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것이 다 지나간, 새 남편을 위해 단장한 새 신부 ( 21: 1- 8)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65:17, 개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21:1, 개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2, 개역)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3, 개역)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21:4, 개역)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5, 개역)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21:6, 개역)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1:7, 개역)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21:8, 개역)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1:1, 새번역)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1:2, 새번역)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21:3, 새번역)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 '장막'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21:4, 새번역)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21:5, 새번역)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21:6, 새번역)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21:7,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21:8, 새번역)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처음 것이 다 사라지고 난 뒤에 새로운 것이 오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새로운것도 결국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처음 것의 대체물 밖에 안되는 기존의 것 곧 역시나 처음 것 이다 말이죠.

 

그래서 처음 것이 (1절 처음 하늘 처음 땅, 4절 모든 처음 것)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기준으로써 또는 법으로써 멀쩡히 공고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이 일체 기준으로, 절대로 자리 못 잡는 그런 입장에서,

그 보편성에서, 그런 절대성에서,
(유대인은 선민이다는 그 절대적인 언약처럼,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도 나오듯이,
지금 현재 2017년에도 유대교가 사라지지 않고 있듯이)

 

새로운 것이 왔다 라는 것은

처음 것이 어떻게 새로운 것에게 무너지는 과정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즉 차이성과 대조성이라는 구별 구분이 명확하게 갈라내더라 라는 겁니다.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결국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구원이 됨으로써 기존의 절대성이 무너지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약속을 어기는데 있어서 더 나은 식으로 어기는 겁니다.

그 여자 단 한 사람에게 보냄을 받는 희년 곧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계시록도 그런 입장에서 마찬가지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즉 누구에게는 나쁜소식 이다? 곧 유대인 이라는 기존의 선민에게 말이죠.)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것을 주 라는 기능이라고 했습니다.

주 라는 존재가 아니라 말이죠.

(그럼 이 예수님을 유대인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그런데 전혀 주 같은 존재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영접을 못해요

그러나 개같은 이방여자는 주가 뭔지도 모르면서 주를 영접합니다.

지금 나의 귀신들림을 곧 나도 귀신들린 딸처럼
나의 귀신들림을 고쳐버린 이상 무엇을 따지고 자시고 하는 조건을, 원인을 따지겠는가 말이죠
.

그래서 존재의 상대적인 기능으로써 주 라는 기능이 이 여인에게 덮쳐진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곧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기능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

구원자를 말하는 구원이지, 기능이지

구원받은 자를 말하는 구원이 아니다는,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주 라는 존재가 있는데

어떻게 이 주라는 존재가 주라는 기능에게 무릎 꿇어서 허물어지는 과정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기 라는 영원한 언약에, 상대적인 안식의 주인이라는 기능 

곧 의문의 반복인 숙제 문제, 풀수 없는 율법에,  상대적인 원인 없는 결과 라는 정답인 율법의 완성이 와 버린 겁니다.)

 

 

그 속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 바로 주의 인애와 자비 라고 했습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즉 이 말은 기존의 것이 사라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라는 새것을 이겨버리는 겁니다.

허물어 지는 것은 오히려 기존의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허물어지더라 말이죠.

그렇게 십자가는 완성 되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것 곧 처음의 것은 여전히 지금도 현재 2017년에도

기존의 하늘, 기존의 땅이 기세 당당하게 있음 곧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새것이 이겼다고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새것이 덮쳐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여전히 기존의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자에게는

계시록의 새롭다 라는 일곱 개념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이 주의 인애와 자비 밖에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새것이 덮쳐진 자에게는 주의 인애와 자비 밖에 안보이는 겁니다.
다 이루었거든요.
더 이상 할게 없어요.

 

그럼 이 간극 주의 인애와 자비 곧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한 이 주의 인애와 자비라는 간극 속에서

 

왜 기존의 것이 뻔히 멀쩡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새로운 것에 의해 허물어져야 하는 가 그 이유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것이 바로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 원인이 바로 자아라는 존재와의 결부입니다.

인간은 뭐든지 자기와 연결 시킵니다.


마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나 와 연결되듯이 말이죠.

즉 이 말은 새 하늘과 새 땅과는 반대로 단절이 된 겁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몸과 연관 되었거든요.

