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안의 날과 한 아기 (9: 1- 7)

 

미디안을 붙이셔서 승리한 날(희년, 전리품 나누는 날)과 다윗의 자리에 앉은 한 아기

 

 

(4:10,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 6:13(칠십인역)

(4:11, 새번역)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4:12, 새번역)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4:13, 새번역)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4:14,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4:15, 새번역) 『⑤"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 9:1;2

(4:16, 새번역)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4:17, 새번역)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9:1, 개역)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개역)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9:3, 개역)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9:4, 개역)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9:5, 개역)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9:6, 개역)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개역)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9:1, 새번역)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9:2, 새번역)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 또는 '어둠의 땅에'

(9:3, 새번역)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9:4, 새번역)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9:5, 새번역)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9:6, 새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또는 '놀라운 자, 조언자' 또는 '권좌에 앉으신 이'

(9:7, 새번역)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4:12, 새번역)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 6:16

(4:13, 새번역)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4:14, 새번역)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4:15, 새번역)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4:16, 새번역)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4:17, 새번역)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4:18, 새번역) 『⑤"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 61:1; 2

(4:19, 새번역)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20, 새번역)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4:2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4:22, 새번역)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4:23, 새번역)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4:24, 새번역)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4:25,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4:26, 새번역)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4:27, 새번역)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 나병을 포함한 악성 피부병 , '깨끗하여지다' , '깨끗하여지다'

(4:28, 새번역)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4:29, 새번역)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4:3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오늘도 성경구절을 길게 올려놓았는데

새번역이 좋아서가 아니라 각주처럼 붙어있는

인용된 연관 성경구절이 붙어있어서 자주 사용하는 겁니다.

공동번역의 뉴버전 최신버전 번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땡을 쫏는 전도사랑 한판 붙었는데

그것도 같은 교회 다니면서 오로지 말씀보존학땡 성경만 바르게 번역이 되어있고

다른 번역성경은 번역이 엉터리이다고 구라를 치는 바람에

 

그 놈이 나랑만 싸웠는데

그 이단을 교회에서 허용하는 것 보면 뭔가를 노리고 뻔히 이단인줄 알면서

도리어 제가 이단으로 몰려서 쫏겨나버렸는데

교회에 돈이 안된다고 말이죠.

 

결국 교회에서의 이단은 돈 안되는 인간이다는 겁니다.

돈 되면 이단이든 삼단이든 칠단이든 다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이니까 강도의 소굴이요 사단의 회인 거죠.

 

자본주의의 모든 가치는 돈입니다.

부모 자식 형제 지간도

교회도 오로지 돈돈돈

 

이 말은 모든 가치를 소유성으로써 따진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성경말씀은 역시나 소유성으로 따집니다. 곧 더 나은 소욕성 잉여성

문제는 그 소유물을 한번 지옥불에 또는 심판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내어보자 라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들은 기겁을 합니다

아니 내 돈 내 돈 내 돈 이라고 고래 고래 고함친다 말이죠

목사들은 내 교회 내 교회 내 교회 라고 고래 고래 고함치겠지요

여자들은 내 아들 내 아들 내 아들 이라고 고함 칠 것이고

아내들은 내 남편

남편들은 내 아내

노인들은 내 명성 내 명성 내 명성 이라고 ~~~

 

이 모든 것이 내 돈 내 소유 내 창고 내 것 내 것

곧 무엇을 통해서 화를내고 고함치느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소유물이 드러나고

그 소유물로써 자신의 가치를 그 소유물에 담고 있다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그런 소유를 안 따진다고 얌전 겸손을 떠는 종교 666처럼 구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더 심한 소유성으로 더 나은 소유성으로 따진다는 겁니다.

즉 불에 집어넣어서 안 타고, 안 녹고, 안 소멸되는 것만 소유물로 취급하겠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이지요

불이라는 부정함도 녹이지 못하는 부정성

왠만한 것은 다 녹는 판국에 다 불타 버려서 잿더미가 되는 판국에

불에서도 타지 않는 그런 소유물이 어디있냐 말이죠

 

그럼 그런 소유물 아니면 소유물리아고 하지를 말라 라는 겁니다.

 

그 소유물이 오늘 나오는 바로 전리품이다는 겁니다.

 

이 전리품은 바로 이 소유물은 바로 너다 너 라는 겁니다.

아니 왜 저죠?

