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2008)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6027


줄거리

전 인류가 눈이 먼 세상...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
평범한 어느 날 오후, 앞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차도 한 가운데에서 차를 세운다.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 준 남자도, 그를 간호한 아내도,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도,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도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이상현상.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하고, 세상의 앞 못 보는 자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인다.
그리고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는 앞을 볼 수 있는 한 여인(줄리안 무어)이 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병동에서 오직 그녀만이 충격의 현장을 목격하는데...

2008년 11월, 충격적인 상상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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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 - 김대식

이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뭐 하긴 서양 영화들이 워낙 성경컴플렉스라서)

출애굽 이후의 광야 이스라엘 즉 광야교회와
그 광야 이후의 구약이스라엘 전체 역사와 너무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모세 혼자만이 유일하게 눈을 뜬자로써
이 여인은 모세처럼 구원자 아닌 구원자 역할로 떠맡겨지게 된다.

그런데 모세는 봐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만난 유일한 자로써(눈뜬자로서)
광야 이스라엘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의 잔인한 모든 면들을 말이다.(곁으로 가장 가난하고 나약하고 미약하지만 가장 악마성이 다 드러난다. 물론 부요하다는 인간은 부요해서 가리우는 것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이런 들추임을 당하지 않는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할례 당하는 부끄러움의 수치를 도려내는듯이 모든 민족을 대표해서 할례당하는 것이다.)
(우상숭배, 간음, 마귀의 광야 3가지 경제 종교 정치를 통한 인간의 자아의 하나님 됨, 오늘날 이 영화보다 더 실감나는 곳은 교회다. 우리교회도 예외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더러움이란 더러움은 다 봐야 한다. 뼈저리게 실감이 날 정도로 현실적이다.)

도대체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말이다.
하나 하나 그 현장 속으로 고고 고고 하면서 그 현장의 목격자로써 남아야 한다.
그리고 원치 않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림의 현장을 모세 또한 같이 격어야만 한다.
아니 도리어 하얀 소경(소경 자체가 어두움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하얗다 라는 것 밖에 안 보인다, 유사품 빛? 유사품 광명?) 속에서만이 들추어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가난 궁핍 연약함 속에서
더욱더 잔인한 인간 속의 악마 하나 하나를 만나야만 한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 시켜놓은 내용처럼
하나 하나 벌겨벗김을 당하는
껍데기 수치를 한꺼플 한꺼플 벗길때마다
그 악마성의 배후에게 깊이 다가가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세상의 문화도 이제 현대는 구약을 나름대로의 해석을 비스무리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교회의 목사 보다 훨씬 낫다 라고 할 정도로?

방금 이 전에 본 지구 최후의 날도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가망없다. 인간의 손에서 지구를 구원시키고자 하는 외부의 생명체 개입.

그런데 웬걸 항상 새언약인 신약에 와서는 한결같이 마귀가 심은 메시야 사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 나라 라는 새생명의 삶 운동 펼치는 놈들의 주장과 같은 식이다.

즉 희망이다.

인간이 희망을 본 이상은 아무리 이전것의 과거가 죄악적이라도
그 죄악을 만회할 희망의 진화가 남아 있다는 주장
근육을 안 사용해서 그렇지 사용만 하면 새롭게 된다는 주장은 이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역시나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이것을 마치 새언약인냥 떠벌리고 사기를 치는 모습은 이 세상 교회와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새것이란 무엇일까? 새것이다, 라는 의미는 곧 새영인 성령과도 연관된다.

요즘 모든 인간들은 이 새것에 대한 해석을 한다.
새것이 없으면 죽고 미래는 없으며 멸망하며 심판하며 희망없고 절망 뿐이다 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조차도 새 것에 대한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다.
새 것이 뭘까? 새로운 마음이 뭘까?

물론 이 영화를 섬기는 행함, 봉사실천의 희생정신이다. 곧 사랑이다.

이 사랑에 대한 해석을 겨우 끄집어 내는 방식들이 이런 내용으로 채운 것이다.
성경을 흉내 내어놓다가 결국은 자기들의 숙제인 인간 하기나름이다 라는 식의 인간숙제로
그래야 구원 받을 값어치를 한다는 성화론의 원리 그대로이다.

성당 안의 인물 조각상들의 한결같은 하얀 눈가리개들은
마치 구약 이사야 1장의 이스라엘을 더러버서 꼴보기 싫다고 안보겠다고 안듣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내 마당을 밟지 말라는 구원단절의 그 차단을 보는 것 같다.

