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도행전 ; 소리 없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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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교재

 

- 사도행전 강해 -

 

소리 없는 현실

 

서론

 

1. 경전의 시대

 

꿈은 탈출의 들썩임이다. 다수가 눌려대는 그 질식의 상황 속에서 홀로 서려는 것이다. 그런데 힘의 실재성은 낮에는 언어의 다발로 나타난다. 개개인이 언어를 주고받는 것은 간직하고 있는 힘을 발산중이다. 하지만 균형적이지는 않다. 힘 쏠림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그 사람 고유의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소속된 바탕의 차이 때문이다. 뒤를 캐보자. 거기에는 언어형식으로 다져진 힘의 원형체가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경전經典이었다.

 

본인들이 궁극적으로 내세울 권위 있는 경전이 없다면 타인과의 힘겨루기에서 달린다. 따라서 자신이 기대는 권위의 확고함을 두둔하기 위해 역사를 증빙자료로 제출하려 한다. 역사가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최종 권위를 수호하고 새롭게 발굴하기위해서이다. 역사는 경전 을 감싸고 풀려나온다. 신적 권위로부터 힘을 끌어온다. 이렇듯 정신적 지주가 없는 역사는 없다. 중앙에 고정 시켜 놓은 경전의 절대적 가치는 역사가 지켜준다.

 

과연 역사 중앙에 신적 권위를 가진 경전이 있을까? 단지 은밀하게 감추어놓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사의 유령이 아닐까? 역사는 증명에 나서면서 동시에 자체 검증을 벌린다. 의심자와 이탈자는 색출하고 정죄하고 또한 포섭한다. 역사란 바로 이런 수완들의 사례집이다. 각가지 계열들이 생겨나고 눈치껏 대충 결집되어 있다.

 

거짓 믿음은 정통주의자들을 당연히 불쾌하게 만든다. 배신자를 색출하고 역사와 전통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가 벌리는 자기현혹작업이다. 역사가 거짓을 추려낼 수 있는 자정능력을 지니고 주장하는 있는 이유는, 무기력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사생활에 활기를 채워주기 위해 역사가 선동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 사회를 가로지르는 대립의 선이 각 주체의 내부까지 파고들면서 역사는 자극이 되고 그것을 부지런한 신의 활약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신은 이런 식으로 역사를 통해 자아-이미지에 노크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이 신과 교류하는 매체다. 따라서 정통주의자들은 역사를 끌어안는다. 현 시대에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자로 행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길고 인생은 짧다. 변동 사항이 멈추지 않는다. 살아생전에 본인이 본인의 신앙을 의심한다면? 어설픈 대리자가 신의 절대성을 훼손한다면? 후대 역사가 본인을 거짓 신앙가로 규정한다면? 역사가 최초도 아니요 최후도 아닌 이상 악순환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절대성을 띠지 못한다.

 

신은, 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역사를 준비하셨다. ‘거짓 믿음을 판정하겠다고 진행하는 역사 자체가 거짓 믿음의 모체로 변모해 가는 점을 하나님은 증명하신다.

 

내 가족의 역사, 내 교회의 역사, 내 기업이나 단체의 역사, 내 국가의 역사, 내 민족의 역사를 증명해 주기 위해 나의 역사 만을 최종 인정하는 신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거짓 믿음이다.

 

내가 있기에 신이 있다는 논리다. 안쪽으로 사라진 신이 바깥쪽으로 나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이다. 내가 곧 나타난 신이라는 의식으로 무장된 것이 인류의 역사다. 경전이나 역사는 구실에 불과하다. 정작 인간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그 신이 곧 자신이기 때문이다.

 

2. 대규모 연대성

 

역사는 현대에 이르렀다. 현대에 와서 역사를 구성하는 모양새가 달라졌다. 경제적 주체, 경제적 자립이 우선 목표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결코 정신적 주체 위주로 살 수 없음을 알았다. 종교보다 돈이 우선인 것이다. 경전과 관련된 언어들이 사회에서 쇠퇴하고 경제와 관련된 언어들이 소통의 주류가 된다. 돈을 연거푸 제공 못하는 역사와 전통은 지켜줄 가치가 없다고 본다. 돈과 경전을 연관 지울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다. 역사가 숨겨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효용성 가치의 나열만이 역사가 된다.

 

인간들은 스스로 단일 기획에 나선다. 즉 자신들이 중심을 차지하려 한다. 특정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계 전체가 단일한 의미를 지키려고 서로 곁눈질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막연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서로가 꾸는 꿈이 대체로 동일하다는 말이다. 주고받는 언어의 원천지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다발이 인정하지 않는 한 진리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식으로 어느 새 연대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개인은 위험하지만 연대는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민족 특유의 전통을 고집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 생의 만족이란 의학적 진단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다. 문화의 차이나 이질성과 무관하게 병에 걸리면 행복할 리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근무 환경 조건 속에서 건강한 몸도 마찬가지로 다루어진다. 매일같이 근무시간 기록표에 사인하고, 비개성적 지시와 일련의 지령을 부여받고 살면서도 그 생활로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세상이 너무 빨리 달린다. 안정된 생활환경을 붙잡고 있을 수 없다. 눈치껏 같이 바뀌지 아니하면 지금의 소박한 삶의 터전마저 강제 철거당한다. 즉 역사 변화에 합류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대규모 일체성에 현대인들은 쫓기고 있다. 도구, 기계, 재료 등 사물과 함께 특정 사물을 생산하게끔 하는 명령받는 한 그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객체가 되어 있다. 본인이 죽고 사는 것은 전체로 볼 때에 하등 중요하지 않다. 전체 사망율과 출산율을 측정하는 통계자료로 활용될 뿐이다. 익명적 존재로 다루어져 소리 없이 세상 속에서 사라진다.

 

집단경험에 같이 휘돌린다는 것은 개인적 자존감은 실패했다는 뜻이요,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해서 언제나 이사를 각오해야 하는 상품으로 전락한 존재라는 말이다. 조작가능한 인간이 환영받고 기계로 다루어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팔려나간다. 세상은 도박판이요 거기서 인간은 판돈이다. 평생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살벌한 우연일 뿐이다.

 

3. 성경이라는 이름의 꿈의 언어

 

언약이 꿈을 통해 침투하는 경우가 있다. 야곱의 꿈이 그러하고(28:12) 요셉의 꿈은 빈번하다.(37:5,9/40:5/41:1) 꿈은 육의 입장에서 볼 때, 외부 사건이다. 특히 할례 언약은, 외부 언약에 직접 육신에 손대게 된다. 곧 육적 이미지를 끊어내는 작업이다.

 

할례의 끊어냄 이미지는 유대 역사 속에서 묵시적 경전을 통해 발산되었다. 유대주의의 종말론적 문헌에서는 세 가지 주제가 등장한다. 압제하는 이방제국의 패배,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 순교자들의 옹호와 보응이 그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심판할 것이라는 잠재적인 암시가 숨어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대적들을 대항한 것처럼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나타날 것이다 는 것이다. 보복의지가 강력하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2:17-18)

 

말세란 기존 역사적으로 이어 오던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2:19-20)

 

사물의 사라짐은 그 사물에 붙여 있던 언어도 같이 소용없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새로 등장된 세상을 위한 언어가 기존 언어를 대체한다. 이 언어는 현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을 품고 있다. 이 개념으로 인하여 예언은, 역사를 신봉하는 현 세상으로부터 강제로 퇴출당한다. 추방당한다. 무시당한다.

 

그러나 성경에 들어 있는 낱말들은 고집스럽게 이 부정성을 붙들고 있다. 이 부정성이 지켜보는 것은 우상숭배 현상이다. 언어의 부정성은 상호 이해를 차단한다. 설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부재(不在=없음)를 부재로서 체험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헛것이고 원래 없는 것이니까!(41:29) 세상은 없어져야 될 것을 역사에 실어서 섬기고 왔다. 헛것을 운반해 온 것이다.

 

낱말들은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낱말들은 부재의 한복판에서 사물들이 되살아나도록만드는 힘을 가진 부재의 지배자이다. 또한 낱말들은 자기를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실현시킨 총체적 안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 힘이 있다. 낱말들은 무효가 되면서 총체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그 낱말 자체를 파괴해서 영원히 총체성을 성취해 낸다.

 

지금까지 확실해 보였던 현실은 말들끼리의 끝없는 연결이 대신한다. 낱말들로 구성된 성경말씀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 세계나 이 우주와는 달리 무한한 불만족스러운 해석으로 이끈다.

 

성경의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리 자신을 지켜봐서 낯선 느낌을 준다. 단순히 한 낱말이 아니라 그 낱말 속에 있는 모든 말들이 그 낱말을 따르면서 다른 낱말들을 포함하는 모든 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절대자의 눈에 홀려 끝없이 늘어선 천사들의 사열을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에 대한 성경의 저항은 원래부터 있어왔다. 인간들의 이해에 동조하지 않는 기능을 발휘하면 나열되어 있는 낱말들의 무한한 연쇄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제 자신을 한계를 지적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지만 죽음 속에서는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이 불가능성은 근원 없는 공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다. 죽음은 당연히 나에게 속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개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의 죽음은 나 자신이 흩어져 버리는 경험에 맡겨 던져 버린다.

 

죽음을 통해 힘을 얻거나 부정을 통해서 실천하는 나를 사유의 중심에서 빼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하나의 예언의 언어가 된다. 나에게서 나를 가리켜 라고 말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에 의한 꿈과 예언은 나를 죽게 한다. 개별자로서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그것이 곧 주의 일이요 성령의 일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이 점을 보여준다. (7:56-60)

 

죽음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수동성을 취할 수가 없다. 꿈과 예언이 나서야 한다. 여기서 언약의 자유로운 이동이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서 언약이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언약은 새로운 몸을 만난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권력이라는 익명의 목소리의 대변자가 된다.

 

그를 향한 나의 운동. 그란 내 자리를 차지하는 침입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란 흔히 말하는 3인칭 가 아니다. 여기에 다른 언어 경험이 필요하다. 공동체를 위한 언어다.

 

4. 근거가 보이지 않는 공동체

 

방언은 개인과 개인의 소통에 필요한 언어가 아니라 도리어 개인의 의견 피력과 설득이 무력화되는 환경에 의해서 나타나는 공동체를 위한 언어다. 즉 정보 교환이라는 일상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낳는 언어이기에 공동체는 성령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하여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고 공동체가 나 자신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일하심 앞에서 성도는 늘 무지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새로움과 낯섦은 성령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리 알게 되면, 인간은 자기 빼놓고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지배해버린다. 이는 자기를 위한 세계. 공동체가 사라진다. 성령의 공동체는 영적인 성만찬으로 통일된 세계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연결된 공동체이다. 그 안에서 모든 성도는 연합되고 합일된다. 그 안에서 성도는 매일같이 자아성을 잃어버리고 새롭게 자기 위치와 기능을 주님과의 연계해서 부여받는다.

 

마땅히 형제도 제공받는다. 이는 정치적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늘 나를 위함을 상실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의 평등도 없다. 타인과의 직접적인 대조와 대비도 성립되지 않는다. 비교할 주인공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데 뭉쳐야만 공동체가 성립된다는 시각은 여기서 작별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본론

 

예수님이 자신의 땅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룬 새 언약이(누가복음 22:20) 옛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여호와의 언약의 일관성에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지향하는 바를 비로소 제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이다.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바가 인간의 무능과 부족과 타락성 때문에 파기된 것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찾아 온 여호와에게 기만당했는가 아니면 또 언약을 남기신 분이 스스로 언약 상대자의 부실 때문에 스스로 언약을 철수해 가 버렸는가 그럼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분도 상대의 부족에는 두 손 들고 말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1:6).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 내용은 그 언약의 설립 뿐 아니라 그 전달과정까지 나아가야 충분히 그 값어치를 알게 된다. 역사의 계속적인 존속의 이유가 여기 있다. 역사란 언약의 본모습을 마음껏 발산하는 시간적 영역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죄의 진척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또 다른 가치는 없다.

 

피조세계는 왜 여호와께 버림받아야 하며 그 가운데서의 구원이 왜 예수그리스도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가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여호와의 언약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노아와 맺은 언약의 목적이 여기 있다. 이스라엘 언약을 위한 질서 있는 배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창세기 8:22/ 시편 19:1-6/ 로마서 10:18).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40일간 제자들과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다고 되어 있다(1:3).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란 이스라엘이 고대한 언약의 목표지점인 여호와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리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옛 언약 입장에서 고려된 내용이지 결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란 없다. 그들은 그런 세계를 고대하지도 않는다.

 

결국 이 말은 언약의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란 누구에 의해서 전달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이스라엘뿐이다(1:4). 1:3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이미 성취된 부분은 사도들이 전달하는데 그냥은 전달될 수 없고 능력이 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어떤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과 사건을 전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으로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고 그럴 때 비로소 옛 언약과 연관성을 갖게 된다(1:8에서 증인이 갖는 뜻이 중요하다).

 

교회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들 증인들이 선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될 사항은 옛 이스라엘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비로소 이 시대에 일관성 있게 달성되었다 하는 것이다. 옛 언약을 도외시하고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말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를 이해할 때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본질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3:23/ 15:16-19/ 18:10/ 에베소서 2:11-22).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간다고 해서 중심이 그렇게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쪽에서 이쪽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 안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비어 있던 한자리의 제자석은 제비뽑기로 채워 12를 맞추어 놓은 것과 각 나라와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한 그 날에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예루살렘의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선포하고 전달하여 그들 지방에서 제2의 제3의 예루살렘의 사건을 반복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조치이다.

 

성령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내용의 사건이다 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이렇게 볼 때에 비로소 교회가 교회를 나타내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기관의 타당성을 가지게 됩니다(14:22-23). 결국 사도란 예루살렘에서 보내지 않는 자는 정식으로 사도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옛 이스라엘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9:26-30,1:18/2:1).

 

그리고 그 사도들이 인정해주지 아니하는 감독이나 장로들은 있을 수 없다(20:28/에베소서 2:

20).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질 모든 일처리는 참된 이스라엘 모습을 역사 안에 나타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역사에서도 그 초월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할 수가 있다. 그 초월성의 기반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역사적 묵시성에 있다.

