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둔 씨앗,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 그때에 사막에 샘이 넘쳐 숲이 우거지리라 (사 11: 1- 9)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9:4, 개역)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9:5, 개역)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9:6, 개역)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개역)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11:1, 개역)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1:2, 개역)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11:3, 개역)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11:4, 개역)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11:5, 개역)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11:6, 개역)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11:7, 개역)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11:8, 개역)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1, 새번역)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11:2, 새번역)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11:3, 새번역)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11:4, 새번역)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11:5, 새번역)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11:6, 새번역)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11:7, 새번역)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11:8, 새번역)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11:9, 새번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다는 것이 천년만년 영원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허무의 반복인 의문의 흐릿함의 반복 뿐이다는 겁니다.

마침이 없다 말이죠

끝이 없으니 끝을 끌여당겨올수가 없어서 의문의 반복 뿐입니다.

 

그런데 끝이 등장합니다. 바로 한 아기 곧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입니다.

이로 인해서 드디어 의문의 흐릿함은 심판받게 됩니다.
곧 육이나 혈통이나 국가나 사회나 조직이나 종교 등등 말이죠

이 심판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시편에서 우리가 계속강조했던 것이

드디어 어두운 터널에서 어두움의 끝인 새벽이 왔다고 아침이 왔다고 얼마나 시편에서 강조합니까

 

그러나 반면에 하이에나 늑대들은 밤새도록 허기진 배고픔으로 울부짖으면서

그 밑도 끝도 없는 배고픔을 채울수가 없어서

어두움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인자하심으로 아침을 새벽을 맞이하게 되고

주의 성실하심으로 밤마다 저런 의문의 것들과 충돌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계시록 107)은 바로 이 언약과 비언약을 충돌 시키는 거룩 곧 나팔 뿌뿌뿌 희년입니다. 찬양입니다.

 

(10:7, 개역)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2:2, 개역)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찬양자란 시편에서 찬양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노래하기 위해서 쓴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성령 곧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정직한 영을 달라고 상한심령이 되는 자입니다.

물론 그 상대적인 악마의 세력은 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거부하고서는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한 싹을 거부하는 사울왕처럼 몽둥이를 쥐고서 한 싹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자들입니다.

 

유다 곧 찬양자란 바로 이렇게 주님의 긍휼인 인애와 자비가 떳다는 그 이유로

회개의 자리에 놓여지는(며느리 다말과 시아버지 유다의 사건 곧 그가 나보다 옳았다)

그 가 나 보다 옳았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럼 나는 틀린 자리 나는 달콤한 자리가 아닌 쓰디쓴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구약이 바로

이사야서와 시편입니다.

 

즉 이 말은 유대인들이 시편을 달달달 그리고 이사야서(선지서의 대표성)에 나타난 메시아를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 했는가를 그래서 달달달 외웠다 말이죠

 

시편대로 왔고 이사야 대로 외쳤다 말이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반대하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유대인입니다.

입에는 찬양하나 속으로는 저주 밖에 안나왔던 겁니다.

입으로는 달달 외우고 마음으로는 싫어했다 말이죠

(마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마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삼상 22:7, 개역)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삼상 22:8, 개역)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삼상 22:9, 개역)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삼상 22:10, 개역)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삼상 22:11, 개역)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삼상 22:12, 개역)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22:13, 개역)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삼상 22:14, 개역)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삼상 22:15, 개역)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삼상 22:16, 개역)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삼상 22:17, 개역)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삼상 22:18, 개역)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삼상 22:19, 개역)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오히려 율법을 어긴 다윗을 죽일려고 밤새도록 찾아헤매는 사울왕처럼
아히멜렉 제사장을 죽였듯이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선지자의 말을 들었습니다.

쓴 잔이 아닌

평강이다 평강이다 달달한 말에 다 넘어가 버렸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 바로 몽둥이를 든 앗수르와 남은자만 돌아온다고 남은자를 대조했습니다.

 

우리가 이 남은자 속에 속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바리새인들이 이 남은자 사상에 얼마나 빠졌냐 말이죠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화론자들에게 다 장악당했듯이
바리새인 자체가 개혁주의자들 아닙니까!!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다 장악당한 유대인처럼

그런 자기자신을 남은자라고 자부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을때에

이 남은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말입니다.

