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성소=주의 인애와 자비, 십자가라는 빈터)에서 주 여호와를 새노래로 찬양할 지어다 (시편 150)

14-150 예수 안(성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여라 (시편 150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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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150:1, 개역)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2, 개역)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150:3, 개역)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4, 개역)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5, 개역)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6, 개역)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1, 새번역) 『㉠할렐루야.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50:2, 새번역)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150:3, 새번역)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150:4, 새번역) 소구 치며 춤추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150:5, 새번역) 오묘한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큰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150:6, 새번역) 숨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 라는 의미가 사람들이 주인으로 모실수 있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버림 받는 분으로써 머릿돌이 되는 주인의 의미이기에

 

주님 쪽에서 주 라는 의미를 십자가라는 새노래로

 

기존의 것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고서 새로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혜 곧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를 지키는 자들

 

곧 지혜를 지키는 자들의 손에 죽는 지혜로써

 

지혜의 주가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를 다 이루시는 겁니다.

 

일점일획도 빠뜨림 없이 말이죠.

 

 

 

욥기서에서 그래서 숨어있는 마귀를 소환시키는데 있어서

 

욥은 마귀가 반드시 내기에 참여할수 있을 정도의 구미꺼리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이 마귀를 거치는 지혜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격동하지 않는 지혜는 거짓이다 말이죠.

 

 

 

다음주 부터는 계시록을 하구요

 

글로는 이사야를 한 달 뒤 쯤 할려고 합니다.

 

 

 

참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 민족이라는 존재 개념을 하나 하나 바닥을 뜯어내듯이 활동하는 반면에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이스라엘은 안 망한다고 합니다.

 

맞죠 안 망하죠.

 

이미 완료된 새이스라엘이 있거든요.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새이스라엘 봤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새 이스라엘이 다 완성 되었다는 것을 못 봤기 때문에

 

기능의 새이스라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약속이 틀릴 리가 없다 라고

 

믿음으로써 이스라엘을 사수 합니다.

 

 

 

문제는 믿음의 주체가 본인들이 되었지

 

믿음의 주가 따로 외부에서 선물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다윗이 그래서 오늘 찬양하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허물고서 새이스라엘을 완성 하시는 주를 찬양하는 거죠.

 

 

 

주란 주의 인애와 자비 라는 기능을 나타내시는데

 

인간이 주라고 하는 주는 그런 기능이 없이

 

그냥 존재이기 때문에

 

마귀가 격동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마귀가 격동해야 진짜 복음이듯이

 

금가락지에 맏아들이 격동해야 진짜 금가락지인 약속이듯이

 

인간이 말하는 주 란 엉터리이다 말이죠.

 

그런 주가 멀쩡히 존재해 있는 기존의 주 개념에

 

새로운 주로써 등장하게 되니까

 

너의 주와 나의 주가 다르다 라는 이사야의 말처럼

 

졸지에 새로운 주 앞에서

 

기존의 주를 따르는 자들이 졸지에 격동케 되는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 격동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맏아들 곧 육적 이스라엘 또는 거짓선지자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 등등이

 

믿음으로써 성전이나 약속의 문화 유대교 문화 등등을 사수할때에

 

 

 

가장 큰 걸림돌로써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주가 등장함으로써

 

믿음의 주가 나타나 버린 겁니다.

 

즉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의 주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저쪽의 믿음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믿음의 주 되심을 거부하는데 있어서

 

믿음과 믿음의 주의 대립이 되는 겁니다.

 

 

 

물론 저들의 믿음은 행함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행함과 행함의 주의 대립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은 때려죽어도 마귀를 격동 시킬수가 없어요.

 

 

 

힌 트 를 줬거든요.

 

 

 

부자청년 너가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니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지금 자선 사업 하라는 게 아닙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라는게 아닙니다.

 

이웃사랑 실천하라는게 아닙니다.

 

 

 

마귀를 격동 시켜 보라는 겁니다.

 

그게 지혜가 아니냐 말이죠.

 

그것이 약속이고

 

그것이 사랑 곧 율법의 완성 사랑이 아니냐 말이죠.

 

그 믿음 또는 종교적 용어이기는 마찬가지인 행함을 보여보라 라는 겁니다.

 

 

 

주님은 마귀를 타 넘어 올 생각 하지 말하는 취지입니다.

 

행하라 라는 게 아닙니다.

 

누가 이 마귀를 타 넘어서 반대방향에서 넘어오는가 하는 겁니다.

 

 

 

이게 선물이다 말이죠.