 

여기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본다.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는 교회가 아닌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아니 될 수 있을까? 그것은 人子로 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인자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역사적 존재들의 연합에 불과해서 비-묵시적 교회가 된다.

 

교회의 묵시성은 언약의 역사성과 상호 모순될 수가 있다. 즉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볼 때는 이는 역사적 단체로서의 다음 단계의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이 아니면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자로서의 주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다니엘 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 묵시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인자와 교회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교회는 분명 현재를 위하여 존재한다. 인자는 현재에 있어 만유의 주가 되셨다. 또 주로서 온전하고 합당한 영광을 미래에 다 차지하실 것이다(요한 12:27/ 베드로 전서 2:9).

 

옛 언약 상황 아래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여호와의 형상을 가져야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예수님을 공격하고 수난을 제공할 역사적 실체와 주체성을 교회 곁에 불러 모으게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무리들이다.

 

마치 여름밤의 야외 조명등 같다. 온갖 수풀 속의 벌레 나방들을 이 조명등 불빛을 향하여 다 기어 나온다. 그래야 모든 역사에 대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나타내고 입증할 수가 있다.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라져 가는 역사 속에서 새 언약이 지닌 의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되고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공생애의 길을 가도록 요구받은 성령으로 인해 결합된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이 하는 역할 때문에 예수님이 보상으로 마련한 그 상급과 기업에 참여되어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진 자들이다(마가복음 3:31-35).

 

그러면 여기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어떠할까? 축약해서 교회와 주님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관계는 새 언약 관계로 묶였다. 새 언약 관계는 옛 언약이 목표한 모든 기대가 다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와 주님관계는 다윗언약으로 말해서 왕과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백성의 관계이다.

 

사도바울은 창조언약에 빗대어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보고 있고 또 모세언약에 빗대어 아버지와 장자의 관계로도 보고 있다. 어쨌든 교회는 역사를 초월한 존재가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은 주님을 교회에서 보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새 언약을 포기하면 교회됨도 상실되고 동시에 세상은 주님을 놓쳐버린다. 그러면 주님은 자신의 주되심의 완성을 위하여 다른 방식의 교회로 나타내게 하실 것이다. 이는 교회의 소멸이 아니라 교회의 이동이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5).

 

주님은 영원 전부터 교회 즉 언약의 상대자를 예정하고 선택했지 어떤 한 인간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을 보여주지 않고도 살아가는 인간은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 하에 새 언약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고 또 나타내는 그 자가 바로 영원 전 부터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다. 예정론을 자기 입장에서 확증하지 말고 언약 중심에 서서 발견해야 될 개념이다.

 

거기에는 인간을 자기의 성전으로 집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형상이 담겨 있을 것이다. 교회란 묵시를 위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역사를 고발하고 또 허용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를 보내고 또 그 사도가 장로나 감독을 세워 교회를 감시케 하신다.(사도행전 14:23-24/ 20:28).

 

양을 친다는 말은, -복음적이며 비-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스며들지 않기 위해 진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해서는 누가 사도가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요구된다. 소위 사도와 사도 후 시기의 장로나 감독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해서 다 사도가 되는가 하는 점과 어떻게 해서 12제자 중 하나가 아닌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정리되어야 된다.

 

복음을 전한다고 다 사도가 아니다. 집사의 직분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12사도만이 사도가 아니다. 12사도도 이방전도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특별히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란 분명 증언과 관계있습니다(사도행전 1:8). 증인이란 부활의 목격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을 상호연관 시키고 그것을 통해 어떤 하늘의 비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진 자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자삼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19-20/ 로마서 16:25-26). 스데반 같은 경우에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사도라고 부르기 곤란할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 선택이 그들만이 사도로 포함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12제자의 선택이 무슨 의도로 선택한 것일까? 또 그 중의 한사람은 왜 사도에서 탈락 당한 것일까?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시대에 있어 어떤 기초를 마련하고자 함이다(에베소서 2:12-20). 옛 이스라엘을 부활의 차원에서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완성을 교회를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12제자의 선택과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사건 등은 장차 교회됨의 모델이 된다. 다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육신과 그들의 육으로 만남을 통한 선택이었지만 사도바울의 경우와 다른 일단의 사도군들은 부활하신 주의 입장에서 육신의 그들은 선택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자에게 다 공개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자에게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보았다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가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선택의 의미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6:19).

 

그것은 구원, 곧 옛 언약의 완성이 죽음과 타락된 아담의 역사와 율법으로 부터의 주 예수의 인도함을 인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도에 기초함은 교회 자체가 또한 사도성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는 또한 언약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 언약성의 확산을 통한 새세계를 시도한다(사도행전 :15-2:4). 각가지 은사를 주지만 그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기능들이다(고린도 전서 12:1-4).

 

성령님의 이러한 적극성은 세상 종말을 알리는 일을 유발하는데 교회가 이 일을 보여준다. 교회에 대항하는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 가운데서 언약공동체의 분명한 자기 모습을 찾아 가도록 한다.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요한복음 16:8-11/ 에베소서 2:21-22/ 4:15-16).

 

교회의 임무란 이처럼 새 언약을 드러내는데 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어떤 식으로 새 언약의 모습을 보일까? 그것은 고난이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모델로서의 고난이다. 여기에서 증인의 증인됨의 주체성이 밝혀진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조사해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 생애에 어떤 유사점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듯 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구조와 사건의 유사성을 보게 되면,

 

누가복음 사도행전

1:1-4 데오빌로에게 드리는 헌정사 1:1-2

3:22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심 2:1-13

4:16-30 첫설교 2:14-40

5:17-26 중풍병자가 치료받다 3:1-10

7:1-10 백부장이 예수님(복음서)과 베드로(행전)10:-23

자기 집으로 초대하다.

7:11-17 과부의 아들의 소생 9:36-43

9:51-19:28 예수살렘에로의 수난여행 19:36-43

22:5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체포되다 21:30

22:63-6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매질을 당하다 23:2

22:66/23:1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에 대한 23-26

8,13 네 번의 재판

23:4,14,22 세 번이나 무죄 선언을 받은 예수님과 바울 23:28/25:25/26:31

이번에는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바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봅시다.

(1) 베드로의 장 (1-12)

(2) 바울의 장 (13-28)

베드로의 장 바울의 장

앉은뱅이 거지의 치료(3:1-10)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14:8-11)

베드로와 마술사(8:14-25) 바울과 마술사(13:4-12/19:13-19)

다비다 혹은 도르가를 살림(9:36-43) 유두고를 살림(20:7-12)

베드로의 수감(4:1-22/5:17-42) 바울의 수감(16:16-40)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12:7-11) 바울의 기적적인 출옥(16:26-34)

예루살렘에서 매 맞은 베드로(6:40) 빌립보에서 매 맞은 바울(16:22-23)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시도(10:25) 바울을 경배하려는 시도(14:8-18)

스데반의 돌 맞음(7:54-60) 바울의 돌 맞음(14:19-20)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베드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울

(15:7-11) (15:12)

성경을 연구하는 내시(8:26-40) 성경을 연구하는 베뢰아(17:10-12)

사도들이 계속에서 설교하도록 천사가 바울이 계속해서 설교하도록 환상이

격려함(5:17-21) 격려함(18:9-11)

베드로가 유대적 의식을 따름(3:1) 바울이 유대적 의식을 따름(18:18/

21:23-26)

산헤드린 앞의 베드로(4:5-22/5:22-42) 산헤드린 앞의 바울(22:30/23:10)

베드로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5:15/16) 바울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28:8-9)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눈멀게 함

저주하여 죽게 함(5:1-10) (13:8-11)

 

위와 같이 예수님의 사건의 반복성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예수님의 초월됨이 역사성 안에서는 고난으로 계시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의 초월성이 같은 고난으로 증명되게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바로 새 언약의 초월성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의해 참여된 셈이 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아니라 승천사건에 있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역사의 질을 바꾸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새 언약에 있어 승천은 예수님만 역사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님을 선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자의 보내신 자도 그 차원 안에 있음을 공포한 일이다. 또 그러한 묵시성은 역사 속에 어디에서 공통성을 갖는가 하면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빠뜨린 그 세력에 의하여 동일한 고난을 지닐 때이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으로 데려간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승천케 하므로 역사를 초월한 분임을 증명시킨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님은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과 생애를 반복하도록 하시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운명을 역사를 초월하는 운명으로 마지막 날에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한 조치를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님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사건의 증인들인 것이다. 여기에 선교나 전도의 본질이 있다. 그들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전하는 그 목격된 사건을 위하여 고난도 함께 각오해야 했다(14:22). 그럴 때 비로소 증인 노릇을 한 셈이고 이것이 선교다.

 

선교란 포섭이라든지 인력의 동원이 아니다. 선언이며 심판의 공표다. 앞으로 남은 새 언약에 속한 마지막 사건인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지속 시켜나가는 것과 같다.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신 것처럼 이제 그 새 언약이 역사를 바라보면서 선언하는 바는 옛날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가 이스라엘을 낮아지게 함으로 그들도 만유의 왕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 옛 언약의 성취로써 새 언약의 의의가 살아난다(고린도전서 3:21-23

/요한계시록 20:6).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서 새로운 종말을 경험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로마, 그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종말의 현상이 발생되고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남은 자들이 등장된다. 이처럼 공간과 시간, 이것은 새 언약을 나타내 보이는 영역으로 아직도 존속되고 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새 언약에서 바라본 역사의 의미를 생각한 동시에 교회가 등장 되었다고 한 그 자체가 예수님의 새 언약을 통한 사역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교회란 증인들이 고난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사건을 선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편에서 예배와 선교와 교육과 교제를 잘 섞어서 세워 보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종교 단체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주어지는 것이지 땅에서 그 사건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결론

 

사원에 갑자기 난입한 표범이 의례를 계속 방해하는데, 어느 순간 표범의 난입 자체가 의례의 한 부분으로 권력자가 전환시키자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그다음부터는 의례 자체의 한 순서로 기대하기조차 한다. 진리 조작은 늘 이런 식이다.

 

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유대교의 환경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예수님을 신격화하므로 서 초기에 이위일체二位一體의 사상으로 무장했다.(고전 8:4-6) 신에게 하듯 예수 그리스도에게 찬미를 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각각 한 분이라는 표현을 동등하게 붙인 것이다. 이로서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차별화를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 모양새는 이성적인 권력 조형작업을 거치면서 항상 거짓으로 다져진다. ‘살아 계신 분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뿐인 정보 전달은, 권력처럼 퍼지지만 거기에는 어떤 본질도 갖지 않으며 모방과 모방만 계속 낳는다. 역사를 통해서 관계와 관계를 무한정 이어나갈 뿐이다.

 

여기에 살아 있는 말씀은 새로운 새로운 언어 질서로 작용한다. 이는 가시성의 질서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리는 것이다. 눈으로 목격이 가능한 신의 현존성이 아니라 왜 그분은 침묵하며 왜 그분은 부재하는 것처럼 활동하시는 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앙이 조성되지 않으면 신앙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고민해야 하고 아파야하고 다쳐야 하고 좌절해야 한다. 복음 없는 세상의 지옥성을 경험해야 한다. 부재(不在)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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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십여수 요약

 

<수련회 요약>

 

1강 무슨 일 있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1:10)

 

고요하게 그냥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 천사 둘이 나타나게 된다. “천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천사가 뭔가 일을 시작해버리면 인간들은 이것을 따라가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인간들이 천사 둘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 쪽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인간 쪽에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천사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세계 바깥에 있는 존재, 외재성이다. 외재성인 천사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천사와 우리가 하는 뜻이 같을 때는 천사는 천사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되는데, 그런데 천사와 우리가 하는 뜻이 다를 때는 없애든지, 회개하든지, 항복하든지 해야 되는 것이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1)

 

천사가 등장했는데, 등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올라가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다른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위로 올라가면 밑에서 볼 수 없는 다른 환경을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올라가심으로 올라가신 분이 보는 안목으로 하시는 말씀은, 인간 너희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셨으니 인간세상을 새롭게 파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가지고 역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일들을 연결시키면 역사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뽑아낸 역사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연결시키는 방식이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용납할 수 없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절대로 모든 세상역사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의식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환경에서는, 인간들끼리는 용납하지만 예수님이 올라가버리면, 위에서 보는 다른 환경에서는 이런 시간의식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사도행전을 역사로 보면 성령 받지 못한 자도 사도행전을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가... 성도가 되려면 성령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있다면 일반인들의 안목이 아니라 올라가서 봤던 다른 안목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은 전부가 하나의 사건이 돼버린다. 단 하나의 사건이 된다. 하나하나 흐르고 있는 역사는 존재기 때문에, 사건은, 흐르고 있는 일어난 일에다 플러스해서 보태기 할 수 없다. 몇 살 몇 살 때 일어난 일은 사건에 말려든 것이지 그걸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스겔처럼, 사도바울처럼, 요한처럼 신에 이끌리어 올라가야 한다(3:12 고후 12:2 4:1).올라가면 다른 환경이 보인다. 천사가 두 명 나타났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시작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심판이라는 테두리 안에 이 세상 모두가 갇혀있다는 것이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힌 물고기처럼. 세월이 몇 년, 몇 십 년, 몇 천 년이 가도 상관없다.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다는 것은 죽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데 굉장히 바쁘다. 이 세상에서 바쁜 그 모든 것들이 이미 들려 올려간 입장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죽은 자의 생활일 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안목을 주시고 새로운 언어를 주셨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바벨탑에 마법을 걸어 놓았다. 모든 민족들이 서로 언어가 안 통하는 마법을. 그러면 주님께서 마법을 풀어주면 될 것 아닌가? 주님은 마법을 풀어주는 대신에, 공통적인 언어를 주되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새로운 장벽의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은 하나인데 서로가 못 알아듣는 마법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방언이라는 마법으로 더 철저하게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다. 말이 아니라 이제는 내용을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환경에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나 아는 내용을 지금 사도를 통해서 현재화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환경에 외재성, 천사가 예언한 대로 성령이 오심으로 방언을 하게 되면, 내재성으로 삽입이 돼버리면, 사도행전 2826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게 된다. 사도행전을 역사로 보면 옛날 일로 그냥 끝나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알지 말라고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왜 알라고 하는가? 마법을 걸어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건 몰라야 된다는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천사다.

