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없는(누락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참성전이신 어린양 (21: 9-27)


(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1:9, 개역)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21:10, 개역)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11, 개역)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21:12, 개역)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21:13, 개역)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21:14, 개역)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21:15, 개역)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21:16, 개역)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21:17, 개역)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21:18, 개역)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21:19, 개역)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1:20, 개역)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21, 개역)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1:23, 개역)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1:24, 개역)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1:25, 개역)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1:26, 개역)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1:27, 개역)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21:9, 새번역) 일곱 천사가 마지막 때에 일곱 재난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리로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21:10, 새번역) 나를 성령으로 휩싸서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21:11, 새번역)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21:12, 새번역)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거기에는 열두 대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열두 대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고,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1:13, 새번역) 그 대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21:14, 새번역) 그 도성의 성벽에는 주춧돌이 열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1:15, 새번역)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금으로 된 자막대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1:16, 새번역) 그 도성은 네 모가 반듯하여, 가로와 세로가 같았습니다. 그가 자막대기로 그 도성을 재어 보니,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서로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 2,200킬로미터

(21:17, 새번역)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니, 사람의 치수로 백사십사 규빗이었는데, 그것은 천사의 치수이기도 합니다. / 65미터

(21:18, 새번역)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21:19, 새번역) 그 성벽의 주춧돌들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이요, 둘째는 사파이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비취옥이요,

(21:20, 새번역)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21:21, 새번역) 또 열두 대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그 대문들이 각각 진주 한 개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넓은 거리는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21:22, 새번역)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1:23, 새번역)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21:24, 새번역)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21:25, 새번역)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21:26,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은 민족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21:27, 새번역)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마지막아담의 새신부 곧 처음것이 지나간

더 이상 슬픔 눈물 아픔 고통이 없는 새피조물 새신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새신랑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새신랑도 결국 존재로 말하는게 아니라

기능으로써

자신의 증상물인 흔적물인 새신부를 가지고서 증거하십니다.

 

그럼 헌신부 가짜 신부들과의 차이성 차이나는 기능으로서

그 간극을 벌리시는데 있어서

가짜 신부들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마침 어머니께서 주일말씀을 자꾸 되내이시면서

열처녀 비유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다섯처녀는 등불을 준비 했고

나머지 다섯처녀는 등불을 준비 못해서 그때 부랴 부랴 사러 갔다 말이죠.

그 사러 간 사이에 이미 문이 닫혀 버렸다는 겁니다.

 

(25:8, 개역)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25:9, 개역)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25:10, 개역)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25:11, 개역)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25:12,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25:13, 개역)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부랴 부랴 사러 갔다는 말은

일부러 그 사이에

사러 간 사이에 오겠다는 기능을 보여주고 있지

존재 곧 사러가서 조건을 갖추도록 기다려준다는 말이 아니다는 겁니다.

기능 자체가 사러간 사이에 오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요

그 사이에 문을 닫고자 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단절입니다. 존재에서는 철저한 단절 말이죠.

 

기능을 우리쪽에서 어떻게 다룰수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기능은 우리 쪽의 존재성을 폭로하면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증상물 흔적물을 찾는 거지

누구의? 임의로 부는 바람의 증상물, 흔적물, 기능의 흔적물

 

존재로 갖출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등불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한다는 자체가

존재로써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성령을 무슨 수로 인간이 갖출수가 있겠습니까?

 

신랑 자체가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기에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아니기에

기능과 기능의 만남이기에

구원자와 죄인의 만남이기에

신랑이라는 기능은 오히려 존재를 피해서 오는 겁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오늘 본문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언급해 놓고서

인간은 그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성전을 찾더라 말이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을 갖추는 것 마냥

예배시간과 예배 장소를 찾는 겁니다.

 

즉 성전이라는 존재 곧 공간을 찾고 또 예배 장소이니까

예배 시간도 찾겠지요

 

그런데 시간도 공간도 없는게 아니라

기존의 것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가 개입해 버리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기가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인물

곧 시공간이 졸지에 인물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안식일 지키기 라는 시간과 안식일을 지키는 장소인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졸지에 그래서 그 조건에 맞는 존재로써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졸지에 안식의 완성인 주인이 와 버리니까

오히려 시공간이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이 시공간이라는 존재성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안식일 모독

성전 모독

이거 두 개

그리고 내가 그 로다 참람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가장 자유롭게 건드린 겁니다.

