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5 누구든지 ?   04.08.01 23:04

어느 장로님이 나에게 이 구절을 어떻게 보아야  하냐고 전화로 오늘 물어 왔다. 사실 토요일날 처음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나의 글을 읽고 너무 기존 교회와 다르다는 생각에 나에게 신학을 했냐고 물어왔다. 신학은 한 것은 없지만, 복음은 신학자들의 손에만 쥐어진 것이 아니기에 너무 기대치 말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질문한 그리고 답변의 내용을 올리고자 한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고 했는데 누구든지가 모든 인간을 두고 말하냐 라고 물었는데 나는 아니다고 했다. 바로 밑의 구절을 보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로 가른다.

왜 이 질문을 장로님이 했을까? 장로님 정도면 더군다다 말씀에 고민하는 자면 나보다 더 깊이 이해했어야 할 사람인데? 그런데 그 질문은 애절하다 주님이 지금 그를 흔들어 놓기에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다 흔들리는 것이다.

솔직히 감리교가 자유주의 다원주의에 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장로님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실상 자유주의든 다원주의든 보수주의든 그 속 내막은 같다. 결국 구원에 대한 야망을 못 버린다.

그래서 누구든지 라는 그 문자에 자기가 포함 시키고픈 자와 그렇지 않는자 라는 경계선 속에서 자기 를 찾고픈 것이다. 실상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냐 나만 구원 받으면 양심상 찔린다. 어떻게 하면 모든 자가 구원을 받냐 라는 걱정을 예수님 보다 더 앞서서 하게 된다. 오죽하면 누군 선택이고 누군 버림이고 불공평함을 하나님보다 자신의 의  공의  정의감에서 외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답변을 아주 간단하게 한다. 매정하다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토기장이에게는 권한 있지만 왜 그렇게 하냐 라는 의문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힐문할 자격 조차 없다고 한다.(롬 9:20)

(살후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라는 구절이 있다. 즉 앞의 모든은  모든 인간 한명 한명을 두고 말하고, 뒤의 모든은  차별이 없는 신분 차이, 성별 차이가 없는 무제한 무조건성을 두고 말한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즉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차별없이 믿는 자들 모두를 조건 안 따지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조건에 교회의 조건에 맞는 예수님만 알기로 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예수님만 골라서 선택하였다. 주님의 선택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교회가 자기 믿음으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있다(선택 당해야 할 자가 도리어 주객전도가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모두 다 예수님을 자기 입맞에 맞추기로 한 것이다. 이 요 3:15절로 무수히 사기치는 그 현실 앞에 정작 예수님은 단 한번도 교회의 머리가 된 적이 없다. 오로지 교회는 자기 종교성 열성과 뜨거움만으로  주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주를 죽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당연시한 교회 우상 숭배에 빠져 있다. 이제 교회는 예수님과 나의 독대 관계에서 섬기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예수님 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원수로 자리 잡았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그런 흐름으로 빠졌다.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자유의지로 신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워낙 인지도가 높은 이름이라 그 이름은 여전히 남겨 두고 그 속 내용물을  자기 유익에 맞게끔 조작해 버렸다. 조작된 예수, 조작된 선택, 조작된 예정론 속에서 우리는 척박한 종교 속에서 오늘 하루 살아남기를 시도 하고 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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