 

그리고 사도들도 마법에 걸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본인이 본인의 일을 결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랫동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윗동네(천사가 온 동네)에 갇혀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랫동네에 갇혀 있고 사도바울은 윗동네에 갇혀 있기 때문에 비두니아(터키북쪽)로 가지 못하게 막고 마게도냐(그리스북부)로 가게 하셨다(16). 갇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참하게 밉상 받아 죽음으로 빠져나갔다. 윗동네가 우리한테 다가올 때 죽음의 세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죽음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법을 풀 수 없는 것이다. 풀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벌써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 그럴 때 윗동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다른 환경의 안목이 없이는 사도바울의 편지나 사도행전의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근데 사도행전이 돈벌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데, 설명이 될 필요가 있는가? 필요 없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가? 미쳤는가 보다. 하지만 그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주역들이다. 그래서 이제 사도행전은 풀린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2:42)(5:42)

 

이것은 부자를 능가한 가난이다. 부자를 능가한 가난이기 때문에 도로 부자가 될 이유가 없다. 천사 두 명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감당하지 못한다. 천사를 빼고 해석하게 되면 역사가 되고, 천사를 포함시켜 해석하면 역사가 꼬인다. 역사의 인물은 자리가 있는데, 천사를 끼어 둘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사를 빼돌려야 한다. 그런데 천사를 빼돌렸다고 하는 그 빼돌림인 그 외재성이 우리 인간에게 내재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게 바로 부자를 능가한 가난한 자의 집합이다. 미쳤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후에 예루살렘에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된다. 인간의 행정적 처리에서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사도들의 행동은 예루살렘에 역사적, 민족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도대체 뭘 전했기에 그런 것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의 설교에 공통점이 있다. 이중결론(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2:23)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24)

 

이중결론이란, 동일한 결과에 원인을 두 가지 집어넣음을 말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인간 너희들이 죽였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죽이신 것인가? 사람들이 죽인 것인가? 지금 사도가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있는 환경에 새로운 환경의 안목으로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세계는 갇혀있을 뿐이다. 갇혀있음이 해결은 안 되지만, 이중결론을 계속 전하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새로운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마법 걸린 사도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결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고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따로 규정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이 세상은 두 파트로 나누어지게 하는 조치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규정하는 자와 규정받는 자로. 그래서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인데 둘로 나누어지더라로 끝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미쳤냐? 니가 미쳤구나!”라는 말을.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종교라는 취미활동이나 하면서 대충 산다. 그러나 그런 요령은 하나님한테 피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살면 된다. 우린 가두리양식에 갇혀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냥 살다보면 어느 날 성령이 오면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그들과 놀아주고 다 해줬는데도, 이상하게 저쪽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자기들을 바라본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천사와 같이 있으면서 세상에 섞여있는 성도의 위상이다.

 

베드로는 옥에 두 번 갇혔는데, 두 번 다 천사가 다 풀어줬다. 그런데 베드로가 갇힌 그 감옥의 간수는 죽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갇혀있던 그 감옥의 간수는 살았다. 산 정도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라는 말씀을 주신다. 죽고 살고는 천사 때문이었다. 천사 때문에 죽게 된 것은 외재성을 이야기한 것이고, 베드로나 바울 때문에는 내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외재성이나 내재성은 전부 하나님이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다. 죽게 된 간수는 죽을 때 내가 진즉에 죽어야 할 사람인 것을 하나님의 윗동네 입장에서 파악을 하게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게 되어 천사가 감옥에서 풀어줬을 때 비로소 간수는 죽어 있는 인간이었음을 안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전체가 이 세상은 죽었음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데 왜 사건들이 많은가? 사도행전 1장에서 28장까지 보면 물방울처럼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이걸 사건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의 사건, 큰 사건의 일관된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단 하나의 사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 장님이 된다. 장님 된 사도바울은 빛을 봤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빛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이 세상은 장님들만이 모여 있는 어두움의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사도바울이 장님 되었다가 아나니아를 통해서 눈을 다시 뜬 것은 구원이란 어두움에 감겼던 눈이 빛의 제공으로 눈을 번쩍 뜨는 것이었다. “! 위에서 본 하늘나라와 아래에서 본 하늘나라는 천지차이구나!”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거짓 영들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서 서로서로가 거짓말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일들이었다. 그래서 신약의 성령 받은 사람들은 구약을 그런 관점으로 파악하게 된다. 사도바울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대화를 듣지 못하고 우레를 들었다고 한다(9, 22).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이 대화가 바로 사도바울식의 방언이 된다. 오순절이 지나고 받았던 성령의 마법이 된 것이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껍데기는 같은데 그 안의 내용물이 다르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사건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런 책이다. “천사 만나 봤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들었던 이런 소리를 들어봤느냐 하는 것이다. 삼층천에 올라간 경험을 했는가? 사도바울은 스데반 죽고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서 광주리를 타고 내뺐다. 유대인들은 성경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경이 있어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아라비아로 가서 3년 있다가 8년 동안 고향 다소라는 곳에 갔다. 다소에 있을 때 삼층천에 올라간 경험을 한다.

 

그러다 안디옥(비시디아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수리아 안디옥이다.)에서 1년 있다가(11:26) 예루살렘에 이르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불길한 예언을 한다. 크게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11:28). 이 아가보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사도바울이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이기도 하다(21:10). 큰 흉년으로 예루살렘에도 가뭄이 들었다. 이 말은 헌금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도 헌금을 하게 되면 같은 교회라고 인정해준다고 나온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AD65년부터 해서 70년에 티투스에 의해서 작살이 난다. 마사다 요새에서 완전히 멸망당한다. 이럴 때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다 어디에 갔느냐 하는 것이다. 요단강 저쪽으로 다 도망갔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사도바울의 편지가 다 쓰여진 시대가 아니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던 그 시대 속에서 교회를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하던 시대였다.

 

 

2강 들리니?

 

사도바울이 예수님과 주고받던 이야기 너도 들었니? 사도행전을 읽을 수도 있고 외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도행전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른다. 왜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감당되지 않는 의미는 삭제를 할 뿐이다. 이 삭제는 살해의지의 반복이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살해했지만 오늘날에는 들리는 것을 살해한다.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 받은 성도들에게 토해내도록 하신다. 외재성이 내재성으로 파고들어서 감당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게 한다. 그럴 때 예수님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도 그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갖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제사장은 율법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어디를 들려야 하느냐 하면 정치세력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연구한 사람이 정치세력이 된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계속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다. 국가의 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국가의 법에는 사법체계와 행정체계가 있다. 사법체계에서 폭력이 나온다.

 

사도바울이 전한 교회에서는 폭력이 안 나온다. 폭력이 안 나오는 대신에 헤어짐이 나온다. “갈라서자!” 세상의 오늘날 교회는 폭력이 나온다. 국가가 종교를 다스릴 때, 권력으로 종교를 다스릴 때 그걸 국가종교라고 한다. 국가종교에서 종교국가로 바뀐다. 모든 국민은 다 자동적으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 이슬람, 북한, 중국.. 전 세계에 많다. 종교국가는 교회가 국가를 다스릴 때 이념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유대교는 종교 플러스(+)국가다. 유대교인들이 따라오면서 사도바울을 괴롭히니까 사도바울은 아테네로 피신을 한다. 아테네는 사도바울이 에피쿠로스학파하고 스토아학파하고의 논쟁했던 발생지다(17). 논쟁하면서, 세상에 있는 국가의 정신을 불어넣어주는 그 정치사상과 복음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복음과 반대되는 것과 부딪힐 때 그 실상이 딱 드러난다. 그 실상은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다 나와 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와 사도바울의 논쟁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입자가 되지 아니하면 분석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힘이 들어간다. 국가든, 가정이든, 사회든, 교회든, 단단하게 응축이 되어야지 흐리멍텅하면 발전이 안 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이다. 국가의 힘이 응축이 돼야 계획이 된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알갱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알갱이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이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이건 뭐냐 존재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입자가 죽었다. 니가 입자의 끝을 알아?” 그 입자가 죽었다는 것이다. 근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죽음?” 아직 오지 않는 경험이기 때문에 미리 땡겨서 겁낼 필요가 없고, 죽었으니까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경험 안 한 그 죽음을 땡겨서 경험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모두 다 동일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믿을래? 안 믿을래? 그들의 희망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백 명 이 백 명이 믿은들 그것은 죽음이요, 죄가 된다. ? 그 안에는 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계급을 낳는다. 목사, 장로, 권사..,계급을. 미래까지 지탱하고 유지하려고 힘을 여기다가 쏟아 붓는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개신교의 출발이다. 개신교는 종교 하나에 나라가 다 붙는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로마에 가면 철학이 되고 개신교에는 문화가 되고 미국에서는 기업이 되고 한국교회에는 초기업이 된다. 전부 다 입자다. 단단하다. 내 교회, 내 가정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교회 세우자는 것이 없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이중결과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가로막고 부정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권력이 있는 것이 권력이 없는 것을 내치게 되어 있다. 교회 갈래? 교회 될래? 어느 것 할래?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점은 자기가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본부다. 아지트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본 것이다(1:8). 그래서 사마리아, 아시아, 다른 곳들은 예루살렘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이 본부고, 지부는 반드시 예루살렘 교회, 본부의 말을 들어야 된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인 것과 같다. 예수님의 지시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본부를 망하게 하셨다. 본부 없다. 주님의 뜻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교회가 망하고 천상의 예루살렘의 교회로 바로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없다.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다. 선교가 있으려면, 1(46-49), 2(49-52), 3(52-56),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처럼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밖에 없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의 파생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의 연발성이다.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과 연결되게 되어 있다. 선교라는 것이 없다. 파생된 사건에서 일어나는 공통점은 신나게 죽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선교는 살기 위해서 선교한다. 일상적인 생활과 똑같다.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는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다.

 

정말 어떤 선교사가 선교를 했을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았다면, “주님이 직접 선교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쓸모없는데, 쓸모없는 인간을 붙여서 주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아볼로가 뭐며, 게바가 뭐며, 바울이 뭐며, 그게 뭔가?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전3). 누굴 통해서? 전혀 능력 없는 선교사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야고보나,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본부로 여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관한 문제다. 이 땅에 대한 의식을 누가 지적하느냐 하면, 예루살렘 열두 사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의 인물, 사울(안디옥 1차전도하기전에 이름이 바뀜)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공박하는데,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교회를 학대한 사람이었다. 이게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이다. 복음을 반대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다. 교회를 핍박한 사람을 교회로 집어넣어버렸다. 그러면 교회는 누굴 따라가야 하느냐 하면 교회를 핍박한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가시적인 땅의 교회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성령이 오고 삼천 명, 오천 명으로 이제는 교회가 커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들은 죽기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죽어도 좋은 사람들이기에, 0+0=0이 되어야 한다. 나를 숫자에 집어넣지 말라. 숫자는 권력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해칠 뿐이다. 권력은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은 권력 자체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예루살렘의 오류를 사도바울이 지적한다. 교회는 교회를 부수면서 교회가 나온다. 이게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멋진 반전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초창기 인물들이 맛디아를 뽑아서 열 두 교회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열두 교회를 작살내려고 뽑았다는 것을 감히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열두 교회를 우습게보고 핍박했던 거기에서 진짜배기 교회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등장한다. 교회! 어차피 무너지지 않으니까 무너트리자! 신나게 편하게 핍박하자.

 

왜 할 수 없는가? 망할 교회를 붙잡고 싶다는 심보와 본인의 자존심, 목돈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교회를 심하게 핍박해서 분란이 일어나서 나간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교회가 아닌 것이었다. 십자가로 세운 교회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만드시고(20:28), 그 교회가시간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보다 뒤에 나타난다. 그 뒤에 나타난 교회를 누가 핍박하느냐 하면, 시간상으로 역사상으로 먼저 나타난 앞에 있는 예루살렘교회가 핍박하고 공격했다.

 

유대교는 율법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율법위에 예수님이 우뚝 선다는 것이다. 그게 율법의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 사도바울은 율법에 철저했던 사람인데, 바로 이 가짜 교회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을, 예수님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아닌 율법 외에 메시야가 와서 율법의 메시야를 전부 다 까는 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바로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율법에 의해 죽을 차례라는 이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이 임하니까, 같은 패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다른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깜짝 놀란다. 못 믿겠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한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진짜였다. 어떻게? 율법의 바탕이 없는데 메시야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이 없다는 것은 과거에 무엇을 했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령으로 천국 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역겨워하고 누가 그렇게 싫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으로 세력화 된, 우리는 교회고 우리는 참된 성도라고 우겼던, 그 법으로 권력화 된 종교단체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흐름은 뭐냐 하면 안 믿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그러다 이미 예루살렘이 권력화 된 가운데 이제 로마권력에 확장되어서 사도바울을 핍박한 것이다. 로마조차도 유대인들을 핍박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만 핍박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이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만 믿는다고 했으니까. 핍박을 해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공격하지도 핍박하지도 않았다. 차이가 뭔가? 왜냐하면 유일신을 믿고 있었고, 로마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은 민족연합체, 혈통연합체였기 때문이다. 혈통에서 권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일신 믿는다는데.

 

근데 기독교인은 왜 핍박하는가? 혈통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중심의 교회는 혈통중심이 아니다.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계없이 하나가 된다. 이게 바로 로마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혈통은 가족인데, 가족의 중심을 깨버리면, 행복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 말이다. 자기가족중심으로 살았는데. 천사를 빼버린 아랫동네로 살았는데. 그러나 사도바울은 천사와 패밀리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역사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괴상한 이야기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내일 일을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만 뒤돌아보면 어디까지 온지는 안다. 주께서 어떻게 한 일을 안다.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예수님한테 가했던 행세를 우리에게 그대로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을 성령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16:17).

