듯이

사랑의 주 라고 표현한다면

반드시 원수 조차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하는 분이 사랑의 주가 되는 겁니다.

원수인데 예수님을 사랑한데요 글쎄

 

분명 원수로 들통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원수로써 들통나서 마귀에게 잡혀옵니다.

 

이것은 마귀가 존재로써 존재인 베드로를 잡아서 존재로 파악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능으로 일하십니다.

물론 기능이라고 이야기 해 봤자

존재로 이해 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기능은 바로 존재를 뛰어넘는 비존재로써

반드시 이런 존재들의 활동을 가지고서 그 차이로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반드시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도록 만드시는 것이 바로

사랑의 주 라는 겁니다.

 

아니 사랑한데요 글쎄

누가?

베드로가요

누구를

예수님을 요

 

아니 예수님을 부인했다메?

세 번씩이나?

 

바로 마귀가 반드시 이 일을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무슨일?

 

존재에서 못 벗어나는 원수로 잡는일

베드로가 드디어 원수가 되어버렸거든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말이죠.

 

베드로 자기 쪽에서 예수님을 주로 만들겠다고

임금 삼겠다고 따라가겠다고 하는데 있어서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끝까지 따라가기는커녕

졸지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존재 졸지에 존재라는 육의 한계성에서 못 벗어나는 자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삼겠다는 것은

그것은 주가 아니라 주 라는 존재인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것이

마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귀 이길 생각 하지 말라 말이죠.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을 넘어설 생각 하지 말자 말이죠.

 

그럼 왜 바리새인을 바리케이트 치시는가?

마귀를 바리케이트 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서 잡히도록 하시는가?

왜 마귀를 푸시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주 라는 기능 때문에

반드시 베드로는 실패해야 되고

그 실패로 인한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죄인이 되어야 해요

의인이 되면 안되요.

 

막살야 되어야 해요

막살지 않는자 되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주라는 기능을 못 봐요

주 라는 존재만 주장하게 되니 그게 우상이다 말이죠.

약속을 못 지키는 우상

 

주 라는 기능은 사랑의 주 로써

원수도

원수 조차도 사랑하시는 주 이시기 때문에

원수가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에수님이 주 로써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가 안되면 의사의 기능을 알 길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즉 베드로가

환자 될 생각 안하고

건강한 자로써 의사의 존재를 따르겠데요 글쎄

그럼 의사랑 노가리를 깔 뿐이지

의사의 기능을 만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그래서 마귀 풀어버리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래서 인간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예수님꼐로 다가가는 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기능입니다.

 

동시에 또 한 가지 주의 기능은

주의 존재가 아닌 기능은

그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베드로 쪽으로 가는 것이 주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 상반되고 모순된 기능이 하나로써 작용하는 기능이 바로 주 이다 말이죠.

 

그런데 존재에게서는 이 모순 됨을 동시에 나타낼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를 든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의 손에서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는 자의 손에서 쫏겨나는 자가 안식의 주인이라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자에게서는 안식의 주인이라는 기능을 알길이 없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능은 안식의 주인의 기능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를 부르러 온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 보란 듯이 안식일을 어기면서 손마른자를 고치는 병고침을 행하시는 기능이 바로 주 라는 기능입니다.

 

그럼 과연 주를 주로 믿을까요?

아니지요?

버리지요

이 버림 조차도 주의 기능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반드시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안식의 주인을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함으로써 숨어있는 주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안식일 곧 영원한 언약인 안식일을 지키는 자의 주인이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도리어 버림으로써 저들의 주인으로부터 나온 안식의 주인을 거부함으로써

저쪽 사람들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나타나는데

저들의 주인이 바로 마귀인데

 

주란 바로 이 숨어있는 주인을 들추어내는 것이 진짜 주 라는 기능입니다.

