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7 중보자(사독 제사장)의 기업 (겔 44,28-3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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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풍기 소리 어쩔수 없으니 감안해 주시고 들으세요 노이즈 제거 아무리 해도 여기까지가 한계라서 ~~)

19-127 중보자(사독 제사장)의 기업 (겔 44,28-31)

사독 제사장의 율법(정답) 규례(작동원리) (겔 44,20-27)
에스겔 2019 2022. 6. 12. 12:56
19-126 사독 제사장의 율법 규례 (겔 44,20-27)

〈에스겔 44,28-31 개역한글, 구약성경 1224쪽,  찬송가 361장 주의 주실 화평,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찬송가 361장 주의 주실 화평〉

1.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 
   주의 제단앞에 모두 바치기전 복을 받을 줄 생각마라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2.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에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좇아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3.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주의 주신 기쁨 또한 그의 사랑 어찌 말로 다 형용하랴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에스겔 44,28-31 개역한글, 구약성경 1224쪽〉

(28)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나는 그 산업이 됨이니라
(29)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지니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하여 드리는 물건을 다 그들에게 돌리며
(30)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31)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삿 17:1, 개역)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삿 17:6, 개역)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7, 개역)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
(삿 17:8, 개역)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찬송가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2.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3.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 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아멘


(겔 44:28, 현대어) 제사장들은 어떤 토지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나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에게 어떤 재산도 주어서는 안 된다. 나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겔 44:29, 현대어) 그들의 양식은 희생제물과 곡식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 가운데에서 얻게 된다. 따라서 내게 봉헌된 모든 제물이 그들의 것이다.
(겔 44:30, 현대어) 또 모든 첫 열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 세금으로 내는 갖가지 예물 중에서도 가장 좋은 예물과, 새로 추수한 곡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예물이 제사장들의 차지가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모든 예물과 제물을 똑바로 바쳐 네 집안에 축복이 내리게 하여라.


한번은 교회후배가 의대생이다 보니
군복무를 보건소에서 해서
심심하다 라고 채팅을 알려줘서 
채팅을 처음 하게 되었는데 기독교 사이트 이다 보니
채팅방에 들어가게 되면 모조리 다 교회사람이더라 말이죠

또 그 와중에 소위 상급계급에 해당된다 라고 여기는 자들
곧 사모와 교역자들의 방이라고 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가 싶어서 들어가 봤다 말이죠

익명성이라서 본심이 다 드러나거든요

모조리 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더라 말이죠
특히 전도사 사모 들의 방에서 말이죠

자나깨나 돈 이야기 뿐이더라 말이죠

어떤 목사 말 마따나 교회는 목사의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라고
자기 죽으면 가족 책임 지라 라고 미리 보험들어야 한다 라고
우회적으로 돈 이야기를 하더라 말이죠

충격먹었지요 아니 한국에서 가장 성화가 된 교회요 목사 라고 해서
뭔가 다른가 싶었는데 
어떤 생각을 하나 싶었더니 
역시나 이건 뭐 세상 사업가와 무슨 차이가 있냐 말이죠
교회에서 알아서 하면 그만인 것을 말이죠
안하면 뭐 어쩔수 없는 건데 말이죠

그것을 또 재정을 맡은 집사가 네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라고
그 빨때에 그 밥풀떼기 이더라 말이죠
흡혈귀가 따로 없어요 글쎄

바로 이런 교회의 모습이 이미 불타는 성전을 통해서 다 까발려 졌고
다시 세우시는 새성전을 기준으로 해서
새로운 성전을 맡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이 새성전의 기능이 뭔가를 보여주도록 성전 일을 맡겼다 말이죠

어머니 말 마따나 또 우상숭배를 하면 우짜노
또 미리 보험 계약 해야 할 거 아니냐 목회자 가족 부양 의무 보험 들어야 할 거 아니냐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 바른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라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죄 라고

바로 이런 생각들이 모조리 다 우상숭배이다 라는 겁니다
새성전에 안 맞는
불타지 않는 성전에 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다 불타고 사라지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삭제되어야 할 것은
다 우상숭배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출말하지 않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요
땅의 것이요 사람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기 의로움을 쌓고자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이다는 겁니다
탐심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목전에서 항상 범죄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오는 제사장의 조건 또는 규례로써
제사장의 기업 또는 재산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위 제사장은 땅의 지분이 없으니까 땅의 재산이 없어요

바로 이 원칙 자체가
땅의 지분이 없다 라는 자체가
이들 제사장은 아주 아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곧 단절 입니다

