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만민의 기호로 서게 되는 예수님 (사 11:10,-16)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17, 새번역)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 예수를 위하여 받은 박해로 생긴 상처 자국을 뜻함

 

(고전 7:18, 새번역) 할례를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그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16:4, 개역)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24:24,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11:10, 개역)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11, 개역)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1:12, 개역)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11:13, 개역)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1:14, 개역)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1:15,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1:16, 개역)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11:10,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11,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다시 손을 펴시어서, 그의 남은 백성들, 곧 앗시리아와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와 엘람과 바빌로니아와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남은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실 것이다. / , '바드로스' , '구스', '나일' 강 상류지역 , '시날'

(11:12, 새번역) 주님께서, 뭇 나라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세우시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방에서 그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11:13, 새번역) 그 때에는 에브라임의 증오가 사라지고, 유다의 적개심이 없어질 것이니, 에브라임이 유다를 증오하지 않고, 유다도 에브라임에게 적개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 또는 '원수들'

(11:14, 새번역) 그들이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공격하고, 함께 동쪽 백성을 약탈하며, 에돔과 모압을 장악할 것이다. 암몬 사람들도 굴복시킬 것이다.

(11:15, 새번역) 주님께서 이집트 바다의 큰 물굽이를 말리시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셔서, 유프라테스 강 물을 말리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것을 쳐서 일곱 개울을 만드실 것이니, 누구나 신을 신고 건널 수 있을 것이다. / 또는 '수에즈 만의' , '그 강'

(11:16, 새번역) 주님께서, 남은 백성 곧 앗시리아에 남은 자들이 돌아오도록 큰길을 내실 것이니,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게 하실 것이다.

(15:12, 새번역)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 11:10(칠십인역)

 

 

성경말씀은 예언으로만 되어 있는 확정적인 내용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비언약을 상대로 하는 겁니다.
곧 언약의 반대인 비언약은

바로 인간의 허구성을 내용으로 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그야말로 말이 되는 소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아니 지금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도 안 돌아오는 판국에

꿈도 야무지시지? 어떻게 이방인이 돌아온다고 하실까요?

 

너무 너무 말이 안되는 것만이 성경에 기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그동안 얼마나 허구 속에서 상상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

이 예언의 말씀에 의해 턱 하고 걸려 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넘어지면서 발가벗겨지면서 그 허상들이 와르르르 바깥으로 쏟아지겠지요?

 

어릴적에 구슬치기해서 딴 구슬을 주머니에 잔뜩 넣었는데

다리에 걸려 넘어지면

구슬이 와르르 바깥으로 쏟아지듯이

우리는 성경 말씀을 만나면 꽝 하고 부딧혀져서

허구와 허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들이

바깥으로 구슬 쏟아지듯이 쏟아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비언약의 내용들이 뭔고 하니

바로 종교 라는 우상인데 신약에서는 곧 자아 가 바로 우상이요 종교이다 말이죠

 

현대에서의 종교는 곧 자아입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고 해도 결국은 자아 가 우상으로서 자리 잡음으로써

반드시 복음은 이 자아를 깨뜨리고자

반드시 이 자아와 이새에서 나온 한 씨를 대립시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무교 라고 해도 역시나 우상숭배자요 교회 다녀도 역시나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자아를 비언약으로 규정하고서, 비언약을 공격함으로써 예언은 펼쳐집니다.

 

그러니 이 예언에서 벗어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유대인의 모습이 남의 모습이 될 수가 없는 거죠

 

자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도 안 돌아오는 판국에

거짓선지자들에게 다 장악 당해서 여호와의 예언을 거부하는 판국에

어떻게 개같은 이방인이 돌아오냐 라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허구 허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믿음을 비웃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날에] 말입니다.

그 날이 오면 말이죠.

여호와가 누구지?

요셉의 아들 아니냐?

 

희년이 글쎄 이렇게 초라해서, 놀림깜이 되기에 아무도 안 믿어요

무시받는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은 곧 인간의 노동의 가치는

그 무시받고 초라한 [그 날]

자신의 목숨을 걸수가 없습니다.

가장 귀중한 목숨을 말라꼬 저런 하찮은 것에 걸겠냐 말이죠

반드시 더 높은 가치가 생기면 그때 거는 것이
인간의 믿음이라는 노동이요 종교성 곧 666 이다 말이죠

그래야 매매하고 소통된다 말이죠

 

가치 없는 것에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 곧 목숨을 거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비웃습니다

 

 

우선 누가 비웃겠냐 말이죠

 

이것이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벌어졌잖아요

이 이새에서 나온 한 싹을 이스라엘이 거부했듯이

희년을 아무리 유대인 회당에서 외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만민에게 넘어가는 기호요 표식이요 표적이요 흔적이 되더라 말이죠

 