 

자 그럼 원수라는 존재로써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마귀에게 잡혀왔을때에

진짜 주는 베드로는 상대하는게 아니라

사랑의 주로써 원수 베드로를 원수 사랑하듯이 사랑하심으로써

졸지에 마구라는 또 다른 주인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진짜 원수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원수를 드러내시는 것이

예수 라는 주 이다는 겁니다.

사랑의 주는

아가서 말씀처럼

사랑의 주 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배신했다고 베드로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베드로를 잡아왔다고

원수 잡아왔다고 드디어 숨은 정체를 드러내는 그 마귀를

그 바리새인들을

미워하는 분이 사랑의 주 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사랑도 기능이다 말이죠.

반드시 미워하는 것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고

또 주 라는 것은 반드시 저들의 숨어있는 주인을 드러내는 것이 주 이다는 겁니다.

 

이 두가지 기능이 합쳐져서 이중기능으로써

사랑의 주는

처음부터 베드로를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처음부터

곧 창세전부터 마귀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이 사랑(십자가의 피 흘리심),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니 시선이 전혀 다른 거죠.

마귀는 이 사랑을 바꿔볼려고 했던 겁니다.

과연 이런 베드로 조차도 사랑할수 있는지??

마귀도 예수님만 상대하도록 되어 있고

예수님도 마귀만 상대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다 말이죠.

 

자 그럼 바리새인 곧 마귀자식들이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왜 지킬까요?

 

맞습니다.

예수님만을 상대하고자 하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게 목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십자가의 능력을 거부하는

제사장의 딸 곧 음녀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거룩이 뭔지 알면서도 이 거룩에 대한 반발성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의 목적이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뭐 안식일 뿐이겠습니까?

 

그래서 일곱교회를 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사단의 회와 비교를 하는 겁니다.

 

일곱은 숫자 일곱이 아닙니다.

묵시 개념입니다.

역사가 아니기에

즉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일곱 교회이다 라고 주장하지 않아요.

그건 숫자로 셀수 있는 것이니

그 숫자 세는 손가락을 뿌르뜨려야 하는 겁니다.

 

정반대입니다.

기능입니다.

일곱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완벽한 거룩을 말해요

그럼 일곱 교회는 정반대로 완벽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단의 회가 바로 이 십자가 라를 거룩에 대한 반발성으로써

일곱 교회에 반대되는 존재로써 등장하는데

이 사단의 회가 글쎄

일곱 교회 중에 칭찬 받았지

야단 맞은 교회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를 자신들의 교회 간판으로

양의 탈을 쓰고 사단의 회가 반드시 대조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일곱이란 주 라는 와 같은 기능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숫자 하나 둘 셋 이라고 셀수 있는 기능이 아니라

숫자를 못 센다 라는 의미에서 770이다는 겁니다.

그럼 일곱 교회가 될려고 할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일곱으로부터 사로잡힘

일곱에 붙잡힌 바가 된 교회를 일곱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이런 존재가 아닌 기능의 의미가 어렵기 떄문에

상대적인 일곱의 대조인 짐승으로부터 부여받은 수인 666을 대조 시키고

또 일곱교회의 대조가 되는 사단의 회를 대조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존재와 기능의 차이를 알게 되는 거죠.

 

자 다시한번 정리를 해 보면

주 라는 기능을 붙이게 되면

이중기능으로써 반복하는 무한반복을 보게 됩니다.

이중반복 말이죠.

 

예로 찬송의 주

찬양의 주

또는 뭐 믿음의 주

또는 안식의 주인

등등으로 예를 들면

 

주인은 반드시 저쪽 헌찬양자들로부터 쫏겨나고 버림받는 분으로써 주 라는 기능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니 저쪽 찬양자들이 누굴까요?

반드시 시편을 다 외우는 어릴적부터 시편을 달달달 외우고

시편대로 행하는 시편 말씀을 다 지키는 자입니다.

그들에게 거부 대상되는 분

곧 주

곧 저들 시편을 달달 외우는 찬양자들로부터 거부를 당하는 자가

바로 찬양의 주 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으로부터 거부대상이 되는 분이 바로 찬송의 주 되신 예수님의 기능이다 말이죠.