 

예상치 못했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그런데 지키게 되면

 

행하게 되면

 

믿게 되면

 

 

 

주체가 자기이기 때문에

 

그 숙제를 달성했다 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게 없게 되는 겁니다.

 

 

 

누가 선물을 자랑하겠습니까?

 

 

 

누가 많이 탕감받음으로써 많이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말이죠.

 

누구든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던진다 말이죠.

 

 

 

다들 장난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지도 못하는 짓만 골라서 하겠다고 합니다.

 

아예 자랑을 하고 과시를 해요 기념비를 쌓아요 글쎄

 

 

 

소위 믿음의 영웅들을 따라 흉내내기를 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족보에 까지는 몰라도

 

수많은 사람인 다수가 인정하는 믿음을 추구하겠다고 사기를 칩니다.

 

그 다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가요?

 

 

 

아니잖아요.

 

믿음이란 확증편향이 아닙니다.

 

믿고픈 것만 믿고

 

듣고픈 것만 듣고

 

보고픈 것만 보는게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믿음은 도저히 믿을수 없는 말도 안되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게 뭔데?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겁니다.

 

 

 

불가능 할려면 이 정도로 불가능해야 진짜 불가능이요 단절이다 말이죠.

 

 

 

육으로 태어난 자들이

 

심지어 약속의 자녀라고 우겼던 유대인들도 안 되는 판국에

 

개같은 이방인인 우리가

 

소위 단군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한국사람 들 속에서 태어난 자가

 

 

 

과연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안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 대용상품

 

대처방법이 바로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둥

 

 

 

얼마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대안들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율법의 완성이 사랑인데

 

나 사랑 없어요

 

그래서 율법 지켜요 라고 한다 말이죠.

 

 

 

이게 마귀자식들입니다.

 

 

 

이런 마귀자식인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예수님께서 넘어오십니다.

 

그것을 선물이다고 한다 말이죠.

 

 

 

바리새인 보다 나을 생각 하지 말라 말이죠.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니까 말이죠.

 

천국에 갈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이지요.

 

울어야 지요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잿더미처럼 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선물이 졸지에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옵니다.

 

 

 

내가 바리새인 보다 나아서 가는 천국은 없어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바리새인을 강조하신 겁니다.

 

 

 

내가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가는 천국은 없구요

 

즉 나의 대상물이 되는 천국이란 망상이다 말이죠.

 

 

 

천국이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나에게로 오는 천국 밖에 없어요

 

이런 천국을 글쎄 다들 무시해요.

 

아무도 못 봐요 글쎄

 

 

 

그래서 바리새인 바리새인 카시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이라는 마귀를 격동 시키시면서 말이죠.

 

 

 

그러니 욥기에서 마귀를 격동 시키시는 내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인간이 지키거나 추구하는 지혜에는

 

마귀가 전혀 격동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를 할텐데

 

다윗이 이 시편 150편을 통해서

 

참선지자가 바톤을 이어 받아서 이 다윗의 시편을 어떻게 외치는고 하니

 

바닥을 뜯어내는 겁니다.

 

마치 철거반장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하나 하나 뜯어내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졸지에 유령처럼 된다 말이죠.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졸지에 유령처럼 사라지는 매개자로써의 이스라엘이

 

계시록에서 일곱이라는 머리가

 

주의 오른손처럼 붙잡아서

 

교회를 붙잡을때에

 

이 관계성을 일곱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물론 상대적으로 거짓선지자들이 사수하고자 했던

 

일곱교회의 상대적인 대립물이 바로 사단의 회로써 등장하는데 있어서

 

그들 사단의 회 곧 유대인들은 이 일곱교회 곧 머리가 일곱이신 심판의 주가 없는

 

머리가 없는 모임으로써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는데 있어서 짐승의 수를 받아

 

완벽한 거룩에 모잘라는 미흡한 짖만 반복하더라 말이죠.

 

 

 

역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곧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제사장 딸인 음녀와 거짓선지자 그리고 짐승의 수를 받은 자들이 말이죠.

 

 

 

자 그럼 오늘 시편 150편은 완벽한 거룩이다 말이죠.

 

즉 구원의 완성을 노래하는데 있어서

 

이 구원의 완성인 주인을 노래하는데

 

그 주인이 바로 성소이다 말이죠.

 

성전

 

참성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다 말이죠.

 

대조 대립되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적이 없는 성전이니

 

이미 벌써 인간은 단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배제 죠.

