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몽둥이(앗수르)를 치시는 여호와 (10: 1-14)

 

 

(10:1, 개역)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10:2, 개역)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10:3, 개역)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10:4, 개역)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10:5, 개역)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10:6, 개역)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10:7, 개역)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10:8, 개역)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10:9, 개역)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10, 개역)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10:11, 개역)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10:12, 개역)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10:13, 개역)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10:14, 개역)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10:1, 새번역)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10:2, 새번역)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

(10:3, 새번역) 주님께서 징벌하시는 날에, 먼 곳으로부터 재앙을 끌어들이시는 날에, 너희는 어찌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청할 것이며, 너희의 재산을 어디에 감추어 두려느냐?

(10:4, 새번역) 너희는 포로들 밑에 깔려 밟혀 죽거나, 시체 더미 밑에 깔려 질식할 것이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10:5, 새번역) 앗시리아에게 재앙이 닥쳐라! 그는 나의 진노의 몽둥이요, 그의 손에 있는 몽둥이는 바로 나의 분노다.

(10:6, 새번역) 내가 그를 경건하지 않은 민족에게 보내며, 그에게 명하여 나를 분노하게 한 백성을 치게 하며 그들을 닥치는 대로 노략하고 약탈하게 하며, 거리의 진흙같이 짓밟도록 하였다.

(10:7, 새번역) 앗시리아 왕은 그렇게 할 뜻이 없었고, 마음에 그럴 생각도 품지 않았다. 오직 그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많은 민족들을 파괴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멸망하게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10:8, 새번역) 그는 이런 말도 하였다. "나의 지휘관들은 어디다 내놓아도 다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

(10:9, 새번역) 갈로는 갈그미스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하맛도 아르밧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사마리아도 다마스쿠스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10:10, 새번역) 내가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을 장악하였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가진 우상보다 더 많은 우상을 섬기는 왕국들을 장악하였다.

(10:11, 새번역) 내가 사마리아와 그 조각한 우상들을 손에 넣었거늘, 예루살렘과 그 우상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10:12,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다 이루시고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앗시리아 왕을 벌하겠다. 멋대로 거드름을 피우며,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그 교만을 벌하겠다."

(10:13, 새번역) 그는 말한다. "내가 민족들의 경계선을 옮겼고, 그들의 재물도 탈취하였으며, 용맹스럽게 주민을 진압하였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것을 하였다. 참으로 나는 현명한 사람이다. / 또는 '용맹스러운 자들을 진압하였다'

(10:14, 새번역)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의 보금자리를 움키듯 움켰고, 온 땅을 버려진 알들을 모으듯 차지하였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소리를 내는 자가 없었다."

 

 

주의 오른손이 펴졌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숨어있는 불의한 것들이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도록 들추어진다는 겁니다.

 

주께서 오늘 본문에 주의 손을 계속 펴시겠다고 합니다.

손을 거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주로 주의 손을 펴심을 구원을 펼치실 때 표현하시는 내용인데

같은 의미로써 주의 원수에게 펼치실 진노 곧 심판을 펼치실때도 사용하십니다.

사실상 이 진노 속에서 죽음 속에서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지

그냥 바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안의 날이 없이 어떻게 유월절 어린양의 피 잔치날이 있겠습니까?

출애굽의 날이 없는데 어떻게 희년이 있겠냐 말이죠

반드시 주인을 결박하고 빼내시는 겁니다.

그 뒤에 탈취물을 즐기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니까 말이죠.

원수 문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구원은 없습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악마들의 활동을 배경으로 깔고서

부지런히 일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나오는 앗수르 라는 몽둥이인데

웃끼는 것은

몽둥이는 몽둥이 본인이 주체가 된 줄 착각하게 됩니다.

이 자기 꾀에서 절대로 못 벗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기능으로써 누구를 징계하는 매, 회초리로써 작동하게 되는데

오히려 몽둥이 자기가 주체인 줄 착각하는 겁니다.

 

몽둥이는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몽둥이를 잡고서 매를 대시는 분은 여호와이지

몽둥이 본인이 아니다 말이죠

 

마귀가 바로 이런 부정적인 도구(기능)로써 작용하는데

마귀 본인은 때려죽어도 주체권을 손에서 놓을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자 그럼 이 몽둥이 역할을 하는 파괴자 앗수르와 마귀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심판 받아야 합니까?

 

이들이 불의한 법령을 잡아 불의한 말로 인해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즉 기준은 불의함의 반대인 정의인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완성이 바로 사랑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이 불의한 법령을 잡아서 누구를 압제하는고 하니

바로 이스라엘의 정신인 언약정신 약속정신인 십자가 정신인 바로

인애와 자비입니다.