다들 묻게 되죠 그럼 뭐 먹고 사노
전도사 사모들이 그래서 십일조 이야기만을 하는 겁니다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 라고
그래야 자신들이 먹고 산다 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 되신다는 의미이지 돈 내라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라고 하니까

그 사모들이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자기 밥줄 끊어버리는 소리를 하는데
이단이라고 쫓아내지요

그럼 또 방에서 쫓겨나서 일부러 방을 새로만듭니다
방제목을 십일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십일조 내지 마시고 십일조 받읍시다 라고

그럼 또 궁금해서 들어올거 아닙니까
자기들 방에는 손님이 없고

우야다가 사람들이 많을 때가 있는데 그때 무슨 소리를 하나 염탐하러 들어온다 말이죠
그럼 그 사모들이 들어오면 바로 쫓아내버립니다
그야말로 황당하겠지요 ㅋㅋㅋㅋ

어차피 대화를 방해할테니까 말이죠
몇 번을 당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교역자들이 사독제사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아비아달 제사장과 엘리제사장의 다른 불을 드리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불타는 성전을 거쳐서
사독 제사장의 계열로써 주님께서 제사장의 규례를 나열하심에 있어서

이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의 곧 거룩이 뭔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간극 이 단절을 두고 말한다 라고 했습니다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죄를 거룩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자가 제사장이요 성전이요
법궤에 담긴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룩한 죽음을 다루는
아주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살벌한 절대저주 절대죽음을 다루는 일을 하는 자가 제사장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미 이스라엘의 포로됨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탐을 겪었고
에스겔 당시에 말이죠

그래서 아비아달 제사장과 엘리 제사장 계열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를 거쳐서

인간 쪽에서 나오는 그 어떤 행함도 받지 않으심과
그들의 행함은
또는 인간 쪽에서 바치는 의미는 모조리 다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통해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이 뭔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거룩한 죽음이 뭔가를 말이죠
처음부터 제사장의 기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도록 되어 있는
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도구들을 다른 사람들이 만지면 죽잖아요

(민 18:1, 개역)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가 그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민 18:2, 개역)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합동시켜 너를 섬기게 하고 너와 네 아들들은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것이니라
(민 18:3, 개역)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민 18:4, 개역)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지킬 것이요 외인은 너희에게 가까이 못할 것이니라
(민 18:5, 개역)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민 18:6, 개역)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 형제 레위인을 취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민 18:7, 개역)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또 성막의 텐트 테두리 높이를 2.5 미터 정도이다 보니 
좀 키가 큰 어른은 보일 듯 말 듯 애매하다 말이죠

늘 성막 구조를 다룬 내용으로써 그림을 검색하다 보면
또 역시나 늘 그 생각이 난다 말이죠

이왕 하는 것 적어도 10미터 높이 정도를 하면 되는데
왜 2.5미터 인가? 늘 애매한 높이였거든요

아예 키가 작으면 단절성 때문에 포기하는데
애매하면 보일 듯 말 듯 하면 더더욱 보고 싶거든요
단절 되면 될수록 더 호기심이 말이죠

그렇게 뒤꿈치 들고 보다가 즉사 한다 말이죠
어딜 더러운 주제에 건방지게 이 비밀을 보느냐 라는 거죠

마치 웃사가 떨어지는 법궤를 손으로 잡다가 즉사한 것처럼 말이죠

네 맞아요 다들 여호와의 불을 다루는 의미입니다

성전의 도구를 전쟁의 승리의 노략물로 취하던
느부갓네살이라는 아버지를 죽인 
누브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이 이 성전의 도구를 건방지게 만지다가
즉사한 웃사처럼 죽게 되지요
벽에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 메네 메네 데갈 우바르신
함량 미달 모잘라 모잘라 거룩이 모잘라 라고 죽여버렸듯이 말이죠

이런 사건도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왜 죽은지도 알길이 없을 것 아니겠냐 말이죠

제 말은 이스라엘은 이런 사건이 적혀 있다고 해도
여전히 제사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여전히 아비아달 제사장의 기능을 쫓으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이 그런 자들 아닙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까지도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속성에서
한 발치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오늘날 목사들 보세요
다른 불을 드리는 자들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들 속에 다른 복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자기를 기쁘게 하는 복음이다 말이죠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라고

