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의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정용섭 목사(판넨베르그 중독자)의 글과 평가를 보고서 적은 나의 생각이다.

십자가란 필연도 우연도 아니다

십자가야 말로 인간을 가장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도출해 내고야 마는 신학조차도 철저한 악마적인 발상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고방식에서 운운되는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는 것들은
그것을 통한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과 구원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을 십자가가 규정한다. 어떻게 인간이야 말로 악마임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사건이다.

종교가 왜 악마적인가를 밝혀는데 십자가가 아니면 그 거룩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겨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종교를 통한 구원을 길을
십자가는 종교의 실체를 다 들추어냄으로써 비로서 모든 구원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써
이제 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준으로해서 죽음을 완료로 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던 것처럼 그것도 항상 성경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죽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항상 성경적인 명분을 내세우는 자들의 손에서 죽어야 하는 그 죽음을 우리의 미래로 확적지은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누가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갈 수가 있겠는가?

결국은 다 거짓말들이다. 예수님의 죽음의 근처에도 못가보고
예수님의 쓴잔과 고난의 단 1초라도 경험한 적도 없는 인간들이
무슨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면서 지식유희를 노닥거린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1초의 경험을 했다고 우겨도
다시 그 1초의 경험을 해보라고 해도 우리는 베드로 보다 더 격렬하게 욕을 하면서
도망치게 될 것이다.

이러면서 필연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어떤 똘마니는 이런 십자가 마을의 행태를 보고 언어의 이중성으로 말장난 친다고 핀잔을 나불거리기도 하지만 정작 그런 말장난으로 사기치는 그런 작당들 속에 있어본 나 로써는 몇배나 더한 놈들이 영적인 강간으로 유린하는 백태를 보니 기가막히다.

즉 자기의 들보는 빼낼 생각조차도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는 기가막히게 잘 찍는 그야말로 족집게 도사들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여이 하나님의 저주를 다 뒤짚어 씌워 가면서 법적인 명분을 다 갖추는데 성공했다.

바로 그런 완벽한 알리바이 형성을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로써 유발케 하신 것이다.

하나님 마저도 자기들 손으로 죽인 인간들이
또 그것을 라멕의 찬양처럼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랑하고 떠벌리는 인간들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마다하지 않고 서슴없이 하고야 마는 그 저력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야말로 인간 자체가 지옥 그 자체로써 자신을 선악으로 똘똘똘 뭉쳐 있다.
자기를 인정하면 천국이요 자기를 인정치 않으면 지옥을 뿜어낸다.

자기를 인정하거나 구원케 하는 것들이면 신학이든 학문이든 교회든 뭐든지 마다 않고 필연이고

자기를 인정치 않으면 하나님이든 예수든 성령이든 교회든 십자가든 뭐든지 우연으로 돌려서 빨리 빨리 시체 치우듯이 쓰레기 장에 버린다.

바로 이 쓰레기를 확정지은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쓰레기다

모든 인간들의 심판을 확정지었지 구원을 확정 지은 적이 없다.

그리고 모든 육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밖는 일만 전담하시는 성령을 확정 지었다.

정작 성령의 열매는 이 심판에 딱 맞는 자들만 열매로서 양산이 되고
그런 자들은 주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그러나 이 확정된 심판을 거부하는 자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동행자가 없는 허상만을 붙들고 있음이 불 속에서 확인이 된다.

모든 인간들을 심판의 불 속에 집어넣는 이 십자가야 말로
자기백성을 가려내는 방식이다.

구원할 필요없이
불 속이, 십자가의 죽음 속이, 심판의 불 속이
도리어

말로 형용 못 할 기쁨과 감사의 세계인 줄 우리는 두려운 공포 때문에 눈이 어두워 알지 못하고

그 대신에 십자가의 신학과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면서 우리의 공포를 대신 카바하면서
의미 없는 육의 소욕의 삶을 정당화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해서 구원 이후의 삶이니 하면서 무화과나뭇잎으로 온갖 거룩한 포장지로 칭칭감아서 남들에게 허물이 들키지 않도록 더더욱 온 몸을 칭칭 감아서 스스로 갇혀 버리는

자아의 바벨탑의 노예로만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은

죄의 잉여로써 사망의 죽음의 권세에 갇혀버리는 우리이기에

다시 산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그가 백날 십자가를 운운하고 십자가의 필연성을 주장해 본들

사기일 뿐이다.