 

그럼 누가 남은자 였었냐 말이죠

진짜 남은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죽었다가 다시 삼일만에 살아 돌아온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남은자 라는 종교꾼들이 좋아하고 선택 취사선택하는 그 의미에서

가짜 남은자와 진짜 남은자를 봐야 합니다.

 

앞의 글 쓴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설정한 가짜 쓴잔과 주님이 먹이신 진짜 쓴잔도 둘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썩어버립니다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율법사가 어떻게 하면 영생 얻냐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큰 계명 지켰다고 들고 왔을때에

이웃을 설정함에 있어서 율법사는 자기가 설정한 이웃을 내밀었던 반면에

예수님은 그것을 받고 그 차이로써 유대인이 도저히 용납못하는 원수인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설정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곧 비밀을 들이대시는 겁니다.

 

즉 가짜 이웃과 진짜 이웃을 대조 시키신다 말이죠

 

그러니 남은자 라고 하니까

자기를 남은자라고 진짜의 자리에 놓는 순간

졸지에 예수님이 가짜로 취급받게 되는 싫어버린바 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유일한 남은자 라고 보게 된다면

자신을 가짜의 자리에서 예수님만이 진짜 남은자입니다 라고 외치는

시아버지 유다처럼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나는 가짜이지만 저분은 진짜 옳은 유일한 남은자라고 외치는 찬양자가 된다는 겁니다.

 

아니 누가 찬양자가 될려고 되고파서 가짜의 자리

나는 뭘 해도 가짜입니다. 나는 뭘 해도 죄입니다 라고

죄인의 자리에

 

곧 쓴 잔을 마시겠습니까?

 

서로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가치를 지닌자로써

자기가 구원받아 마땅한 자라고

남은자는 자기 라고 우긴다 말이죠

 

그러니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인 심판 앞에서는

찬양자가 아님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아니 왜?

십자가가 잉태하여서 낳은 자가 아니기에 찬양자로 태어나지 않았음이 들추어지는 겁니다.

 

아니 누가 보다 열심히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바리새인)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고(맏아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율법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고(부자청년)

내 이웃을 사랑하라를 완벽하게 지켰다 말이죠(율법사)

 

그런데 이들이 십자가를 거부하더라 말이죠

오히려 이 십자가를 더욱더 노래해야 정상인데

바로 그런것들을 지켰다면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가 낳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기 아비인 마귀에게로 가더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자기 아비가 아니였다는 거죠

 

자식은 아비의 열매이니까 말이죠

 

마찬가지로 몽둥이를 쥐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몽둥이를 쥔 앗수르와 남은자의 대조에서

그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그 남은자란

아무도 풀수 없는 비밀로써

결국 누구였습니까? 우리입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이 남은자로써 자부했다 말이죠 바리새인이였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오늘 나오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이 바로 남은자였다는 겁니다.

 

이 남은자가 낳은 자식들이 있어요

바로 찬양자입니다.

십자가가 낳은 자식입니다.

 

그들은 바로 몽둥이와 대조를 이루면서 그 차이로써 나타납니다.

 

그들이 바로 쓴잔을 마신자 인데

 

저는 갑자기 예수님께서 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는 말씀에서

죄인이란 결국 감추어진 의미였다는 것을

이번 계시록 배에는 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는 도중에 아 이거구나 라고 떠올랐다 말이죠

마침 저녁 10시 가까이 될 때 엄집사님이 질문을 주신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왜 욥이 애매한 고난을 당했는가

왜 쓴잔을 마시게 되었는가

 

바로 누구를 찬양하라고? 찬양자로 태어난 증거로써 애매한 고난

곧 죄를 해석을 못하는 자들에게 우겨삼을 당하는가를 보았다 말이죠

 

이 심판의 자리에 놓여진 쓴 잔을 마시는 자가 바로

성령을 받은 자 곧 상한심령이 된 자이다는 겁니다

 

아니 왜죠? 바로 한 아기가 떳기 때문에

 

자 그럼 이 한 싹, 한 그루터기, 한 거룩한 씨, 한 아기, 한 남겨둔 씨앗이

떳다는 그 증상으로써

 

성도는 구원자를 말하기 위해서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한 남겨진 씨를 말하기 위해서

죄인의 자리

환자의 자리

에 놓여진다는 겁니다.

