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은 침략하는 자의 것이다. 빼앗는 자의 것이다

좀 의아할 것이다.

 

말씀을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인데

 

다들 반대하는 용어가 나와버렸다.


그 와중에 더 부정의 부정한 의미가 나와버렸다.

즉 빼앗지 못하면 결국은 당한다는 것이다
.

 

종교꾼들은 빼앗는다 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기분나빠서 이단으로 몰아갈테지만

정작 그 부정은 다시 부정의 부정으로 바뀐다.

못 빼앗으면 도리어 천국으로부터 당한다는 것이

이건 뭐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천국을 빼앗다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냐 라고 반발하다가

뭐 이제는 안 빼앗으면 천국으로부터 당한다고? 라고 은근슬쩍 발을 빼버리고픈 식이다.
실족치 않을 인간이 없으니 말이다.

사사기가 그래서 자기소견대로 행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들통내고 있다.

맞다 우리는 뭘 해도 안되는 놈들이다.

성화론이 얼마나 엉터리 논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천국을 빼앗지 못하면 당한다.

 

어떤 분이 질문을 했다.

 

사도행전 16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 말씀이

인간적 측면의 간구함인가?

아니면 성령의 이끌림 인가?

이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

 

주일에 말씀을 나누고 난 뒤에 갑자기 이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질문을 보고 바로 답변을 생각나는대로 적었지만

정작 나도 쥐뿔도 모른면서 천방지축으로 날 뛰듯이 답변을 했지만

가만히 보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셨다는 사실

그래서 지옥에 뛰어들어서

지옥에 있는 우리를 빼내시고자 지옥을 침략해서라도 지옥으로 갇히신다는 것

 

이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다.

우리가 알 바를 모르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은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옆에서 기도하신다.

 

인간의 실수로 단 하루의 깜방생활로 인해

지진으로 범죄자들이 탈출했고

그로인해 간수가 자살해야 하는 처지에

 

그 간수가 정작 진짜 갇혀 있는 죄인으로써

 

그 죄인을 부르시고자 구원자는 지옥에 뛰어들어서

이 천국시민으로 작정된 자를 빼앗는 것이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니 지옥에 뛰어들어서라고 이 간수 한 사람 건지기 위해서

모든 정황을 일부로 인간의 실수로 로마시민권인 사도바울을 잡게 했고

그 앞에서는 유대인들을 격동케 만들어서 가두게 만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자작극으로써

이 아무것도 아닌 간수 하나 건지기 위해서 벌리신 일이였다니

 

핵 소름

 

그러고 보니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개인의 종말을 어떻게 슬기롭게 지혜를 펼쳤는지도

결국 끝을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기생라합처럼 이 바닥을 뜯어내는

천국을 침략하여서 빼앗는

종말을 빼앗는 자는 종말을 가지게 되는

원인 없는 결과를 가지게 되는

 

아 이래서 인간은 안되지만

주님은 뭐든지 다 하시는

인간은 결국 따라해봣자

단지파처럼 에브라임지파처럼 결국은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쪽으로 가지만

주님의 새찬양은 바로 이 새것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버리게 하는

종말을, 끝을 결과만을 미리 앞당겨 땡겨버리는


뭘 해도 새 찬양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바울도 실라도 이 새 것을 믿어야 할 판국으로써

주님이 그 자살하고자 하는 간수에게 붙이셔서

본인들도 이 새것을 매일 매일 받아야(7에 70번) 하는 판국으로써

남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남에게 전도가 목적이 아니다.
이런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선물로 받는 도리어 구원받아야 하는 판국으로써
십자가로부터 전도 받아야 하는 판국으로써
살려주세요 라고 성령이 확 등떠밀어 버린 그 상황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뭍으로 나오다 보니 간수가 언제 내 다리 잡고서 함께 딸려나온 것이다.
누가 나를 등떠밀었지?

이것이 종말이다. 인생의 끝을 순간 순간 죽음으로써 맛보는 사이에
주님은 또 나 같은 죄인 하나 건지실려고
지옥에 또 뛰어드셨던 것이다.