십자가의 지혜는 정작 그렇게 필연을 철두철미하게 주장하는 그 자를 비켜가고
십자가에 대해서 아예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들어본적 조차도 없는 창녀 강도 매국노 세리를 통해서

십자가의 지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고도 넉넉하게 7광주리? 12광주리 남는
어떤 방해에도 전혀 훼방조차 되지도 않는 그 여유로운

함께 죽어주시고 함께 살아주시는 그 자유 앞에서

백날 십자가 신학으로 완전무장해서 십자가를 외쳐본들
오히려 가학적인 성적 쾌감을 즐기는 중독자일 뿐인 것이다.

십자가야 말로 어떤 인간에게도 포착되지 않고 스스로 움직여서
모든 인간을 찌르고 다닐 뿐이다.

심심해서 할 짓 없는 인간들이 학문적인 유희로 실로암 소경의 어두움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예수님에게까지 장난을 쳤다.
그 짖 말고는 할게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 짖을 말고도 할 게 없는 자들이 교회요 목사다.

그들의 성경공부니 뭐니 하는 것들은 권태로움의 장난질일 뿐이다.

그 장난 중에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면서 장난치다가 그 장난도 너무 지겨워서
가끔 솔직하게 자기도 모르게 내 뱉게 된다. 우연이라고 십자가는 우연이라고

맞다 장난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맞짱 뜨며 더 장난에 몰두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필연이라고 십자가는 필연이라고
여전히 할 짖 없는 인간들이 그 장난에 맞짱뜬다.

자 이런 게임 조차도 결국 중독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저들도 어쩔수 없는 게임의 잉여성 때문이다. 그 댓가를 염두한 맞짱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소용 없는 것이다. 죄인만을 부르러 온 것이다.
죄인에게만 실상이지 의인들에게는 하나의 유희요 장난질일 뿐이다.
그리고 십자가 구원 이후도 장난질만 할 뿐이다.

이것을 확 찢어버리러 온 것이다.

우리는 찔리는 대상일 뿐이지
십자가를 빙자해서 남을 찌를 입장이 못된다.

도리어 찔릴 때 마다 허걱 거리는 그 탄식으로 인해
그 탄식을 듣고 실행하시는 영적인 전쟁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적인 전쟁 외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여호와께 속한 전쟁을 기여이 나의 전쟁으로 바꾸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공포가 오기 때문에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일하심을 볼 여유를 입장이 못 된다.
그래서 시체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죽은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요 종말의 열매이다.
열매 아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채로 옆에 서있던 파라오 왕이 작살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심판과 저주와 죽음은 곧 버림은
인간들과 마귀의 합작품으로서 도저히 될 수 없는 그야말로 멀리하고픈 것들이며

도리어 십자가의 구원이야 말로 인간과 마귀의 합작품이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자기의 손으로 찔러 죽이면서 까지
십자가의 구원을 창조해낸 신들이다.

그리고 대량양산의 공장으로 막 찍어내기 시작한다.

인류를 위해서라면 자기목숨까지 다 버리는 희열을 느끼는 판국에 그것쯤이야 못하겠는가?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창조해 낸다면 그 자가 유일한 메시아 이다.

정작 자기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그 죽음의 심판을 달개 순종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누가? 자기의 선행을 남 다 주고 그 남의 허물을 대신 뒤짚어 써서 지옥에 가겠는가?
다 천국간다는 계산아래의 노림수로 의도적인 행위를 나타내지

정말 아무 계산 없이 하는 자는 없기에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필연이라고 우겨본들 사기일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심판은 오로지 성령의 몫이다.
목사도 심판 대상일 뿐이지 심판할 권리나 행사할 재간이 없다.

다만 심판의 증거인이다. 나 이런 심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성령이 배태한 열매인 심판의 잉여품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2009-01-31 00:57:52 조회 : 189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읽으시는 분들의 소감 부탁 드림니다)  이름 : 김영완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대구샘터교회목사, 서울샘터교회목사 정용섭

오늘 나는 자칫 시빗거리에 휩싸일지 모를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미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절대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 토를 단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근본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을 포기하면 광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인류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이 자리에서 “그게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지는 마시라. 믿지 못할 일이라도 성서가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인가, 그의 부활인가, 그의 사랑인가, 그의 행위인가, 그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그의 인격과 그의 운명인가?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무엇을 믿는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 예수 자체를 믿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믿는가? 위에서 무질서하게 나열한 질문들의 무게는 여기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