즉 유대인이라는 선민이라고 해서 예수님과 연관 되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무연관이 되었고

 

개같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유대인 예수님과 연관이 아예 없다고 확고하게 된 것이

성령에 의해 즉 원인 없는 결과에 의해 연관이 되어버린

만민의 기호가 되더라 말이죠

 

기호란 제가 국민학교때 즉 초등학교때 무조건 키가 가장 작은 아이가 1번이요

반아이중 가장 키 큰 아이가 끝 번호였듯이 나중에는 이름 ㄱ ㄴ 순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이런 것이 기호가 된다는 겁니다. 표식 말이죠

군에서 또는 교련 제식훈련때 기준을 정하면 그 기준이 하나의 깃발이요 기준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반 아이들도 너 1번이지 라고 안다 말이죠

 

마치 멀리서 깃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띄듯이

누구나 인식할수 있는 표시가 된다 말이죠

 

유대인의 대표적인 기호 표식은 할례다 말이죠

또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이 유대인이다 선민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주변에서 인식할 수 있듯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표식을 바꿔치기 해 버리시는 겁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기존의 표식으로 기호로 다윗의 자손을 기다려도

그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라고 못 믿도록

 

다른 표식이 있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입니다.

 

뭐 믿는게 뭐가 어렵다고 십자가 믿는다고 하면 되잖아 라고 할수도 있지만

유대인 만큼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십자가 라는 표식 기호를 찬양하게 되면

그들의 소속 조직인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말이죠

예수님이 버림받듯이 말이죠

 

그리고 반드시 유대인들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인

다른 표식을 찾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활동에서 언급되는 부자청년이나 맏아들이나 바리새인 등등이 그런 사고방식으로써

 

반드시 그들은 의인의 자리에 놓여지더라 말이죠

 

반대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 그 죄인이

그냥 죄를 지으면 죄가 되는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죄이기에

요나의 표적 상에서의 죄이기에

십자가에서 밝혀지는 원수로써 그 원수에게 피 용서가 발리는 겁니다

 

그러니 의인에게는 말도 안되죠

용서 자체가 필요가 없으니 말이죠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거룩이 도리어 가장 더러운 개같은 이방여자 중에 많은 과부 중에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고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스라엘 문둥병자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많은 이방인 문둥병자도 아니고

오직 단 한 사람 나아만 장군 문둥병자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환자에게만 보내심을 받는 의사이다는 겁니다.

 

현대에 지금까지도 이 문둥병 곧 한센병은 불치병이다 말이죠

즉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죽은자에게만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자 그럼 유대인은 더더욱 보내심을 받지 않은 거다 말이죠

 

그러니 예언이 이런 단절성 곧 말도 안되게

간따나 유대인도 안 되는 판국에

이방인이 무슨 수로 만민의 기호로써 깃발로써

저요 저요 손을 번쩍 깃발처럼 들어서

 

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너무 잘 알아요 라고 할 수 있겠냐 말이죠

 

성경도 몰라요

글도 모르는데 성경을 우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였다가

예수님이 그 소경에게만 보내심을 받다 보니

그 실로암 소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마치 평생을 거쳐서 다 안 것 같이 말을 하나

 

정작 성경박사요 신학자인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너무 깜깜하더라 말이죠

 

성경 박사요 신학자인데 왜 에언을 모를까요? 왜 이새에서 난 한 싹을 왜 모를까요?

껍데기(그림자)는 달인인데 속 알맹이(실상)는 텅텅 비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더라 말이죠

연결 된 자라고 누구나 다 알고 있었는데(안식일 지키고 할례하고)

정작 단절 되었고

단절 되었다고 정죄해 버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단절된 자인

손마른 자를 안식일날 일부러 고치시는 안식의 주인이 졸지에 연결이 되고

안식일 지키는 자는 아무리 지켜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고

선이 끊어져 있더라 말이죠

와이파이가 막혀 있어요 글쎄

 

정작 실로암 소경을 도리어 정죄하고 죄 인 이라고

본인들이 규정한 그 규정이

손부끄럽게 만들정도로

실로암 소경이 도리어 이 이새에서 난 한 싹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너무 너무 잘 알더라 말이죠

 

자 그러면 여러분 왜 참선지자들이 배에는 쓴 말씀을 왜 먹게 될까요?

왜 배에는 달달한 말씀을 먹지 않고 왜 쓴 말씀을 먹을까요?

 

즉 상대적인 거짓선지자들은 쓴 말씀을 왜 먹지 못할까요?

 

방금 예를 든

바리새인들은 왜 쓴 말씀을 먹지 못하고 있고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왜 먹지 못하고

 

반대로 실로암 소경은 저들 말 마따나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어두운 죄인인데

성전측량으로 따지면 가장 더러운 가장 먼 거룩치 못한자인데

어떻게 무슨 수로 예수님이라는 이새에서 난 한 싹을 외치는

깃발이 될까요? 표식이 될까요?