마구 마구

막 건드렸다 말이죠.

 

이게 바로 인간 자체가 신전이요 인간의 행함의 공적이 시간 아닙니까 영원불멸을 향한 노력을

졸지에 예수님이 날려버린 겁니다.

어릴적부터 지킨 율법 다 날려버리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냐고

시간을 날려 버리니까

 

이거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공든 탑을 무너뜨렸으니

 

그러니 그냥 신랑이 아니라

이런 기능의 신랑이라고 오늘 소개하는 겁니다.

그 신부에 그 신랑이라꼬

 

기능 곧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기능이다 말이죠.

 

성전을 헐라 3일만에 다시 세우는 기능으로써의 신랑이 바로 성전이다는 겁니다.

 

성전이 예배장소, 거룩하게 안식하는 날

시공간으로만 알았던 성전이

인물일줄

기능일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치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는 기능처럼

그저 신기하고 놀랄뿐인

인간의 손이 전혀 필요치 않는 성전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다 말이죠.

 

이 성전 때문에

돌삐는 보석이 되어야만 했었던 겁니다.

성전은 어린양으로 좌우되지

인간이 하기 나름으로 달린게 아니더라 말이죠.

돌삐는 그 속에 빛을 비추임으로써

보석으로 좌우되지

돌삐 자체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성전도 그저 돌삐일 뿐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어린양이 성전 되심

곧 빛되심만 있다면

성전은 없어도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누락의 의미입니다.

교회란 누락의 의미입니다.

저 분이 옳았습니다 라고 외치고 누락되는 겁니다.

24장로가 면류관을 반납하듯이 누락 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으로써 저 분이 참성전입니다 라고 외치고

성전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인데 왜 그런 장치들이 필요하냐 말이죠.

그런 것들은 그림자이지 실상이 아니거든요.

 

지킬 안식일 날짜도 사라져 버렸고

지킬 안식일 예배 공간인 성전도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 곧 실상이 와 버렸다 말이죠.

 

그것을 바로 안식일 지키는 자들 옆에서 보여주신다 말이죠,

 

시편을 보면서 놀랬던 것이

이것을 직접 격은 자가 바로 다윗인데

그래서 시로 노래로 읊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시편을 지키더라 말이죠.

 

온통 시편은 예수님을 노래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어릴적부터 시편을 달달 외우면서도 오히려 외웠다는 조건을 갖춤으로 인해

시편 말씀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는 조건을 갖춤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노래 할 수 조차 없게 되더라 말이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분명 예수님을 노래 했는데

그 다윗의 시편을 따라 부르는 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이 안 나오더라 말이죠.

신기하죠

 

웃끼게도 문자로 단어로 안 적혔다는 겁니다.

존재화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럼 존재화 되면 딴 민족은 몰라도 유대인은 그럼 예수님을 알까요?

임의로 부는 바람을 알까요?

비겁한 변명입니다 ~~~~~~~~~~

 

그럼 도대체 유대인들은 누구의 증상물이였던 겁니까?

마귀 아닙니까?

그것을 글쎄 예수님이 밝혀 버리니까 비로소 살인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뭐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굽쇼?

십계명을 지켰다굽쇼?

지금은 이웃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이웃을 핍박하는

예수 쟁이를 핍박하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유대인 아니냐 말이죠.

 

결국 다윗은 기능인데 죄인인데

 

정반대로 본 겁니다.

다윗을 존재로 또 의인으로써 파악하고 따라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예수님을

유대인 자신들이 어릴적부터 달달 외울 정도로 자부하는 그 시편의 예수님을

마귀의 대 마왕 바알세불 로 봤듯이 정반대로 보고 있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모습이 성전을 찾고 그 성전에서 예배 곧 안식날을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졸지에 성전이 없어요

그렇게 되니 예배 시간도 자연히 없어요.

 

그런데 성전보다 더 나은 성전이 있는데 바로 어린양이 성전이더라 말이죠.

인물이 성전이고

존재가 아닌 기능이 성전이더라 말이죠.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다는 증거로써

표현 된 것이 바로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보석이라는 것이 뭡니까?

돌삐입니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고 누가 말했잖아요.

즉 존재로 보고 기능으로 보지말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돌삐 속에 반짝 반짝 빛나는 기능이 있어서

더 이상 돌삐로 볼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이런 기능으로써의 성도가 바로 보석이다는 겁니다.

 

탕자는 돌삐와 같은 자입니다.

