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20: 1-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0: 1-15)

 


(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0:1, 개역)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0:2, 개역)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20:3, 개역)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20:4, 개역)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20:5, 개역)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20:6, 개역)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0:7, 개역)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20:8, 개역)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20:9, 개역)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20:10, 개역)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1, 개역)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20:12, 개역)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13, 개역)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개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0:15, 개역)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0:1, 새번역) 나는 또 한 천사가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20:2, 새번역) 그는 그 용,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결박하여,

(20:3, 새번역) 『㉡아비소스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20:4, 새번역)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20:5, 새번역)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20:6, 새번역)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20:7, 새번역)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20:8, 새번역)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20:9, 새번역)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20:10, 새번역)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20:11, 새번역)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0:12, 새번역)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20:13, 새번역)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 , '하데스'

(20:14, 새번역)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 , '하데스'

(20:15, 새번역)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성경말씀은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전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은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합니다.

 

아마 소위 종교라고 양의 탈을 쓰고있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외친다면

 

그 외침을 없애버릴려고 어떻게 해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앞의 시편 149편에서 주 라는 의미는

남이 아닌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주를 버리는 사건을 거침으로써

존재로써의 주 가 아니라

기능으로써의 주 라고 했다 말이죠.

 

존재의 주는 원인 있는 결과로

내가 백성으로써 믿어주는 백성의 의무를 다 할때에 주 가 주가 된다는 식의 존재개념입니다.

 

그러나 기능은 정반대입니다.

주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게 해서 주 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즉 인간이 여기서 개입한 공로가 없다는 겁니다. 행함이 개입이 안된다는 거죠.

거룩에 동참은 커녕 거룩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살인자로 죄인으로 원수로 나타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주의 기능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악마에게 율법의 네 배나 갚도록 해라 (다윗)
니가 그 악마다 이 놈아 (나단 선지자)

그러니 십자가를 거치는데 있어서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거리끼는 겁니다.

남이 아닌 나를 제대로 악마의 자식으로 들통내지 못하는 십자가는 가짜이다 말이죠.

자신들이 믿는 주가 존재로써의 주가 아닌

기능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주가 되고

자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믿고자 했던 주는
마귀로 판명이 나니까 사단의 회로 드러나게 되니

이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가면이 벗겨져 버리니


이 십자가만 어떻게 하면 안되는가 하는 것에 모든 것을 맞추고 있는 겁니다
.

십자가가 졸지에 검은 점으로써 빼버리고 싶은 잉여점이 되어버렸거든요. 얼룩 말이죠.

 

자 그래서 종교가 만약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외친다면

벌써 사라졌고 사라졌을 겁니다.

그런 어리석고 미련한 짖을 할 리가 없다 말이죠.

장사가 안될테니 말이죠.

 

소위 영적인 활동을 한다고 외치는 종교가 말이죠

 

말이 영적인 것이지 철저하게 육적인 것 밖에 모르는 겁니다.

우상인거죠.

 

우상이란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처럼 생명책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약속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근거로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말이죠.

그럼 우상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다 말이죠.

모든 종교가 그래서 짐승의 수를 받은 666이 됩니다.

 

666은 완벽한 거룩에 모잘란다 라는 겁니다.

곧 의문의 반복이다는 거죠. 완료가 없는 미완료 말이죠.

 

분명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단 한 개도 떨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반드시 다 이루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약속은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문제는 어떻게 율법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느냐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경험해 본바로는

소위 율법폐기론을 반대하면서 율법사수를 외치는 자들을 보면서

정작 그들에게서 율법을 지키는 자를 못 봤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외치는 저 구절 특히 성화론자들이 무지 강조하거든요.

율법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니 이미 율법폐기론은 틀려버린 겁니다.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9, 개역)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개역)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1, 개역)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개역)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3, 개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8, 개역)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 2:19, 개역)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 2:20, 개역)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 개역)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 개역)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 개역)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그런데 정작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렸다 에서는 반박을 못하는 겁니다
.