주 라는 기능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분이 주 라는 기능을 제대로 나타낸 분이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냐?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었다는 겁니다.

즉 말씀 지켰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버림 받는 분이 바로 말씀의 주 가 되는 겁니다.

 

주인이라는 주 의 의미는 이런 기능을 담고 있어요

 

그냥 말로만 때우는 주 주 주인 되신 분 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 쪽에서

마치 베드로가 마귀를 타넘고서

바리새인을 타 넘고서

예수님 쪽으로 가겠다는

예수님은 멍청하게 베드로가 마귀를 뛰어넘어 오기를 바라는 그것이 주 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건 존재요 우상이요

베드로 라는 육체 또는 몸의 소망인 우상이지 약속이 아니다 말이죠.

 

약속은 정반대로 예수님 쪽애서 뛰어넘어오시는 겁니다.

졸지에 우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 보아야 할 입장인데

가만히 서서 기다릴 인간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를 푸시는 겁니다.

마귀에게 꼼짝 다달싹도 못하게 잡혀 꽁꽁꽁 묵여짐을 당하라꼬 말이죠.

 

그래야 베드로가 넘어설려고 하는 몸부림을 막고서

누가 넘어오는가를 볼게 아닙니까?

누구 마저도 넘어서시는 분?

마귀 마저도 넘어서서 넘어 오시는 분

그 분이 주로써 오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주란 남이 아닌 내가 세 번 부인했던 그 분

남이 아닌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분이

 

졸지에 사랑의 주로써

원수 마저도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주로써 넘어오시는데 있어서

 

이 기능을 마귀가 말해주지 않는 겁니다.

마귀는 그저 따지는 것이 조건만 따집니다.

정작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을 마귀가 조건 따지면서

정작 빠뜨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이 주의 기능을 빠뜨리면서 조건을 따질때에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바리새인을 뛰어넘어서

마귀를 뛰어 넘어서

 

물으시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새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졸지에 베드로가 이 새노래의 기능을 보게 된 겁니다.

마귀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바리새인이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시편의 주인의 기능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안식의 주인의 기능을 말이죠.

 

그래서 몸을 죽이면서 심판하는 자를 두려워 하지 않고

영혼을 심판하시는 일곱을 보고서 두려워 벌벌 떨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십자가를 다 이루신 주의 기능을 노래한다 말이죠.

 

그게 바로 다윗이 오늘 말하는 새노래입니다.

다윗이 누굽니까?

철저하게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자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우리야를 죽여서 남의 아내를 취한 자 아닙니까?

 

그 범인을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선고한 재판장 아닙니까? 나단 선지자에게 외친자 아닙니까?

 

그 범인이 누굽니까? 존재 아닙니까?

그 존재

마귀처럼 존재로 다루면 다윗은 지옥 가도 할 말 없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능으로써 십자가에 다 이루셨기 때문에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으로써 다윗은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노래하도록 되어 있는

새노래를 부르는 어린양에게 속한 자이다는 겁니다.

이 새노래 때문에

새노래를 부르라꼬

새노래의 주인을 말하라꼬

그 사건을 벌리셨던 분이

새노래의 주인을 노래하는 다윗이다는 겁니다.

 

안식일만 고침을 받아야만 했던 손마른 자로 태어났어야만 하는 자이듯이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다윗의 자손 곧 다윗의 주여 라고 주를 부르는 자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귀신 들린 딸의 부모가 되어야만 했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였다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날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야만 했듯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말이죠.

 

다들 존재로만 실로암 소경을 해석하니까

저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수 있겠노 라고

 

오늘날처럼 다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술꾼에 먹기를 탐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예수를 구원자로 여기면 안된다고

그렇게 했다가는 하나님께 영광 못 돌린다고

오늘날도 똑같이 바리새인이 장악하는 환경 속에 집어넣는 것이 바로

주의 기능이다 말이죠.