 

귀신들린 점치는 여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 이 말이 맞나? 틀리나? 만약에 이 말이 맞는 이야기면 사도바울은 잘한다고 격려했을 것이고, 이것이 틀린 이야기라면, 그럼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 뭔데? 이 여자가 하는 말대로 그대로 하잖아.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다음 사도바울의 조치는 뭐였는가? 여자에게 귀신을 내쫓아버리면 이 여자는 두 번 다시 그런 이야기를 안 하게 되니까, 전도하는데 손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전이라는 것이다.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여자는 귀신들렸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정체를 안다. 귀신들렸음에도, 사도바울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 사람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아무리 복음을 알고 아무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도, 그냥 아는 것으로 머리에 담아두기를 원하지 그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본인이 원치 않는 강력한 힘에 매여 있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아무리 알아도 아는 것으로 그친다. 손해 보기를 원치 않는다. 악마가 발목잡고 있는 것이다. 죽기 싫다. 가족혈통으로 나간다. 알고 있는 내용에 투신하기를 싫어한다. 귀신은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면서도 귀신은 지옥가기를 수호한다. 이 사실을 아랫동네인 인간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것이다.

 

철판은 하나의 사건을 보여주고 철판 안에서 구워지고 있는 것들은 심판이라는 파생된 사건을 보여준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 나온다.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보인다. 심판 속에서는 안 보인다. 심판의 의미를 아는 구원받은 사람이 나온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때려죽였다. 그것을 하나님은 죽이셨고 살리셨다.” 이 복음을 듣고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13:48). 이게 뭐냐 이중결과다.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무조건 복음을 전하고 사도들은 고생한다. 인간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지만, 하나님이 알아서 죽이시고 하나님이 알아서 살리신다.

 

인간은 이중결론이다.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구원받았습니다.” 뭔가 해야만 하고, 하고 싶다. 주님이 하시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 이것으로 구원되지 않음을 알지만 하고 싶다. ?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 본격적으로 한다. ?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다(로마서 1). 안 설쳐도 대는데 자꾸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어 해놓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합격을 받아놓고 왜 내가 하는 것은 합격이 안 되었는가를, 합격증을 쥐고 이제는 뭔들 못해! 뭐든지 구애받지 않고 한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죄를 마음 놓고 하는 죄의 즐거움이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빌립집사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그 내시가 이사야 53장에서 이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묻자 빌립은 구약 전체를 설명해 줬다. 세례를 받겠다고 했다. 이 사람이 뭘 안게 아니다. 단지 철판전체를 알게 된 것이다. 세례는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이다. 세례의 내용의 전부다. 이중결론이다. 뒤돌아보면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사도행전은 철판구이에서 일어난 일은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 확정된 가운데 십자가 사건의 재현이다. 자기가 뭘 안게 아니라 철판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안 것이다. “주께서 하게 하셨다.”

 

 

3강 선교는 없다.

 

선교의 있다 없다는 사도바울의 설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령 받은 사도들의 설교핵심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을 볼 때 선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활동(선교)을 하면 죽었다에서 홀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도들의 선교 내용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본임이 선교에 나서게 되면 자기의 관심사로 이동해서 본인은 예수님의 죽었다에 포함이 안 되는 독특한 사람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이 내용을 전하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여기에 모든 인간은 죽은 자가 된다. 죽은 자가 무슨 선교를 하는가?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 뚝 끊어버려라. 예수님이 현존에 인간이 끼어들면 이 복음적인 사실이 훼손된다. 예수님이 죽었고 살아나셨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는 꼭 질문이, “그럼 나는? 나는 천국가요? 지옥가요?”라는 이 질문이 나오는데, 이 복음 앞에서 이런 질문은 파생되어 나올 수가 없다. 사도는 복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얼마나 자기에게 이득을 볼까? 자기미래를 잘 풀어볼까? 하는 것이다. 이건 반칙이다. 선교가 없는데 갑자기 선교가 나와 버리는 것이다. “베드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얼마나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여기에 관심 있는 채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죽었다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에만 관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짓 하는 자체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현존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방식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는 놔두고 살았다고만 증거 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님이 살았다고만 하면 안 된다. 죽었다고 해줘야 선교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1,2,3차 선교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뒤에서 발길로 차버린 것이다.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왜 이 선교가 왜 선교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한다.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선교한 사람이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자가 뭘 증거 하게 되면 주님의 현존하는 공식에 어긋난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모든 인간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공식에 위반해서 살아있는, 선교하는 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현재 존재하는 방식들을 선교라는 명목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라고 보는 그 안목, 사고방식이 주님의 현존,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 안 하면 주께서 일 안 하시는가? 주의 일이 실패하셨는가? 교회 없으면 주님이 답답해하시는가?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1:7).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이에 정보를 주고받아야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셨다. 묻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정보 빼내서 주님 일에 협조해서 주님한테 칭찬받을 가능성을 높이려고 한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봐달라고 한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잘라버린다. “같은 편이잖아요?” “같은 편 좋아하네.” 주님은 자기편이 필요치 않는다. 주님은 아버지하고 의논하기 때문에. 아버지 보시기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완료된 것이다. 이중결론, 이미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은 이미 죽어 마땅한 세상인 것만 까발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후딱 죽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죽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단지 사도바울은 어디서 생을 마감해야하는지 지금 정해지지 않아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어디서 죽을지... 사도바울의 의식은 보통 인간들이 가름할 수 없다. 판단도, 해석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바울 움직임 자체가 이미 해석이 끝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이 끝났을 때, 사도바울의 고백 같은 것이 나온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었다. 이곳은 자기 동네가 아니니까. 그 근거는 사도의 설교 속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이다. “저는요?” 그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 있음이 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 그것만 설교에 담아서 전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한테 있는가? 나한테 있는가?

 

교회를 세운다? 훼방질을 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움직이는 교회다. 이렇게 교회가 있는데, 왜 따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가?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이 교회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도 교회다. 왜 한국교회를 만들려고 하는가? 돈이 들어오니까 신천지, 구천지를 계속 만드는 것이다. 사업이기 때문이다. 사업이기 때문에.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2), 이 내용을 가지고 써먹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4). 이 바나바는 사도바울을 잘 챙겨주고 보호해주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잘 챙겨주면 뭐하는가? 나중에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싸워서 헤어지는데, 둘 다 성령 받았는데 싸우면 성령 대 성령의 배틀인가?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싸우라고 해서 싸운 게 아니고, 그것은 사도바울도 갈수록 의식의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편지 내용과 옥중서신과 다른 것이다.

 

선교가 없는 이유는,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자체가 파괴가 된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의 핵심,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것이 이 세상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저주의 기준이 된다. 선교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심판을 해버리면 복음 전할 타이밍, 복음 전할 구석은 없지 않는가? 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요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요나에서 어느 것이 구원의 방식에 근접하고 모델에 적한한가? 북이스라엘 구원방식이 옳은가?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어느 쪽이 정답인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은 처음에는 니느웨를 심판하라고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복음전할 구석이 되지 않는다. 심판하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데, 풍랑이 일어서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서 있다가 사흘 만에 니느웨 앞에 토해내게 했다. 심판을 전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요나가 40일 후에 멸망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니느웨 사람들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이 다 회개했다. 요나는 죽겠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니까 심판이 없어졌다. 구원의 원형은 심판이 근접하고 회개하는 무조건 잘못되었습니다. 나 자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놓쳐버렸다.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식을 그들은 놓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원리를 깨트려버린 것이다. 그 깨트린 것을 니느웨를 통해서, 우회해서 보여준 것이다.

 

응용문제다. 예루살렘에 있는 열두 제자(유대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침대로 삼아서 까치발을 들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율법을 지킨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결합된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으로 메시야가 온다면, 언약의 혜택으로 본 것이다. 이게 번이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할례를 반드시 행해야 하고,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렇게 했어도 개 같은 이방인취급을 했다. “이방인들아! 우리가 봐주니까 같이 천당 가는 거야.”

 

사도행전은 역사를 뽑아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편지가 그렇게 역사 중심으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나서 사도회의(15)를 하고 난 뒤에 안디옥에 가서 2년 동안 있으면서 쓴 게 갈라디아서다. 갈라디아서 4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이거는 뭘 의식한 것인가? 예루살렘 형님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는 예루살렘 본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 쓴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혈통중심이라는 것이다. 로마도 유대종교를 핍박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뭐냐,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생뚱맞다. 형님들의 본점에 갈 필요도 없다. 본사 무시하고, 성령이 오시면 그대로 끝인 것이다. 더 보태고 뺄 필요도 없다.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영이 오게 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8:11).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십자가 영이기 때문이다. 그냥 담겨버리는 것이다. 아이언맨이다. 이방인들은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방인들이 안다.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예상도 안 했다. 니느웨에 전면적인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이유 없이 심판받고, 저주받고, 지옥가야 한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저주받고 심판받는데 아무 이유 없다. 특히 이방인들한테는 대상이 안 된다. 언약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방인들에게 깜짝 놀랄 구원을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은 너희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을 이방인들을 통해서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아니고 너희들이 개무시한 이방인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이 언약대로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11장 돌감람나무, 참감람나무 이야기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 이게 사도바울의 편지다.

 

브리스길라(아내)와 아굴라(남편)부부가 로마에 살던 사람인데 유대인이라고 나가라고 해서 고린도에서 바울을 2차 여행 때 만나서 복음을 듣고 다시 로마로 갔고, 그 다음에 3차 때 고린도에 있으면서 이 부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로마서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편지 내용이 바로 이 원리를 겨냥한다. 이 큰형님들, 인간적인 열두제자들이 전했던 이 구원이 한계가 있음을 성령께서 알렸다고 보내는 편지다. 사도바울은 121로 붙는다.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큰형님 노릇한다고 안디옥에서 복음 전한다고 했지만, 근데 거기서 할례 받지 못한 율법에 훼방되는 사람이 딱 오니까, 깜짝 놀라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와 식사를 같이하게 되면 율법에 어긋나고 거룩에 훼방이 될까봐 후딱 빠져나간다.

 

그걸 보고 사도바울은 막아서면서 할례에 막히는 이게 무슨 복음이냐?”라고 한다. 무슨 복음이 율법 지켰다, 안 지켰다, 할례에 막히는 게 무슨 복음이냐 하는 것이다. 그럼 복음은 뭔데? 개 같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면 끝이라고. 이것은 어떤 인간이 훌륭해서도, 착실해서도 아니다. 성령 자체가 값어치가 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얹어도 우리의 질량은 제로(0).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인간들의 레벨이 이것밖에 안 된다 면박을 주고 있다. 인간은 성령이오기 전에 뭔가 장착을 해줘야 성령이 그거보고 찾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가장 심판받을만한 사람을 찾아간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유대인들이 했던 그 모든 것은 헛짓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령 받아 활동하면 의식이 자꾸 동업자가 된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이게 바로 자기 의라고 한다. 자기 의. 자기 의가 생기는 절차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은 법의 형식이다. 법은 새로운 두 가지 결과를 예상한다. 법을 못 지키면 체벌이고, 법을 지키면 축복이다. 따라서 인간이 해석할 때는 자기존재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 받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게 자기 의다. 여기서 공식은 법의 해석 작업을 유도한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집단해석을 하고, 거기서 권력이 나오고, 권력은 역사와 전통, 관습이 나온다. 왜 이렇게 나오느냐 하면 처벌받지 않고 복 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법의 해석에서 놓친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자기 주제파악을 놓쳤다는 것이다. 나는 처벌받아 마땅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이것을 놓쳤다. 죄인 주제에 처벌이 적당하다.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12년 동안 혈류병을 앓은 여인,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 자기 딸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내가 있음은 저주가 있는 곳임을 알았고 개로 인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 심판에서 면제될 때 진짜 구원의 원형이 나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못됐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한 게 기억나서 반성한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죄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나의 움직임 자체는 저주가 냄새피우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강도와 세리와 창기가 먼저 간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근거해서 니 주제파악해라. 선악을 아는 자체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본래 니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해석범주에서 저주받은 짓을 유발시킨다. 해석하면 처벌받고 또 해석하게 한다. 블레셋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언약궤가 있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법의 해석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또 제사장이 제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사울이 제사를 드리려는 사울의 본 의중을 사무엘이 약속을 어김으로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 의중을 드러내기 위해서 참으신다. 오늘날 성도를 인내하시는 이유는 니가 얼마나 예수 믿는 믿음이 좋다고, 잘났다고 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니가 어디서 깨져야 하고 니가 얼마나 못났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이게 바로, 이방인의 구원방식이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원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구원의 원인이 나온다. 열두제자가 아니라 개 같은 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구원이 없다. 구원은 어떤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내용물 때문에 우리는 번쩍번쩍 퍼지는 현상이다.

 

 

4강 방언

 

현상이란, 부분을 가지고도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께서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은, 현상적으로 그걸 세대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세대와 저 세대를 나누는, 단절의 펜스, 장벽을 설정한다. 이 경계선이 만들어지면서 이 세대와 저 세대가 같이 딸려온다. 같이 나타난다. 하나에서 이 세대와 저 세대가 나온다. 빵은 두 개지만, 마치 햄버거의 빵 속에 들어있는 토핑처럼, 빵과 빵 사이에 들어있는 부분, 이 경계선을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라고 보면 된다. 양쪽의 빵은 세대다. 성령이 임하므로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이미 종결되었다. 천국과 지옥으로, 성령이 없으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고, 율법의 종이 되고, 아무라도 주시라고 할 수 없다(고전12:3).

 

사도행전에는 이게 나타나지 않고, 그러나 교인들은 사도바울이 전도한다고 왔다 갔다 하니까, 교회 키우는데 사도행전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소위 지도자급, 유명한 자들, 바나바, 니게르, 시므온, 루기오, 미나엔(13:1), 이 다섯 명이 집단체계, 연합체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이 시켜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디옥 여기를 이방인 전도의 베이스캠프로 여긴 것이다. 그럴 때 안디옥과 예루살렘이 누가 더 크냐? 하고 배틀이 붙었다. 사도행전이 이런 식으로 가는 이유는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기업이 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상품을 팔아야 돈이 들어오니까, 새로운 목사의 역량은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과 헌금이 나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새로운 목사는 무리한 프로젝트를 한다. 후임의 당회장이 새로운 교회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가시적인 양적팽창을 제시해야 된다. 거기에 적합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선교하자! 결국 인간은 살기 위해서다. 교회가 살려줄게. 돈 내라!