 

너를 미디안의 날에 빼왔거든

 

미디안의 날요? 그날이 무슨 날인데요?

 

(9:4, 개역)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9:4, 새번역)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몇월 며칠이라는 날짜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건의 내용 곧 기능으로써의 사건이 지금 현재도 덮쳐지고 있느냐 라는 겁니다.

 

바로 기드온이 용사 300명을 데리고 미디안과 전쟁을 밤에 벌린 날입니다.

 

기드온 군사가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나팔을 뿌뿌뿌 부니까

이미 승리했다고 외치니까

미디안 군사가 깨어있지 못하고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놀라서 저거들끼리 막 찔러 죽여서

승리한 평화의 날 곧 전쟁이 종식된 날 그래서 전리품을 나누는 날이 바로 미디안의 날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쳤는데

칼이 없다 말이죠

 

없음 무 무능 존재로써는 가치가 없는

아무것도 없다 말이죠

그게 기능입니다.

없으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없다면 사건이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특징이 없다라는 비존재로써 등장하지

존재로써는 사건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칼이 없거든요 그런데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쳤잖아요

 

그렇다면 사기를 친거 아닙니까? 거짓말 한거 아니냐 말이죠.

이게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거짓말이요? 아니요

 

거짓말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이다 말이죠

즉 반드시 마귀의 귀에 거짓말이 되는 것이 진짜 참된 말이다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마귀 곧 부정의 귀에 거짓말인 부정함이 참되다 라는 겁니다.

 

그럼 누구에게는 도리어 은혜의 날이 되는 겁니다. 이 거짓말이 말이죠

곧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은혜가 되는 겁니다

 

사건은 바로 이 마귀를 들추어내지 못한다면 사건이 아닌거다 말이죠

기능이기에 반드시 마귀를 들추어내는

이미 승리함으로써 이미 완료됨으로써 나타나는 미래완료의 증상이 사건이니까 말이죠

미래완료가 터트리는 것이 사건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를 걸림돌이요, ? 거짓말 하면 안되니까 탁 걸려 넘을수가 없고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겁니다,

거짓으로 부정함으로 세워진 건축물은 언젠가는 다 허물어 진다고 보고 있거든요.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게

종말을, 이미 완료된 다 이루셨다는, 종말을 미리 앞당겨 와서

종말을 미리 대비하는 곧 행함이 있는 믿음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하지 않고

게으르다 라는 부정성을 끌어와서 개미에게 배우라는 겁니다

그럼 자동적으로 부지런함을 배우라는 말이 아니냐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구지 예수님과 연관성이 없어요

지혜란 인물이요 그 인물의 기능인 십자가라는 사건이거든요

이 십자가의 지혜와 연관이 되는 겁니다.

 

게으르지말로 부지런하라 라는 것은 모든 종교가 다 그래 외치는데요?

 

개미는 종말을 대비한다는 겁니다. 곧 추수 때입니다.

이것은 마치 놀고 있고 눕고 있고 잠자는 자에게서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려한 마치 저주받은자 같아 보인다는 겁니다.

왜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종말을 추구하냐 라는 거죠.

어리석은 다섯처녀다 말이죠

신랑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왜 미리 등불을 준비하냐 말이죠

 

도리어 똑똑한 다섯처녀는 그때 신랑이 오면 그때 준비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슬기로운 다섯처녀인데

 

종말은 이것을 뒤 바꿔서 팔을 어긋맞게 해 버리는 겁니다.

종말 자체가 그렇게 만들지 인간 쪽에서 이 비유를 준비할 수가 없다 말이죠

 

종말 자체가 어리석고 미련한 다섯처녀를 슬기로운 다섯처녀로 만들어 버리고

종말 자체가 똑똑한 다섯처녀를 헛똑똑이로 미련한 다섯처녀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개미와의 연관성입니다.

개미는 마치 불의한 청지기처럼(등불을 미리 준비하는 미련한 다섯처녀를 슬기롭다고)

끝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종말을 외치는 종말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두령도 없이 간역자도 없이 주권자도 없이

누가 시킨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착착착

끝을 종말을 환란 날을 미디안 날을 미리 당기는 겁니다.