자신들의 근원인 뿌리를 핍박하더라 말이죠

아니 왜?

이스라엘을 운영하는 정신을 자신들의 뿌리인 인애와 자비를 버리고 곧 십자가를 버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번제와 제사로 이스라엘을 운영하고 있으니

결국 그 이스라엘은 불법을 저지르는 식이 되는 겁니다.
시편에서 언급되는 원수 곧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들
.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7:23)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7:26, 개역)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요일 3:3, 개역)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4, 개역)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5, 개역)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일 3:6, 개역)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 3:7, 개역)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일 3:8, 개역)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9, 개역)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10,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1, 개역)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일 3:12, 개역)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3, 개역)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4, 개역)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5, 개역)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6, 개역)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자 그렇게 번제와 제사를 잡다 보니

이 인애와 자비의 대상을 도리어 핍박하는 자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원수인 이스라엘이 되고

교회를 핍박하는 강도의 소굴인 교회가 되다 보니

 

그것은 앗수르 라는 파괴자들이 갖는 불의함인데

바로 몽둥이를 가졌다고 자신의 능력들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저 마다 그렇게들 자랑하더라 말이죠

나의 장군들은 모든 신당을, 우상을 무너뜨릴 정도로 어디에서든 왕 자격이 될 정도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자랑한다 말이죠

아니 그 권세 가져서 무엇하게요? 이것이 마귀의 세 번째 시험 아닙니까?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주겠다는 ~~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사탄도 물리쳤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꾸 권력이라는 자신의 능력의 유무를 따지더라 말이죠

이게 바로 부자청년처럼 또는 바리새인처럼 완벽해 질려는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10:5, 새번역) 앗시리아에게 재앙이 닥쳐라! 그는 나의 진노의 몽둥이요, 그의 손에 있는 몽둥이는 바로 나의 분노다.

(10:6, 새번역) 내가 그를 경건하지 않은 민족에게 보내며, 그에게 명하여 나를 분노하게 한 백성을 치게 하며 그들을 닥치는 대로 노략하고 약탈하게 하며, 거리의 진흙같이 짓밟도록 하였다.

(10:7, 새번역) 앗시리아 왕은 그렇게 할 뜻이 없었고, 마음에 그럴 생각도 품지 않았다. 오직 그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많은 민족들을 파괴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멸망하게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10:8, 새번역) 그는 이런 말도 하였다. "나의 지휘관들은 어디다 내놓아도 다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

(10:9, 새번역) 갈로는 갈그미스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하맛도 아르밧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사마리아도 다마스쿠스처럼 망하지 않았느냐?

(10:10, 새번역) 내가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을 장악하였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가진 우상보다 더 많은 우상을 섬기는 왕국들을 장악하였다.

(10:11, 새번역) 내가 사마리아와 그 조각한 우상들을 손에 넣었거늘, 예루살렘과 그 우상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바로 이런 앗수르의 사고방식이 챗바퀴 돌 듯이 의문의 반복을 잡아버리니까

도리어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같이 불의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회초리를 대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회초리(앗수르)를 대시니까
이 회초리가 또 까부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의문의 반복입니다.
(왜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와야 할까요? 바로 이 원리입니다.

의문의 반복과 그 차이로써의 십자가의 밝히 보이시는 피 용서 긍휼 말이죠)


그럼 상대적으로 또렷한 것은 이 약속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 그런 점에서 이 심판성에 대해서 도리어 감사해야 할 것은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또렷하게 있다는 증거이니까 말입니다.
반드시 이 심판성을 거치는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요 십자가의 피 용서이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거기에 목숨을 걸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삶의 기쁨입니다.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다윗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비로소 사도바울이 공감하면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재반복하고 있습니다.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곧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것 보다 더 기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심판 인 십자가입니다.

 

다윗의 행복은 바로 이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해 목숨걸게 된 삶이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인간의 번제와 제사를 바침에 대한 행함에 좌우되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이니

더 이상 불안할 게 아무것도 없게 된거다 말이죠.

 

자 이제 눈치 채셨지요

한 쪽은 완벽해질려고 자꾸 자신의 능력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앗수르 파괴자의 사고방식입니다.

 

반면에 한 세트를 구성하는 그 반대인 다윗의 자리는 뭡니까?

완벽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운영하고자 함이 아닌

성도의 인생을 운영하고자 함이 아닌

도리어 무능으로써 주의 심판을 그 완벽한 심판 곧

불의에 대한 심판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또렷하고 명료한 제대로 된 심판만이 곧 완벽한 거룩만이

죄를 미워하는 십자가의 완료이기에

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유일하게 인생의 목적으로써

이 인애와 자비에 목숨 거는 겁니다.

