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 토리노 (Gran Torino, 2008)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비 방, 아니 허, 크리스토퍼 칼리   
요약정보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 범죄, 드라마 | 2009.03.19 | 12세이상관람가 | 116분
줄거리 한국전을 참전했던 외골수의 보수적인 노인(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옆집으로 이사온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우연한 사건으로 엮이면서 평생 ..

거리:

<밀리언 달러 베이비>, <미스틱 리버>,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을 통해 연기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출력을 겸비했음을 과시한 바 있는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감동 드라마. 제작비 3,300만불이 소요된 이 영화의 출연진으로는,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중심으로, 17세의 신인배우 비 뱅이 소년 타오 역을 연기했으며, TV <링컨 하이트(Lincoln Heights)>의 코리 하드릭트, <디파티드>, <진주만>의 브라이언 할리, <에반 올마이티>, <행복을 찾아서>의 브라이언 호우, <로스트 라이언>의 크리스토퍼 칼리, TV <가십 걸(Gossip Girl)>의 드리마 워커 등이 공연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선 개봉 5주차에 극장 수를 2,808개로 늘이며 전국확대개봉에 들어간 주말 3일동안 2,948만불의 수입을 벌어들여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한국군 참전용사인 월트 코왈스키는 매사가 불만인 홀아비 노인. 가족들이나 이민자 이웃들과도 관계를 멀리하는 그가 아끼는 것이라고는 포드 사에서 만든 1972년산 그랜 토리노 자동차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인 흐몽족 10대 타오가 자신의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하자 라이플로 위협해 그를 쫒아낸다. 이를 계기로 뜻하지 않게 타오의 가족들과 관계를 가지게 된 코왈스키는 어딘가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결국 코왈스키는 이웃 이민자들을 갱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서게 되는데…

 미국 개봉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깊은 호감을 나타내었다. 뉴욕 포스트의 루 루메닉은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 작품은 관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흥분했고, 버라이어티의 토드 맥카시는 “<체인질링>이후 올해 들어 두번째로 내놓은 이 이스트우드 영화는 최근 몇 년동안 나왔던 영화들중 가장 적나라하고 꾸밈없는 작품.”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릴뷰스의 제임스 베랄디넬리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최상급의 반인종주의 우화.”라고 요약했다. 또, 시카고 선타임즈의 로저 이버트는 별 넷 만점에 세개 반을 부여하면서 “이 영화는 두가지를 그리고 있다. 첫째는 뒤늦게 꽃피운 한 남자의 선한 본능이고, 둘째는 21세기 들어 타인종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열어가는 미국내 인종들이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시카고 트리뷴의 맷 파이스는 “아직까지 이스트우드가 그 누구라도 육포처럼 씹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분좋은 영화.”라고 만족감을 나타내었으며, 뉴욕 타임즈의 마놀라 다지즈는 “레퀴엠(진혼곡)의 느낌을 지닌 작품.”이라고 결론내렸다. (장재일 분석)

메모:

보수주의자이고 공화당원이지만 진보주의자와 민주당원에게도 존경받는 '이스트우드'의 미국에 대한 생각들을 '그랜 토리노'를 통해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트우드'는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 통합이- 통합이란 말 보다는 조화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요구되어 지는 현 시대에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는 자신이 선이고 남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모호함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생각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상대성으로 타협의 지점을 발견해내는 방식이죠.

많은 진보적인 우리 나라 영화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해내려 했습니다. 편견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조명과 이해를 통한 접근, '박찬욱'이 만든 '모호 필름'을 그 상징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나라에 보수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회 통합과 조화를 시도하려는 노력들이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뉴라이트'가 제작한다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계획에 의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조화보다는 갈등의 소지를 더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작품들이죠. 그 생각에는 선과 악에 대한 선명한 이분법이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이스트우드'역시 모호함 보다는  선명함의 이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확실하죠. 그러나 이스트우드의 이분법은 한국 주류 보수의 이분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그건 단순히 이념의 문제로 볼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이스트우드'의 선과 악은  생각이나 이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후에 발생하죠.

 예를 들어 미국에서 많은 공화당원들이 제 3세계 이민자들 자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 이스트우드는 이민자들이 정착한 후 그들의 삶에서 선과 악을 발견합니다. '그랜토리노'에서  그는 낯설은 이민자들과 점차 문화를 이해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그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예의 바른 젊은이들이 바로 올바름이자 미국 미래의 희망입니다.  버릇없는 미국 토종 젊은인들보다 오히려 제 3세계 성실한 이민자 젊은이들을 이스트우드에게는 '선(善)'이고 진정한 미국의 국민입니다.