바로 일곱교회처럼 일곱이라는 심판의 주에 의해 사로잡혀 

오른손에 붙잡힌 일곱에게 붙잡힌 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몸 처럼 말이죠.

 

그래서 율법이 가입하는데 있어서 몽학선생은 너가 아니라 저 분이다 라고 저분에게 안내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자아를 죄 아래 가두기 위해 가입이 됩니다.

너는 안돼 라는 겁니다.

 

뭐 된다고?

그럼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가게 된다

바리새인을 넘어 보라는 겁니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자 그럼 여러분 바리새인을 넘어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럼 바리새인 본인들은 그럼 바리새인으로써 바리새인을 넘은 셈 아닙니까?

그럼 이들은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까?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까?

 

지금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을 기준으로 천국을 말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이 바리새인을 기존의 것, 처음 것으로 활용이 되는 겁니다.

뭘 해도 기존의 것 곧 처음 것은 바리새인과 결부된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을 넘어설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새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 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새번역)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4:7, 공동)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죄의 소원이 있는데 그 죄의 문을 넘어보라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바리새인을 하나의 죄 덩어리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도 같은 인간으로써 바리새인과 별 다를바 없고

같은 욕망으로써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그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 실천의 대가들은 실지로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죄를 잘 다르신다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칭찬 듣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자가 바리새인임을 알고서
예수님은 바리새인 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

 

아무도 바리새인을 그 당시 사람들은 마귀로 안 본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말이죠.

오히려 가장 천국의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다는 겁니다.

 

졸지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준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범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하고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어떻게 하실래요?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라고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문재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성화론자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개혁주의자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유느님 유재석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찌 하실래요? 천국에 과연 갈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 원인을 제거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 원인이 바로 이전 것, 처음 것 입니다.

그것을 이전 것은 지나갔다 라는

[이전 것이], [처음 것이], 소위 주님 보시기에 가짜 라는 겁니다.

그럼 그런 것이 기준으로써 작용이 되어 보편화 되어서 목표설정화 한 그 천국도 가짜이다는 거죠.


기존의 천국이지 새 천국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것을 뻔히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강조하시는 겁니다.

넘어봐 넘어보라니깐 넘어보세요 라고 말이죠.


기존의 것이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바라보고자

기존의 것을 버린다는 것은 마치 기생라합처럼

바리새인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아예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추호도 없는 바리새인과 대조되는

믿음 곧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원인 없는 결과로써

뭘 잘했다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고자 하냐 말이죠.

 

내 말이 ~!~!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다 말이죠
.

그래놓고 바리새인이 누구를 욕하냐 말이죠.


과연 바리새인이 누구를 욕하는데 전 인생의 목표가 되었는가를 보게 되니

졸지에 예수님 하나 죽이고자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더라 말이죠.


결국 결과적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이 되는 겁니다.

왜? 안식의 주인으로 오시니까 말이죠.

의문으로만 남아야 하는데

완성이 와 버리니까

사랑이 와 버리니까

울리는 꽹과리로 들통나 버린 겁니다.

 

저게 바로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간다는 역설이다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 보다 더 나을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봤자 또 의문이다는 거죠.


새것 이신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랑 때문에 졸지에 저절로 생긴 새 신부 입니다.


신부가 새 신부 되고자 노력한것 아무것도 없이 된

원인 없는 결과 곧 새신랑만 오시면 저절로 생기는 새신부입니다.

 

자 그럼 바리새인이 천국에 못들어가는 이유는

그것도 이미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는 1순위의 바리새인이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못 넘어서기 때문이다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이유 없이 이 예수님을 제거하는데 동원이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탕자로써 어리석은 지혜로써 얼룩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

맏아들인 천국 1순위인

또 역시나 천국 1순위인 바리새인이 이 탕자 예수님을 못 넘어섬으로써

이 원인을 제거 당하는 겁니다.

오로지 탕자에게 금가락지 라는 원인 없는 결과 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 라는 원인은 사라지고 

기존의 것은 사라지고

처음 것은 지나가고

오로지

안식의 주인 이라는 안식의 완성만

원인 없는 결과만

새 것만 있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인과 아벨의 사건인 십자가의 사건이 2000년 전 (바리새인 기준에서)


또 현재의 기준인 4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2017년에도 벌어지고 있는 실제상황 참현실인 실화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을 제거하고자 침노하는 진짜 천국이다는 겁니다.