 

(6:6, 개역)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6:7, 개역)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6:8, 개역)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6:9, 개역)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6:10, 개역)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6:11, 개역)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

 

 

곧 기생라합처럼 거짓말로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집문서 나라문서 국가문서를 전부다

간담이 녹게 하신 여호와게 다 팔아넘겨버리는
(어차피 다 녹을 것 애굽을 멸망시킨 심판주를 미리 당겨 버리는)

(이 기생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단들은 잘 해석을 못해서 입도 뻥긋 안 하지만

하며는 자기들 정체가 드러나니까 소위 정통도 마찬가지

열처녀 비유는 이 종말론을 주장하던 이단들이 재산 바쳐서 등불 준비하라고 사기를 쳐서

크게 한 탕 해 먹은 것으로 많이 애용하고 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등불 준비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니 속지 마시길

두 패로 나누는 종말의 기능 곧 사건 보다

자기쪽만 천국가겠다는 탐심을 부추기는 것이 먹혀들기에 많이들 속아도 또 속더라 말이죠.)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미리 앞당겨서 행하는 문서 조작을 한
불의한 청지기가 옳았다는 겁니다

(물론 세기말 1999년도에 종말을 외쳐서 이렇게 사기친 자들이 많았죠

문제는 부정의 부정이 아니라 도리어 긍정성으로써 사기를 쳤다는 겁니다.

돈 내면 천국이다 라고 말이죠 돈 내어도 천국 못 간다고 종말을 외치는 자는 없었다 말이죠

이재땡처럼 만민중땡처럼 에덴동산처럼 발가벗어야 천국을 누릴수 있다고

문제는 자기는 때려죽어도 안벗는다 말이죠 벗고 설교하고 벗고 돌아다녀보라 말이죠

부정의 부정이 안되는 겁니다.

마귀들로부터 미움받는자가 아니라 마귀들로부터 칭찬받는자들일 뿐이다는 거죠)

 

반드시 불의한 청지기를 욕하면 자칭 빛의 아들들이라는 자들의 반응이 있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반드시 누구의 눈에만 만큼은 반드시 거짓으로 받아들여져서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맞물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그 맞물리는 서로 다른 소욕성을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펼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주체가 되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는게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기생라합에게 덮쳐졌습니다

 

그러니 부정의 부정으로써 기드온의 칼이다 말이죠

왜 기드온의 막대기가 아니냐 말이죠

 

칼은 저들 미디안의 무기가 아니냐 말이죠 칼을 쓰는자는 칼로 망하는데

왜 기드온의 칼이라고 하느냐 칼로 망할텐데 라고 볼게 아니라

 

실제로 기드온에게는 칼이 없어요

저쪽은 칼이 있고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겁쟁이 기드온이 누가 칼인가를 보라 라는 겁니다

늘 칼 앞에서 겁쟁이라고 살 수 밖에 없는 자를 가지고서

누가 칼인가? 저 미디안이 실제로 쥐고 있는 것이 칼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가 칼인가

그 칼을 기드온이 얼마나 이 붙이시는 전쟁에서 빠져나와볼려고 시험을 세 번씩이나 했지 않았냐 말이죠

세 번 부인했다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승리한게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 라는 것을

누구보다 기드온 만큼은 압니다만

이 기드온 전쟁에 반발 했던 자들이 갑자기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고자 할때에 거부함에 있어서

아이고 겸손도 해라 라고 이들 내부의 악마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는데 억지로 왕 삼음에 있어서 절대로 타협하지 않더라 말이죠(마귀의 세 번째 시험 정치)

 

벌써 칼이신 여호와 앞에서 겁쟁이 기드온이 감히 여호와를 시험한 그 자체로써 죽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칼이 죽여도 시원찮을 기드온을 살려주시는 이유는

 

주님은 세상을 칼로 법으로 힘으로 창조하신게 아니라

은혜로 인애와 자비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기드온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은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번제와 제사로 곧 인간의 행함과 가치성으로 승리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에봇을 우상화 하는

그 노림수에 기드온이 말려들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힘 곧 칼을 쥐어야만 살도록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졸지에 약속의 땅 마저도 척박한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활과 화살을 쥐고 있지 않으면 언제 짐승에게 먹힐지 모르는 지옥으로 만든 그 죄악을

주님은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래 그것도 힘이냐 그것도 칼이냐 라고

칼도 없는데 칼을 이기는

기드온 너가 바로 칼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제일 겁쟁이를 사사 구원자로 삼아서

어중이 떠중이를 구원자로 말이죠

 

오죽하면 입다 산적을 구원자 곧 사사로 삼으니까

이스라엘 장로들이 비웃는 겁니다.