 

물론 독자적으로 고난의 자리에 놓여지는 것은 그것은 위선이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의인의 자리의 대조된 죄인의 자리이기에

가짜 쓴잔을 마시는 자와 대조로써 원치도 않았는데

말씀 두루마기를 먹고자 준비한 것도 전혀 없는데

먹음으로써 배에 쓰게 되었다 말이죠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신 매맞음으로써

혹독하게 쓰디쓴 심판의 자리에 놓여진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마귀들은 몽둥이를 쥐고 남을 잡아먹는 이스라엘을 잡아먹을 권리가 있는냥 착각토록

하만이 홀을 잡고 면류관을 쓰고 망토를 입는 반면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쓰디쓴 자리에 놓여지는데

이것이 바로 한 아기가 떳다는 증상으로써

의사를 찬양하고자 환자의 자리에 놓여지는 찬양이라는 사건을

저들은 그것도 모르고 의인의 자리 건강하다고 외치니

 

의사라는 기능이 저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기능으로써

구원자를 배척케 되더라 라는 겁니다.

 

즉 시편 이사야 달달 외웠는데

? 구원 받을려고

 

그런데 그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으로써

시편대로 이사야말씀대로 오셨는데

의사로 오셨고 구원자로 메시아로 오셨는데

아무도 환자가 없고

아무도 죄인이 없고

 

그저 시편대로 지켰다

이사야대로 메시아 곧 구원자를 맞이할 자격 조건 갖추었다 라고

서로 서로가 의인이다 건강한 자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외칠 뿐이지

 

시편의 다윗처럼 주여 저 원수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찬양하는 자가 단 한사람도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없음을 기정 사실화 한 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12지파 이스라엘을 십자가로써 낳아서

미래에서 현재로 그들 찬양자를 꼿아서 배치하니까

 

이들이 저들과 대조로써 실로암소경이 찬양자였지

바리새인이 찬양자가 아니였음이 드러난

이 충돌 이 나팔전쟁을 벌리시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낳은자식이 미래에서 날라와서 현재에 배치당함으로써

에스겔처럼 사도요한처럼 쓰디쓴 말씀을 먹음으로써

 

그들은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자로써 기쁜소식인 예수님을 찬양하는 반면에

정작 건강하다고 하고서는

의인이다고 하고서는

벙어리가 아니다고 하고서는

귀머거리가 아니다고 하고서는

 

십자가를 노래를 못하더라 말이죠

거리껴서 목에 탁 걸려 안 나오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사야 35장에도 반복 되는데요

 

사막인데 글쎄 샘이 흘러 넘쳐요

광야인데 숲이 우거져요

 

배에는 쓴데 입에는 달아요 글쎄

포로된 자 인데 자유를 외쳐요

갇힌자 인데 해방을 노래해요

억눌린자인데 구원을 노래하더라 말이죠

 

모순 되잖아요

건강한 자가 의사를 노래하는게 아니라

의인이 구원자를 찬양하는게 아니라

죄인이 글쎄 구원자를 노래해요

원수가 글쎄 십자가의 사랑, 피 용서를 노래한다 말이죠

 

(9:24, 새번역) 유다 사람의 원수 아각의 자손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유다 사람들을 죽여 없애려고,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를 던져서, 유다 사람들을 다 없앨 날을 받았으나,

(9:25, 새번역) 에스더가 그 음모를 왕 앞에 말하니, 왕은 하만이 유다 사람을 해치려고 꾸민 악한 흉계가 하만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하만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아들까지도 장대에 매달도록, 글로 써서 조서를 내렸다.

(9:26, 새번역) 그래서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라는 말을 따라, 이 두 날을 불러서 부림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사건은, 유다 사람 스스로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이며, 모르드개의 글에도 적혀 있는 것이다.

(9:27, 새번역) 그래서 그들은 이 두 날을, 그들과 자손과 그들에게 귀화하는 모든 사람이, 해마다 정해진 때에, 글에 적혀 있는 대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절로 삼았다.

(9:28, 새번역) 이 두 날은, 유다 사람이면, 어느 지방 어느 성읍에 살든지, 모든 집안마다 대대로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날이다. 이틀 동안 계속되는 부림절은 유다 사람들로서는 거를 수 없는 명절이 되고, 자손에게도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되었다.

(9:29, 새번역) 아비하일의 딸 에스더 왕후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와 함께, 전권을 가지고 두 번째로 편지를 써서, 부림절을 확정하였다.