 

 

 

그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이 구원의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뭐뭐 의 주 라고 기능을 붙여야

 

대립되는

 

그냥 구원 과

 

그 구원에 맞춤형 인간인 존재를 끼어넣는 그 존재의 사고방식과의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그 구원 존재 곧 구원 기능이 아닌

 

그 구원 존재가 된

 

구원받은자들이라는 존재로부터 구원의 주인은 버림받는 모습으로 오시는데

 

이것이 신비입니다.

 

구원의 존재가 아니라

 

구원의 주인은 반드시 구원의 존재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로부터 버림받더라 말이죠.

 

 

 

그런 너희로부터 죽임을 당한 주를 하나님이 다시 3일만에 다시 살려내어서 주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 간극을 보여주는 곧 주의 인애와 자비라는 간극을 보여주는 주 만이

 

진짜 구원의 주인데

 

 

 

정작 이미 예수님의 족보에 창세전에 오른 자는 심판의 주를 영접하게 되고

 

 

 

소위 마귀자식들인 사단의 회는 자꾸 구원에 걸맞는 행동들을 했다고

 

심판의 주로 전혀 안보이는 겁니다.

 

 

 

격동케 하는 지혜의 주인이 없이

 

지혜를 지켰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겨요 글쎄.

 

 

 

그러니 다윗의 언약을 이은 참선지자들은 바닥을 뜯는 겁니다.

 

뭐 지혜 지켰다굽쇼? 과연 지켰는지 보자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거봐 못 하잖아 라고 말이죠.

 

심판성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 심판성을 퍼붓는

 

즉 일곱을 퍼붓는

 

마치 계시록의 일곱천사처럼

 

완벽한 거룩을 퍼붓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여섯날개를 가진 천사도 타 죽을까봐 가리고 가리는

 

그 완벽한 영광을 보고

 

이사야는 아 나는 죽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거한다고 해서 안 죽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죽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거룩 앞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더럽기 짝이 없는 자였구나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졸지에 망해서 타 죽어야 하는 구나 라고 말이죠.

 

 

 

그런데 금가락지가 날라와서 이사야의 부정함을 제거 하는 겁니다.

 

 

 

졸지에 이사야는 맏아들이 격동하게 되는 탕자가 되어 구원을 얻게 되더라 말이죠.

 

 

 

마귀들이 이사야를 격동해요 글쎄

 

거짓선지자들이 이 이사야를 격동해요 글쎄

 

 

 

시편 150편을 다 지키는 이스라엘이

 

유대인이

 

바리새인이

 

대제사장이

 

율법사들이

 

사두개인이

 

 

 

글쎄 이사야를 보고 격동해요 글쎄

 

 

 

그 노선으로 예수님을 보고 격동합니다

 

견딜수 없어 해요 글쎄

 

 

 

안식일을 지키면 지킬수록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면 할수록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으면 없을수록

 

성전을 사수하면 사수할수록 말이죠.

 

 

 

이게 주입니다.

 

이것이 진짜 주의 기능입니다.

 

주라는 존재가 아니라

 

 

 

주의 기능이다 말이죠.

 

머리입니다.

 

남이 아닌 나의 손에서 버림 받는 머리 인데

 

그런 나를 장악해서 나의 머리로

 

나의 주체로

 

나 라는 자아 라는 머리를 짤라내고

 

할례하듯이 머리를 짤라서

 

말만 주 주 주 라고 했지

 

진짜 주가 될줄

 

머리가 될 줄

 

머리를 짤라서 머릿돌이 되는데 있어서

 

 

 

정작 예수님의 족보에 이미 창세전에 올라간 자는

 

주를 보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심판의 주로

 

나의 머리를 짜르는 분으로써 기뻐하는데

 

 

 

저들은 졸지에 어떻게 죽일꼬 라고 분노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이 시편 150편을 마치면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로써 굴러오는 그 머리 그 주인을

 

자기 혼자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어서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어 달라고

 

이 가짜 머리를 짤라내어 달라고 말이죠.

 

 

 

이것이 노래 곧 이미 완료되었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계시록이 그래서 승리의 노래인 겁니다.

 

 

 

심판이라는 일곱이 바로

 

그 기능이 머리 갈아 치우기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끝난 게임이다 말이죠.

 

 

 

머리 갈아치울때에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주가 어떻게 기존의 주를 짤라내고

 

곧 머리를 짤라내고

 

머릿돌이 되시는지를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놓친 장면이 없이 다 다시보기

 

돌려보기를 통해서

 

주의 승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나의 승리가 아닌

 

주의 승리

 

곧 승리의 주를 아니 노래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소에서 곧 참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주가 되신 예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 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이죠.

 

이것이 바로 마귀를 격동케 하는 새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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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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