 

그런데 사도바울은 전도를 하면서 이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이건 아니다. 기존의 예루살렘이 유대교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법적인 체계에 옭아맸고, 그 법적인 체계에 의해서, “바나바냐? 예수냐?”해서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듯이, 개인이 아닌 권력체계의 집단범죄를 한 것이다. 사울이 바울되기 전에, 하나님의 일은 율법의 해석체계가 정치 행위로 가세해서 하나의 권력에 집단화된 정치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그 다음에는 율법을 받침대로 사용해서 까치발을 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이 공식, 이 공식에 철저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될 때 율법의 실제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했던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악행이었다. 이것을 안디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교회는 계급이라는 것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 이것은 어느 정도 유대교에서 했던 계급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법체계를 깨는 식으로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를 한다. 3차에서는 고린도교회가 주()가 되고, 2차에서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주()가 된다고 보면 된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볼로가 2년 동안 있었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편지로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 법체계를 은사로 깬 것이다. 은사의 특징은 우발성이다.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교를 한 20년 동안 전했어도 그 다음 주에 복음이 안 나오면 그만둬야 한다. 자기를 고수하면 유대교식 기독교가 된다. 폐암으로 죽은 코미디언 이주일이 한 말이 있다.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설교자는 뭔가 보여주면 계속하고 뭔가 안 나오면 그만둬야 한다. 그런데 유대교식 기독교가 되어서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자리가 중요하다고 나와 버리면 교황이 된다. 교황은 인격을 논하지 않는다. 교황은 생물학적 신체로는 윤리도덕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법적신체로는 교황이라는 권위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게 바로 권력행위다. 이 권력행위를 관통해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뚫은 분이 예수님이다. 그동안 권력체제가 쏘아대는 화살을 예수님의 온 몸으로 다 받으신 것이다. 온 몸으로 다 받아서 형성된 정보를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전부 다 안겨버렸다.

 

그러면 성도가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가름하는 햄버거 속처럼, 알맹이처럼 경계선으로 움직인다. 거기서 바로 이 세대, 저 세대의 정체가 부각된다.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복음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지옥 갈 사람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죽었는데 어쩌라고?” 이렇게 돼버리고. 천국 갈 사람은 어찌할꼬? 나는 진즉에 죽은 자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구나!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구나! 그동안 자기 의를 위해서 법의 해석체계에 팔렸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이 바로 쫙 깔려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 동의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다. 그런데 지옥 갈 자들은 존재라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천국 믿어야 하고, 나를 위해서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있어야 된다.

 

존재의 특징은 보호받는 것이다. 유기체의 자기 조직화다. 유기체는 보호본능이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한다. 인간도 카멜레온처럼 보호막, 보호책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상은 이미 찢어짐이다. 그 찢어짐 속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이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대로 살뿐이다. 존재를 찢은 관계가 있다. 바로 연인관계다. “그대만 있으면,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없어져 줄게.”라고 한다. 자기존재를 알아서 삭제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요 현상이 된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고전16:22). 존재는 권력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반면에 사랑은 자진해서 자신을 찢는다. 그 사랑을 희생이라고 한다.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성령의 택배로 부어주게 되면 내가 왜 사랑받아서는 안 될 그런 나쁜 사람인가를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로마서 5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은혜는 왕이요, 나는 그 은혜의 쫄다구가 되면 행복이고, 누구의 쫄다구가 되는 즐거움이다. 예수님의 현상을 집어넣는, 본체와 그림자가 붙어서 같이 가는 것이다.

 

현상은 주의 지시가 먼저 내려지면 주님의 숨겨져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현상이 먼저 보이니까, 그 현상으로 주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 현상으로 주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방언이다. 방언은 내용으로 결정된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다. 인간은 무엇을 믿든지 나 좋아라고 믿는 것이고 나를 위한 보호막을 걸치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현대이전은 계급사회였다. 그래서 권력이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게 1789년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독립전쟁에 의해서 모든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진다고 한 것이다. 근데 이건 거짓말이다. 모든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내부에 있는 괴물의 목소리다. 인간의 보호본능을 숨길 수 없다. 자본주의는 본인이 본인에게 권력이 된다. 외부권력은 여론(언론)이다. 리스크(위험부담)를 제거하기 위한 보험이다. 보험은 자기에게 미래에 올 필요한 권력을 돈 주고 가지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보험체계다. 빈곤에는 금전적 빈곤과 사회적 빈곤이 있다. 금전적 빈곤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사회적 빈곤은 마약, 도박, , 담배는 해결할 수 없다.

 

이 시대는 개인을 보호할 때 얼마나 많은 권력을 동원해야 하느냐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기가 누군가를 지적해줄, 법적 정당성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체계가 없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보험으로 보호를 느끼다가 교회 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존재보호의 고리를 강제로 끊어야 된다는 것을 누가 해 준 적이 없다. 주위에서 아무도 안 해준다. “나는 진즉에 죽은 자구나!”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 안 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배우들이 연극할 때는 조명이 거기를 비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 옷을 벗고 나면, 다시 말해서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죽고 난 뒤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존재는 사건이다. 주님께서 너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존재도 아닌데 왜 존재라고 하느냐, 법적해석을 잘못해서 그렇다. 제대로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줄 복음적 해석을 교회에서도 안 하고, 모든 종교에서 이야기 안 하고 돈이나 빼먹기만 할 뿐이었다. 정작 니가 누구냐를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인간들이 보호를 할 때 개인적으로 안 되니까 공동체운동을 만드는 것이다. 김진홍 목사의 두레마을처럼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사도행전 2장을 들고 나온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 상대적 빈곤을 모른다. 5퍼센트 낸 사람하고 50퍼센트 낸 사람하고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이게 다 보호에서 나왔다. 보호는 지독한 자기사랑이다. 이걸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은 성경공부로 삼아서 나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성경공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보호할 필요도 없고 보호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은 방식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방언이라는 것이 뭐냐, 방언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의 소속이 저주받을 이 세대에 속했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정도로 못 알아듣는가?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해도 사하심을 얻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대 사람으로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아직까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펜스, 장벽이 오기 전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는 새로 마련된 자리이다. 110편에 우편의 자리는 예외 없이 심판의 자리다. 하나님이 심판할 때는 우편의 자리에서 심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우편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출애굽기 156절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한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너올 때 애굽 군대도 건너오고자 했다. 근데 몰살당했다. 그럴 때 왜 쟤들만 건너 가냐?”라고 한다면, 이거는 내 백성이다 이 말이다.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줬다는 말은, 성도는 이 땅에서 심판자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죄인이다.” 그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기능이다. 이미 권력을 뚫고 들어온 주의 영이 함께 있으면 너희는 이 세상의 소속이 아니고 하늘의 소속이다. 매일같이 현재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재림이 되는데, 이 재림은 현재가 넘쳐흐름을 말한다. 현재가 넘쳐흐름. 그러니까 현재와 재림의 특징이 있다. 저 세상에 속하면서 이 세상의 속한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현재의 성도의 모습과 재림이 같은 것이다. 주께서 자기 자신의 심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재림이다.

 

이 세상은 둘로 구분(장벽)되어 있다. 장벽은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이것을 실어서 성도가 가는 곳마다 둘로 팍팍 나누어지게 성령께서 하신다. 하나는 악취요(무슨 개소리냐!) 하나는 향수다(반갑다 친구야!).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을 보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게 하나님의 성과다. “니들이 뭘 알아?” 이게 성과라니까.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셨다는 것은 나머지기는 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도의 설교다. 이거 말고 나머지기는 다 제거해버린다. , 취직, 건강, 출세, 성공... 그게 뭔데?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미 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이것을 그대로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경계선이 와 있다. 이 세대도 저 세대도 함께 있다.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저 세대에 못 가는 것이다. 이미 막다른 시대에 도달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마지막 때를 거론하는 요엘 선지자를 거론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19, “또 내가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해석체제가 또 방언에 속한다. 이건 무슨 내용인가? 마지막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럼 그 마지막 때의 현상이 3차 대전인지, 개기일식인지.. 그런 것을 질문하는 것이 또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 때의 현상은 성령은 우발적이라서 나라는 존재가 파악이 될 의무가 없다. 내가 마지막 때에 속한다면 골프를 쳐도 해가 변하는 것이다. 내가 놀러가도 해가 변하는 현상으로 같은 레벨에 속한, 같은 서랍에 들어있는 현상이다. 해가 변하는 것이나 성도가 골프 치는 것이나 똑같이 종말이 왔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이 말이다.

 

사도행전 217,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여기에 들어있는 원형은 예수님께서 일하신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대패질을 했다면 이게 예언이고 환상이다. 꿈이 된다. 저 세상을 보여주는 현상의 부분이다. 현상은 전체를 보여준다. 제각기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평범한 돈벌이지만 성도끼리 볼 때는 종말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성령이 현상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방언은 너무나 평범해서 못 알아듣는다. 소속이 저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땅에 있으면서, 경계선으로, 내가 어떻게 살든 주께서는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그 덕분에 나는 구원되었다. 그 이야기를 품고 태어나게 했으면, 그것은 주님의 역량이고 주께서 만들어주신 경계선이다.

 

 

5. 방언의 해석.

 

예수님 자신이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외부인이 하는 모든 것이 방언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를 못한다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모아이의 거석이 있는데, 땅에 파묻혀있다. 머리는 외부에 나와 있고 몸체는 내부에 연결되어 묻혀 있다. 그러면 방언은 주님이 안 보이지만 이쪽(모아이 아래쪽)에 속한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서 한다. 방언은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이야기다. 살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죽으심을 앞장세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이게 언어에 담긴 의미인데, 항상 언어의 의미에서 이런 단어들은 나라는 중심으로 의미를 압축(은유)하고 결합(환유)한다.

 

인간의 단어는 자기존재증명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언은 사람들에게 밀침 당해 죽으셨다는 그 분을 증거 하는 내용이 된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내가 살고자 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데 엉뚱하게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하니까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내 살기에 유리한 하나님으로 굳히기 때문에, 죽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에 삽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심지어 열두제자마저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예수님을 좇다가 다 도망갔다. 그 중에 글로바라는 제자에게 나타나 약속대로 죽은 하나님이라고 하니 깜짝 놀랐을 정도다.

 

그렇다면 방언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 우리가 하면 안 되고, 성령 받은 베드로, 빌립, 스데반, 사도바울 이런 분들이 나서서 방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봐야 한다.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을 이름을 중첩시킨다. 중첩이란 것은 하나가 있어야 될 자리에 두 개가 있는 것이다.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구약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예수그리스도와 중첩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그러면 인간의 이름은 가면이 된다. 이 가면을 벗길 때 방언이 해석이 된다.

 

시대적으로 공간적으로 뚝 떨어져있는, B.C.900 다윗시대와 그 이후의 예수님 시대가 같이 얽혀 있다. 중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리학에 양자 얽힘, 중첩이라는 용어가 있다. 중첩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일어난 일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도 사실은 원인과 결과로 얽혀져 있다는 것이다. 서로 동떨어진 시대인데, 동일한 시대로 같이 보는 것이다. 성령이 다윗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까. 다윗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함께 있었다면, 다윗의 가면을 확 벗기면 그 안에 예수님의 일하심이, 성령님의 일하심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삐에로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윗 때는 몰랐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소급해서 그렇게 구약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425,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이 말씀이 시편2편의 말씀인데 언제 완성되느냐고 할 때, 다윗시대에?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게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거리는 무시하자는 것이다. 모든 게 현재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성령 안에서의 시간은 말씀이 언제 던져졌느냐가 중요하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느냐는 의미 없다. 다윗이 죽든지 살든지 뭘 해도 어차피 다윗은 삐에로요 마스크다. 그러한 마스크역할을 행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가 또 모세를 통해서 한다. 나와 같은 선지자가 곧 모세다. 모세의 가면을 벗기면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빼버리면 진짜 선지자, 모세에게 예언했던 진짜 그 원형의 선지자는 모세 안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가는 곳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잡아먹듯이, 쥐어뜯듯이 반항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상에 자기백성들을 깔아놓고 시공간을 능가하는 다른 해석을 내어 놓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다르다. 인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계속 가는 것이 시간이고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점에 있다가, 또 이 지점에 있다가 움직임으로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이 공간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예를 들어서 기차시간이 확정되면 인간의 시간은 사적시간, 공적시간으로 중첩이 된다. 그래서 우린 공적인 시간에 지배받게 되어있다. 사적보다 공적이 우선된다. 공적인 시간이 유지돼야 국가권력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사적인 비눗방울과 공적인 비눗방울 둘 다 들어있어서 주변과 함께 간다. 내 소유는 나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다. 자기 육체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인간은 행동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주님의 몸은 새로운 시공간의 중첩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 인간은 자기존재증명을 하고 예수님도 자기존재증명을 한다. 사도행전 마지막에는 왜 풍랑이 일어나느냐? 그리고 스데반집사는 왜 돌에 맞느냐? 라고 할 때에 죽음을 통해서 자기 마스크가 벗겨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제는 남의 인생을 그만 살래자기주인은 따로 있는데, 자기 몸이 있으니까 마스크를 그만 쓰고 싶은 것이다. 내용물은 주님이고 껍데기는 나고, 이것이 중첩이다.

 

사도바울에게는 죽음보다 더 센 게 왔다. 환란이다. 주님의 죽음이 들어있다. 죽음마저 이겨내지 못한 그 고유의 자리에 주님과 사도바울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중첩된 현상이 다 되었을 때, 주님이 제시한 것은 죽음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다(9:30), 다윗을 누가 그렇게 괴롭게 했는가? 시편2편에 보면 이방민족이다. 신약에 오면 이방민족정체가 바꾸어진다. 구약은 이스라엘 대 이방민족 이렇게 대치되어 있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민족 대 이스라엘민족에게 밉상 받는 사도들로 대치되어 있다. 결국 이방민족은 이스라엘과 결탁이 된다. 본디오 빌라도와 권력이 결탁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민족에게는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중첩이 없고, 사도들은 마스크를 썼으니까, 아바타니까 중첩이 있고, 보기에는 같은 인간이지만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으니까, 사도들을 몰아세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살해했던 그 권력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모아이거석을 보면 머리(부활하신 예수님)는 바람 불어 멀쩡하지만, 땅에 묻혀 있는 몸(사도들)은 모기한테 뜯기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아프다. “니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참아라. 니는 뜯길만하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기한테 뜯기는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 때문이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을 통역한 것도 방언이다. 방언이라는 외국말이 이제는 저 초월적인 하늘나라의 말이 되는 것이다.