(9:30, 새번역) 위로와 격려의 말이 담긴 그 편지는, 아하수에로 왕국 백스물일곱 지방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발송되었다.

(9:31, 새번역) 이 편지는 이틀 동안 계속되는 부림절을 확정짓는 것이다. 이것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 왕후가 지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다 사람들 스스로도 기꺼이 부림절을 명절로 확정하고, 그 자손들도 그 때가 되면, 금식하며, 슬피 울면서 지키도록 하였다.

(9:32, 새번역) 부림절에 관한 규정은, 에스더의 명령으로 이렇게 확정되고, 그것은 글로 기록되었다.

 

 

부르 라는 주사위 던져서 받은 날

점 친날

유대인들을 몰살하는 날 심판의 날인

주사위 던질 날이

몽둥이를 쥐는 날이

미디안의 날이

애굽의 날이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날이

 

그 가짜 받고 그 받은 것에 더 나은 제사 곧

 

770의 용서의 날인

 

졸지에 구원의 날이 되더라 말이죠

 

(9:22, 새번역) 그 날에 유다 사람이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났으며, 그 날에 유다 사람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뀌었으므로, 모르드개는 그 이틀 동안을,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하는 명절로 정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도록 지시하였다.

 

슬플 대신 희락을

초상날이 잔칫날

잿더미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날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쓴 잔을 마시라 라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 놓여져라

죽으면 죽으리라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의 자리에서 천국을 외쳐라 라는 겁니다.

 

왜 천국이 떳기에

 

천국이 낳은 증상이다 말이죠

 

결국 반대로 저들은 몽둥이를 쥐고 싶어서 쥔게 아니라

한 아기가 떳기에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에

한 싹이 떳기에 그 증상으로써

몽둥이를 쥐기 싫어도 쥘 수 밖에 없도록

건강한 자의 자리

의인의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들은 미디안의 날을 거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디안이니까 말이죠

자기가 죽는 부르 주사위를 던진 날을 거칠수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심판날을 받는 자는 없다 말이죠 그저 남을 잡아먹을려고 받아두는 날이니까 말이죠

 

하만이 자기 죽는날을 잡을 리가 없잖아요? 남 잡아죽일려고 잡은 날이 도리어 남구원해 줄려고 잡은 날이 된 셈이다 말이죠.

 

 

자 여기 오늘 본문에 어린양 VS 이리, 어린 염소 VS 표범

송아지 어린사자 어린아이

젖먹는 아이, 젖뗀 어린아이 VS 독사

 

(11:6, 개역)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11:7, 개역)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11:8, 개역)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라는 어린 무능한 자는 그때에 이리 속에 표범 속에 곰들 속에 사자 속에 독사 속에 놓여져도

자유한 반면에

 

상대적인 어른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가치를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어린아이처럼 자기가치능력이 다 날라가버린 상태에서는 살수 없는 때가 바로

부림절 곧 희년이 된다 말이죠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자는 곧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만 희년이 기쁜날이지

포로된적 없고 갇힌적 없고 억눌린적 없는

소위 건강한 자

의인

이런 자들은 자신의 능력 가치가 다 날라가버리는 희년이 인애와 자비가 펼쳐지는 아침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에게는 어둡고 캄캄한 밤이 되는 겁니다.

그 캄캄한 밤을 자신의 능력으로 버텨내어야 하고

배고픔을 채워야 하니 잠을 못 자요 배고파서

하이에나처럼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다 말이죠

안 채워지고

아침이 오지를 않는 겁니다.

부활이 없어요

 

어떻게 사막인데 샘이 넘치냐 말이죠

어린양이 어떻게 사자와 함께 뛰놉니까?

배에는 쓴 데 어떻게 입에는 다냐 말이죠 말도 안되잖아요

 

자신의 가치가 되는 능력으로 살아온자에게서는 말도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완벽을 추구하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이다 말이죠

그래서 시편을 달달 외우고

이사야서를 완벽하게 지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만처럼 몽둥이를 쥐게 되지

그 몽둥이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저 분만 옳았다고 하지 않는다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다들 몽둥이를 쥐고 예수님을 개패듯이 살해한 살해자

원수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

그런 몽둥이를 쥔 너를 건질려고

원수 너를 건질려고 대신 매 맞은 거다 라고

 

왜 저 원수 하만 저 원수 마귀의 손에서 빼내시고자 말이죠

아뿔사 허걱

내가 마귀였군요

원수였군요

 

그러니 한 아기가 떳다는 것은

이새의 줄기에 한 싹이 태어났다는 것은

진짜 실상인 십자가를 통해서

누가 마귀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이 마귀를 거쳐서

이 마귀와 싸워 이기신 어린양이다는 겁니다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인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도바울도 원수로써 예수님을 죽인자이다 말이죠

그 사도바울이 용서 받을려고 원수짖을 의도적으로 한게 아닙니다.