다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의 역사 문제로 돌리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만약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의 과정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인류의 구원할만한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종의 역사 결정론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서 말석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역사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게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그런 걸 예정, 또는 섭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정론과 섭리론은 역사 결정론과는 격을 달리한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우연이다. 여기서 우연이라는 말은 주사위처럼 여러 가능성 중에서 어쩌다 선택되었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열려진 사건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예수에게는 이미 출생부터 십자가가 결정된 게 아니라 열려져 있었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때 이런 게 좀 까다로운 부분이다. 원칙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지만, 또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이미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이 세상이 이런 필연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오히려 우연 안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게 바로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고 능력이다. 이런 우연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는 긴장이 작동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역사의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오늘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건 단지 신학적 유희에 불과한 걸까? 이 문제를 좀더 실감하기 위해서는 2천 년 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아무도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철저한 실패에 불과한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천천히 인식되고 고백된 것이다. 전혀 주목받지 못한 사건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오히려 경원의 대상에 불과했던 사건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으로 부각되었다는 이 역사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오늘도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민감하게, 깨어있는 영성으로 살펴야만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기독교는 구원에 가까운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설명해야하는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더 설명하자.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인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종말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길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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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규 현   09-01-31 09:01  
본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필자가 “만약 이 자리에서 ‘그게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지는 마시라.”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불경이나 유교 경전을 통하여 설명할 것인가? 목사로서 언어도단이다.

2. 필자는 “내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우연이다.”라고 하였다.

성서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필연뿐이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눅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3. 필자는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고 능력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인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종말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필자의 궤변이다.
 
역사란 인간의 사상일 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다. 따라서 역사 결정론이란 용어가 적절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묵시일 따름이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따라서 우연이 될 수 없다.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언약하고 있다. 해당되는 구약은 다음과 같다. 사53장, 단9:26, 시22장, 슥12:10, 창22장이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이미 기록된 대로(마26:24) 응하시기로 하셨다(마16:21, 막8:31-9:1,눅9:22-27).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 주님의 언약의 실현의 말씀을 바울은 십자가의 도라 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도에게 역사(役事)하고 있다.(갈2:20)

소위 목사라는 자의 입에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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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09-01-31 09:49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필연을 우연으로 바뀌어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지만 가룟 유다 자신은 유의미하고 예수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용섭 씨는 자신이 하는 것을 유의미하게 하기 위해 다른 예수상을 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나 정용섭씨에게 있어 십자가 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정용섭 씨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들은 십자가 피를 기피합니다. 그 이유는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신학과 목회와 행함이 무의미하게 된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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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진  09-01-31 15:11  
여기 코끼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코끼리를 빨간색 종이컵에 넣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파란색 종이컵에 넣은 것이 옳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코끼리가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설치던 그 남자를 밟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남자는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코끼리가 당신을 밟아 죽인 것은 필연입니까, 우연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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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구만  09-01-31 19:26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바위 이것은 동시에 시온에 둔 귀한 머릿돌이니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엄격하게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 하신다.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음에만 계시 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자신을 숨기신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선포 함으로 그는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선포 하신다. 진리로 부터 나온자는 그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누가 진리에 자신의 근원을 갖고 있는가 누가 하나님 자신을 보는가 오히려 그로 부터 피해 가기위해 셀수없는 수 많은 변명을 늘어 놓지 않겠는가.(중략) 우리가 진리의 기적에 대해 열려있지 않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 날수 없다면 진리는 기적 없이 단순히 자신의 내재적 논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심판이 된다. 믿음 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이라고 그가 일컫는바 곧 유한한 목표를 추구하는 온갖 뜀박질 가운데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시온의 한가운데 이 지상적인 하늘 안에 자신이 영원한 자 로서 찾아 구해지는 바로 그 곳에 은혜로 자신을 찾게하는 바로 그 영원한 분 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정 하셨다는 것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믿는자 만이 이 부딪침과 걸림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믿지않고 "추구하는자",그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한 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것을 거두어 들일 뿐이다. 그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내달려 가는 사람 모양 부딪치게 된다. '인식의 위기''종교의 파국'이 돌발된다.    - 칼 바르트 '로마서 강해'중에서-

 강구만  09-01-31 20:13  
정용섭씨 자신에게 포착 되지않는 십자가 이기에 개념이고 종교 일뿐입니다.
진리를 찾아 떠도는 구도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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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득영  09-02-01 22:12  
믿음이 없는 목사가 교회에 나오는 현대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아이 돈 노우'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필연과 우연은 이 양반처럼 사용이 되면 안 되고, 주님에게는 필연적인 사건이,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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