 

왜 개같이 더러운 이방인이 만민의 깃발로써 예수님을 외칠까요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사랑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피 용서로 인한 결과이다 말이죠

즉 원인 없는 결과로써

결과 밖에 없어요

원인이 없어요

끝에서

종말에서

다 이루심에서 왔거든요

 

그러니 처음자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의 자리이니까 말이죠

 

난 죽은 자입니다.

산 자 아닙니다.

 

이런 자에게만 의사 곧 십자가의 피 용서가 덮쳐진다는 겁니다.

 

지혜를 보세요

솔로몬이 외치는 지혜란 인물이거든요

 

성전 제일 바깥이듯이

나라 제일 끄트머리에서 벌어진 사건이 제일 높은 임금의 자리에 까지 올라갑니다

아무도 해결 할 자가 없어서 말이죠

 

지혜라는 인물은 그냥 가만히 팔짱끼고 있는게 아니라

도리어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서

죄인 가장 더러운 죄인

원수 가장 죄인 중의 괴수에게 까지 내려가서

지혜를 펼치신다 말이죠

 

그러니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는 지식의 최고수준일 뿐이지

정작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는 웃싸꺼리 밖에 안된다 말이죠

그 의문의 왜 반복하냐 말이죠

 

철학자들이 때려죽어도 말 못하는 지혜는 바로 인물입니다.

 

이 인물을 이야기 했다가는 웃싸꺼리가 되니까 거리껴서 말 못 해요

걸림돌이거든요

 

지혜가 지혜를 다리걸어 넘어뜨리는 지혜인줄 곧 인물인줄 모르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지혜를 몰라서 지혜를 습득했겠습니까?

 

그 지혜로 자기를 찌르는 지혜를 펼칠수가 없다 말이죠

그 지혜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지혜를 못 펼쳐요

 

헬라인이란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와 같은 자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이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이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지혜 아니다고 한 것에

정작 유대인들은 결과는 십자가가 자신들의 첫사랑의 원리 뿌리인줄 알면서도

미련해 질까봐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이 자신들이 습득한 지혜들을 배설물로 여겨 못 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겨 버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버린 겁니다. 자기 밥벌이인데 이제 더 이상 자기관리를 자기가 하지 않고

용서라는 피에 맡겨버린바 된 매인 몸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이라는 깃발, 표식입니다. 툭 건드리면 무조건 십자가의 피 복음만 튀어나도록 되어 있는 자동자판기이다는 거죠)

완악한 수건을 못 벗는 겁니다.

기여이 원인을 쥐고 싶어서

결과를 버리는 겁니다.

원인이 있다는 말은 결과가 없다는 것이거든요

즉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지식이 1020년 지나면 다 웃싸꺼리인데도 그 지식을 소유한 것이

구원의 증표인냥 깃발인냥 표식인냥 쥐고 있더라 말이죠

 

원인이 있다는 말은

원인을 쥔다는 말은

결국 자아는 없는데 자아는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마귀가 만들어낸 자아는 반드시 몽둥이를 쥐게 되지

 

그 몽둥이에 맞아 죽는 시체의 자리에 못 선다 말이죠

 

그런데 그 몽둥이가 자기가 죽인 그 시체에 깔려 죽는 몽둥이인데 말이죠

 

한 쪽 기생이 솔로몬의 지혜에 박수를 치면서 옳소이다

정말 정말 지혜롭습니다. 라고 지혜를 칭찬하지만

 

그 기생은 지혜가 인물로써 자신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자

죽음의 자리에 뛰어들어 지금의 상황을 역전 시키는 줄 모르는 겁니다.

 

인물인줄 모르고 끝까지 지식으로 보는 자아의 인식을 못 포기하는 겁니다.

 

죽음으로써 지혜를 만나게 되는 줄 모르고

살아남게 되어서 지혜를 자기의 유익에 맞다고 이 자기유익이 바로 우상이거든요

박수를 치더라 말이죠

 

그런데 지혜라는 인물은 이런 법이라는 껍데기 그림자가 아니라

실상이라서

진짜 어미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죽음을 의도적으로 일부러 펼치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펼치더라 말이죠

 

바리새인이 왜 이새에게서 난 한 싹을 왜 못 알아봤을까요?

그들에게는 죽음이 안 깔리는 겁니다.