 

사람이 불안하기 때문에 자꾸 완벽해 지고자 하고

그래서 근심해서 등돌리고 가는 부자청년처럼

목숨 걸때가 없는 겁니다.

 

목숨 걸 만한 것이 있다면 불안할 필요도 없고 완벽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이미 완료가 덮쳐버렸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도리어 이 심판성을

되도 않는 인간들의 마귀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겁주어서 평생을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함이 아닌

제대로 된 십자가라는 저의 심판을 미리 확 잡아 땡겨서 어서 어서 심판해 달라고

이 제대로 된 심판만이 제대로 된 거룩으로써 죄를 심판하는 유일한 십자가의 죽음이기에

이 심판을 미리 미래에서 땡겨와서 누리는 것이

성도의 기쁨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행복이요

다윗의 자리인 한 아기가 앉는 처소가 된다 말이죠.

 

주께서 날 위해 죽으셨듯이 내가 주를 위해 죽는

이 관계성의 자리

그래서 목숨 걸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 말이죠

다윗이 그래서 한 아기가 앉는 자리가 되는

그 희년을 누리는 겁니다.

 

상석에 앉지 말고 차라리 심판의 자리에 말석에 앉으라 라는 것은

약속의 성격이 그렇다는 겁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가 늦게 식사자리에 앉게 된 저에게

저 자리에 앉으라고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다고 하길래

그 자리에 앉았다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들끼리는 그 자리가 상석이라고

자신들은 말석에 앉았다고 하더라 말이죠

뭐 구지 상석처럼 안 보이던데 그렇게 웃자 라는 식으로 웃고 넘어갔는데

알고보니 진심이 배여있었더라 라는 겁니다.

결국 본인들이 상석에 앉았고 심판의 자리로 저를 앉혔던데

그런 본인들의 꾀에 본인들이 넘어가더라 말이죠

 

자신들이 파 놓은 올무에 자기들이 파 묻히는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10:4, 새번역) 너희는 포로들 밑에 깔려 밟혀 죽거나, 시체 더미 밑에 깔려 질식할 것이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이게 뭡니까? 자기가 잡은 포로에게 도리어 깔려 밟혀 죽는

전형적인 출애굽사건을 말하지 않냐 말이죠

반드시 미디안의 날이 있어야

구원이라는 어린양의 피 잔치를 누린다 말이죠

 

이 애굽의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 누구냐 말이죠

앗수르다 말이죠 파괴자

몽둥이 역할로 안 끝나요

주님의 인애와 자비에 도전을 하더라 말이죠

그 챗바퀴 도는 의문의 반복으로

또렷하고 명료한 십자가의 피 용서에 도전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또 이 짖을 하더라 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전부다 긍휼을 안 쳐다보는

자신이 심판의 자리에 놓여짐을 모르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여기는

 

그래서 바리새인과 실로암소경을 대비하고

맏아들과 탕자를 대비하고

에서와 야곱

사울과 다윗

가인과 아벨을 대비 시키는 겁니다.

 

한 쪽은 흐릿한 의문을 잡고 그것을 반복하고

다른 한 쪽은 심판받은자 같으나

죽은자 같으나

무능한 자 같으나

믿음으로 이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심판의 자리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

흑암의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주저 앉은자 개같은 갈릴리 이방인의 자리에서

희년을 누리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희년이 글쎄 다윗의 자리에 앉더라 라는 겁니다.

한 아기가 글쎄 죄인의 자리에 앉더라 라는 겁니다.

 

가인이 나오니까 위에서 언급한 구절을 다시 언급하면

가인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아니 글쎄 제사 한번 제대로 드려 보겠다는 것이 도리어 아우를 죽이는 살인의지로 나오게 되더라 말이죠

 

(요일 3:12, 개역)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이게 불법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법을 행하고자 하면 할수록 내 속의 다른 법이 자꾸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죽이더라 라는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더라 말이죠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차라리 지킬려고 하지 말고

죄가 내 속에 있는 이상 안되니까

그냥 포기하고
(포기하라고 하니까 가만히 있어라가 아니라

가만히 있는 것도 지킬려고 하더라 말이죠

차라리 적극적으로 이 죄를 심판하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미리 땡겨버리는 심판의 자리에 앉자 말이죠
죽으면 죽으리라
이게 행복입니다 기준이 있으니까 얼마나 감사하지 않냐 말이죠

이것을 마귀들이 못해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거짓선지자는 못합니다 종말을 땅겨버리는)

도리어 죄가 없는게 아니라 있기에 심판의 자리에 가라 말이죠

 

죄를 싫어하자 말이죠

죄를 심판하자 말이죠

곧 나를 미워하자 말이죠

? 그냥 미워하면 정신병이나 우울증이 되는

일종의 강박증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병인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이고