 

산적이 뭘 안다고

불의한 청지기가 뭐 우리를 구원한다고?

뭐 불뱀에게 물렸는데 장대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보라꼬? 산적을 구원자로 보라꼬?

뭐 피부병에 걸려 죽게 될 판국에 뭐 똥물에 몸을 일곱 번 담구어라고?

 

또 이 말 듣고 피부병 환자들 똥물에 몸 담그지 마세요

성경은 불가능한 말만 하는 이유는

기존의 인간 속에 박혀 있는 마귀가 심은 것을 겨냥한 것이지

우리 보고 행하고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될 거 같으면 마귀도 인간이 충분히 이기게 되게요?

인간에게 지는 마귀가 없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판대기 전체 두 세력을 전쟁을 보여주는 겁니다

말이 전체이지

예수님 쪽은 딸랑 예수님 혼자 뿐입니다,

 

기드온 보세요 천하의 겁쟁이 조차도 예수님 편에 안썰려고 얼마나 발악을 하지 않습니까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막사는 자일 뿐이예요.

그런 기드온을 포기케 만들어서 전쟁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것도 기드온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으로

기드온을 칼로 삼아서

그것도 미디안의 칼 보다 더 나은 칼

부정의 부정으로써 말이죠

이것은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되기에

기드온은 도리어 나 아니요 주님만이 옳았다고 외칠 뿐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부정함을 가지고서 어설픈 부정함을 더 나은 부정함이 깨뜨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부정 부정 하느냐 좀 긍정 긍정 의 의미는 없느냐?

네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 또는 인식하는 그 긍정들이 모조리 다 악마적이기에 말이죠

 

그것을 악마가 예수님에게까지 노리고 시험을 합니다

바로 긍정함을 가지고 말이죠

 

자 예수야 돌을 떡덩이 되게 해서 가난 배고픔 굶주림 궁핍함을 해결해라

그것이 메시야 답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긍정적입니다 긍정이 단순히 긍정이 아니라 이런 희망과 꿈이 없으면

인간은 단 하루도 살수가 살수가 없어요 난 ~~~ 살아요

 

그런데 그 긍정이라는 것이 의문이다 말이죠

인간은 그 긍정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

긍정으로부터 소유 당하기는 때려죽어도 싫어한다는 겁니다.
(정작 십자가 라는 부정은 또렷한데 말이죠)

 

곧 종말 다 이루었다 라는 끝으로부터 소유 당하기 싫어해요

그래놓고 긍정을 외친다는 자체가

긍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자신이 선악이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악마가 장악한 인간인줄 모르는 겁니다.

 

바로 이것에 대한 전쟁이 예수님께서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이미 승리하고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그 전리품으로써 승리의 증상물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그런데 다들 거부합니다

 

너 요셉의 아들아니냐 라고 말이죠

 

어딜 감히 우리들을 가르쳐들려고 해 라고 쫏아내버리는 겁니다.

 

즉 너 보다 내가 더 소유물이 많아

더 지식이 많아

라고 거부하는데

 

정작 그 잉여성이 예수님이 더 많이 나타남에 있어서

이들이 졸지에 빈궁함이 들통나니까

성경지식이든 주님의 능력이든 바닥남이 들추어지니까

졸지에 그 시기심에서 적개심과 살기가 넘쳐 흐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았던 그 살기 살해의지가 말이죠.

 

칼이 뭡니까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의 전쟁 무기 아닙니까

구약에서는 칼 들고 싸우는 것이 눈에 목격이 될 정도로 눈에 확 띄지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에게는 절대로 칼을 손에 쥐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칼이 쥐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밝히 보일수 있을까요?

그들의 살해의지를 말이죠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검으로 인해 원수 곧 숨어있는 원수가 들추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만을 겨냥한 거다 말이죠

사람의 원수는 가족이다 말이죠

기드온의 미디안 날에 내부의 원수까지도 다 들추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즉 마귀들에게 있어서 악마로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제시하면 그들은 곧 부정한 마귀는 이 부정한

부정의 부정인 십자가를 피할려고 하고 반드시 막고자 할 것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루시고자 하심에 있어서

절대로 천사로 보이면 안된다는 그 두려움이 마귀들에게서 노출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걸린 대 마왕이라고 퍼트리는 이유입니다.

