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멈추는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2008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4838



줄거리

인류에 닥친 최대 위기! 지구를 향해 미확인 물체가 돌진해 온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78분!
우주 생물학자이자 교수인 ‘헬렌’은 의붓 아들 ‘제이콥’과 단 둘이 살아가던 중 갑자기 닥친 정부 기관의 사람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연행된다. 도착한 곳에서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은 바로 미확인 물체가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 이 물체가 지구와 충돌할 시, 지구는 한줌의 재처럼 우주에서 사라지게 된다. 남은 시간은 단 78분!

하지만 충돌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속력을 줄이고 센트럴 파크에 안착한 물체(스피어)의 출현에 정부는 혼란에 빠지고, 그 곳에서 걸어 나온 정체 불명의 외계 생명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들도 죽지만,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살 수 있어.”
인간과 동일한 모습의 외계인 ‘클라투’는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위해 세계 정상들과의 회담을 요청하지만, 그를 위험존재로 간주한 미국 정부는 그 요청을 거절한다. 그의 방문 목적을 캐내려는 정부 기관의 노력 속에 ‘헬렌’은 직감적으로 그를 구해야한다 생각하고, 그의 탈출을 돕는다.

탈출에 성공한 ‘클라투’와 ‘헬렌’, 그리고 ‘제이콥’은 정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헬렌’은 ‘클라투’가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마침내, 그의 경고를 무시한 인류를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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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멈추는 날

일단 이 영화는 재미가 없다.
아니 기대한 것들이 많았는데 나오겠지 하면서 봤지만 영 아니었다.
그야말로 요즘말로 낚였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인간들의 해석이 과거 1999년 때와는 달리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거 하나 건졌다고나 할까?

물론 종말에 대한 엉터리 해석을 하고 있다.

오늘날 자칭 종말의 단체 라고 하는 교회가 똑같은 해석을 이 영화처럼 하고 있다.

지구가 멸망해도 미래를 희망하는 진화하는 사과는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는 인간의 탐욕은 여전하다 그 탐욕의 터전이 교회이듯이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흉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니 교회를 닮아갈려고 안달이 난 모습 같았다.

역설적으로 교회로부터 세상을 구원해야 할 판국이 아닐까?

그들은 도리어 교회에 세뇌 당해서
이런 영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치 인간으로부터 지구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 거룩한 행위? 새로운 종말을 보는 안목?
등등을 빙자해서 더욱더 인간 자체라는 가인성에 의미를 두고 그 자아의 가인 성을 더더욱확대 진화 발전 시키면 유일한 구원이 될 것이다 라는 그야말로 구원에 대한 결핍으로 세워진 바벨탑이 세워지는 원리와 똑같다. 교회 또한 그런 핑개로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방주의 값어치를 하겠다고 우긴다.

종말이란 바로 그런 생각 마저도 인간의 선한의지의 계산인 선악과 나무로 인한 죄악임을 지적당하는 것이다. 차라리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구원인데
교회든 세상이든 이 종말 조차도 자기들의 숙제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한다.
가인의 족보가 그래서 더더욱 생명나무 집착에 영웅들 출현 곧 구원자 흉내를 내는 모습과 동일하다. 오늘날 그 가인의 거인족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처럼

그러나 종말(미래완료)은 그 가인족보의 반대 족보인 아벨의 족보를 양산해 낸다.
그것은 의인의 피 다.

종말의 영이란 바로 이 의인의 피를 양산해 냄으로써
종말이, 심판이, 완료됨이, 더 이상의 추가할 것이 없이 완성됨을 더욱더 구체화 하는 일이
종말의 영인 성령의 일이다.

그래서 의인의 피를 양산해 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칭 종말의 단체라고 우기는 교회나?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구원받은 성도 라고 하는 작자들이
도리어 의인의 피를 흘리고 있다. (구약의 역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인의 피를 흘리고 있는 짖을 자랑스러워 하고 키득키득 웃으면서 장난을 치면서
기념비인냥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을 밝혀내고 들추어내지 못하는 종말의 영은 가짜다.

왜 심판 받아야 하는 가에 대한 그 내막을 제대로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지 못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처럼 대충 죄를 지적하고, 대충 그 대안의 회개 반성과,
대충 희망의 희생 봉사정신의 실천행동이 유일한 그 종말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짖 꺼리와 별반 다를바 없다.

그렇기에 심판 조차도 종말 조차도 자기들의 손으로 해석하는 꼬락서니가
이런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채워지는 것이다. 교회도 인간의 종말해석 아이디어로 채워지듯

그런 거룩한 행위를 일체 거부하고
도리어 저런 인간은 종말 받아도 마땅하다 라는 인물을
구원의 대상 긍휼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면
그렇게 종말의 대비하면서 열심히 바벨탑(교회, 거룩함을 쌓기)을 쌓는 인간들 앞에
아주 아주 노골적으로 일방적으로 지독한 편애를 퍼붓게 된다는 어찌 될까?

종말을 유보하고자 하는 모든 아이디어가
도리어 종말을 재촉케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종말의 영인 성령은 놓치지 않고 일하신다.

아니 이런 일만 골라서 하신다.

즉 인간들의 종말에 대한 해석에 반대의 길로만
너무 너무 얄밉게도 그 거룩한 행동의 반대의 길로만 골라 골라서 간다.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3, 개역)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을 달성하시는 것이다.
(즉 성령의 일과 은사란 저들의 시기로 인해 구원을 넘기우는 일만 골라서 하는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한다. 그래야 구원이 넘어감으로 남을 부요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분 곧 은사 라는 것이다.)

실컷 구원받을 짖만 골라서 거룩이란 행위로 구원의 알리바이와 정당성을 신학이든 행함이든 성경지식이든 모조리 다 갖추고 열심히 다 채웠는데 (성전 안의 두 사람 중 바리새인)

일부러 그런 자의 눈 앞에서 딴 사람인 그 반대의 사람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종말의 행위이다.(성전 안의 두 사람 중 세리)

이 성령의 행위에 모든 인간들의 종말 대비책 행위는
반드시 그 대조되는 비교와 차이성이 드러나도록만 되어 있다.

마치 부자가 열심히 자기의 거룩으로 구원받기 위한 정당성을 가득 창고에 채웠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짖임을 그렇게 심각하게 모아 놓은 구원의 복들을 봐주지는 않고
티비 채널 확 돌려 버리듯이
갑자기 그 부자의 영혼을 오늘밤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종말을 반대로 해석해 왔고
그 종말의 대비 앞에 얼마나 무용지물이였음을 드러내는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종말에 대한 패스워드가 기가막히게 비밀로써 너무너무 잘 걸려 있는 아무도 못 푸는
이 비유야 말로 인간의 모든 미래 준비, 종말 대비책을 비켜 비켜 골라 간다.

볼 품 없는 들풀과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종말의 심각성을 보는 자만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주님의 영광을 봤다 누가 이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라는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불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자일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을 정당성, 구원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부자와 같다.
종말을 무시했기에 피를 무시했기에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심판 당하심을 무시했기에 생명을 무시한 것이다.

(눅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눅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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