둘 다 문자를 붙잡고 싸우는데 있어서

언어는 권력이거든요.

정작 내용의 질 보다

외적인 양으로 곧 외적인 권력으로 언어를 장악하기 때문에


참으로 감사하게도 율법폐기론자를 공격하는 자나 율법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나

둘 다 마귀새끼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둘 다 문자를 따지고 있지

정작 예수님을 안 쳐다본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실재로 성경에 나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의 손에서만 죽도록 되어 있는 안식의 주인입니다.

 

왜 안식의 완성, 안식의 완성자 라고 안하고

주인 이라고 안식의 주인이라고 표현했는가에 대해서 무지 무지 신기했거든요>
너무 너무 특이한 표현 아닙니까?
즉 나는 너의 주인이야?가 아니라
너는 나의 백성이 아니야 라고 딴 주인을 염두한 표현으로 너무 너무 낯설다 말이죠.


즉 안식의 주인은 반드시 인간을 장악한 주인을 들추어내도록 되어 있는 주인이다는 겁니다
.

그러니 존재가 아닌 기능이지요.

오히려 기능은 존재를 들통내거든요

 

그러니 고맙게도 마귀와 마귀자식은 안식일을 지켜주어야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아야 하고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도 잡아야 하고
동정녀 마리아도 잡아서 돌삐 쳐 죽이는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겁니다.

율법 지키는 것이 졸지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모습이거든요.

마치 율법 폐기론자들이나 율법 폐기론자를 공격하는 자들이나
둘 다 문자를 지킬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말이죠
.

둘 다 존재만을 주장하니까 말이죠. 기능(사랑)이 없어요.
그래서 요란합니다. 울리는 꽹과리 입니다.
나 율법 지켰다고

십의 이조를 드린다고
이레에 두번 금식 한다고
어릴적 부터 시편대로 다 지켰다고 부자청년이 말이죠.


그런데 둘 다 안식의 주인에는 관심도 없고

또 한가지 중요한 기능이 뭔고 하니

존재를 허물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사랑이 없거든요.

즉 존재라는 우상인

약속을 못 지키는 마귀라는 가짜 주인을 들추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그들 둘 다
또 성경에서의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이나

존재에만 관심 두고 있지

기능은 안 쳐다보는 겁니다.

기능을 구지 성경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십자가의 영입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의 용서 입니다.
주의 인애와 자비를 안 쳐다보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써 긍휼을 바라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십의 이조 지켰다는 존재라는 둥
이레에 두번 금식드리는 존재라는 둥
안식일을 지키는 존재라고 자꾸 존재 존재
우상 우상
어릴적 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존재 존재 우상 우상만 주장하는 겁니다.

 

왜 성령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느냐 하면

이미 자신들이 쓰고 있는 용어로써 이미 언어로써 장악했기 때문에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거나 불편하지 않게

용어 문자를 순화 시켜서 이미 자신의 육체인 몸에 찰지게 감기도록 만들어 버렸거든요.

종교와 철학 곧 거짓선지자들은 이런 언어로 사람을 장악합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행함은 가능성이기에 불편하지 않아요 행하면 되거든요,

그러나 사랑은 무지 무지 불편합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었듯이
그 사랑에 졸지에 나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기쁨으로 내어줄 정도로

낯설기 짝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부자청년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라 라고
사랑하라 라고 
그냥 사랑이 아니라

원수
웬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부담이 되는 겁니다.


사랑 보다 부담스러운 것이 없거든요.

모든 것을 다 내어주니까 말이죠.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셨다 말이죠.
즉 매일 매일 공급받아야 할 정도로
칠에 칠십번 용서 곧 사랑 받아야 할 관계로써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원수이다 죄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얼룩이지요.