이전 것의 천국을 허무는 새 천국 말이죠.

 

그럼 어디까지나 천국은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진짜 선물입니다.

예상 못했기에 선물이고 은혜이거든요.

 

바리새인은 이미 계산하고 원인으로 삼아서 들어가고자 한 천국인데

그게 가짜 천국이요

조건 갖추기가 되는 겁니다.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고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국들어갈 사람 1순위로 인정받고자 했는데

그 껍데기를 확 벗기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 되어버린 겁니다.

 

(23:1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14절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 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23:13, 공동)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11:52, 공동)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십자가 라는 새로움을 마치 기생라합처럼
간담이 녹아 벌벌 떪음으로써 심판의 주를 영접하는 것이 십자가가 넘어오는 방식입니다
.

세상에 바리새인을 넘어오시다니? 세상에 최 강국인 애굽을 넘어오시다니?

이게 구원이지

간담이 녹는 구원이지


인간이 구원 받고자 구원의 조건을 갖추는 것은

새것이 아니다 말이죠.

바리새인도 못 넘는 판국에

마귀도 못 넘는데????


그래서 베드로가 마귀에게 잡혀 오는 겁니다.

넘지 말라꼬

욥도 마귀에게 잡혀오는 식이 되는 겁니다.

넘지 말라꼬

넘는다는 것은 조건 따지고 조건 갖추겠다는 바리새인과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새 것이 넘어오시니까

아픔도 눈물도 고통도 즉 기존의 것은 다 지나가는 겁니다.

새 것이 되었으니까 말이죠.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개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0, 개역)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1, 개역)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14, 새번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고후 5:15, 새번역)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5:16, 새번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후 5:17, 새번역)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18, 새번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고후 5:19, 새번역)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후 5:20,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고후 5:21,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십자가가 넘어오는 겁니다.

원수 관계인 바리새인이 아니라
화해인 십자가가 넘어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완성이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가 말이죠.

결과 곧 완성이 넘어오는 겁니다.

새 것이 넘어오는 겁니다.

바리새인 곧 기존의 것, 이전의 것, 처음 것을 지나서 말이죠.

천국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넘어오는 겁니다.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영접하는 겁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화해 곧 화친을 청하는 겁니다.

그 앞에서 무슨 놈의 십의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어릴적 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

조건 갖추었다는 것을 내세울수가 있겠습니까?

심판 앞에 그 저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만 보일 뿐인데

이 일곱 이라는 심판 곧 완벽한 거룩 앞에서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이고, 배설물일 뿐인데

기존의 것이지, 새것이 아님이 들통날 뿐인데

 

이것이 일곱 이라는 주 에게 사로잡힌 일곱교회 라고 했습니다.

화목이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긍휼을 입은 자들 말입니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움을 당한

새 신랑이 직접 자신의 피로 꽃단장 시킨 새 신부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니까

행함을 자꾸 자기가 뭔가를 행한다고 보는데

그게 아니라 바리새인을 넘어오는 그 구체적인 의미 곧 밝히 또렷히 보이는 십자가가 행함입니다.


직접 천국이 넘어오는 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주체 말이죠. 주인 주 주 주 말입니다.

완성이 아니면 행함이 아닙니다.

완벽한 거룩인 일곱이 아니면 행함이 아니다 말이죠.

나를 제대로 심판 하시는 주를 영접하는 것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을 영접하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누구처럼? 네 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주여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주인을 말하는 자, 주인을 제대로 본 자, 유일한 새것을 본 자 처럼 말이죠.

기생 라합도 그랬거든요.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칠때에 새것을 봤거든요

이전 것을 지나서 오시는 예수님을 곧 믿음을 아브라함은 본 겁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넘어서 오시는 것을 아브라함이 본 겁니다.

그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겁니다.


십자가를 내가 대상물로 삼아 믿는게 아니라

십자가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넘어오게 되니까

저 잘난 바리새인을 훌쩍 지나감으로써

그 잘난 아브라함을 넘어서 말이죠.