아니 다들 자기 좋게끔 하기 위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었는데

제사장은 그런 하나님을 두면 안된다 라고 해야하는데
도리어 제사장이 그런 가짜 하나님을 두라 라고 우상숭배를 부치기고 있더라 말이죠

오늘날 목사들은 오죽 더 더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겠냐 말이죠

거룩한 죽음인 절대저주 절대죽음을 다루는 중보자가
이런 주님의 살과 피를 다루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일을 제사장이 하는 겁니다
거룩한 죽음을 다루는데 있어서
특별하게 지정된 자만이 다루거든요 

그런데 거룩함 이거는 우리 쪽에서 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거룩한 죽음에서 죽음은 빼버리고 가르치더라 말이죠

거룩은 우리도 할 줄 안다 라고
거룩의 원리를 제사장 딸도 알 정도이니까
가능성으로 보게 되니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가 제사장 딸이
힘이 없을때에는 짐승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드디어 돈 있고 힘이 있게 되니까 그 동안의 결핍을 채울려고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가 거룩한 성전에 갔듯이 예루살렘에 말이죠
짐승의 등 위에 올라타서

이 주님 쪽에서 넘어오는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한
거룩한 죽음
주님의 살과 피를 무시하고서

자기들이 이제 힘 생겼으니까 계속 바치게 되어서
이제 재앙을 받지 않고 복 받을 수 있다 라고 여기는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듯이 하나님과 우상을 썩어서
자기의 의로움을 바치더라 말이죠

똥덩어리 배설물을 말이죠
남의 것 빼앗아서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말이죠
더더욱 경계선을 그으면서
담벼락을 더더욱 세우면서 말이죠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이름없는 아기 
솔로몬의 형을 다윗을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겠다 라고 말이죠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두 패로 나눈다 라고 했잖아요
두 언약으로 말이죠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말이죠
이 두 패로 가르는 천국과 지옥으로 가르는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의, 거룩인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 너 누군지 모르겠는데 라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피 흘린적이 없고
피 바른 적도 없는 자들이

반드시 자기 쪽에서 바치겠다 라고 나오게 되니
주님의 살과 피는 정작 거부하고
거리끼는 걸림돌

아니 제가 식인종입니까 라고 나오듯이 말이죠

식인종이 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이 자유를 못 누리도록 되어 있어요
도리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된 거죠
주님의 살과 피가

거룩한 죽음을 말하는 제사장이 중보자가 말이죠

율법의 완성인 남을, 원수를 사랑하심 이거든요

그 원수의 자리에
율법의 완성인 원수사랑의 증상물로써 원수가 나타나는데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아무도 죄인이 없고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고
찢겨진 자가 없으니까

거룩한 죽음을 말라꼬 보겠냐 말이죠

중보자가 말라꼬 있겠냐 말이죠

그들의 중보자는 오로지 복 달라 라는 무당 밖에 없는 셈인 거다 말이죠
이 무당이라는 살 자를 죽이고 죽을 자 무당을 살리기 위해서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듯이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믿음은 이 중보자를 거부하고 가짜를 세우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인 거룩한 죽음으로써의 십자가가 덮치게 되면
우리는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이 절대죽음 앞에서 나는 늘 함량미달이다는 겁니다

웃사처럼 더러운 주제에 어딜 들어와 어딜 만져 어딜 쳐다봐 뭐 천국 거룩한 곳에 들어오겠다고
즉사 당하는 것처럼 말이죠

니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든다 라고
선지자들은 반드시 이 거룩한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거룩은 배설물 똥덩어리 임을 고백케 만드십니다
회개케 하시는 능력이 넘어오니까 그 증상물로써 말이죠
단절케 하시는 능력이 넘어오니까 말이죠

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서는 다시는 낫게 해 달라고 하지 않듯이
이 거룩한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

밤새도록 벽돌로 끍어대는 그 아토피 조차도
절대 죽음 앞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 라는 것을 비로소 안 겁니다

엘리야의 내 열심히 특심이다는 둥
요나의 퍼뜩망하라꼬 삼일길의 단절을 하루만에 돌 듯이

또 남들은 다 버려도 나 베드로 수제자 만큼은 절대로 안 버리고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장 지지겠다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함께 따라 죽겠다 라는

이 모든 인간 쪽에서 바치는 믿음을 실패로 돌아가게끔 만드시는 것이
바로 주의 살과 피

중보자는 이 주님이 흘리시는 살과 피를 먹이고자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과 피를 다루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또 다윗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려보겠다 라는 등등 도 마찬가지 이구요

이 거룩한 죽음 앞에서는 감히 씨알도 안 먹히는
함량미달의 짐승의 수 666일 뿐임을 말이죠

백날 거룩이랍시고 바쳐보세요
무게가 채워지는가
백날 성전을 세워보세요 46년 동안 지어도 미완성이지
그 의문의 반복 손 놔라 말이죠
인간 숙제 손 떼세요