그런데 행하고 지키는 법으로 작용해 버리면

낯설지 않아요
익숙해요

지키면 끝 행하면 끝이지

사랑하고 자시고 할게 없다 말이죠.

살과 피를 먹을 필요성이 전혀 없어요.

성전을 헐라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가 전혀 필요치가 않아요.

얼룩으로, 불편함으로 작용하지 않아요

등에 쇠파리

또는 가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곱 교회라고 제가 어머니께 예배후에도 언급했는데요

사단의 회의 특징이 일곱 교회가 될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그 말은 일곱이 붙잡아서 머리로 섬겨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일곱 교회가 될려고 해요

거지 나사로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율법폐기론이든 그 반대론이든 둘 다 자꾸 자기가 직접 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안식의 주인의 기능이 뭔지 모르고

존재만을 자꾸 쭈물딱 쭈물딱 다루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이 실로암 소경을 쭈물딱 쭈물딱 다루듯이

존재로 파악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 되었다는 말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거든요.

 

원인 있는 결과로써 부모죄인가 자기죄인가를 따질때에

예수님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표현이 거부감과 낯설음과 불편함으로 작용케 되니

졸지에 이 마음껏 무시했던 실로암 소경 때문에

자신들이 미끼인 실로암 소경을 덮썩 무는 바람에

자기들이 마귀의 자식으로 들통나 버리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기능입니다.

 

시편을 마지막 한 편을 남기고 있는 가운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 등이 지혜문서로써 작용하니까

아예 다 지켜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나는 못 지키는 죄인입니다.

나는 헛됩니다.

나의 구원은 헛됩니다 라는 지혜문서의 기능 곧 지혜의 주 되심을 못보고

 

보는 것만 보는

확증 편향

듣고픈 것만 듣고 보고픈 것만 보고 믿고픈 것만 믿을려는 확증편향만 강해지는

그 미끼를 덮썩 물어버려서

말씀 자체가 미끼로 작용케 되니까 말이죠.

 

보이는 것 즉 얼룩

이 얼룩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기능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이 지혜문서의 주인이신데

안식일의 주인이신데

율법의 완성자 이신다 말이죠.

 

그러니 율법폐기론 교리론자든 율법폐기교리 반대론자이든

둘 다 율법의 완성자인 주인으로부터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모르는

얼룩으로 오시는 주님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인 마귀자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 일곱 교회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고른다 말이죠.

 

? 존재 곧 보는 것만 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얼룩은 모든 시선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고개를 돌려 싫어버린바 되어 안 볼란다 라고 해도

이미 잔상으로 인해 박혀 버린 시선이 바로

얼룩입니다.

 

일곱이라는 심판이 교회를 붙잡아서 머리로 섬기고 있는 겁니다.

마치 불 붙은 가시떨기 나무처럼

 

불이라는 심판 곧 일곱이

가시떨기나무라는 교회를 붙잡아서

 

타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는 그 섬김이 바로

 

주인으로써 백성을 섬기는 십자가의 지혜로 말이죠.

 

아 그런데 이것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니까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말이죠.

아 일곱 교회가 되라고요? 네 일곱 교회가 되겠습니다 라고

 

자꾸 바리새인 또는 사단의 회를 타 넘어서 일곱교회가 될려고 하니까

그게 바로 사단의 회의 특징이다 말이죠.

 

일곱교회와 대비된 사단의 회를 괜히 대조시킨게 아니다 말이죠

 

정작 일곱교회는 사단의 회를 타 넘을 필요가 없이

일곱 되신 심판의 주께서 사단의 회를 타 넘어 오셔서

섬기시고자 머리가 되시는 겁니다.

일곱이 머리이다 말이죠.

 

일곱을 머리로 둔 교회를 일곱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심판의 주

일곱이라는 심판을 주로 머리로 작용하는 기능에 저촉당하는 몸으로써의 기능이 교회다 말이죠.

 

그러니 발생적이며 우연적이지

 

존재적으로 고정화 된게 아니다 말이죠.