 

모하이 이미지를 바닷물고기로 보면 이 물고기가 가끔은 바닷물 위로 뛰어 올라온다. 근데 자기만 뛰어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서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세상권력에서 나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에서 벌떡 뛰어올라온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연합하고 규합하고 조합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잠식되어 있고, 잠겨 있다는 것이 수면위로 고개를 내민 물고기에게만 그것이 인식이 되게 되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난 받아서 펄쩍 위로 올라가니까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악마의 세력이라는 것이 바다에 잠겨 있다가 가끔 뛰어오르는 물고기에 의해서 증거 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살면 되는데, 어떤 사태가 유발되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행전 27장 풍랑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풍랑이 왜 일어났는가, 풍랑으로 구원의 여망이 끊어질 정도로 사도바울은 곧 죽을 것 같은데 사도바울은 살아있었다. 그것은 사도바울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살리기 위해 사도바울을 보호해준다. 그러지 말고 우리는 그냥 바다가 잔잔했으면, 앉은뱅이가 아예 처음부터 멀쩡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이에는 죽음의 세계, 악마의 세계,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계에 잠겨있었다는 것을, 이 세상 전체를 볼 계기가 된 것이다. 몸이 나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인식하는 이것이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살아계시다. 나는 죽어있는데 예수님이 살아있는 조건하에서만 나는 살아있다. 나는 죄인이 맞는데 의인이 되는 조건은 죄인과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나는 의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래, 나 죄인이야!”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구원받은 자기존재증명이 아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되는데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를 임의로 택했고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다. 구약에서는 다윗이나 모세가 죽을 뻔 했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풍랑이 일어서 산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로 사도바울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타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4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바친 것과 대조를 시키는 것이다. 값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둘 다 값을 내놓았다. 바나바는 주님의 아바타이기에 시킨 대로 주님의 것을 내놓으라고 해서 내놓았을 뿐이다. 주의 이름과 내 이름에서 내 이름이 삭제되면서 주의 이름이 드러난다. 근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이름을 반만 지웠다. 모아이에서 얼굴은 주님인데 아래턱에는 자기 수염이 난 것이다. 괴물이다. 베드로가 니가 사람을 속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속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둘 다 죽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안 냈으면 안 죽었을까? 그런데 안 낼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 이름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기존재증명의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을 사도 앞에서 행사한 것이다.

 

사도행전 53,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갑자기 악마(사단)가 나온다. 악마의 특징은 주님을 알면서도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가 뭐가 병이고 모자란 줄 알면서도 절대 병원에 안 간다. 나이 들수록, 70이나 80이 되면 고집증세가 급상승한다. 속에 있는 괴물이 점점 더 위세를 발휘한다. 반인반수다. 이게 인간의 본색이다. 자기 속에 괴물이, 사탄이 우선이다. 자기존재증명, 자기 의가 눌러져 있다가 두뇌에 산소공급이 안 되면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야말로 개구리나 곤충이 가지고 있는 본능에 충만한 것 밖에는 없다. 감각에만 의지하여 하루하루 버틴다. 악마가 교회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사태를 유발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권한이 있다고 헌금에 실어서 자기정당성을 내세운 것이다. “주의 영을 시험 하려느냐”(5:9).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보고 온 교회가 함께 두려한다는 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즐거워해야한다. 주님의 살아있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보다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처음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와 함께 있지를 않았다. 하나님은 안 받아 줄 사람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안 받아준다. 이 대목을 보면서 그 당시에 헌금을 내려고 한 사람이 벌벌 떨 텐데, 근데 성령이 찾아온 사람과 안 찾아온 사람의 구분을 해야 된다. 내든 안 내든, 깎아내도 안 죽는다. ? 성령이 그걸 지시했기에. 나는 어차피 개판이요, 어차피 죽은 사람으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내 잘남의 존재증명을 할 것이냐, 그러나 성령이임하게 되면 우리는 어차피 죽은 자기 때문에 두 번 죽을 필요가 없으니까, 주님의 아바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방언해석의 중첩되어 있고, 중첩된 마스크를 벗을 때, 반드시 죽음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마술사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고자 했을 때(8:18), 베드로는 돈 주고 성령을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니가 은과 함께 망하라고 한다(8:20). 이렇게 성령은 인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는다. 온화하다고 성령이 오지 않는다. 모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에 자기 몸체를 드러낼 때는 이미 머리에서 결정된 것이다. 근데 밑에서 비슷하게 흉내 내어 머리에 접근하려고 하게 되면 다 잘린다. 끊어진다. 그래서 모방은 한계가 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는, 모방범죄를 하는 사람들을 다 추려내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827절에 보면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전도를 한다.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은 성령이 밀어붙이는 것이다. 자기가 전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있는 자리가 주와 함께 있는 자리이기에 전도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537-8절을 읽게 된다. 성경 펼치는 것도 우연이다. “저가 누구냐?” 빌립이 방언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자기존재증명이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성령이 하고자 하는 뜻이다. 내 존재증명 접어버리고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내놓으면 그게 바로 성령의 해석이다.

 

 

6강 세속

 

사도행전의 테마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므로 구원된다면 이스라엘에게도 율법주지 말고 바로 성령을 주시면 깔끔하게 될 텐데, 왜 율법을 줘서, 이스라엘이 오해케 해서 메시야를 죽게 만들고 뒤늦게 와서 그 방법이 아니라고, 까치발 딛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그 점이다. 사실은 사도바울은 베드로와 충돌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방법과 충돌하면서 더 감추어진 내용을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다 담아놓았다.

 

이방인의 구원방법과 유대인들의 구원방법이 왜 다른가? 어느 쪽이 왜 정답인가? 사도행전 10장부터 시작이 된다. 고넬료에게 천사가 찾아온다. 베드로에게도 천사가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이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이 자체가, 이미 인간은 비눗방울이어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선과 악이라는 법적인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고 선악과 체계에 질식하도록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이 구원이 되려면, ‘어디에서 어디로가 성립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라는 방식이 다 성립이 되어야 한다. 근데 순서상 어떻게가 먼저 등장해서 어디에서 어디로는 이미 어떻게로 결정이 다 돼버렸다. 구원이란 율법의 저주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율법을 십자가로 완성하면 더 이상 저주는 없다. 근데 인간은 그냥 몸 편하면 그만이다. 불행에서 나가면 구원이고 행복으로의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게 잘못된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끼어드는 게 없이 그냥 자기 몸 편한 것으로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고 축복이라고, 일방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자기가 정한 것이다. 어떻게? 이게 없다. ? 살기 힘들어서,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가 밤잠을 못자기에.. 모든 종교가 여기에 해당된다.

 

종교는 고통에서의 해방, 고통에서의 면제를 원한다. 그러면 그 고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느냐? 사람들은 고통은 죄를 지어서 온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다. 죄를 지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복음이다. 왜 세상에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다녀가신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덩달아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정답을 내려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이 땅에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있어줘야 된다. 그게 바로 죄다.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자체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통 받았다. 그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고통이 주어졌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잘 됐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일이 옳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결론은 인간의 고생은 죄 탓이 아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라고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결론을 내야 된다. 주님이 이미 고통스러웠다면 우리도 당연히 고통스러워야 된다.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주님의 고통에 동참된 것을 감사하라고 한다. 주님과 함께 끈으로 묶여진, 주님의 아바타기 때문에 고통이 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감사하면 고통이 사라질까? 감사한다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센 게 온다. 응용문제, 심화문제가 들이닥친다. 왜냐하면 내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믿은 적도 없고 믿음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고...내가 믿음소망사랑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데에서 나오는 감사가 나온다.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한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을 벌이셨잖아요.”라는 고백이다.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도로 주님께 도로 주는 것이다. 계시록 4장에서 면류관을 도로 바친 것처럼, 내가 쓸게 아니기에. 원치 않는 사태가 그냥 일어난 것이기에, 주고받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잊어버리고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먹고자 했는데, 하늘에서 한 그릇이 내려왔다. 근데 그릇 안에 있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못 먹는 것이었다. 여기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넬료가 자기 자존심 때문에 율법적인 성향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베드로를 도와준다. “니 강도 돼봤어?”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가르치듯이, 구원받은 이방인이 구원받겠다고 그렇게 닦달을 내는 유대인을 가르치는 것이다. 못났기에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 못남을 유지하지 못하고 뭔가 쪼다 되었다고 느낄 때는 이미 먼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는 농락당했다고 생각할 때 그만두어야 한다. 사람에게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싸울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붕 떠서 그렇다. 나는 니 한테는 안 진다. 니한테 지는 것보다 차라리 죽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아무것도 아닌 자를 구원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오직 십자가의 피, 주님의 희생만, 단독자의 영광에만 쏠리게 한다.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다. 이것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것만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근데 이것을 믿는다고 하게 되면 복음이 가리어지기 때문에, 또 자기가 잘난 체 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더 이방인, 더 낮은 사람, 더 구원받지 못할 자로 들이대는 것이다.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에 대해서는, 율법 없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래서 너희들의 구원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함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근데 이방인의 구원 방식에는 난제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방민족의 권세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1,2,3차에서 그걸 느낀다. 사도행전 17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유대인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바울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리스사람과 만난 것이다. 18절에 보면,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바울이 가진 이 복음이 어떤 내용이기에 이게 쟁론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렇게 구원 받았다.”라고 나오면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와의 대결이 안 된다. 구원론에 관한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이 두 학파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와 살았다가 내용이기에 그들은 멍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났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들도 사도바울을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당신은 행복한가? 라고 사도바울에게 질문한다면, 나는 예수 믿음으로 행복한 것이라고 하면 그들과 같은 한통속일 뿐이다. 근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죄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스토아, 에피쿠로스철학자들이 무슨 소리를 증거 했기에, 대분부의 아테네 사람들도 동조하고 이들과 함께 사도바울을 공격했던가? 이게 옛날 철학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세상은 원자로 또는 입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다 보면 결국은 쪼개지 못할 입자들의 다발이 있다. 근데 위에서 똑바로 떨어지지 않고 가끔은 비스듬하게 떨어지게 되면 입자들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우주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신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철학에 신이 없음에도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에 이미 신을 지워버리고 인간존재를 그 자리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전쟁으로 자기인생을 못 살고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지겹고 그냥 내 몸 하나 편하면 좋겠다 해서 나온 철학, 윤리, 실천철학이 스토아, 에피쿠로스철학이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스토아학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세상의 원리를 알면 행복할 수 있다. 로고스라 하는데 이것은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원리인데 감정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감정은 우발적이지만 이성은 한결같기 때문에 한결같은 로고스, 이성에 의해서 살아간다. 복음이 오기 전에 이미 이런 로고스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원리를 알고 있으면 감정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게 행복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그게 아니다. 쾌락을 조절하면 그게 행복이라는 것이다. 너무 즐겁지도 말고 너무 재미있지도 말고, 너무 퍼지지도 말고, 적당하게 행복하고, 적당하게 즐기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이다. 이 이론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생존경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 지금 현 시대의 모토가 되어 있고, 모든 게 경쟁인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성주의(스토아)가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칸트주의로 나간다.. 쾌락주의(에피쿠로스)는 편리한 것이 진리라고 하는 존듀이의 공리주의로 나간다. 이것이 나중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나온다. 과학은 응축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하면 된다. 내 것만 소유하면 된다는 이 진리가 과학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에서의 질량은 힘을 줬을 때 가속도가 나오는 것을 질량이라고 하는데, 질량은 다 응축된 것이다. 응축된 것은 소유의 대상이다. 내가 나를 응축할 때, 붙들 때 행복하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으면 나름 행복한 것이다. 꼭 나를 붙들고 산다. 과학정신이다. 내가 나를 확고하게 응축하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없다. 응축되는 것은 계속 팔리기 때문이다. 내가 붙들고 싶은 가사를 써라. 자기이야기만. 꼭 자기이야기만. 그게 랩이다. 무조건 나만 잘된다면.

 

질량으로 모든 것을 응축할 때 이것을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수학언어로 함축시켜버린 이 우주관, 이걸 내가 알 때, 소유할 때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 사도바울은 예수와 그 몸의 부활을 자랑한다(17:18)고 했다. 대결 방법이 서로 다르다. 그들은 그저 내 몸을 내가 지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한다. 혼자 행복하지 않고, 상대적 빈곤에서 행복하고, 짓밟으면서 행복하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나에게 응축한 시대에게 예수님의 몸을 주목하라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세상은 이미 죽음의 바다에 빠져있음을 그냥 알려준다. 이게 설교의 핵심이었다.

 

그럼 설교하기 쉽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 할 때, 예수님의 몸은 이런 더러운 세상, 악마와 결부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맞물려 이야기 해줘야 한다. 나만 잘 살면 행복이라고 여겼던 자기의 몸이 그걸 낯설지 않게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예외 될 수 없다. 맞닥트리고 모든 만남이, 육신과 주님의 복음과의 계속 부딪힘이 그대로 설교로 나와야 한다. “나 이렇게 개판이고 죄인입니다. 돈에 환장하는 이런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설교가. 이게 바로 방언이다.

 

그러나 스토아나 에피쿠로스학파는 내가 잘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잘 될 때 복음 없이도 산다. 살면 살수록,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만 생각하는 증세가 심해진다. 이럴 때 복음 전하는 기회다. 나 같은 이렇게 못돼먹은 인간이 또 있을까? 라는 것과 예수님의 피를 절묘하게 결합을 시키라고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망가지고 또 망가지게 한다. 감사가 없다는 것은 높아지고, 높아지고,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힘들다. 근데 낮아질수록 중력의 법칙 의해서 자꾸 내려간다. 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이 더 높아지는 그 길이가, 그 낚싯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십자가 지는 것이 그렇게 편하다. 성도의 모습은 더더욱 낮아지게 하신다. 주님은 사도바울을 더 낮아지고, 더 낮아지게 만든다. ? 그거보다 더 낮은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다.