 

그런점에서 칼을 뒤로 숨기고 있는 저들에게서

여호와의 칼이란 자신들의 패배가 이미 완료된 상태로써

여호와의 칼은 부정의 부정으로써 십자가의 다 이루심

곧 여호와의 칼의 승리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칼을 쥔적이 없다 말이죠

횃불 항아리 나팔

 

이 무능한 것으로써의 기능이 바로 기드온 자신이 여호와의 칼로 작용하는 기능입니다

곧 여호와의 승리 말이죠

 

이미 완료된 승리로써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기드온 자신이 검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칼을 쥘 필요가 없듯이

복받을려고 할 필요 없이

기도온 자체가

성도 자체가 복덩이입니다.

복덩이가 복을 따로 받을려고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듯이

이미 복이니까 복을 따로 칼을 따로 쥘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의 원수들이 자꾸 이 부분을 집요하게 주장하는데

그것 자체도 이미 완료됨 앞에서 의문의 것들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미 승리이니까 말이죠

 

왜냐하면 승리의 증상물 곧 전리품이거든요.

아무튼 이제 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하는데

임마누엘 곧 남겨둔 씨가 이미 떳기에 이미 승리한 완료된 승리로써의

미디안의 날 곧 원수와의 전쟁을 벌려서

그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의 날이 희년인데

원수는 바로 이 한 아기의 원수이지

인간의 원수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원수가 있으면 아무리 원수를 갚아도 또 의문의 반복이 되지만

한 아기의 원수 문제를 해결함으로 인해서 다시는 전쟁이 없다는 겁니다.

곧 마침이 되고

평화가 옴으로 다시는 전쟁 준비나 훈련을 다시는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 한 아기 곧 임마누엘이 평화의 왕으로써 왕이 앉는 자리에 앉아 다스리시는

그 왕의 자리가 바로 다윗의 위입니다.

다윗의 자리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다윗 자체가 한 아기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다윗이 의자라는 기능이다는 거죠.

의자로써 왕좌로써 다윗이다는 겁니다.

교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전이다는 겁니다.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새번역)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다윗은 무조건 한 아기의 보좌가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 죄인으로써 한 아기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죄수복을 입고서 피를 증거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다른 왕들은 지적을 안 받습니다.

지 마음대로 삽니다.

막살아요

그런데 다윗만큼은 그 막살았음을 지적받아서 뭘 해도 막사는 자였음을 이 한 아기의 의자로 이미 당첨되었기에 긍휼과 자비로써 저 미디안 날에 박살이 남음으로써

저 미디안 속에서 저 죽음 속에서 저 지옥 속에서 저 원수 속에서

빼내임을 당하는 전리품으로써 다윗은 한 아기의 의자, 자리, 왕좌가 되는 겁니다.

 

즉 다윗 자체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이방의 갈릴리 이다는 겁니다.

원수 이다는 원수

그 원수에게 빛이 비추었다는 겁니다.

죄인에게 구원자가

환자에게 의사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4:14,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4:15, 새번역) 『⑤"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 9:1;2

(4:16, 새번역)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4:17, 새번역)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9:1, 개역)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개역)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9:3, 개역)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다윗 자체가 흑암의 백성이고

사망의 땅이고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인데

빛이 비추었다는 겁니다.

 

그럼 흑암이 쫏겨나고 사망도 쫏겨나고 그늘에도 빛이 비추어져 싹 사라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라는 의자에 앉은 한 아기가

이미 완료된 승리로써 미디안의 날을 펼치시는

죽음 속에서의 생명이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

 

이 한 아기가 누구를 자리로 삼아 앉는지에 대해서는 쳐다볼 생각도 안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인간 쪽에서 갖추는 식으로 본다는 자체가

마치 입다를 구원자로 세운 것에 못 마땅한 이스라엘 장로처럼

내부의 적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고자 에봇을 우상화 하는 내부의 적

바로 베드로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잡아오는 그 마귀를

 

숨어있는 진짜 원수를 들추어내는 식입니다.