오죽하면 맏아들이 미워하는 동생이다 말이죠.

돌삐를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천하디 천한 것인데

 

아버지 말씀을 듣기를 하나

물려줄 재산 미리 달라고 해서 다 탕진을 하지 않나

술과 여자와 사기꾼에 다 말아먹어 빈털터리가 되질 않나

 

그야말로 돌삐처럼 무가치한 자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누가 이런 탕자를 보석으로 보겠습니까?

 

아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돌삐에 빛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라는 잉여가

기능이

반짝 반짝 빛나는 이유 하나 만으로

졸지에 보석이 되어버렸듯이

 

탕자에게 금가락지 하나 끼엇을 뿐인데

다들 격분하고 세상이 견디질 못하더라 말이죠

마귀가 시기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진짜 사랑은

안식일 지키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신 기능

곧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날 일부러 안식일 지키는 자들 코 앞에서

손마른 자를 고쳐주시는

빛을 만나게 된

이것이

 

마귀가 격동하고 견딜수 없어 하는

진짜 사랑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마귀가 하나도 시기를 하지 않습니다

견딜수 없어 하지 않아요

 

그런데 마귀가 격동하고 견딜수 없어 하는 성전은

베드로를

그것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에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신부로 삼는 그 성전을

마귀가 미워하는 겁니다.

 

다른 성전은 미워하지도 않아요

그래서일까요?

다른 성전은 그저 돈만 모아요

썩을 재물을 막 쌓기 바빠요

 

이런 참성전의 기능에는 아예 관심도 없어요.

 

돈을 다 빼앗고

상전을 엎어버렸듯이

또 그 성전을 헐라 3일만에 짖겠다 라고 나오면

그때서야 으르렁 거리면서 반응하지

아예 관심 없어요.

 

이것이 신랑 곧 어린양이라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전은 이 분이 진짜 성전입니다 라고 누락 됨으로써

가짜 성전을 허무는 심판의 주를 소개하고 뒤로 빠지는 겁니다.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1:23, 개역)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럴때에 돌삐일 뿐인데 벽돌일 뿐인데

그 속에서 빛나는 빛 때문에 보석이 되듯이

 

일곱이라는 심판의 주가 교회를 오른손으로 붙잡아서 보석이 되었듯이 일곱교회가 되었듯이

인간이 찾고자 했던 성전이 누락이 되고

처음 것이 지나가고 이전 것이 사라지듯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가 없는 것은

진짜 실상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이고 어린양의 그 성의 등불이 되기 때문에

보석이 안 되고는 못 배기는 당위 곧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12 보석입니다.

? 그 속에 빛이 비추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곧 말씀이 비추었기 때문에

12 보석은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십자가의 흔적으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말이죠.

 

12 보석이 보석이 되기 위한 조건을 갖춘게 있던가요?

심지어 24장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였고

그들 세력과 함께 했던 자들이였습니다.

그랬던 자들이 십자가의 용서를 받았을때에 누가 버럭 화를 내겠습니까?

견디질 못하더라 말이죠.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66:1; 2

(7:50, 새번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뭐 사람의 손으로 성전을 짖겠다고?

이것은 인간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 갈수 있는

마귀를 타 넘어 갈수 있는 거룩한 몸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을 이 성전 짖기에 미쳐 있습니다.

바벨탑이 그래서 나왔고

국가 소위 민주주의 국가

아아 우리 대한 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잘 사는 나라 만들겠다는 것이

인간 신체의 확대 확장으로써 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 그런데 성소에 들어갔더니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더니만

성전이 없는 겁니다.

벌써 누락 되고 없더라 말이죠.

 

그 성전도 없을 뿐더라

그 성전을 비추던 해도 달도 없더라 말이죠.

 

벌써 처음 것이 지나갔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가버려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전도 없고

국가도 없고

우짜죠?

 

그런데 그것이 기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 없고

성전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아니 왜?

더러운 짓 만 하거든요.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66:4, 개역)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즉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 곧 인애와 자비인데

성전을 줬더니

안식일을 줬더니

우상이나 섬기질 않나

안식의 주인을 살인하려고 하지 않나

그런 짖만 반복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누락시켜서 이전 것은 누락시켜서

새피조물을 창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을 쳐다본 겁니다.

시편에서 말이죠.

이것을 이어 받아서 참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누락시키는 바닥을 뜯어내는 겁니다.

철거공사 말이죠.