자 이제 모세만이 본 그 구원단절인 차단성을
막힘담을 헐어버리듯이 뚫어야할 사명을 지닌채
인간의 숙제를 홀로 담당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개혁주의 설교와 같다.

이제 작은 예수로써 주변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자의 사명을 담당하라는 것이다.

더욱더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마치 한국영화 밀양처럼

용서 받아야할 대상이고
구원 받아야할 대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조리 모든 인간을 다 눈 멀게 했건만
눈 뜬 자들 보다 더 몇천배나 악랄한 짖만을 골라서 할 수 밖에 없는
육의 본성을 도리어 눈이 가리워졌다는 이유로 더더욱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어쩔수 없다는 핑계를 정당화 하면서 말이다.

꼭 목사들의 핑계와 같다. 목사인 나를 힘들게 했으니
교인들을 강간해서라도 목사인 자신의 목사됨을 추구하겠다는 권력의 교회를 마치 칼처럼 마구 마구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교인이니 하나님 당신은 빼앗을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왕을 뭣도 모르고 세운뒤에
그 왕에게 강간 당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김 당하듯이 사망의 왕노릇을 이스라엘은 격어야만 했다.

이제 그 왕 노릇을 이런 희망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똑같이 강간을 하는 우상숭배의 거짖영을 이 영화 또한 톡톡히 그 값어치를 하고 있다.

새언약에 대한 해석
구원에 대한 해석
사랑에 대한 해석을 이 영화가 얼마나 엉터리로 하고 있는지를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짖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적나라하게 예수님이 불뱀의 모습으로 나무에 달려
너의 불뱀의 모습을 다 까발리겠다는 십자가의 사건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예수님의 숙제 하심만 그 십자가의 사건만 바라보게 된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소경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물론 당연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예루살렘 도시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어린아이의 찬양 외침, 시각이 없다.
또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소경의 외침도 없다
또 동시에 말라비틀어진 무화과 나무(종말)도 없다.
고로 진짜 어두운 권세인 죽음의 실체와 전쟁을 벌리시는
젖먹이를 통해서 거룩한 피 전쟁이 없다.

그저 인간이여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 라는 트릭만 난무하다. 아무리 성경 흉내를 내어도
이 눈먼자들의 도시는 예루살렘 도시 보다더 더 배불러 터져있다. http://crosslamb.tistory.com/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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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눈먼 자의 도시 (Blindness)

2008-12-08 17:40:06  이름 : 이근호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해냄 출판사)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줄거리]

복잡한 대도시의 네거리.

신호가 왔음에도 맨 앞에 있는 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졸지에 일본인 운전사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그가 접촉한 모든 이들, 친절을 가장한 차 절도범, 치료를 했던 안과의사 등등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해버린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백색의 바다’ 뿐이다.

하얀 스크린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질병이 삽식 간에 그 도시에 번진다. 행정 당국은 크게 당황하고 안과 질환의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도 원인 모를 실명 사태가 일어난다. 당국은 군을 동원해서 실명한 자들을 따로 격리시킨다.

이때부터 실명한 자들은 생소한 장님의 생활을 해야 한다. 전에는 각자 독특한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이제는 장님이라는 점 외에는 모든 차이와 차별이 인정되지 못한다. 남과 여, 노인과 아이의 차이도 무시된다. 그동안 남의 눈 병을 치료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 가정도 당국의 명령에 따라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자 주인공인 안과 전문의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돌보아주기 위해 당국을 속이고 남편의 곁에서 그 수용소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이로서 그녀는 유일하게 ‘보는 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용소 내에서 어떻게 집단생활을 평화롭게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세 병동으로 짜인 수용소에서 제 3의 병동이 다른 병동에 대해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두머리에게는 유일하게 권총이 있기 때문이다. 골고루 주어지던 시 당국의 급식이 수용소 자체에서 일어난 새로운 질서 개편으로 인하여 제 3병동의 두목이 다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도 눈이 멀어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직 바텐더였던 그가 권력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은 것은 그의 곁에 애초부터 장님이었던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두움의 세계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만큼 숙달되어 자였던 것이다. 실명의 세계에서는 장님 되었던 자가 월등히 유리하다. 거기에다 권총까지 갖고 있는 자와 합세했으니 이는 곧 생명 여탈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달될 장님과 권총의 힘으로 그들은 모든 양식을 독점해서 다른 병동,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가의 귀금속을 받고 되팔아먹는다. 결국 사람들이 내놓은 보석마저 고갈되자 급기에 여자를 상납하기를 요구한다. 여자를 내놓지 아니하면 그 병동에는 급식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내를 가진 남편과 아내들은 심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아내를 폭력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편들과, 거기에 비해서 양식을 구해서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윤리 도덕은 나중 문제라는 여성들의 주장이 맞서지만 결국 남편들도 양식 앞에서는 무력하다.