 

물에 빠지지 않으니까 살려주세요 라고 울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로암 소경에게는 죽음을 깔다 보니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살려주세요 라고 우는 자가 되더라 말이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 위로 걷고 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유대인이라는 선민으로써 이 기적이야 말로

자신이 구원받은자 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기회가 된다 말이죠

 

소위 말해서 깃발 기준 표식 표적 흔적 표시가 된다 말이죠

 

물 위를 걷는 기적이니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이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라면

모든 유대인들이 바라는 그 속내가 베드로를 통해서 들통남으로써

이 속내가 사실은 마귀가 심은 것으로써

마귀에게 장악 당한 우상숭배자이지

 

이새에게서 난 한 싹과 무관한 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죽음 속으로 뛰어 드셔야지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기에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서

그 죽음 속에 뛰어드심으로써 건지셔야

 

비로소 죽다 살아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새롭게 보인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표식이라는 기호 깃발은

기준으로써 예수님 본인이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살아난 부활의 첫 깃발이 되는 겁니다.

(그 첫 깃발 첫 기준으로서 후발자로써 둘째 부활에 속하는데

정작 유대인이 아닌 만민이 깃발로써 예수님을 찬양하더라 라는 겁니다 마치 실로암소경이 깃발로서 청기 들어 백기 내려 십자가의 예수님 들어 유대인 완악한 수건 내려 라고 깃발을 든다 말이죠 나팔 분다 말이죠 뿌뿌뿌 내 죄를 씻으신 분이 여기 계십니다

물동이 던지면서 동네 사람들 내 죄를 용서하시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외치는 사라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죠)

 

이 푯대에 메인바 된 사도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듯이

남들이 죽이기 전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죽음의 자리에 몰아가는 겁니다.

그 기능을 받았다고 말이죠

물론 베드로는 스스로 못하지만 이미 원치 않는 길로 가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 덮쳐져 버렸다 말이죠

(여기서 스스로는 자아 라는 원인으로써 스스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결과가 덮쳐진 증상이지 자아가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 곧 자원하는 영을 말합니다. 괜히 흉내내지 마시길)

 

그래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외치는 무가치한 닭으로써 우는 겁니다.

베드로가 울어야 할 것을 닭이 대신 울고

다시 베드로가 사도로써 백성들의 죄악을 대신해서 울어서 죽는 겁니다.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일관되게 죽음 곧 삼일의 간극을 채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모습이고

 

이 한 싹의 계통

노선이 아닌 것은

이 삼일의 간극인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채우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한 때는 바벨론으로 포로 당하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받는 핍박이고

두 때는 이유없이 받는 핍박이고

반 때 는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으로써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식이다 말이죠

 

이 삼일의 간극인 엘리야의 삼년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죽음 속으로 몰아가는 이 단절이

비로소 천국이 이미 덮쳐진 자에게서 회개라는 증상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찬양 유다 시아버지 유다처럼 찬양하는 깃발

표식

요나의 표적이 덮쳐진 결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 아들을 이 뺑뺑이 세 번

간첩으로 몰려서 뺑뺑이 세 번 도는 가운데에

 

이 죽음 속에 놓여짐에 있어서 비로소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기 아들을 바침으로써 패쓰 넘어가더라 말이죠

 

욥이 자신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님을 비로소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알고

내 죽음으로 내 죄로 우는게 아니라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 마땅함이고

정작 주님의 죽음으로 주님의 죄 담당하심으로 움으로써 넘어가더라 라는 겁니다.

요셉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살았다는 것을 모르고 산 것에 대해서 회개함으로써

천국이 이렇게 나 유다를 뺑뺑뺑 돌게 했다고

비로소 해답인 십자가의 죽음 곧 원수사랑을 원수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에서 외침으로써 넘어가는 겁니다.

마치 한 쪽 기생이 죽음으로 인해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움으로써

이 죽음이 옳다고서 지혜라는 인물을 외치는 겁니다.

깃발로써

나팔로써

광야의 소리로써 말이죠

 

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외칠까요?(세례요한)

우리는 이 광야라는 죽음이 마땅하지만

주님은 이 죽음마저도 생명수로 채우시는 인애와 자비를 베푸실 자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 (시편 149)

라는 글에서 열방이 주를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편에서 열방을 심판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편에는 열방이 주를 찬양한다고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주를 찬양한다고

깃발을 흔든다고 합니다.

 

열방도 유대인도 모조리 이 십자가라는 심판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이라는 지혜를 곧 십자가의 지혜를 외치는

다른 한 쪽 기생(항상 두 언약을 대조하니까)의 울부짖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외침이요

우리의 노래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안 받습니다.

인간의 죽음 조차도 의문일 뿐입니다.

그러니 순교니 뭐니 하면서 사기칠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만이 또렷하고 밝히 보이니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 신나게 외치면 됩니다.

다른 결과는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이 제대로 된 마무리요 완료요 결과이지

다른 것은 또 의문의 반복이라서 밑도 끝도 없는 마침이 없는 암흑 뿐입니다.

 

이미 한 아기가 떳기에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이 떳기에

그 증상으로써 만민의 기호로

이방인이

창녀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깃발 표식 표적을

찬양하는 겁니다

 

반대로 유대인은

의인을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를 노래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것 조차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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