 

여기에 그럼 베드로는 다윗은 자신의 죄인으로써 한 아기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바로 회개

회개란 회개의 달인인 바리새인을 말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회개의 달인인 바리새인이 때려죽어도 못하는

종말을 미리 앞당기는

심판을 미리 앞당기는 죄인으로써 예수님의 피를 외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저들 회개의 달인들은 반성의 달인으로써 123456으로 어떻게 하면 구원 얻고자

회개를 하나의 조건으로 갖추는 시공간의 역사적인 행함적인 회개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 곧 회개란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 때문에

마귀 앞에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비록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없는 아기 못살려내는 회개 눈물 금식 기도라는 4종 세트로 아무리 해도 아이를 살려낼수 없음을 아는

도리어 너가 아이 꺽으신 뼈로 인해 너가 아기를 살리는게 아니라 남을 7번 용서하는게 아니라

너가 도리어 아기의 죽음으로, 죽은 너가 살아나야만 하는 770번 용서받아야만 하는

십자가의 피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종말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진 것이 회개의 사람이 이미 되었다는 것에서

 

저들 지옥 속에서 빼내시는 전리품이다는 겁니다

희년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날이다 말이죠

 

이것이 임마누엘이라는 남겨진 씨 한 아기로 인해서 벌어진 사건인데

기능은 이 사건을 높이 영광 돌리도록 되어 있지만

 

기능이 아닌 존재는 사건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존재인 자기가 뭘 해야만 하면 구원을 얻느냐 라고

따로 국밥처럼 어떻게 하면 복 받느냐를 따지더라 말이죠

 

본인 자체가 복 이다는 것은 거부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존재를 넘어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건인데

 

모조리 다 존재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십일 조 될 생각은 안하고 십일조를 낼려고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 될 생각은 안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을 지킬려고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그것 못하는 자를 정죄할 뿐이다 말이죠

 

그 정죄한 자를 예수님이 용서하니까

마귀처럼 예수님을 죽이더라 말이죠

 

다윗이 자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바리새인은 본인들이 성령의 전

한 아기의 의자가 되기를 거부하니까

하나님의 일에 관심 없고

사람의 일에 빠져 버리는 겁니다.

 

자 그런 점에 왜 한 아기가 등장해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지만

그래서 구원도 없지만

 

예수님의 원수에게서 왜 빼내시는 이 구원에는 관심이 없기에

저 의문의 반복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스불론 땅, 납달리 땅, 이방 갈릴리

흑암의 백성, 사망의 땅, 사망의 그늘에서 폭삭 주저 앉은자

 

이것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습니다

평준화

죄인의 자리

원수의 자리

 

그런데 이 처음자리를 무시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마일리지 쌓기 밖에 안되기에

본인이 이웃으로써 예수님의 긍휼의 대상임을 못 보니까

도리어 예수님이 이웃사랑으로써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심에 대해 반감을 표하더라 말이죠

베드로를 잃어버려서 그 죽음 속에서 그 미디안 속에서 빼내시는

예수님의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으로써 기뻐하는 희년의 날이다는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이구요

그 베드로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삼아 버렸다 말이죠

예수님의 주의 주 되심의 자리, 의자 로 삼았다는 겁니다.

성령의 전이다 말이죠

 

베드로가 뭐 한게 있던가요?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바로 이것이 은혜가(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값없이 용서 받은) 왕노릇하는

왕의 자리

한 아기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 다윗과 베드로는 바로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라는 종말이라는 끝

다 이루셨음을 미리 앞당기는데 그것을 회개라고 하지

눈물 질질 짜고 자신을 학대하는게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끝을

완료를 미리 앞 당겨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미디안의 날

곧 죽음 속에 집어넣으시는 것으로 인해서

모조리 다

그 어떤 것도 의지할 것이 없도록 다 부수는 날이

 

바로 구원의 날 희년 기쁜날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믿을구석이 없는

나 조차도 더 이상 못믿도록 다 부서버리는

저 한 아기로 인한 전쟁의 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는 겁니다

 

이 희년을

유대인들처럼 무시하지 않도록

낮추시는 그 징계를 감사하시면 됩니다.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0:4, 개역)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5, 개역)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20:6, 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20:8, 개역)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20:9, 개역)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개역)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개역)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12,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0:13, 개역) 살인하지 말지니라

(20:14, 개역) 간음하지 말지니라

(20:15, 개역) 도적질하지말지니라

(20:16, 개역)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0:17, 개역)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20:18, 개역)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20:19, 개역)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20,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0:21, 개역)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20:22,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0:23, 개역)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0:24, 개역)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0:25, 개역)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0:26, 개역)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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