나를 기생라합처럼 벌벌 떨게 만듬으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심판받는 화로다 화로다 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아무도 나를 구원할수 없구나

기존의 구원교리 신학지식도 성경지식도 십자가교리도

소위 오늘 나오는 예루살렘도 안된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즉 모든 구원의 장치들이 도구들이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타 죽는 것 밖에 없이

구원을 커녕 다 무용지물이더라 라는 겁니다.


이전의 것이지 새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죽음 속에서 예상치 못한 용서가 왔다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이유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은 것처럼 말이죠.

그럼 행함이 있는 믿음에서 행함은 뭔가?

 

그 행함이 바로 나를 심판하고자 일곱으로 심판하고자 바리새인을 타 넘고 오신

십자가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 이다는 겁니다.

 

졸지에 바리새인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 조차도 인간의 숙제로 말하는 그 마귀들을 의도적으로 까시는 이유도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 오늘날 삯꾼 목사들 말을 듣지 말고

주님이 직접 그런 삯꾼 목사를 타 넘어서 오시겠다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이전 것은 곧 처음 것은

기준으로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울왕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을 새롭게 세운다는 것은

 

누가 종말 곧 심판을 미리 앞당기는

끝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자 인가 라는 겁니다.

 

이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부 라고

새 남편을 위해서 꽃단장 한 신부 곧 새예루살렘이다는 겁니다.

 

기존의 예루살렘이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 있는 결과라는 기존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새예루살렘 말이죠.

 

그 새신부가 계시록 초반에 일곱에게 사로잡힌 일곱교회 이고

상대적인 기존의 유대인 곧 사단의 회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사단의 회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실천의 대가들이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족보에는 죽어도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고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1순위로 인정받는 자 이기 때문에

원인을 갖추었기 때문에 결과가 없는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3:30, 개역)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아 그럼 나중에라도 들어가면 될거 아니냐

늦게라고

 

그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너희들 곧 바리새인들이 때려죽어도 저 창기와 세리는 천국에 절대로 못들어간다고 단언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많은 교회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이 천국 가 있다면 나는 절대로 천국 안 갈련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말씀이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미끼를 창기와 세리로

맏아들에게는 탕자로 했다 말이죠.

 

아 그렇게 되니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그러니 인간들이 가고자 하는 천국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아무리 바리새인 신학박사들의 대가

실천의 대가들 조차도 말하는 천국은 다 가짜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만이 진짜 천국인데

그 진짜 천국은

기존의 천국관와 하나도 맞는 것이 일체 없는 모습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가는 모습으로써

전혀 낯선

예상치 못한

신학과 교리와 이론과 학문에

포착이 안되는 방식으로만 오신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하고

바리새인이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에도 이런 바리새인 같은 존재들을 예수님은

새신부 주변에 깔아서

그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시는 천국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들이 주변에 깔려 있으신 가요?

 

없다면

아 나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천국에 갇혔구나 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소위 종교라는 짐승의 수를 받은 종교가 퍼트린 천국에 빠져있구나 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빼내달라고 말이죠.

 

오히려 내가 이런 바리새인으로써 활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무리 봐도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습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뚱아리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이 십자가의 심판을누가 받고 있는지를 보시길 바랍니다.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바로 새 신부를 꽃단장 시키고자

십자가에 피 흘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전혀 무관한 분입니다.

참성전은 저 분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대신 저주 받는 대신 심판받는 분

남이 아닌 나에게서 죽임을 당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 분만이 주 가 되는 겁니다.

나의 신랑이 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원수인 죄인을 사랑하시는 십자가로 밝히 보여주신 분입니다.

 

다른 신랑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완벽한 성화됨을 추구하는 성화론자들이나

다들 신랑처럼 보이고자 하는데

다 지나간 것들인, 처음의 것들입니다.

 

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심판 받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오히려 심판 받을까봐 말씀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증거죠.

그래서 어릴적부터 다 지킨 율법을 절대로 남에게 줄수 없는

딱딱한 회칠한 무덤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저들과 대조되신 모습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정도로

넉넉한 사랑으로 저들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승리로

넉넉히 이기었느니라 라고

이미 선언하고

원인 없는 결과 라는 이 새 신부됨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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