반면에 이런 선량함을 공격하는 세력이 바로 악(惡)이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힘없는 선량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은 폭력을 넘어 무자비하기 까지 합니다. 단순히 조폭이나 깽들에게 한정되어 있는것도 아닙니다. '체인질링'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 주류 보수에겐 절대선이나 다름없는 공권력조차 잘못되어 있으면 이스트우드에게는 공격받아야 할 악의 세력일 뿐입니다.

결국 이스트우드에게 사라져야 할 악의 세력은, 출신과 상관없이 선량한 자에게 힘의 우위를 무기로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제 생각에 이스트우드는 이런 생각의 가치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외된 자들입니다. 그 소외가 낡은 생각과 다른 문화적 전통을 고집하는 생활 방식에서 이루어졌더라도,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치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자들의 권익을 위해 당당히 일어나 싸울 줄아는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

가족에 대한 개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밀리언 달라 베이비'의 '힐러리 스왱크' 가족이나 '그랜 토리노'에서 '이스트우드'가족이나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관계는 그에게 가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트우드'는 이게 진보적인 시대가 가져온 폐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것을 헤쳐나가는 개척자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그랜 토리노'에서 보여준 유산 분배 방식을 보면, 단순히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보다는 인간 관계를 통해 싹수가 보이는 자들에게 맞추어 기부하던지 물려줍니다. 한국의 보수가 가족,혈연관계 속에서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기에, 상속세 폐지가 보수의 정신처럼 표현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이스트우드의 문제제기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 생,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여든살이 된 이 시대의 진정한 영화인.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귀감을 보여주는 그의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생각들이 한국 사회 보수주의의 정립과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보기를 바래봅니다.

-퍼온글-

★★★★★★★☆☆☆ 

2009.01.29

http://www.cyworld.com/8684137/248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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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김대식

그가 만진 자 - 열매 이야기

사람이란 자기가 의미를 부여한 것에 가치를 둔다.
그래서 성화란 결국 자기가 자기 외에는 믿을 것이 없기에
자기의 믿음을 부여한 자기를 만지고 자기를 개선시킨 그 자기에 대한 집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령이 아무에게서의 손을 타지 아니한
성령 자신만의 손으로 만진 창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 성령은 십자가 라는 어떤 인간도 흉내낼수 없는 유일한 창조의 기준이요
사랑의 기준인 십자가로써 성령만의 열매를 도출해 낸다.

바로 죽음으로써 잉태한 열매이기에
죽음의 방식이 아닌 잉여는 모두다 거짓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철저하게 단절성을 띤 노인네가
유독 한 어린청년인 이방인 남자에게 비록 남자이지만
정작 외부의 단단한 껍질을 깨지 못하고
낙태 위기에 처한 연약한 남자청년을 보고

자신의 죽음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만의 기준을 그 소년에게 부어 넣기로 마음을 먹는다. 즉 지독한 편애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또 상대적으로 다른 이방인의 또래 청년들에게
비록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 살지만 전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방인의 청년 깡패들과의 대조성을 일방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즉 지독한 미움으로써

드디어 자신의 모든 것을 지독한 편애의 이방인 한 청년에게 부어넣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어떤 누구도 이 창조성에 방해를 하지 못한다.

의미를 부여한 이상 만만치 않는 그 방해성도 극도로 달한다.

그리고 이 노인네는 그 창조성의 최종적인 마지막 손길로
이 청년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 창조성에 이 청년은 철저하게 소외 시키면서 말이다.

바로 열매란 죽음으로써 드러난다.

어두움의 그림자도 걷히도록 만들고

애송이 신부의 성화론도 극복을 하면서

정작 열매란 자신의 목숨 조차도 담보로 걸면서
잉태해낸 유일하고 또 어떤 다른 첨가물에 필요없는
완벽한 완료가 미래의 모든 안식까지
부어넣으면서 현재를 쳐들어 와서 이루고마는 것이다.

늙은 나무는 자기 열매를 알아보고

자기 열매는 자신을 만진 그 늙은 고송의 희생의 죽음을 안다.

죽음만이 유일한 관계에서 배태해낸 부정할 수 없는 잉여이기 때문이다.

출발이 결국 달랐던 것이다.

나무에서의 출발인지?

아니면 열매가 열매를 맺는 기형아들인지? 나무 없이 가지가 가지를 맺다니 그러니까 악마짖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억지로 잉여를 맺을려고 하니 불속에서 죽음속에서 거짖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목자의 음성은 늑대들에게는 지독한 소음일 뿐이다. 지독한 구세대의 영감탱이

(요 10:1,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개역)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요 10:5, 개역)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6, 개역)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 10:7,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개역)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9, 개역)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개역)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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