 

누가 술꾼에게 구원 받고 싶겠냐 말이죠

 

그런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가 아닙니다.

기능입니다.

곧 실로암 소경이요

안식일만 고침받은 손마른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친구가 된

매국노 친일파의 친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친구인

친구의 친구라는 기능

곧 주인의 기능이 덮쳐진 자만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한다 말이죠.

 

다른 이는 심판의 주가 아니다 말이죠.

기껏 내 목숨 하나 죽일 뿐이지

영혼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진짜 주인의 기능은 심판의 주 로 보이는 분이어야만이 주인이다 말이죠.

 

누가 술꾼이자 먹보 먹기를 탐하는 자를 보고

간담이 녹아서 벌벌벌 떠는 심판의 주로 보겠습니까?

이몽룡의 몰골이 다 떨어진 갓을 쓰고

누더기 옷을 입고

양반의 옷 차림세가 거지 보다 더 심한데

누가 심판의 주로써

벌벌벌 떨 자로 보이겠냐 말이죠.

 

새노래는 이렇게 싫어버린바 되고

아무도 부를려고도 하지 않고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는 기능으로써 작용하는 것이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새노래를 부르니까

혹시 미친거 아닙니까 라고 되묻는 겁니다.

 

어딜 감히 새노래에

회개 눈물 금식 기도를 갖다대냐 말이죠,.

들이댈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그런 의문들이

새노래 라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또렷한 밝히 보이는데

그런 의문의 것으로

속일려고 꾀냐 말이죠.

혹 혹 혹시 살려주시기는커녕

어히려 더 또렷하게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꺽으신 뼈를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이다 말이죠.

다들 듣기 싫어하는 노래를 이제야 비로소 부르는 겁니다.

 

오직 다윗 너만 부르라꼬

오직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너 그래 너 너

원수인 너 만 부르라꼬

주여 저는 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너만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라꼬

 

딴 사람은 못 부르도록

혹 부를까 싶어서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 바로 새노래이다 말이죠.

 

인간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 마귀를 못 넘어서기에

바리새인을 타 넘어설수가 없기에

 

새노래가 넘어와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노래 찬양 찬송 한다고 우기는 나라는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그 새노래가

나의 머리가 되는 주가 되는

그런 나를 용서하시는 새노래가

진짜 새노래이지

이런 기능을 나태내지 않는다면

인간의 입에서 흥얼 흥얼 거리는 종교음악의 장난꺼리이다 말이죠.

어느 정도로 장난치느냐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안식의 주인을 죽이는

찬양을 지키는 자로써 시편을 다 지킴으로써 시편의 주를 등돌리고 돌아서는 부자청년처럼

장난 치는

종교오락으로 노래부르는 노래방 놀이터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존재 기껏 존재성만 나타내는

존재 이전의 기능은 전혀 모르는

 

혹시 알게 될까봐 새노래는 두려워 벌벌 떨고 있다 말이죠.

 

옳치 옳치 나 새노래를 눈치 채고 알아보면 안돼 라고

새노래는 마구 마구 마귀를 타 넘고 넘어오시는 겁니다.

 

누가 이 새노래의 주의 기능을 알아보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원수가 졸지에 되어버린 자가 알게 되는

보기는 보아도 알게 되고

듣기는 들어도 알게 되는

 

귀신 들린 딸의 어미가 알아보게 되고

 

정작 이스라엘은 거부하는데 말이죠.

 

마귀에게 잡혀온 베드로는 알게 되고

그 베드로를 잡은 마귀는 정작 알면서도 거부하는

 

이 진짜베기의 내막을 새노래의 주는 드러내시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인 새노래를 거부하고자

베드로를 입 막았다고 성공한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외치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예상치 못한 금가락지에 대한 반발성을

오히려 탕자의 새노래 때문에

들통나 버리는 뽀락 나 버리게 되어버렸으니

 

탕자나 베드로가 목적이 아니라

저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애와 자비인

이 십자가에 대한 반발성을 목적으로 했기에

 

베드로를 잡지를 않나

탕자를 미워하지를 않나

이것이 창세전에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자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로써 말이죠.