거짓선지자들이 인간 숙제 손 떼라 라고 말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바로 걸려버리는 겁니다
그 사모들처럼 말이죠

자꾸 인간이 다루고자 나대는 겁니다

제사장도 주님의 살과 피를 다루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제사장을 다루는 겁니다

주객이 뒤 바뀐 겁니다

도리어 이 거룩한 죽음으로써 흘리는 피와 기름이
누구에게 발리느냐 라는
이 일에 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일에 동원이 되는 자가 제사장이니까 말이죠

주님은 이 원수를 부르러 왔다 말이죠
회개케 하시는 능력을 받은 자를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십자가가 둘이 된 원수지간을
하나로 만드는 한 몸으로 만드는
이혼할려고 자꾸 떨어지는 부부를 수갑을 채워버리니까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이 십자가라는 수갑을 채워서 하나가 되게
막힌 담을 헐게
우상이라는 자아를 헐어버리는 겁니다
당신만 보이는 자가 경계선이 무너진 자가 자유하는 여자로 만드시는
회개케 하시는 능력 곧 거룩한 죽음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원수가 없어요
아무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없어요

다들 잔칫집이다 보니
그 잔칫집 유지할려고 번제와 제사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방인을 압제하더라 말이죠

바로 그런 황금성전인 솔로몬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잔칫집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님을 삼키고 죽이더라 말이죠

정작 예수님이라는 성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는데 말이죠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다들 싫어버린바 고개를 돌려 버려요
즉 때려죽어도 안 볼 거야 라는 다짐이 이게 바로 인간에게 이미 들어가 있는 믿음인
선악을 알고서 하나님과 같이 된 우상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겁니다

없는 자아가 생겨서 그 자아랑 때려죽어도 안 맞는 것이
싫어버린 바 되신 예수님이거든요

이 거룩한 죽음을 보고서도

아무도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부정한 백성에 거하는 자로서 나는 지옥갈 자 였구나 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말이죠

처음 사랑을 간직한 자가 없어요
처음사랑이 우리는 다루는게 아니라
우리가 자꾸 처음사랑을 다룰려고 하니까 자꾸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순수했던 나, 자아를 다시 찾겠노라 라꼬

그 반대죠 처음사랑이야 말로 자아를 없애버린 유일한 정답이 나를 다 장악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산 때 였거든요

즉 이런 특급상품 포도나무가 하나도 없고
모조리 다 들포도가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결국 우상숭배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아니 분명히 특급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거든요
그런데 엉뚱한 열매가 나오더라 말이죠

이것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제사장이 하는 일과 연관이 됩니다
제사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중보자입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절대거룩을 말하기 위해서
왜 인간 쪽에서 바치는 것이 모조리 다 실패로 돌아가야만 하는 가를 보여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이미 구약에서 인간들이 모조리 다 실패했기에
보혜사 성령만이 예수님의 영
십자가의 영
예수님의 마음만이 중보자 이실 뿐이다 말이죠

즉 중보라는 기능은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나(예수님)와 연관이 상관이 관계가 없다
나 너 누군지 모르겠는데 라는 겁니다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알 듯
저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서로가 누군지를 아는데 말이죠

너 어디서 굴러먹던 뼉다귀야 라고
출신, 출처가, 처음사랑이, 근본이, 뿌리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닌 이상은
모조리 다 단절로써

모든 율법은 모든 말씀은 바로 이 정답이신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의 죽음만을 외치고 있는데
자꾸 다른 의를 가지고 와서 날 좀 받아달라 복 달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유일한 성공이요 유일한 정답이요
유일하게 다 이루었다 가 되는 것은
약속 다 이룸 빨래 끝은
유일한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율법의 완성 밖에 없는데

뭘 도대체 바치겠다 라고 하냐 말이죠

다윗이 글쎄 이것을 알아버렸어요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바칠려는 그 인간의 선함 속에 항상 악이 들어가 있더라 라는 겁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인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라고 말이죠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 동안 다윗은 그것을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손가락 세듯이
물 위를 세 번 걸었다는 듯이
남을 7번 용서했다는 듯이
자꾸 인구조사하듯이 셀려고 한다 라는 겁니다 손가락으로 말이죠