 

예수 안에 이미 기능하고 있다 말이죠. 존재 이전의 기능으로써 말이죠.

 

 

오늘 본문에

무저갱에 천년동안 갇힌 마귀를 통해서 어떻게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시고자 마귀를 풀어버리는 겁니다.

 

즉 빛을 말하기 위해서 어두움을 푸는 겁니다.

 

누가 주인 곧 주인공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이 깡패 17명을 풀어서

십 칠 대 일로 싸워 이기는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러니 이 내용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십 칠명의 깡패는 곧 사단의 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달인들로 나오는 겁니다.


그 구역에 예수님께서 등장해서

자기 백성을 빼내시는 겁니다.


괜히 안식일 잘 지키는 자들에게 가서
괜히 마귀들 보란 듯이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시는 겁니다.

구원의 뿔로 구멍을 뻥뻥 내는 겁니다.
안식일을 마구 마구 수셔대면서 구멍을 내요 글쎄 ~~

성전도 허물어 버리는 판국에 안식일 까정 남아나는 세간이 있겠습니까?????


(마 12:26, 개역)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7, 개역)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개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 실로암 소경을

그 손 마른 자를

안식일날 고치심으로써

안식의 주인되심을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그 실로암과 소경과 손 마른 자를 일곱 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손가락 백날 세워보세요 손마른 자가 어떻게 일곱이라는 숫자가 되는지?

아 손 마른 자 일곱 명을 데리고 오면 일곱교회가 된다굽쇼?

차라리 770명을 데리고 오면 완벽한 거룩이지 않겠습니까?

째째하게 겨우 손마른 자 일곱으로 일곱교회가 되겠습니까?

자 이렇게 주 란 진리란 초과잉적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단 한 명도 안되는 판국이다 말이죠.

오히려 반대로 상대적인 안식일날을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사단의 회 라고 규정하시는

제대로 확실하게 명료하고 또렷하게 보여주시는 안식의 주인이니까

반드시 이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이게 주인의 기능입니다.

 

내가 임금 삼고자 한다고 주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그건 우상이지요.

 

반드시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 살인을 당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진짜 주인 이다는 겁니다.

 

즉 계시록으로 치면

나는 사단의 회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 아니라

 

주여 저는 일곱교회입니다 저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라고 나올때에

주인의 진정한 기능은 그렇게 일곱교회가 될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도 일곱교회 중에 가장 칭찬받은 교회를 골라 잡아서

저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할때에

바로 진짜 주인은 그 사람들로부터 사단의 회라고 취급받아 쫏겨나는 자가

진짜 주인이다는 겁니다. 그런 기능으로 작용하는

기능은 십자가 지혜 뿐이다 말이죠.

지혜문서를 다 지키는 자에게서 못 박혀 죽는 십자가 지혜 말이죠.

그 사단의 회로 취급받은 예수님이 진짜 주인 곧 일곱이시다는 겁니다.

 

심판 주 이시다는 겁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살리려서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였던 자를 말이죠.

 

그러니 이 계시록은 이미 다 이루어진 겁니다.

 

앞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요

일점일획도 남김 없이 다 이루어진 겁니다.

 

 

그 완성된 십자가 사건을

미래완료로써 현재에 쳐들어와서 구성하는 겁니다.

미래는 덜 이루어진 미완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자신을 존재로써 자기 기준에서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한 거지

 

묵시에서는 즉 숫자화 된 일곱 에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미래완료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2000년 전의 33. 35?

검색해 보니 A.D 3047일 경 쯤이다고 하니 과연 그 과거냐?

미래완료에서 지금 현재 2017년에도 벌어지고

계속해서 벌어졌고 앞으로도 벌어지는

꽉꽉 빈공간이 없이 꽉 채우는

인간의 몸이 터져나가라고 쳐들어 오는 사건인데?