 

눈에 보이는 존재하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은

다윗과 아이들, 난 알아요 이스라엘을 뜯어내야 한다는 그 이유를 ~~~ 당당 당 디기기기

다윗과 참선지자들이다 말이죠.

처음 것이 다 지나가거든요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말이죠.

그리고 새것으로써 성전은 어린양이 성전임을 말이죠.

눈에 보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있는데

그 마약에 빠져 있는데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 줄 것이다 라고

종교마약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어린양이라는 성전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맞물리도록

뻔히 기존의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성전

어린양 성전을 말하기 위해서

성전을 헐라 라고 하는 겁니다.

목숨과도 같은 성전을 헐라니?????

성전을 헐고 3일만에 짖는 자여?

이것이 그만 별명이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저들의 성전이 기준으로 못 박혀 있는 겁니다.

뼛속 깊이 사라질 성전이 말이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말이죠.

 

그거 허물줄 모르는 성전은 가짜 성전입니다.

그래서 참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써

화목제물로 되어

그 의문의 제사를 모두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단 번에 말이죠.

 

이제 더 이상 의문의 반복은 없다 말이죠.

곧 처음 것, 이전 것, 지나가는 것, 사라지는 것의

성전, 예배, 찬송, 등등이 없다 말이죠.

 

(7:27, 개역)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런 거룩만이 입혀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지

인간이 거룩을 쌓고자

단번에가 아닌 점점점 쌓고 쌓아서 성화되는 마일리지를 쌓는 거룩은

거룩 취급 조차 안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전 것은 지나간 것이 아니다는 거죠.

새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마귀가 하나도 시기하지 않아요

 

그러니 오늘 나오는 예루살렘은

성전이 누락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곧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빛

돌삐에게 빛을 비추는 그 빛의 기능을 말하고자 하는

환자로써

죄인으로써

이 빛을 소개하는 예루살렘이지

예루살렘 독자적인 존재성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할 줄 안다고 하는

성전 안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은

그 성전을 모독하고 있다 말이죠.

성전이신 어린양을 모독하더라 말이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모독하는 겁니다.

 

독자적인 존재를 부각시키니까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세리는 고개도 못 들고서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다 말이죠.

 

즉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소경입니다.

저는 빛이 없습니다 빛을 비추어 주소서 라고 하더라 말이죠.

 

바리새인은 자신의 빛을 자랑하는데 있어서 반대로

세리는 내세울 빛이 없는 환자요 어두움이요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럼 성전의 기능은 뭡니까?

 

처음 것을 지나가게 하는

해와 달의 비추임이 필요치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등불을 비추어주는 겁니다.

 

당연히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이제 불타 사라지겠구나

여호와의 영광을 봐 버렸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불타오르네 ~~~

 

방탄소년단이 부르는 화이어 ~~~~

불타오르네 라고 부르는 그 불과 족히 비교도 안되는

심판의 불에 타버리는

 

이 일곱이라는 완벽한 거룩의 심판불 앞에서 타 버리는 겁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인 인애와 자비 외에는 살길이 없는데

그 앞에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은 운운하고 있으니

누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성전에서 하던 버릇이니까 말이죠.

참성전에서는 그 딴거 안 통하거든요.

 

그러니 예루살렘은 해와 달이 비추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런 처음 예루살렘은 지나갔고

보라 새것이 된 예루살렘은

열두 보석처럼

새 이스라엘은 해와 달의 빛과 족히 비교도 안되는

더 나은 빛으로써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그 빛으로 비추어주심으로써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금가락지 끼우듯이

예루살렘은 이제 더 이상 의문의 성전이 필요치 않는

해와 달도 필요치 않는 더 나은 빛으로써

반짝 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겁니다.

 

이 새예루살렘을 미리 봐버렸기에

누가? 다윗이 말이죠.

다윗과 아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다윗언약으로 세워진 참선지자들은

기존의 예루살렘을 기존의 이스라엘을 바닥 뜯어내는 겁니다.

 

있어봤짜 슬픔 고통 아픔이 반복 되거든요.

아예 슬픔 고통 아픔이 없는 새성전을 얼른 얼른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이스라엘을 쫄딱 망하게 하는 발언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 처음 것, 이전 것, 지나간 것, 사라지는 것은

누락이 되고

새 나라에서는 슬픔 고통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거 보여 주고 싶어서 말이죠.

