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트  (Doubt, 2008)


http://movie.empas.com/movie/movieinfo?cinema_id=42289

드라마 | 104분 | 15세 이상 | 미국 | 2009.02.12 개봉
감독 : 존 패트릭 샤인리
출연 :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아담스, 비올라 데이비스
줄거리 : 존 패트릭 셰인리는 진실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변화를 강요하고, 도덕적 신념에 의해 한정된 맹목적 정의의 통렬한 결말을 보여주는 연극 <다우트>를 각색해 스크린으로 ... 더보기
멀티미디어 : 포스터, 예고편, 스틸컷


줄거리

존 패트릭 셰인리는 진실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변화를 강요하고, 도덕적 신념에 의해 한정된 맹목적 정의의 통렬한 결말을 보여주는 연극 <다우트>를 각색해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는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활기에 가득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는 철의 여인이며,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건히 믿고 있는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 분)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이어지던 학교의 엄격한 관습을 바꾸려고 한다. 당시 지역 사회에 급격히 퍼지던 정치적 변화의 바람과 함께 학교도 첫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한다. 하지만, 희망에 부푼 순진무구한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 분)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 밀러에게 지나치게 개인적인 호의를 베푼다며, 죄를 저지른 것 같다는 의심스러운 언급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고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 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도덕적 확신 이외에 단 하나의 증거 하나 없이, 알로이시스 수녀는 교회를 와해시키고 학교를 곤란에 빠트릴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플린 신부와의 은밀한 전쟁을 시작한다.

영화 <다우트>는 존 패트릭 셰인리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로는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아담스, 바이올라 데이비스 등이 있다. 제작은 스콧 루딘과 마크 로이볼이 맡았고 제작 총지휘는 셀리아 코스타스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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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나서 - 김대식

다우트 (Doubt)

다우트 의심이라는 뜻인데
도마가 생각 났다.

이 영화는 다크 나이트에서 느꼈던 것처럼
결론은 내리지 않고 독자들에게 맡겨버린다.

자 그렇게 되면 효과가 독자의 선택으로 상당한 긴 여운을 독자들에게 맡길수가 있다는 계산이
요즘 영화들의 추세인가 보다.

아무튼 독자들에게 떠맡겨진 선택은
과연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의심받는 자의 편인가? vs 의심하는 자의 편인가?

그리고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 포스터의 사진과 영화 제일 마지막 자막에
제임스 수녀님이라고 불리웠던 마가렛 메킨티 수녀님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라는
자막을 통해서 제임스 수녀처럼 양쪽 편에도 서지 않고 둘 다 상처입은 존재로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그런 사건의 경험이 짧은 수녀의 편에 설 것인가?


정 반 합? 삼위일체? 고개숙인 합?

나 또한 이 영화를 보고 결론을 파헤치고 싶었으나 독자들에게 선택이 떠 맡겨진 이상
구지 사실관계를 따질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서

도마를 생각하면서

아무리 의심이 많던 도마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미완료로 취급하면서 의심해 봤자
또 의심한다고 탓할 수 없는 의심의 세계에 갇혀버린 이상
그 의심을 벽 뚫고 퓨처
벽 뚫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세상 어떤 누구도 그 의심을 뚫을 수가 없다.
그 의심은 곧 자아와 결부가 된 어떤 누구도 자아의 결집이 된 바벨성의 잉여을 허물수가 없는 것이다.
(검은 의복과 검은 교회-포스터 가 감옥처럼 쪼여오는 갇힌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듯이
교회란 자유의 터전가 아니라 오히려 의심의 터전, 의심뿐인 탐욕의 원천으로 묘사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이 누구 보다 남달리 유별나게 의심했던 도마라는 의심쟁이도
뚫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아무리 의심해도 사랑의 행보를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의심하지 말자 라고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의심하고 의심해서
그 완료가 얼마나 깊고 넓고 길고 높은지를 우리는
원치 않는 의심을 통해서도 더더욱 그 사랑을 알수 있게 되는
십자가에 매인바가 된 자들이다.

그래서 뭐든지 다 수셔서 찔러보고
도금인지 정금인지 긁어봐야 한다.

이미 완료된 것이 우리 속에 구석에 쳐박아 놓는 골동품처럼 취급할려는 우리의 안일함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고지 곳대로 융통성 없이

모든 것들을 찔러 보고 넘어뜨려 보고 실족케 하여서
아무리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인가를 잉여품인가를 아는 것 조차도 말씀의 운동력 때문일 것이다.

누가 맞다 틀렸다가 아니라.

서로 서로가 찔러 보고 넘어뜨려보고 수셔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오뚜기 (피 발린자)인지를 늘 수시로 확인하도록
성령은 부지런히 붙이신다.

말씀만이 남기고 모든 것을 지워버리듯이 말이다.

이유와 조건을 갖추어서 잉여가 된 것인지
아무 이유도 조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잉여품인지

두 잉여세계인
긍휼의 잉여인지(지독한 편애=아벨) 진노의 잉여인지를(지독한미움=가인)

성령은 늘 수시로 종말의 상황인 사건을 터트려서

종말에만 등장하는 자기의 열매를 늘 수시로 앞장 세우신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성령의 전이다.
종말에만 등장하는 성령의 전리품인 것이다.
의심많던 그 도마도 십자가의 죽음의 창자국 못자국인
성령의 그 정과 욕심을 못밖은 그 실상 앞에서 무릎꿇게 된다.

이 보다 더 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 뿐이다.

사랑만이 완료이기에 더 이상 완료될 필요 없이 다 이루어 졌기에
죽음 아래의 것들은 마음 놓고 자유롭게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도 상관이 없다.
(범사에 감사란 또는 미쁘심 곧 든든할 정도로 믿음직 스러움이란
아무리 찌르고 찔러도 그 잉여성은 변함이 없다. 첫사랑은 바로 그러한 잉여다. 처음자리)

공기를 찔러 보라 태양을 찔러 보라 공기를 의심해 보고 태양을 아무리 의심해 봐도
변함이 없는 처음 그 자리의 잉여라면 그저 감사함과 감사함에 몸서리칠 정도로 놀라운 감사와 은혜가 넘칠 것이다. 우리는 이 은혜에 촉촉이 젖어 살아왔고 지금 현재 누리고 있으며 또 변함없이 처음 그대로 주신다.

우리는 처음부터 긍휼의 대상이요 용서의 대상일 뿐이다.
사랑의 대상인 불쌍히 여겨주심의 대상일 뿐이다.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은혜이기에

이 은혜가 맞는지 틀린지, 선악이 왜 아닌지를, 법이 왜 틀렸는지를
왜 은혜만이 옳았는지를, 왜 그 부정 중의 부정인 십자가만이 옳았는지를,

뭐뭐뭐 아니고 뭐뭐가 옳았습니다 라는 그 차이성을 

죽도록 평생토록 주님과 함께 변론하자.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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