종말이라는 주인공의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그릇으로

새 것을 담은 그릇으로 동원이 되는 것이다.

 

맞다 맞어

천국은 침략하는 자의 것이다.

종말은 침략하는 자의 것이다.

주여 어서 나의 끝을 미리 땡겨주소서 심판을 땡겨주소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이다.


그 천국을 그 종말을 몰고오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몰고오신 분이 아니였다면
휴 ~~~~ 누가 나를 건졌겠는가?

천국을 침략하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
종말을 침략하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
우리가 아니다 착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도리어 침략하신 분의 증상물 즉 노략물 전리품이다.
주인을 결박하고 새간을 빼앗은 도둑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이다.ㅋㅋㅋ.
 

어떻게 끝을 미리 앞당겨 땡겨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듣든 안듣든 상관없다.
이미 전리품으로써 증거할 뿐이니 노래할 뿐이다.
결과만 외칠 뿐이다.

모든 인간은 어차피 끝을 거부하니까 어쩔수 없다.
나도 그랬으니 신결쓸 필요가 없다.

 

이 심판이라는 종말이야 말로 저 죽어가는 자들을 건지는 유일한

구원자의 메시지가 아닌가?

 

메신져는 우체부는 책임이 없다.

그저 통보만을 할 뿐이다.

 

여러분 새 것이 왔데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벌써 왔데요

이 세상은 이 새 것에 의해서

바닥 뜯긴데요.

어서 어서 종말을 침략하세요

종말을 빼앗으세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자가 없다.

 

예수님 홀로만 우리의 죄악을 빼앗고자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다.

희생의 죽음 아니고서는

 

죄를 죽음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이룰수 없는 십자가의 피 용서이다.

 

그러니 끝을 미리 봐버린 자

종말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봐버린자는

 

현재의 눈에 보이는 허깨비 보다

실상을 아니외치고는 못배기는 것이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이다.

 

그 허구의 인생의 끝을 미리 땡겨서

바울과 실라는 찬양하고 있다.

 

찬양이란 시편이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죽음도 마귀도 이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 라는 외침을 막을수가 없으니

 

마귀의 끝도 우리의 끝도 미리 당겨버려서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놀라운 찬양을 하게 만든

주님의 놀라운 탄식이 나의 기도 보다 옳을 수밖에 없는

소름끼치는 핵소름의 복음을

 

따악

허걱

깜짝 깜짝

 

경끼를 일으키면서

새삼 놀라는

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쁜소식이다.

 

 

(11:1, 개역)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11:2, 개역)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11:3, 개역)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1: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11:7, 개역)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11:8,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11:9, 개역)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1:10,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11,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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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할렐루야

사도행전 16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 말씀이

인간적 측면의 간구함인가요?

아니면 성령의 이끌림 인가요?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A) (16:20, 새번역)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16:21, 새번역)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22, 새번역)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16:23, 새번역)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16:24, 새번역)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16:25, 새번역) 한밤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16:26, 새번역)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16:27, 새번역)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16:28, 새번역)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16:29, 새번역)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16:30, 새번역)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16:31, 새번역)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6:32, 새번역)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님의'

(16:33, 새번역)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16:34, 새번역)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16:35, 새번역) 날이 새니, 치안관들은 부하들을 보내어, 그 두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령하였다.

(16:36, 새번역) 그래서 간수는 이 말을 바울에게 전하였다. "치안관들이 사도님들을 놓아주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16:37, 새번역)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우리를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공공연히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내놓겠다는 겁니까? 안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합니다."

(16:38, 새번역) 관리들이 이 말을 치안관들에게 전하니,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서 두려워하였다.

(16:39, 새번역) 그래서 치안관들은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데리고 나가서,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청하였다.

 

 

먼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는

사건이요

기능입니다. 즉 영의 활동이지

육의 활동은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의 기도는 없습니다.

기능의 기도인 겁니다. 곧 성령의 놀라운 탄식 말이죠.