원수를 용서하는 이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를 말이죠.

 

그러니 오늘 시편 149편에서 다윗은 더욱 더 신나게 새노래를 부르는데 있어서

이미 원수들은 끝났지롱이라고 선언을 해 버리는 겁니다.

 

마귀는 이렇게 주장할 겁니다.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왔냐고?

 

즉 자신들을 심판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이죠.

그럼 그 심판 주가 심판하심이 심판 주 마음대로 이지

 

허락 맞고 심판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심판 주가 아닌 거죠.

 

이것이 인간을 장악한 주인

 

정작 술꾼의 먹보에 세리 매국노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심판주로 전혀 안보이고

 

죽기를 무서워 사망이 왕노릇하는

죽음에 벌벌 떠는 마귀라는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예수님을 전혀 구원의 주 라고 여기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니 막살면 안된다고

일부러 술꾼의 먹보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라고 별명을 퍼트리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구원받고 싶니 라고 말이죠.

 

막사는 자에게 구원받고 싶니

만약 원한다면 너도 똑같은 술꾼에 먹보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니

 

우리 맴버에서 나가라 라는 무언의 압력의 정치다 말이죠.

 

별명은 이념을 새기거든요 주홍글씨처럼

낙인 찍어버리는 겁니다.

도리어 낙인 찍히는 줄 모르고 말이죠.

 

십자가의 지혜는 무지 무지 간단합니다.

 

마치 주의 기능과 같은 기능으로써

예수님을 낙인 찍고

십자가에 못 박고 했는데

정작 예수님이 달려 죽은게 아니라

예수님은 오히려 덕분에 주가 되셨고

그게 존재가 아닌 기능이고

오히려 존재만을 주장해서 직접 십자가에 못 박는 자신이

예수님을 못 박은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거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십자가라는 완벽한 거룩인 일곱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더욱 완악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기는커녕

자기가 자기 손모가지 발모가지 계속해서 못 박아요

멈출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너무 너무 미워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이라

정작 예수님이 저주 받아 죽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자기가 자기를 계속해서 못 박고 있어

 

멈출수가 없어

 

그러니 더더욱 예수님이 더 미워

 

안 미워하고 싶은데 몸이 아프니

자기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못박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죠.

 

자 그래서 놀랍게도 맏아들이 탕자를 미워한게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존재예요

존재로 보는 해석이고

맏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미워한 겁니다.

기능으로 해석해야 되요

 

자 놀랍게도 그래서 거꾸로 원인 없는 결과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로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자체가

아버지를 미워 한다는 겁니다.

 

이런 해석은 논리나 존재로써는 안되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말이 되거든요

말이 되면 믿음의 세계가 아니지

 

믿음의 주란 믿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분이 믿음의 주 라고 했잖아요

일단 인간은 죽음을 못 넘어서요

그 죽음 너머의 세계는 일단 단절이 되어버렸으니

사고나 생각이나 이론이나 존재는 그 죽음의 너머에서는 없어요

 

그런데 기능은 넘어섬으로써 기능을 나타낸다 말이죠.

기능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다른 기능은 없어요.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만이 밝히 보이기에 다른 것은 속일 뿐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에 죽음을 넘어서는 십자가가 옳았다는 기능을 나타내고자

역사 속에 거꾸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그러니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존재를 주장하지만

정작 기능에서 해석해 보면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시는 이 시편의 새노래에 대한 반발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게 아니라

단 한 개도 지킨 적이 없는

매일 매일 어기는

탕자 보다 더 낫다고 우겼는데

알고보니 탕자 보다 더 더러운 자로 들통났다 말이죠.

분명 탕자 보다 나은 줄로 알았는데 말이죠.

 

귀신 들린 딸의 어미 보다 더 못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였다 말이죠.

개같은 이방인 보다 더 못한

심지어 귀신들린자 보다 더 못한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

구원자이기는커녕

 

술꾼에 먹보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저 거지같은 예수에게 구원해 달라꼬?