남에게 자랑할려는 즉 날 무시 하지 말라 라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담벼락을 더더욱 높이 크게 길게 넓게 지을려는 산당이다 라는 거죠
왜? 부자청년처럼 담벼락을 바리케이트를 더더욱 높이 쌓아야 하니까
이 강박증
경계선 긋기 말이죠

이것이 그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제사장의 기능으로 본거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바치는 겁니다
금을 바쳐야 맹세와 기도가 효험있다 라고 본 거다 말이죠

이것은 거꾸로 봐도 한참을 거꾸로 본 거다 말이죠

정작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주님의 살과 피는
사랑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사독제사장을 그래서 저 아비아달 제사장과 분리 시켜서 두 언약으로 나누어서
언약을 성사 시키시는 겁니다

정반대의 극과 극으로써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율법을 곡해하고
말씀을 자기 소견대로 예언하듯이 본 것이 없이 말이죠

바로 이런 시선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써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님을 삼키는 죽이는

아니 자기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를 
도리어 기다렸다 라는 내 열심히 특심이라는 이유로 죽이게 되는
막상 오게 되니까 내가 원했던 메시아 아니네 라고 죽여버린거다 말이죠
얼마나 기대치가 컷겠냐 말이죠
그런데 싫어버린바 되고
흠모할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며

즉 자기랑 때려죽어도 안 맞다 라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것에 하나님과 같이 된 자아랑 단 하나도 안 맞아요

심지어 무자아 라고 추구하는 불교의 교리 플러스 실천 가들 조차도
전혀 안 맞아요
아니 무자아 라메?

무자아를 추구하는 자아는 그럼 자아 아니냐 말이죠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안 맞아요
안 멋들어진 구원이예요
모욕적인 구원이신 주님의 살과 피로만 된다는 겁니다

아니 왜?

네 맞아요 의인에게는 살과 피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죄인에게는 이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고침 받을 방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어차피 번제와 제사를 드리고자
부모 잡아먹고 자식 잡아 먹을 것
그거 백날 해도 의문의 반복 그거 하지 말고
단번에 한번만에 다 이루는
나의 살과 피를 먹어라

아니 구원자의 살과 피를
의사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자기 구원이 날라가버릴거 아니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자아 라는 우상을 구원하고자 했지

주님이 창조하신 처음자리로써의 특급상품은 단 한놈도 구원해 달라고 하지를 안아요

그러니 의인으로써 자꾸 구원 받을려는
멋들어진 구원을 바라는 
그 가짜인 자아를 구원해서 뭐하게
허구 허상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그 허구를 구원해서 뭐하게요

주여 처음자리로써의 주님이 창조하신 자를 구원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새창조해 달라고
이전 것을 다 멸망 시켜 달래요
나 도 포함해서

제대로 된 절대죽음 절대심판을 보여주세요 라고
솔로몬 왕에게 지혜에게 부탁하는 것이 진짜 어미인
진짜 아들의 죽음에 뛰어드는 어미이다 말이죠

새판을 짜 달라고
그래서 새 판을 짠게 신약이다 말이죠
안그러면 또 의문의 반복인 들포로도 변한 유대인 데리고 계속 
답도 없이 의문만을 반복할 꺼 아니겠냐 말이죠

이런 모욕적인 구원
이스라엘 원가지도 아끼지 않고 짤라냈는데
개같은 이방인인 우리는 오죽하겠느냐 말이죠

짤라 내는 구원

그러니 아무도 구원이 없죠

그 짤림 당하는 찢겨지는 그 심판 속에
뛰어드시는 이 분이

바로 율법 외에 한 의로써 나타난 겁니다

율법은 날 찢고요
시온에서 나온 율법은 날 찢고요 이유없이 무조건 심판 저주를 하고요
예루살렘에서 나온 말씀이 이윺 없이 나를 다시 싸매어주시는

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겁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화목제물이 나타난 거다 말이죠

바로 나를 비추는 거울로써
중금속이나 수은 중독의 얼굴이 새까만 얼굴로써 병자의 모습으로써
우리들의 질고를 질병을 담당하신 모습으로 왔으니

꼴보기 싫다 라고 죽여버리면 버릴수록
자기 뺨을 자기가 때리는 누워서 침뱉기 하도록 하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도록 하신 지혜이더라 말이죠

그리고서는 다른 메시아를 또 기다려요 글쎄

제사장의 기능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들의 죄악을 거룩으로 변이 변화 전이 이동 시키는 작업을 하는
아주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절대저주 속으로 들어가서 절대거룩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어주는 이 하나님의 의 이라는 이 삼일의 간극을 보여준다 말이죠