 

그래서 결과 적으로 보면(답을 미리 반칙으로, 원인 없는 결과로 보면. 곧 기능으로 보면)

어차피 그 다음날 풀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35절부터 쭈욱 나오죠


(
16:35, 새번역) 날이 새니, 치안관들은 부하들을 보내어, 그 두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럼 왜 하룻밤에 매맞고 옥에 갇혀져야만 했을까요
?

그것은 이 간수 하나 건지기 위한 주님의 조치입니다.


마치 지옥의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지옥으로 들어가 빼내시는 것처럼

맞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건지시는 일에 주님은 여전히 목숨 걸고 충성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마치 고멜을 건지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가 모든 명성을 버리고 결혼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처음 사랑 곧 원수사랑인 십자가의 피 용서요 바로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서 빠져나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말이죠.

몇 분전에 포항에서 지진 3.7이 일어났다고 문자가 오던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만 건물이 뒤틀려서 옥문이 열렸다 말이죠.

그럼 도망쳐야지요? 그런데 사건은 그 뒤에 있습니다.
진짜 사건은 지진이 아니라 그 뒤가 말도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 이다는 겁니다.
이 결과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져야 했던 겁니다. 지진도 말이죠.

 

간수는 알았습니다. 아 죄수들이 다 도망치고, 나는 감당을 할 수 없고

결국 나는 죽었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주변의 환경에 놓여져 버렸으니 말이죠.

 


그런데 말도 안되게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앞서서 미리 기도했던 겁니다
.

인간의 노래나 기도가 아닌거죠.

주님의 놀라운 탄식이 덮쳐져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찬양이란 사건이다 말이죠.

말도 안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요 선물입니다.

 

어떤 선물?

저 자살할려는 간수 하나 얻을려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로마인에게는 로마인으로

간수에게는 죄수로

부요한 자에게는 부요한 자로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로

 

보내주신 겁니다.

 

(고전 9:19, 개역)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개역)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1, 개역)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2, 개역)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5, 개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자 그럼 사도바울 본인도 이 찬양이 벌린 사건을 믿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자기가 노래해서 기도해서 벌어진 원인 있는 결과

존재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찬양이 사도바울과 실라를 찬미토록 입을 벌리도록 했고

주의 놀라운 탄식이 사도바울과 실라는 기도케 한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먼저 말이죠.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내용물이 후차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 곧 사건이 벌린 일이기에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이나 개혁주의 등등의

오늘날 교회는 자꾸 인간에게 숙제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니까

 

역사로, 시간 순으로 봐야 하기에

구원을 자꾸 개인 구원으로

간수 한 명의 개인 구원으로 해석한다 말이죠.

 

간수는 이미 벌써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이라는 결과가 덮쳐졌기에

바울과 실라는

사람들의 오해와 실수로 인해 두들겨 맞아야 하고

또 감옥에 잡혀야 하고

심지어 큰 지진이 일어나 다들 도망치는 가운데서 도망칠수 없도록 되어 있는

 

기능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막았던 거죠.

 

그리고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감옥에 가둔자들이 행정실수의 처벌을 받을까봐

어서 어서 나가도 된다고 청하고 청하더라 말이죠.

 

그럼 왜 간수가 이 사건을 격어야 합니까?

성도는 또는 사도는

또는 성령 받은 자는

사건을 유발하는 사건 덩어리입니다.

곧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입니다.

피 사건을 터트리는 미끼로 작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간수는 구원받았지만

사도바울이 귀신들린 여자 점쟁이를 고쳐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그 점쟁이를 뒤에서 조정하던 돈 포주들은

오히려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이 사도를 곧 성령 받은 자를 못 알아 보는 겁니다.

 

역시나 간수 또한 무슨수로 알아먹겠습니까?

그런데 알 수밖에 없도록 긍휼이 덮쳐지니까

자살할려다가도 멈추게 됩니다.

? 창세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었거든요.

 

이렇게 미움 받기로 작정된자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를

둘로 나누는 십자가의 긍휼을

 

십자가의 피 용서는 매일 매일 사건으로 터트리는 겁니다.

 

피로 사셨다고 간수를 빼내시는 겁니다.

구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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