왜 완벽해지고 싶어서 자기를 미워하는 것도 자기가 지킬려고 하니까 말이죠

그게 아니라

상대적인 불법의 반대

죄의 반대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인애와 자비

곧 십자가의 피 용서가 떳기에

이미 떳기에

신나게 신나게 자기를 미워하자 말이죠

기준이 떳거든요

십자가의 사랑이 떳거든요

 

그러니 마귀에게 잡혀오자 말이죠

마귀에게 잡혀와도

무엇만 있으면 된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 있으면 되요

 

그래서 신나게 심판의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몽둥이 쥐었다고 착각한 마귀는

도리어 베드로를 주님의 피 옷으로

신부옷으로 입혀주고자 델 따 주는 꼴

데려다 주는 꼴

 

곧 자기 포로에게

자기가 잡은 도둑놈에게 도리어 붙잡히는 형사 꼴

자기가 잡은 노예에게 짖밟히는 꼴

하만이 그랬거든요

 

잡은줄 알았는데

도리어 잡힌 꼴입니다.

 

맞습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음부의 권세를 이길수 없어요

그래서 그냥 심판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잡은 음부의 권세가 도리어

자기가 잡은 노략물에게 도리어 잡혀 깔려 죽는 겁니다.

아니 이게 왜 이럴까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거든요

 

즉 기준이 떳다는 겁니다.

바로 인애와 자비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의 정신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어요

약속의 땅 밖에서는 살수 없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듯이

십자가의 피 용서 밖에는 살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마귀가 자기 꾀로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주님도 어서 어서 마귀야 나랑 내기 하자 라고 하신다 말이죠

 

하만의 꾀와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의 지혜가

 

한 세트로써 충돌하는 겁니다.

하나는 거인 골리앗이다 말이죠

파괴자 앗수르 애굽이다 말이죠

 

하나는 어린아이 무능한 다윗이다 말이죠

여자 에스더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죽음의 자리에 놓여지더라 말이죠

무슨 수로 이길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붙이시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나열합니다

십일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지 않았고

절대로 거짓말 안해요

양심은 있다고 이레에 세 번 금식 했다고 뻥 안칩니다

반드시 두 번 만 했다고 정직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아예 처음부터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거짓말? 뭘 해도 거짓말이다는 것을 본인이 안다 말이죠

그러니 뭘 했다 뭘 했다 라는 것을 내어놓을 것이 아예 없어요

일한 것이 없다 말이죠

그저 심판 뿐임을 아는 것은

완벽한 거룩이 떳기에

그 종말을 미리 앞당겨 버리기에

자신을 종말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 놓더라 라는 겁니다.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누가 더 옳습니까?

인간이 항상 주님께 다가올 때 누가 옳냐 라고 묻는 것을

다시 되받아쳐서 누가 더 옳냐 라고 물으신다 말이죠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즉 이 말은 인간 쪽에서 가지고 오는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가심이 의가 되고 거룩이 되고 참이 된다 말이죠

자 그래서 인간이 해석한 옳음이 틀림이 되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해석한 옳음은 도리어 거리끼는 것으로써 더 옳다 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이 새로운 기준에 대해서 처음듣는 비유 비밀로써 접하게 되니까

익숙한 것들과의 충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그 익숙한 것이 절대 옳음이라고 알아왔으니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제자들 본인들도 뒤집어 엎어지고 자빠지어야만 하니까 말이죠

 

즉 심판의 자리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다윗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 예수님이라는 한 아기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역사의 순으로 시간의 순으로 행함의 순서대로 행해오던 모든 것들이

가짜로 밝혀지는

의문의 반복으로써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겁니다.

미리 앞당겨서 심판의 자리에서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누린자가 바로

다윗이라는 자리로써

도리어 잡혀버린 포로로써 노략물을 누리는 희년을 즐기고

반대로 포로를 잡았던

주인으로써 완벽자로써 능력자로써 도리어 자기가 잡은 포로에게 밟혀 죽게되는

 

차라리 죽으면 죽으리라 자리에 놓여졌을 껄껄껄 라고 후회한다 말이죠

 

회개의 자리에 앉지 않다 보니

이미 완료된 천국을 못 누리고

도리어 의문의 반복인 지옥을 붙잡으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자 이렇게 앗수르를 몽둥이로 삼으시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매로 징계하심은

기준이 또렷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또렷하냐 하면

절대로 이 사랑이 앗수르라는 몽둥이에게는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정도로 또렷하고 명료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용서에 인생을 다 바치도록 되어 있는 여러분은

다윗이 말하는 행복만 누릴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찬양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인생을 누리는 겁니다.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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