지옥의 큰 구멍 세 개를 말이죠

아니 절대저주 속으로 들어가는 원인이 있으면 
역시나 같은 결과인 절대저주라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도리러 절대거룩이라는 결과가 원인과 다르게 나타나버렸다 라면

이것은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제사장의 기능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주님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제사장 기능이다는 거죠

자 그럼 믿음이란 신앙이란 
우리의 굳센 다짐이나 결심 오기 신념이 아니라

그런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왜 주님은 제사장을 주지 않으면 안되시는가를 아는 것이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중보자 말이죠

(요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주님의 살과 피를 외쳐야 하는 왕같은 제사장이 바로 중보자 이다는 겁니다

제사장이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느냐를 말이죠

중보자 이거든요
중간에 다리를 놓아주는 그런 단순한 의미 보다

에스겔서 이니까 새성전에 맞는 왜 인자를 주지 않으면 안되느냐 라는 겁니다

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어서
자꾸 자꾸 하나님과 같이 될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을 실패케 하시는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자로써
중보자를 주셨다 라는 겁니다

연결 연결이 아니라 단절이다 말이죠
성령론을 개방 연합으로 해석하면 그거 불교입니다
또 교리 플러스 실천 이라는
방종하지 말자 로 나와요
방종 그럼 하라는 말이냐

방종이 잘하는 짓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나 잘못 되었다 말이죠

이런 방종이라는 악 방종안하기 라는 선
이 선과 악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생존에서의 출발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니
이 주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늘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계선을 긋는 자아가
막힌 담을 더더욱 높이 세워서 산당을 시온산에 짓는 자아가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할 정도로
병자이다 라는 환자 이다 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니

오죽 하면 그럴까봐 무시 당할까봐
모세가 광채나는 것을 오래 오래 소유하고파서
광채 사라지면 곧 바로 죽일려고 달려드니까 말이죠
어디 한 두 번 당했겠냐 말이죠
그래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들의 허물을 담는 그릇으로써의 인자이어야 하니까
거울로 담아 비추고자

발가벗고 삼년
싫어버린 바 
풍채 없고
아름다운 모양 없고

이것이 광야에 있는 선지자요 초상집에 있는 주님의 살과 피라는 희생제물이다 말이죠

아니 이 중보자 볼려고 광야에 나가지

좋은 옷 입은 자 볼려고 갑니까 그런 자는 왕궁에 있어요
온갖 편리시설이 다 있어요

여성이 젊었을때에는 어서 시골에서 떠나서 온갖 편리함이 다 있는
도시로 가서 애 낳고 살고 싶어 하다가
늙으면 아름다움도 젊은도 다 사라지게 되니
자꾸 조용 조용한 시골에 살고 싶다 라고 한다 말이죠

맞아요 늙음 병듬 힘없음은 도시에 안 맞다 라는 것을 잘 알거든요

잔칫집에 안 맞아요

그래서 지혜는 자꾸 초상집에 가라는 겁니다
종말을 보거든요

제사장은 늘 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종말을 보여주는데
어라 희망을 주고 어라 연장선의 잇기 잇기를 보여주는
왕궁에 좋은 옷을 입고 있더라 말이죠

그러니 발가벗고 나타나는 인자와는 전혀 안 맞는 겁니다

그것이 누구 누구의 아들 바로 인자 라는 겁니다

뭐! 에스겔 인자가 말한 새성전을 그대로 오늘날 유대인들이 제 3의 성전을 짖겠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이제 기후재앙으로 세상이 끝난다 말이죠
그러니 자기들이 끝낼려고 더더욱 이 새성전에 집착할꺼 아니냐 말이죠


그 인자라는 박스에 나의 꽁꽁꽁 가매춰 둔 죄악이나 모든 허물을 다 담아서
다시는 보시지 않겠다 라고 피를 뿌려 덮는
이 수치를 제거하는 화목제물이 바로 인자 라는 걸어다니는 새성전인데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짓는 성전
또 불 타는 성전
아무리 46년 동안 돈을 엄청나게 때려부어도 여전히 완성되지도 못하는 미완성의 성전을
짓겠다 라는 그 심뽀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겁니까

네 맞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말이죠
마귀가 괜히 유대인을 다 장악해서

메시아를 고대하는데 있어서
마귀의 시험 3가지를 통해서

전혀 유대인이란 안 맞는 메시아로써 왔으니 말이죠

그러니 다른 중보자를 찾는 겁니다

네 맞아요 중보자는 딱 한 분 뿐입니다

이런 엉터리 중보자를 다시 찾고 기다리는 우리의 믿음 안 보십니다

내 때문에 대신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에 달려 죽는 분 만이 중보자이십니다