유일하게 눈을 뜬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들어가서 한참 여자를 탐하고 있는 두목의 목을 찔려 죽여 버리고 그 와중에서 불이 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들 황급히 수용소 마당으로 나온다. 평소에 나왔다가는 군인들이 총을 맞게 되지만 왠지 조용하다. 의사가 아내가 육중한 수용소 문을 열고 보니 이미 그 도시의 모든 인간들이 어느 누구랄 것이 없이 장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수용에 수용이 불가했던 것이다. 수용소 안이나 수용소 밖이나 보이는 자는 오직 의사의 아내뿐이었다.

도시는 더럽게 황폐해졌다. 먹을 것을 찾아서 사람들은 더듬거리면서 슈퍼마켓을 강탈하고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음식 창고를 발견한 의사 아내는 수용소에서 가깝게 지내는 몇몇을 데리고 옛날에 살았던 자기 집을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정성껏 그들의 손발이 되어 수발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못보고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기에 상대방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들의 서로의 마음만 점검하면서 하나가 되어 간다. 마음만 따뜻하다면 다른 조건들은 상관없었다. 이 진리를 찾기까지 그들은 눈이 멀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맨 처음 장님이 되었던 그 일본인 남자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절망에 빠져 있다가 일본인 남자가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보며 살날이 올 것이라고…


[평가]

감독은 강력한 메시지를 모호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이가 눈이 감겨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자가 행사해야 할 의미와 사명에 관한 것이다. 본인 아니게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된 여자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 남편만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수용소에 잠입했지만 막상 남편을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님들에게 대해서도 동일한 봉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즉 섬겨야 할 자를 정하는데 있어 막상 당해보니 자신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고 상황이 도리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 수많은 장님들을 다 수발하기에 너무 힘들기에 그녀는 차라리 자신마저 장님이 되어 섬김 받음과 섬김 해줌의 관계 자체에서 해소되어버릴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녀의 봉사는 단순히 장님들의 일상생활의 어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의 집단에서 필히 발생하는 권력의 횡포마저 결정적으로 제거시키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감독은 외치고 싶은 것이다. 권력자들이 지배하기 위한 권력을 창출하는 일을 하고 일반 대중들이 생존이라는 점을 들어서 거기에 순복하는 현실들은 모두 자신들이 영적 장님이기에 발생되는 사태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 중에 영적으로 제대로 세상을 보는 자가 있다면 그 권력 창출의 무모함과 억지를 근원적으로 제거해 버리고 자유를 향하여 탈출할 것을 계시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 먼 자들에게 있어 눈 뜬 자는 공연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다. 다수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도 눈 뜬 자와 같이 눈 뜨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눈 뜬 유일한 여성 지도자에게 억매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가 다 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곧 그들로 하여금 눈 뜰 수 있다는 희망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절망적인 미래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기적을 만들어 낸다. 맨 처음 영문도 모르는 채 장님이 되었던 그 자가 다시 세상을 보게 되므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 남자에게 일어날 기적이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온 누리에 퍼지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소식은 곧 자신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들뜨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전 15:20-22)


(평가)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마치 기독교 교리와 연관된 상징과 비유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되어 있다.

즉 소경된 자이기에 자신의 누리고 있는 행복과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소망의 가치를 모르고 권력과 재물로 사람의 가치를 평하는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으로 눈이 열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가치들은 그저 ‘뭔가 보인다. 는 이 극히 단순한 행복과 다행함과는 족히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영화 마지막 근처 장면에서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니 모든 거리의 장님들은 그 장대비를 맞으면서 은혜에 잠겨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눈을 뜨고 살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대수롭지 않는 작은 일 속에 그토록 고귀하고 숭고한 행복이 덩어리째 담겨 있었던 것을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영적으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절망을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복음적인 색채를 비쳐낸다. 참으로 신의 심판을 궁극적으로 믿는 자라면 손에 만져지는 당장의 무서운 저주의 형벌보다는 차라리 용서를 구하게 된다. 즉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요구했던 제자들의 요청을 예수님의 거부하시고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말은 성경은 귀하게 담아 낸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섬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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