 

 

7강 일체성

 

천국을 만드신 예수님한테 직접 설교를 듣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좋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 주님을 내쫓고 죽여 버렸다. 우리도 사도행전을 보면서 성령을 받았던 사도바울에게 직접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던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게 하신다. 스토아 에피쿠로스,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바울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매개라고 하는 것이다. 매개는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매개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매개를 재 정돈해주고 있다.

 

사도행전 1722절에 아덴사람들은 종교성이 많다고 한다. 종교성이라는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매개물이 있는 것이다. 그저 누리고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아테네 사람들아! 이 이방사람들아! 너희들 나름대로의 매개물, 내가 착해서, 내가 잘해서, 신에게 갖다 바쳤기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으면 안 되겠니? 신상을 섬긴다는 것은 얻을 것은 얻고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결과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럼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의 호의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그렇게 생각해야 그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내가 알고 있는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말씀 지켜서 받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호의를 받았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17:25). 거저 주시는 분이다. 안 착해도 준다. 신은 퍼주시는 분으로 반영되고 있다. 다만 종교 없이 살자는 것이다. 그냥 살자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렇게 점잖게 설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걸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냥 사는 것,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은 퍼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구원받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설교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제 사도바울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줄 수 없는 은혜가 온다는 그 교차점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집어넣는다. “니가 알아? 왜 퍼주시는지?” 그 교차점, 그 교차점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설교방식이었다. 여기에다가 사도바울이 결정적인 중요한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하나입니다.” 일체성을 이야기한다. 일체성을.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일체성, 하나로 묶어버린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는 그 점에서 하나로, 일체성을 만들어버린다. 한 것 없이 그냥 누렸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모든 것이 하나 되어 있다는 것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자기만 특별대우해달라고 할 수 없다. 다 거저 받았다. 다 너도나도 거저 받은 입장에서 왜 시건방을 떨었을까?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 매개체로서 예수님이 들어간다.

 

근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하고,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간다는 것하고 이거는 말이 다르다.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은 띵한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서 그냥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화투 48장을 나누어주면서 왜 죽습니까? “나는 매개체야!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거저 주는 것은 없어!” 예수님께서는 내가 죽지 않으면 거저 주는 것도 없다고 하신다. 은혜와 죽음의 상관관계다. 이런 상관관계가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와 닿지를 않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기 존재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거저 준다고 하면 감사하지만, 죽음과 자기의 존재를 어떻게 매치시킬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점점 더 나아가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하신다(17:31). 심판하실 거면서 왜 줬어요? 사도바울이 좋게 가다가 뒤에다 심판한다고 하니까, 심판과 은혜가 매치가 안 되고, 죽음과 은혜가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된다. 요한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 곧 성령세례와의 차이점은 뭔가? 세례요한의 세례는 천국 못 간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천국 간다는 것인데, 왜 세례요한의 세례가 거추장스럽게 미리 왔는가 하는 것이다. 호의를 베풀어놓고 심판을 한다는 것과 세례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와의 이것이 서로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다. 힌트는 일체성이다. 전부 다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박스에 모든 사람을 다 집어넣는다. 인류를 하나, 1로 취급한다. 75억의 인구를 한 아담으로(로마서 5). 단 하나에서 새끼 쳤던 75억을 도로 한명으로 응집시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대할 때는 내가 은혜로 너를 만들었다가 된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줬다는 것과 같은 취지가 된다. 이렇게 해버리면 기존의 종교성은 인간 중에 괜찮은 하나를 뽑아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시켜 그 덕을 보자는 것이다. 이게 종교성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다.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의 최고의 은혜는 예수님을 죽여서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여서 살려내는 것하고 그동안 태어나서 사는 것하고, 이 두 개의 가치를 비교해봐야 한다.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그다음에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다. 우리의 잘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냥 퍼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퍼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물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에 붙을 것이냐는 것이다. 아니면 그 선물을 발길로 차버릴 것이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걸로 결정적인 심판의 한방을 날리겠다는 것이다.

 

일체 묻지 않을 테니, 신에게 바쳐서 챙기는 그런 공식을, 종교성을 철폐하자는 것이다. 착해서, 바쳐서 복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뭘 해줬는가가 중요하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정하신 사람으로 죽음 가운데서 살려낸 것을 복음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려낸 것이 복음이라면 아담(인간)쪽에서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착해도 더 착해야 하고, 아무리 바쳐도 더 바쳐야 하고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개인적인 의견이나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나 꼬시기 위해서 했다면 안 먹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행19:13-14절을 보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사도바울이 마귀를 쫓아내니까, 그게 굉장히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방을 해서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거기에서 유명한 고백이 15절에 나온다. “악귀(마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마귀 쪽에서도 유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천국에서 인정한, 유일한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저 반대편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바울이 편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바울은 고생을 한다. 풍랑이 인다.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한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죽음 가운데서 바울의 자리가 바로 주님의 자리였다. 지금 사도바울의 싸움은 영적싸움이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의 차별, 직업이라든지, 수입이라든지, 금전, 부동산, 재산, 행실, 행동, 지금 그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 안 하기로 이미 하나님은 정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죽이는 그것으로도 악마한테 협박당하지 않았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살인하고 간음했어도 협박당하지 않았다. ? “나 원래 그런 놈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야!” 이게 성도의 표준모델이다. 그런데 악마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악마의 구조다. 그러나 주님의 구조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트랜스다.

 

사도바울은 니들이 악마를 알아? 하나님이 퍼주는 것을 알아? 그냥 퍼주면 밥 먹고 살면 된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은 끝난 것이다. 따라서 그 퍼주는 그 호의의 결정판, 그 결정판은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들을 죽여서 살려내는 이 과정에 개입된 성령이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집어넣어 줘버리면 이 사람은 거저 죽었다가 거저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를 거저 아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모아이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뭐냐, 사도행전에는 안 나오는데 골2장에는 나온다. 세례란, 한 몸이다. 연합이다. 예수님이 택한 백성을 위해 죽으면 우리도 죽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면 우리도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도 좋든 싫든 의인으로 살아나야 한다. 누구 덕분에? 주님의 액션 덕분에 한통속으로 뻔뻔스럽게 살아나야 한다. 이 뻔뻔스러움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이 뻔뻔함을 강력히 반대했다. “인간은 착한만큼 주께 영광 돌리는 도덕적인 존재다.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거룩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세례()가 빠졌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왜 안 되느냐 하면 준비단계는 되지만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본인이 알아서 물에 들어가야 한다. 본인의 액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일방적이다.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죽으시고 살아나셨기에.

 

주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서 그 다음에는 본인이 본인의 원대로 하지 않고, 끈을 묶어놓으면 예수님의 성령께서 앞장세워서 필요한 대로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사명이다. 존재의 특징은 홀로 있다. 사명은 지시하는 다른 외부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다. 골프를 쳐도, 크루즈여행을 가도 다 주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될 정도로의 뻔뻔스러움! 그것이 거저주시는 은혜에 대한 사도바울의 설교다.

 

 

8강 교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설교를 하는 사도바울을 누가 괴롭히는가?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괴롭혔지만 이제는 교인들이 괴롭힌다. 같은 교인들이 그렇게 괴롭히면 하나님의 원수가 점점 더 위험한 지경으로, 적과 적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우리의 거룩한 공간까지 마귀가 침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천막장사를 했어도 모자라서 데살로니가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으로 만난다. 노동자로 만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인간관계가 우선이지 노동관계가 우선이 아니다. 돈만 많이 주고 잘해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헌금해서 부동산을 사고, 여기서 부동산이 생긴다. 소유주가 누구? 이렇게 된다. 부동산은 있음이 되고, 최종소유주는 존재에 종속이 된다. 그 부동산을 교회라고 해버리고 연속적의미를 준다. 이 의미를 지키기 위한 사명이 이 소유주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이 소유주는 부동산 지키는 사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교회인가? 왜 교회까지 악마가 따라왔는가? 교회는 왜 무너져야 교회인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20:28).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곳이다. 피의 가치가 계속해서 살아있는 그때만 교회가 된다. 이럴 때 교회 있음은, 교회가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그 이유는 자기를 쫓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20:29). 자기라는 인물, 거짓인물이다. 피를 흘리지 않았다. 사울은 사울파를 왜 좋아하지 않았나? 나는 십지가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면 교회고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피 흘린 그 분만, 한 분만으로 결정하자!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이니까. 사명이니까. 십자가지지 않은 자가 은근히 소유권을 주장했을 그게 바로 악마가 침투한 교회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다. 이런 교회밖에 없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교회가 있으면 우리는 또 달려가 악마의 교회로 만들어버리니까.

 

사도바울은 아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탐하지는 않았지만 받아 챙겼다(20:33).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다(20:33-34). 이것은 기능에 대해서 도와준 것이다. 은사가 끊어지면 안 주겠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에게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사도바울과 어떤 기능을 행사할 때, 주의 지시에 의해서 성령 받은 사람이 하게 되면, 은사를 받아서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퍼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서로 예의를 차리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빠이빠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어떤 동네를 떠날 때 빠이빠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동네 주민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반대할 때는 미련 없이 떠났다. 자기를 반대할 때 억지로 붙어있지 않았다. 반대하면 그냥 떠났다. 왜냐하면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고 주께서 이제 됐다고 하는 주님의 시그널, 신호로 본 것이다. 떠나가면 주께서 갈 곳을 인도해주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누굴 원망하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는 그런 것 없었다. 그냥 가는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사명이 내 존재보다 우선이다. 묻고 따지지 않는 퍼주시는 은혜다. 예수그리스와 함께 묶여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너 같은 인간을 통해서, 더욱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 사도바울은 믿음이 좋다. 믿음 좋은 사도바울이나 이렇게 사세요! 사도될 만 해서 사도되었구나! 이렇게 모든 영광을 주께 빼앗아 사도바울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사명을 빠트렸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평생에 사명이 늘 앞장섰다. 사명이 우선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특이점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으로 보았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바치는 위험한 짓으로 보았다. 될 수 있으면 결혼하지마라. 그러나 너무 사랑스럽거든 결혼해라. 차라리 결혼해서 실컷 고생해라. 원 없이 고생해라. 사명이 사도바울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니까 자식이 없었다. 자식이 없으니까 돈을 모을 필요가 없다. 혼자 먹고 다 쓰면 된다.

 

뻔뻔스러워져라! 이것이 사명이다. 사명. 자식 놓는 것도 사명이고, 자식한테 재산 물려주는 것도 사명이고. 그게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사명인데, 그 사명이 뭐냐 하면, “나 이토록 죄인입니다.”를 들추어내는 사명. “이만큼 잘났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 못난 놈을 건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그 사명. 그러니까 결국 그냥 사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안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0:28).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피가 중지되지 않는다. 반드시 교회는 있기 마련이다. 듬성듬성 있어도 촘촘히 있어도. “이 말을 한 후에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20:36).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20:37).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20:38). 이 대목을 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좋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아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사도바울을 좋아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었다. 눈이라도. 사도바울은 이것을 기능이라고 보았다. 3초의 기능으로. 3초의 사명으로. 주께서 인도해야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21:10). 가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가라는 이야기인가? 성령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더욱 가야한다. 사도바울은 아바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아픔을 그대로 운반하는 사람인데, 이것이 사도바울이 받은 사명이다. 고린도교회에선 고생을 많이 한 사도는 저주받은 자로 보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를 사도라고 하지 않는 자들을 고린도교회에서 내쫓으라는 것이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20:9). 강의 내용대로 실제로 죽음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죽었다고 판정 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건 죽은 자가 맞다. 죽은 자 맞는데, 다른 사람은 여기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유일하게 사도바울이 손을 댐으로써, 생명을 줌으로서, 사도바울의 기적뿐만 아니고 그동안 밤새도록 강의한 강의내용, 이게 옳았다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주의 의해서 죽은 것을 알고, 주의 뜻이 있다면 살아날 줄로 알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이해했고, 밤새도록 전했던 그 복음 내용이 진실이구나, 이게 현실자체구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살아있다. 죽었던 분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서 활동하는 그것은 보지 말고 주님이 활동하는 그걸 보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다.

 

사도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26).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그 사실을 세 번씩이나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을 역사로 받아들이게 되면, 이런 이야기가 사적인 경험으로 끼어 넣어 진다. 그러나 세 번이야기(9:7, 22:9)를 한 것은 역사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장님으로 살았을 때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렇게 생각과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게 종교성이다. 종교 빼고 살면 되는데, 그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 이만큼 충성봉사, 십일조 했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정이 잘 됐다는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어디에 가겠는가? 장님인데 운전을 잘하고, 장님이 장님끼리 보다가 장님인줄 모른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안다. 저 세상을 아니까. 지금 이것이 팩트다. 안 그러면 동화책이다.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지금도 반복이다. 사도바울의 눈을 뜨게 하여,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서 일체성을 갖고 있고, 구원은 빛의 세계로, 그 다음에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라고 주께서 시켰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아그립바 왕이 하는 말이 바울아 니가 미쳤도다”(26: 24)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제대로 잘 전한 것이다. 양보 없이 전했고, 냉정하게 전했고, 똑바로 전한 것이다. 왕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알아서 기면서 권력 앞에 입을 다물고 있다. ? 살라고! 병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치료받기 싫어하는 그 고집,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집착하는 것, 악마의 권세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공한 것이다. “니 지금 악마의 권세에 있다!”