이 중보자를 하나님이 주셨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믿음을 밀어 붙이시는 분이 믿음의 주 이시다 라는 겁니다

이 믿음에 우리는 불도져에 깔려 죽듯이 깔려서
0층 1층이 되어야 할 판국인데

이 불도져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이 중보자 제사장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제사장 조차도 제사장의 기능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 앞에서 선하니 악하니를 따진다 라는 자체가
손가락 세고 있다 라는 자체가

불 앞에서 타 죽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울어야 하는 판국 뿐인데

이것이 바로 죄이다 라는 겁니다
우상숭배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왜 가짜인고 하니
그냥 안 믿습니다
그저 남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입장에서 인간은 믿을려고 하지
아니 우위에 두지 못할 것 같으면 말라꼬 믿을려고 하겠냐 말이죠

출발 자체가 이미 악마적이다는 겁니다

늘 자아를 좋은 자리에 미리 놓고 출발하니 말이죠
종말은 그 반대죠 바로 그런 자아를 끝장내 버리는 겁니다
자아 없애기
종말의 숙제이지
불교처럼 또 자아가 무자아 숙제를 하고 있으니 어딜 사기를 ㅋㅋㅋㅋ

교회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 이 이유이거든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말이죠

이 재미 없으면 말라꼬 기도하겠냐 말이죠
그저 종교 오락이요 취미요 아주 아주 건전한 취미
막살지 않기 라는 아주 아주 건전한 건강한 취미 오락

나는 저 사람 보다 절대로 더 나으면 안됩니다 라고 기도하는 자 봤냐 말이죠
나는 저 사람 보다 막사는 자로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 봤냐 말이죠
하나님의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와서 까지
서로 지 잘났니 라는 싸움 밖에 없어요

그런 일이 혹 있을 지라도 
절대로 그럴일이 없지만 혹시나 있을지라도
목사놈이 바로 그런 기도를 못하도록 고치고자 수정해 버립니다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 라고 째찍질을 함으로써
더 열심히 달리도록 말이죠

그런 기도 하는 자가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중고등부 아이들에게는 종교심이 가장 강할 때이니까
실제로 뇌과학자들이 사춘기 때에 뇌가 재편성을 한다고 합니다

가족 중심에서 친구 중심으로 말이죠

그때 부모는 내가 니 부모인데 라고 나오면 애가 더 반항하지요
그때 부모는 친구가 되어야 애가 삐둘어지지 않는다 라고
아니 뇌가 재편성이 되는 판국인데
내가 니 애비다 만을 강조해 버리면
간따나 생명의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것에 아이가 감당을 못하는 판국인데
(사춘기와 반대로 갱년기는 죽음이 덮쳐오니까 감당을 못하죠 
누가 죽을 준비도 안한 판국인데, 벌써 종말이 왔으니 말이죠)

더 한 법으로 눌러 버리면 아이는 튕겨 버리지 않겠냐 말이죠

애가 몸도 마음도 용수철로 변했다 라고 인정해야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말이죠

자 다시 돌아와서
중고등부때 사춘기 때에 종교성이 강하다 보니
나는 저 사람보다 잘 되게가 아닌
저 사람 보다 잘 안되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하고 라고 하면
진짜로 애들은 해 버립니다

순수해서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다 말이죠
우리 때는 그랬거든요

요즘은 유치부때부터 대학경쟁을 미리 하다 보니
모조리 다 경쟁자 이다 보니
친구가 없지요
그저 서로 서로 이용해 먹기 위한 친구로써

그래서 부모가 공부 잘하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라 라고 하지요

그래서 왕따가 벌써부터 있더라 말이죠

제가 20대 후반 쯤에
중학생 인터뷰를 한 것을 티비에서 보니까

왜 친구를 왕따 시키니 라고 물어보니
재를 왕따 시키지 않으면 내가 왕따 당해요 라고 그만 울어버리더라 말이죠

그때는 양심이 있었다 말이죠 우는 것 보니

요즘은 아예 양심도 없지요 소년재판을 올해 초에 보니까
소년재판이 아니라 거꾸로 재판관을 소년이 심판하더라 말이죠

아이들이 어른의 거울로써 증상물로써 사건으로써 나오니까 말이죠

중학생 아이들이 하나의 사나운 짐승으로써 나오더라 말이죠

결국 사회가, 어른들이, 모조리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으로써
사나운 짐승이다 라는 것을 아이를 통해서 거울로써 보여주는 것이겠죠