내 속의 죄가 그랬다 말이죠

참 핑계좋죠?

아닙니다 믿음으로 쓴 로마서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갇힌바 된 곤고한 자였던 겁니다.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쓰디쓴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에 의해

우리는 비로소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보게 된 겁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지혜를 마귀가 싫어하는 겁니다.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습니까?

여러분이 아침에 세수할 때 세수대아의 물이 지구의 바다를 다 덮는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물두멍이라는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제사장이 손발을 씻는 큰물동이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피가 전지구의 바다처럼 허다한 허물을 다 덮냐 말이죠

 

마귀는 이것에 반발하고자 자꾸 들쳐볼려고 한다 말이죠

 

말도 안된다고

 

바다는 마귀가 다 장악할 정도로

이미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포로되었고 갇혔고 억눌린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빠져나올수 없는

마치 바다를 상대해야 할 정도로 불가능한 어마 어마한 바다에 갇힌바 된

허다한 허물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만의 날에서 무슨수로

앗수르의 몽둥이에서 무슨수로

애굽과 애굽군사 에게서 무슨 수로 구원받냐 말이죠

 

불가능해요

 

그런데 믿음은 한다 라는 겁니다.

 

그 애굽 애굽군사를 받고

앗수르 몽둥이 받고

 

그 받은 것에 곱하기 70 뿌뿌뿌 나팔절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날은

바로 심판의 날 미디안의 날 끝이라는 종말의 날 받고

그 종말의 날이 심판의 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 되는 새해 새날이 되는 겁니다

부림절 희년 말이죠

 

이 심판의 날을 기뻐하라 말이죠

그 뒤에 구원의 날이 오니까 말이죠

나의 죄악이 심판받는 날이 곧 내 죄가 씻겨지는 날이다는 겁니다.

 

이 끝을 이 심판을 땡기는 자가 바로 쓴 말씀을 먹는 참선지자 이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는 모호하고 의문만 반복하지

심판의 날 땡기면 안된다고 외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 그들에게는 이 한 아기가 떳다가 없으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지 않았으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십자가가 새로 낳은 자녀가 아니니까

쓰디쓴 말씀을 먹지 못하는 겁니다.

 

도리어 그들은 몽둥이를 쥐고서 남을 잡아먹는 권리가 있는냥 행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1:9, 새번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산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떳기에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2:3, 새번역)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 또는 '가르침' 또는 '교훈'

 

(2:4, 개역)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드디어 다시는 전쟁이 없는 전쟁의 종식인 평화가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외치시는 겁니다.

독사굴에 어린양이 손 넣어도 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을 다 덮는 예수님의 피가 온 세상의 모든 허물을 다 덮는 겁니다.

이 상태가 바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는

바로 천국이 침노하는 자에 의해서 침노당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서 이룬다 말이죠

 

정작 마귀는 율법을 쥐고서 사랑을 이루는게 아니라 몽둥이 쥐었다고 좋아라 했지만

도리어 그 몽둥이로 남을 시체로 만들었는데 그 시체가 자기가 깔려 죽는 식입니다

그런식으로는 율법의 완성인 거룩이 사랑이 안 나오는 거죠

두 패로 안 갈려진다 말이죠

 

(11:9, 새번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자 한 아기가 떳기에

몽둥이를 쥐는 자와 쓴 말씀을 먹는자로 나타나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두 패로 나오지

몽둥이 쥐고 싶어서 쥐게 된 것도 아니요

쓴 말씀을 먹고자 안달이 나서 준비하고 갖추어서 먹는게 아닌

 

이미 한 아기가 떳기에

창세전에 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기로

야곱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겁니다

 

바로 유일하신 남은자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말이죠

그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자들이 남겨둔 씨앗인 예수님으로 인해

곧 일곱으로 인해

12지파인 새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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