 

이 말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나오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차라리 아버지 말씀을 지킨 적이 없다고 하면

십자가가 밝히 보일텐데

도리어 뻔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흐릿하고 모호한 것으로 속이고 있더라 말이죠.

 

팔을 어긋맞게 하시니

들통나 버리는 겁니다.

 

왕같은 제사장을

거룩한 나라를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를

 

맏아들이 아닌

탕자로 삼아버리니까

 

탕자가 밉기는커녕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들더라 말이죠.

 

존재가 아닌 기능이 박혀 버리니까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새노래가 주인이 되어서 나타나는 기능이다 말이죠.

존재는 자기가 자기 쪽에서 새노래를 대상물로 자꾸 삼을려고 하지

새노래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새노래의 주인 주체를 말이죠.

그냥 새노래의 주가 아니라

고침을 받을까봐 벌벌 떠는 새노래의 주인이 말이죠.

혹시 불리어지면 안된다고 두려워 벌벌 떠는 새노래의 주께서 말이죠.

 

존재를 죽여버려서 사라지게 없애 버렸는데

이상하게 기능은 계속해서 남아서

오히료 더 또렷하게 너무 너무 또렷하게 박혀 버리는 겁니다.

이제 존재를 죽이고 싶어도 못 죽여요

이미 죽였는데 계속해서 기능이 나타나니까

칼로 물 베기 밖에 안돼

 

칼과 창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어

오히려 찌르면 찌를수록 자기를 찔러버리니 누워서 침뱉기이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기능이다 말이죠.

얼마나 지혜롭냐 말이죠.

그야말로 영광이다 말이죠.

새노래가 저절로 나와요 막을 길이 없어요

 

그런데 새노래를 거부하고자

십의 이조를 내고

찬양부르기를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도록 하고자 하고

막살지 않겠다고 하고

성화 되고자 하고

 

바로 새노래의 주인을 거부하는

마귀를 주인으로 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떄문에 다윗은 새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여 빨리 죽어주소서 라고 말이죠

모세가 또 엘리야가

이 두 증인이 변화산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서

시차의 간극이 하나는 1300년 하나는 900년 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천년이 왕노릇하는냥

이미 다 이루었다는 냥

빨리 죽어주소서 라고

마음 푹 놓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미리 선포하면서

새노래를 부르듯이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말이죠.

다윗이 지금 이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즉 반면에 상대적인 저들은 새노래를 거부하는 증거로써

지키기 바쁘고

십의 이조 드리기 바쁘고

안식일 지키기 바쁘고

믿기 바쁘지

믿음의 주를 거부하는 줄 모르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사기예요 자기믿음이 자기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우상인줄도 모르고

확증편향 아닌게 없어요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건국 건설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바리새인의 일을 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물에 빠뜨리는

이 다윗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참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빨리 바벨론 큰 물고기 입에 등떠밀어 빠뜨리는 일을 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 이스라엘 안 망한다고

 

마치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그런다고 예수님이 안 죽냐 말이죠?

더 죽인다 말이죠.

 

차라리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나타내달라고

 

? 나는 죽었기에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살수 있는

당신만이 심판의 주이기에

생명의 떡이기에

그 정도로 나는 이 매일 매일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없이는 못 살기에

제발 살려달라고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 새노래를 부르게 할려고

다윗은 등떠미는 겁니다.

물에 확 빠뜨리는 겁니다.

 

그 심판의 불속에서

곧 십자가 속에서 보게 되니까

 

거꾸로 보이는 겁니다.

 

누가봐도 거룩한 삶을 사는 천국 갈 자가 지옥 갈 자였고

누가 봐도 더럽기 짝이 없는 막사는 자인 지옥 갈 자가 천국에 가게 하시는

 

주 라는 기능이 뭔가를 보라꼬 말이죠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꼬

물에 빠뜨려 새노래의 세례를 퍼붓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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