푸틴 보세요 짐승 아닙니까
그 푸틴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거든요

무당 여사 보세요
지마음대로 하잖아요

닭그네 2 중대 무당 샤머니즘 이라
법사 시키는대로 말이죠

이들 보다 더 더 더 심한 것이 있어요 더 댄저러스 더 위험한 자가 있어요
더 더 더 부정의 부정이 있어요

바로 중보자 제사장입니다

아이고 그것도 단절이가 우리 연변에서는 그런 것은 단절 축에도 못 든다 라고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절대저주로써 기름과 피를 짜내는 겁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안 받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왜 실패로 돌아가야만 하는 가를 보여주는 자가 제사장의 기능이니까 말이죠
주의 살과 피는 왜 인간 쪽에서의 행함들이 바치는 것들이 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가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인가를 보여준다 말이죠
단절 단절 다절

아뿔사 그가 나 보다 옳았다

아니 부정의 부정이 어찌 옳습니까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의 처형이
어떻게 율법 어릴적부터 다 지킨 것 보다 더 옳습니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 맏아들 보다
어떻게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하여서 빈털터리가 되어서 아버지의 용서를 바라고자
돌아오는 탕자가 더 옳습니까

중보자의 살과 피가 탕자에게 발렸으니까 말이죠

그렇게 뭘 해도 아무리 의를 바쳐도 배설물 죄로 만들어 버리고
죄인 중이 괴수로 만드시는 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가

도리어 이런 죄 마저도 너끈히 용서하시는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기름과 피로써
절대거룩을 입히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율법의 완성인 정답인 살과 피를 보여주는 자가 제사장이요 중보자 이다는 겁니다

역시나 인간 제사장들은 다 실패했어요
본인들도 안 믿겨지는 것을 믿어야 할 판국인데
역시나 안 믿겨지니까 말이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놓고도 도리어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떤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설마 복음을 전하는 자를 버릴 리가 있겠냐 라는 것이 
보통의 인간의 생각인데
사도바울은 바로 이런 제사장의 원리가 바로 십자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라는 것을 알기에
내 쪽에서 확정 시킬수 있는 것은 무조건 실패해야만 한다 라는 것을 알았다 말이죠

그러니 끝까지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복음 전하는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거죠
도리어 복음이 바울을 다루어 왔음을 믿어야 할판국으로써
본인은 그저 장기알 이였을 뿐이다 무익한 종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 마저도 주님이 하셨다 라는 것을 도리어 믿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아무 가치 없다 라는 거죠

자 그러니 중보자가 우리와 주님과의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는 중간다리 중간매체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 

아이고 그것도 단절이가 바로
적어도 내 정도로 싫어버린바 되고
내 정도로 옥동자 정도로 옥동자 맨치로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척 하기는 
적어도 이 정도로 잘 생겨야지 라고 반어법으로써 

너희들의 모든 허다한 허물 그 밑바닥 내가 감당하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중보자요 이것이 인자 이다 말이죠

그러니 제사장 만큼이나 아무도 가지 않는 광야
초상집

아무도 근처에 갈려고 하지 않는 저 죽음 속을 매일 매일 들락 날락 해야 한다 말이죠

이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우리는 온갖 사람의 일로써 제사장을 타락케 만들어 버리다 보니
거꾸로 제사장이 우상숭배를 가장 부추기는 자가 되어버리니까
(장로 집사 이런 놈들이 교인들 까지도
모조리 다 사람의 일을 하라 라꼬 제사장을 꼬득이니까 말이죠
사사기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하더라 라고
그러니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레위지파가 굶어죽고
장막에서 떠나버리고 개인의 점쟁이로 변질되어 버렸다 말이죠
단 지파의 미가와 미가의 어머니 에 대한 내용이 사사기 17장에 나옵니다

전락해 버립니다

(삿 17:1, 개역)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삿 17:6, 개역)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7, 개역)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
(삿 17:8, 개역)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

저 위험한 죽음 속을 절대 저주와 절대 거룩 속을 들락 날락 하는 기능을
누가 할려고 하겠냐 말이죠

자기의 일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셔야 한다는 식으로
복 빌려고 하듯이

늘 이 선악의 구조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주님은 중보자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처럼 보내셔서

선악의 구조가 아니라

십자가의 살과 피 라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구조로써

재편성 싹 다 갈아엎으시고 새로 만드시는

이 새언약으로써 이미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증상물로써

중보자가 이 세상에 투입이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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