? 인간의 몸 자체가 가나안땅 천국이거든요?

그 천국이 침노 당하거든요.

일곱으로부터

 

십자가는 이 몸을 못 박고자 오는 겁니다.

 

 

이게 일곱의 기능이다 말이죠.

 

주의 기능이다 말이죠.

 

이 주의 기능에 상대적인 육의 역할이 있어요.

육체의 주인의 역할 말이죠.

 

아니 왜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둔 마귀를 푸는 겁니까?

마귀가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께서 마귀를 푸시는 겁니까?

 

바로 주의 기능에 반대의 일을 해야하거든요.

 

마치 안식의 주인을 못 보도록 안식일 지키는 짖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안식의 완성을 죽이는 역할 말이죠.

 

십자가라는 지혜를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고자

지혜문서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를 다 지켜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이 시편을 완성하는 꼴을 못 보도록 거부하고자 지혜를 지키는 겁니다.

탈무드가 그런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안식일 지킨 것이 오히려 오로지 단 한 인물을 겨냥한 살인과 거부로 향했듯이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오로지 이 십자가를, 걸림돌을 뽑아내고자 하는

원인 없는 결과로 작용케 되는 거다 말이죠.

 

? 생명책에 기록이 안 되어 있으니까

즉 행함책에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666이라는 미흡하고 모자라는 의문의 모호함에만 집요하게 집착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마귀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심판주의 시선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들은 다 사단의 회 인 겁니다.

 

그럼 진짜 교회는요?

존재로 존재하지 않고요

기능으로써 일곱에게 사로잡혀 그때 그때 발생하는 겁니다.

 

마치 40년 동안 간담이 녹아서 벌벌 떨었던 기생라합이

 

광야에서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대조를 이루고

또 자기 민족과 자기 백성의 신앙대상인 자기 신을 배신하면서 대조를 이루면서 말이죠.

 

이 기생라합이 일곱이 오른손으로 붙잡은 일곱교회로써

 

저 무저갱에서 풀린 마귀들과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정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체험했던 이스라엘과 달리

 

기생라합은 아무것도 체험한 것이 없이

오로지 이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

 

불리워진바 되고

찾으신바 된

 

 

따르릉 따르릉 내가 니 의사야 라고

휴대폰에서 기생 라합 씨 이시죠?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당첨이 되셨습니다 라고

 

 

아니 저는 개 같은 이방인인데요? 이스라엘 아닌데요?

 

네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이미 생명책에 기록이 되셨습니다. 라꼬

이것을 실행하시는 분이 바로 일곱되신 심판 주 이십니다.
지혜란 바로 마귀를 격동케 만들거든요.

천한 계집종을 왕비가 되도록 하는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잠 30:23, 새번역) 『꺼림을 받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과, 여종이 그 안주인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다.』

(잠 30:23, 공동)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가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잠 30:23, 쉬운)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 시집간 일과 여주인을 대신한 여종이다.』

(잠 30:23, 킹흠정) 『미운 여자가 시집간 것과 여종이 여주인의 상속자가 된 것이니라.』

(잠 30:23, 현대인)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과 계집 종이 자기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잠 30:23, 현대어)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막 돼먹은 여자가 신랑을 맞아들이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7,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 54:1』


(사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1, 새번역)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백날 안식일 지켜보세요 천한 계집종을 왕비 만들어낼 수가 있는가?

잉태한 적도 없는 여자가 자식이 많아 복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과연 율법을 지켜서 인지 말이죠?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게 되는 지를? 


죽은 자 요셉을 바로의 아비와 주로, 애굽의 치리자로 만들어 낼수 있는지?

(창 45:8, 개역)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얼마나 또렷하고 밝히 보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뭘 또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일방적인 선포에

 

선물을 받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말이죠.

 

이렇게 호출

불리워지고 찾은바 된 겁니다.

 

이것이 천국 혼인 잔치인 계시록 입니다.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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