 

 

9강 폭풍 속으로

 

불의 혀로 시작했다가 풍랑으로 끝난다(27:14). 자연현상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다. 하늘과 달과 별,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질서다. 2장에서 성령은 인간의 한계로 여겼던 질서를 뚫고, 자연세계를 뚫고 오시는 것이다. 외재성이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한다. 인간은 처음 만들었을 때도 에덴동산에 갇혀있었고, 추방되어서는 자연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별을 관찰해봤자, 별은 계속 도망치고 있다. 별의 확장성이다. 마치 대자연은 인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그런 식이다. 마지막을 넘어서야 전부를 아는데, 마치부부사이처럼, 안다고 했는데 살면 살수록 우주팽창성 같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다. 누구야 너? 정체성을 모른다. 이처럼 갇혀있는 인간에게 성령이 오신 일, “이게 다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것이 이거 외에는 일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불의 혀같이 임한다는 것은 바로 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다. 요엘 예언서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불이 임하는데, 이렇게 불이 임한다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것이다. 불이다. 그리고 이 불은 미리 앞당겨서 언어의 형식으로, 혀니까, 언어의 형식으로 너희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의 할 일은 끝났다. 다 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아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내용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죄사함이었다. 과학, 의학, 물리학, 어떤 학문으로도 죄사함은 없다. 공부 많이 해도 죄사함은 없다. 박사학위를 받아도 죄사함은 없다. 세리, 창기도 죄 사함 받는다. 죄사함은 받는 것이 아니다. 죄사함은 외부에서 침투한다. 방언이기 때문이다. 죄사함의 효과가 눈에 보일 때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이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는, 사도의 존재는 소멸하는 것이다. 소멸, 사도는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다. 교회가 뭔지, 인생이 뭔지, 알 필요가 없다.

 

복음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구태여 내가 나를 계산해서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사라짐이다. 점점점...예수님의 효과로 미미하게 사라진다. 다 사라지는 것이다. 나에게 주신 거룩함은 나를 사라지게 한다. 사도의 사라짐이 예수님의 사라짐과 유사하다. 이게 복음의 효과다.

 

사라지는 것인데, 왜 풍랑이 이는가? 하나님께서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준비했다. 근데 풍랑이 어느 정도의 풍랑이냐 하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7:20). 큰 풍랑이었다.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려면 존재가 있어야 하기에, 살고자 하기에 구원에 대한 의미가 심각하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살아야 되는데 살 희망이 없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27:24).

 

사도와 함께 죄수로 동행한 사람이 276명이다. 자연의 변화 앞에 다 두려워 떨게 만들었다. 그런데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이건 약속이다. 약속이 큰지 대자연이 큰지를 대조시키는 것이다. 14일 동안 해도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은 끝났어! 이것이 존재의 한계다. 존재의 한계는 풍랑에 빠져 죽는다는 것이다. 자연이 살면 우리가 살고 우리가 살면 자연도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재성, 이런 자연의 한계를 뚫고 약속이 들어온다. 비록 대자연은 너를 협박할지라도, 너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약속은 끄덕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랑을 준비한 것이다. 자연의 풍랑이 아니더라도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그게 풍랑이다.

 

한평생 우리가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살았어도 마지막에 약속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로또 맞은 것이다. 그 분이 나를 구원하는 근거는, 나보다 더 센 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남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이제부터 살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사라져야 하고 그걸 위한 긴긴 세월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존재한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을 통과하고 온 것이다. 주께서 허락한 사건을 통과한 것이다. 이게 인생이다. 그게 풍랑이다. 풍랑 속에서 배운 것이다. 결국 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사건은 바람 같아서 있다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가 없는데, 풍랑은 왜 일고하는가? 사도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죄인의 역할로 사람들에게 서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죄인 아닌 자가 죄인 아니기를 원했던 죄인인 자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존재와 그 십자가 사건을 사도를 통해서 반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령께서 오신 자들의 특징이다. 성령 받았다면 이제부터 죄 속에 살아라. 이것이 나와 주변을 살리는 임무다. 멀쩡한데 죄 속에 있는 것이다. Mission: Impossible

 

사도바울도 지금 죄수276명과 죄수 취급받아서 로마로 호송되고 있다. 죄수이기에 지도자급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다 살림으로서, 없어져야 될 인물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기존인물들을 다 파괴시킨다. 예수 믿으면 착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죄수 아닌 죄수로 살게 하셔서 무시당하는 자를 구원하는 역할을 이 땅에서 맡긴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창3, 선악을 아는 자체로 내가 의인이라고 쳐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본래 모습은 몰라도 되는 것이다. 바로 몰라도 되는 이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천국가기 전에 미리 우리에게 살면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지 잘난 체 하니까 죄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가 있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딱 지목해서 율법을 줘가지고 그러니까 니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니가 죄를 모르고 죄 지은 것 없어서 나는 잘난 체 하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그게 바로 창세기 2장을 모르는 죄인이라는 뜻인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못 넘어간다. 만만치 않다.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 연속성으로 사도바울을 세운다. 풍랑이라는 사태 앞에서 인간의 지식이나 노하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가운데서, 살리는 것은 오직 걱정하지 마라 로마에 선다.”라는 이 약속뿐이다.

 

이 약속 때문에 사도는 살아야 하고 살 필요도 없는 다른 죄수가 산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필요도 없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애초부터 자기한테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내가 뭔가 잡았다, 소유했다가 문제다. 유령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세상주변으로부터 뭔가 자꾸 채우고 붙잡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외재성인데, 침투한 외재성으로 우리는 그냥 현상에 불과한데, 이것이 복음인데, 그걸 흔들어놓기 위해서 창세기 3장에서 기어이 창세기 2장으로 못 가겠다고 하는 인간들은, 인간 쪽에서 대자연의 질서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카드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나열한 카드에서 정보 4개만 알아도 찾아낼 수 있다. 후루꾸(요행수). 인간이 찾아가는 방법이 다 이렇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터줏대감(노하우, 정보가 많은)들이 있다. 빅데이터, 정보를 잘 듣는 것이 미래의 희망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응축되어 있다. 병이 들었는데도 치료를 싫어한다. 인간은 다 정신병자다. 남을 패면서 즐거워하는 사디즘이, 또 하나는 자기가 얻어맞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조히즘이, 바로 자본주의다. 돈 자체가 상품화 되어 집착증과 편집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버는데?” 마음을 낮추면 된다. 소멸된다. 소멸 중에 약속이 부여된다. 니 역할이 중요하다. 드라마 연극이 끝나면 우리 역할은 끝난다. 흙인데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있다. 역할 다 하면 끝난다. 하늘나라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천사와 같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방언이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독사에게 물렸는데, 독이 퍼지지 않았다. 인간의 빅데이터는 몇 초 만에 독이 퍼지는데,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 된다. 정보에서 나올 수 없다.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모아놓은 그 정보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 죄인인데 의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그것을 사도바울은 전파하는 것이다. 건강해도 건강이 아니고 아파도 아픔 그것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몸이 아프냐 건강하냐를 가지고 너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의 잣대로 삼지 말고, 니가 예수님의 피로 죄 없게 되었느냐, 니가 죄를 갖고 있는가, 그게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지금 사도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이 보블리오 추장을 만났고, 그 증거로 추장의 아버지의 열병을 고쳐준다(28:8).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고”(28:23).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해를 해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하늘나라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아니하면 오는 세계에 못 들어간다. 미리 예약이 되어 있다. 예약이 되어야 한다. 이미 온 하늘나라의 소식을, 말씀을 귀찮게 여기고 외면해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의 운명은 끝장이날뿐이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서 먹을 것인가? .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성령이 어떤 것을 주셨는지, 우리는 번이 정답인줄 알지만 우환이 있을 때는 성경을 나를 위해서 써먹으려고 한다. 번인 줄 알지만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순간에 번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장사가 안 돼서 조금 손해 보는 것, 성령께서 주신 주님의 풍랑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울처럼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보다 성령이 주신 하늘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28:24-27)

 

그 하늘나라가 외재성으로 다가왔을 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성령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했더니만 흩어졌다. 왜냐하면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 때문이다. 다 간다 해도 우리는 왜 갈 수 없는가? 그것은 이사야로 하신 이 말씀이 우리를 강권적으로 장악한 것이다. 다 흩어져도, 그럴 경우라도 가족보다 교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살아난 약속과 복음만 자랑한다. 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다 흩어질 때 사도는 감사했다.

 

나는 안 완악했는가? 나는 안 둔했는가? 나는 장님이 아니었었나? 나는 귀머리가 아니었었나? “오지 마!” 이 오지마를 뚫고 왔기 때문에 우리는 횡재한 것이다. 안 오셔도 되는데 오셨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가끔가다가 이게 내가 미쳤나? 진짠가?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으로만 끝나면 진짜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 이게 진짜구나!” 풍랑보다 더 센 게 약속이다. 죄인이 되라! 오늘날 우리들이 사도다. 사도는 이렇게 사라진다. 죄인이 될 경우에만, 내가 무가치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 사도의 기능을 할 수 있다.

 

 

<후기>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사도바울의 움직임이 보이고,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보인다. 예수님, 그 분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게 복음이다. 왜 복음인가?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건이다. 이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니다. 철판에 어떤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그것은 하나의 철판에서 만들어진 요리다. 이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에서 파생되어져 나온 모든 사건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다 흡수되어 녹아져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판단기준이 되는 모든 것들도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 세상이라는 아랫동네에서는 우리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도 함께 살고 있다. 천사뿐이겠는가? 예수님의 영이 활동하고 계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워버린다고 해서, 들리는 것을 살해한다고 해서 면제되지 않는다. 거저주시고 막 퍼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햇빛과 공기와 비를 내려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음에도, 인간의 끝없는 불만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감사는 곧 자기정당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가면일 뿐이다. 그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고통 없는 인간은 없다.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 모르면서 고통스러워한다. 갇혀있다. 가두리양식장이라는 하나의 양식장에 일괄적으로 다 갇혀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많은 정보를 동원해도, 죽음에 가둬놓고 심판을 행사하시는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뭘 잘못해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풍랑보다 더 센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 성령의 일방적인 침투는 자기존재증명에서 손을 놓게 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죄수 아닌데 죄수인자로 살게 한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시다. 교회가 우선이 아니고 복음이 우선이다. 성령의 발길질로 편하게 살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의 핵심은 복음이라는 매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처럼 선교한다고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복음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움직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실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기보호를 위해서 자기를 붙잡지 말아야 할 교회를 붙잡고, 로마마저도 옹호했던 혈통중심의 교회, 유대교회는 다 권력이고 그 권력과 결탁한 정치세력이었다. 그 밑바탕에 깔린 것은 나만 살면 된다는 본성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침대로 삼고 까치발을 딛고 구원받고자 했다. 그런 유대인들을 쳐내고 개 같은 이방인을 구원함으로 진짜 이스라엘의 구원의 내용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아닌 무조건 잘못했고, 구원받지 못할 저주받은 자로 드러나는 것이 구원의 내용이었다. 율법의 메시야가 아닌 율법 외의 메시야의 구원이다. 사도바울은 북이스라엘/니느웨, 유대인들/이방인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인/ 사도바울, 이 대조를 통해서 주님의 생뚱 맞는 구원방식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의 인식은 점점 더 수정되어져 가고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답답한 가면을 벗고 후딱 죽고 싶은 것이다. 가면을 벗기면 예수님이 그 안에 있다.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경계선이 된다. 가는 곳마다 갈라지고 흩어진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복음전파 때문이다. 창세기3장에서 선악과에 발목 잡혀 있는 인간은 절대로 2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죄인인줄 몰라야 되는데, 죄인인줄 안다. 죄인인줄 아는 그것이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의 죄기 때문이다. 착하면 행복하게 살고 나쁘면 불행하게 산다는 이 선악적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시킨 것이다.

 

도박판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종교마저 예수님마저 도박판에 벌여놓고 판돈을 건다. 판돈을 다 가져가는 자가 성공한 것이고 판돈을 잃은 자는 실패자가 된다.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한 이 경쟁마당에서 낙오자는 필요치 않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이 아니다. 사도바울을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풍랑 속에서 살리신 것은 살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이시기 위해서였다. 풍랑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 약속으로 죽어야 한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풍랑 속에서다. 모든 게 풍랑이다. 풍랑 아닌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구원받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한 구원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의도한 14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한 14일이 지나면,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에게는 구원이었듯이 성도에게도 구원이 된다. 연극이 끝나면 정적만이 흐르고, 죄인이라는 역할이 끝나면 답답했던 가면을 벗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

 

태풍 같은 성령이 불어 닥치면 성도(?)가 성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상하다. 태풍은 다 휩쓸어버린다.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태풍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성령은 사건으로 남아있다.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뿐이다. 변한다면 죄인만이 변한다. 죄인이 변화의 흐름에 따라간다면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주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린 방언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격, 기질, 목소리, 외적인 것 때문에 갈라진다. “내 말 들리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내 말을 들어주면 내 편이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편이 된다. 무수한 말들이 오가지만 방언은 없다.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뿐이다. 방언은 못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지셨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외쳤던 것은 내가 십자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말아야 한다. 단 성도에게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내부는 방언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방언은 어떤 이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어떤 이에게는 프레쉬fresh, 살아있는 향수가 되어 흩어지게 하실 것이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갈라섬의 현상을 일으켰듯이, 그렇게 말이다. 우리는 늘 이중결정에서 산다.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으로,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언약으로... 우리가 죄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죄인이 되어야 된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주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없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아야 교회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유창한 말로 전했을 때, 니가 미쳤구나! 라는 말을 사도바울은 들었다. 잘 전한 것이다. 제대로 전한 것이다.

 

잘 전하셨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주고 싶어 했다. 아니었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사도바울의 인식에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초창기 편지보다 옥중에서의 편지가 더 깊어져 갔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도바울의 복음은 눈을 빼주고 싶은 그때보다 더 휘몰아가는 현상으로 움직였다. 죄짓는 사명이 나를 미치게 한다. 죄짓고 싶어서. 사적인 아쉬움이 있었어도 기대치 않았던 공적인 욕심이 아쉬움의 그림자마저도 덮었다. 이번 수련회는 죄짓기 위해서 늦은 밤까지 이야기하고 죄짓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났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미쳤다. 가야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자연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 자연의 한계를 뚫고 들어오신 외재성으로 인해 내재성은 짜증의 언어를 토해낸다. 엄청 덥다. 오늘은 좀 시원하겠지... 그 기대마저도 포기하도록 매일 새롭게 더웠다. 폭염으로 죽을 자는 죽는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 이미 죽었는데 뭘? 그럼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에어컨 바람 말고 자연의 바람이... 중첩된 현상으로 벌써 그립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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