 

그래서 슬픔 대신 희락을 보여주고 싶어서

슬픔 속에 집어 넣고 즉 심판 속에

제대로 된 심판 곧 여호와의 불

곧 오늘 표현된 일곱 완벽한 거룩 앞에서

제대로 된 심판에 불 타야 진짜 거룩을 봐야

되도않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자라는 부족한 의문의 666 제사를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으면 그 꾀임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제대로 된 하나님의 심판 곧 저주인 십자가

이 완벽한 일곱을 만남으로써

이 일곱이라는 기능에 사로잡힘으로써

붙잡힌 바 됨으로써

 

누락되는 성전을 찾지 않고

인물을 찾는 겁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고 인물인데

심판의 주로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시선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인한 시선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단절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사람이 찾는 예배 시간 안식일 지키기와 성전이라는 공간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뚝 끊어진 단절입니다.

즉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이죠.

 

그럼 그림자는 이제 지나갔기에

실상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불 곧 심판과 동행할 자 누굽니까?

다스 주인 누굽니까?

 

불과 함께 동행할자 누굽니까?

일곱 완벽한 거룩과 함께 동행할 자 누굽니까?

안 타 죽을 자신 있는 자 누굽니까?

결국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3일 만에 다시 지어진 참성전 누굽니까?

어린양 예수님 아닙니까?

이 인물을 말하기 위한 그림자인데

졸지에 그림자들이 이 실상을 죽이는 짖만 골라서 하더라 말이죠.

 

돌삐는 아무리 도딱고 왁스로 윤기나게 딱아도

돌삐는 돌삐입니다.

외부에서 비추이는 빛이 없으면 보석이 될 수가 없다 말이죠.

 

그 빛이 글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쓸모 없다고 버린 빛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결국 십자가란 이런 나의 허물도 다 덮어버리는 넉넉한 승리이다는 겁니다.

그 모든 허물을 피로 덮었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오늘날 마귀들과 가짜교회

역사나 우기고

사마리아 신학이나 우기고

예루살렘 신학이나 우기는

정작 십자가의 죽음의 사랑이 없는

그런 정통이나 우려먹는 자들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고 있더라 말이죠.

 

그것이 성전이 누락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고 우기는 자들의 시선인데

 

정작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이 없이 누락된 채로

 

예수님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바로 참성전으로써

이 분과의 싸귐 곧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은 자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지킬려고 하는거다 말이죠.

 

가정부와 아내의 차이점이

아내는 지키는게 없고

가정부는 지키는 것 밖에 없지 사랑을 못해요

 

그러니 가정부는 원인 있는 결과만 추구할 수 밖에 없고

절대로 막 살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내세울 것이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습니다 라는 주장 밖에 못해요.

존재이니까

절대로 저 탕자처럼 막살면 안된다 말이죠.

월급을 못 받아요.

 

이것이 사랑의 관계성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내는 원인 없는 결과 곧 이유 없는 사랑

이유 없는 용서만 받도록 되어 있는

탕자입니다.

아무리 막살아도

그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이라는 새신란 곧 전남편 율법과 차이나는 새남편의 사랑만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770번의 미래완료에서 거꾸로 현재에 덮쳐오는 사랑 뿐이거든요.

 

오로지 이 새 남편을 말하도록 되어 있는 아내 이다는 겁니다.

누구의 아내 로써 누구만 자랑하는

 

이래야 상대적인 전남편을 자랑하는 절대로 막살지 않는 자들이

반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행함이 있는 믿음이 떠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너는 성전 없지? 나는 성전 있어 라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곧 절대로 막 살지 않은 성전을 과시하더라 말이죠.

 

마침 성전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 곧 절대로 막살지 않는자

또 하나는 세리 매국노 곧 매국노 자체가 하나님 팔아먹고 하나님의 백성 자기 민족 팔아먹고

그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이다 말이죠.

누가 과연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맞는 자 인가 하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이면 구지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없어요.

말이 되니까

그런데 매국노 친일파 세리가 성전이 딱 맞는 신부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기록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이니까 말이죠.

 

결국 성전이 바리새인은 전남편 율법이였고 그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전이였고

세리는 성전이 새남편 예수그리스도의 피 남편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곧

예수님 본인이 성전인 성전이였던 겁니다.

 

이것이 일곱이라는 완벽한 거룩의 사랑에 사로잡힌바 된

새신랑의 사랑입니다.

 

곧 십자가의 피로 세운 일곱교회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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