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필연도 우연도 아니다 2

아래의 기사 내용을 보고 문뜩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생각에 제목을 붙여보면 할례가 아벨의 제사(십자가)를 말한다고? 정말?

할례를 율법이 아닌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해석해서 뒤에서 소급하여 구약을 다시 해석하게 되면

할례란 몸에 칼을 대는 죽음의 참여로써 육의 연결의 단절과 생산의 거부이다.
(칼을 대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할례를 지키면 지킬수록 모든 인간은 칼 댄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칼로 죽이는 가해자로 등장하게 된다. 라멕의 찬양처럼 가인의 제사처럼, 아벨의 제사가 나타났기에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가인의 죄의 소원인 잉여이다. 무조건적인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이유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듯이)
문뜩 아벨 제사가 생각이 났다.

즉 할례란 지킬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육의 출발과 행함의 거부인 자기부인의 여부임에도 불구하고)
덮쳐 오는 것인데. (연합=세례) 덮쳐와도 자기 유리하도록 해석 되는 의미가 아니라, 정작 도망칠 수 밖에 없는 비연합의 의미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덮쳐온다는 것이다.(아벨의 믿음의 세계가 덮쳐오는 상황, 아벨이 본 미래, 완료된 미래)
그것은 베드로가 일치하겠다고 다가오는 것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사람의 일의 연합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의 연합을 생각지 않는다고 욕먹고
또 부활에서 마르다가 부활교리로써 자신은 연합 되었다고 우기지만
정작 예수님이 부활이다는 것에서는 철저한 단절성을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서 보여준다. 즉 인간은 부활조차도 탐욕의 지식으로 채운 것을 그들의 교육의 결과물인 마르다를 통해서 드러낸다.

아무튼 할례가 왜 아벨의 제사인가?

죽음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제사이기에 죽음으로 말하고 의인은 주 안에서 다시 사는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즉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예수님이 다시 잇고 그 흐름은 전혀 중단되거나 방해를 받거나 멈춘적이 없는 영원하다는 것을

도리어 그 영원함을 안색이 변하는 가인의 제사를 통해서 더욱더 부각 시키는 것이다.

결국 아벨의 제사가 믿음의 제사인 이유가?
가인의 제사를 통해서 죽음이 아닌 안색의 변함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만이 완료이고 예수님의 죽음만이 완료인 이유가?
인간들의 모든 내막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 고정화된 우상들의 탐심들이 다 들추어지기 때문이다.

십자가 마저도 필연화 시켜본들 십자가는 고정되지 않는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부지런히 죄인과 원수를 만들어내고 그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사랑을 확정지었다. 그 사랑이 움직이는 이상 인간은 포착할수 없고 필연화 할 수 없다.

필연화 하는 순간부터 영적인 강간으로인한 매춘부 활동과 창녀촌으로 전락하여
포주로써 쾌락의 유희의 잉여로써 돈이라는 재물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로 공인된 창녀촌인 이유가 그러하다.
지친 영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집단성교로 인한 인생고역을 달래주는 고정화 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 시간을 날려버려도 상관 없는 산 제사인 아벨의 제사가 덮쳐오면
비로소 그들은 안색이 변한다.

십자가를 고정화 필연화 했건만 또 다시 십자가를 뽑아서 우리 자신들에게 들이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인간들의 죄악을 박스 상자처럼 담기 위해서라도 지금도 스스로 바퀴달린 전차처럼 움직인다.

종교적인 거룩한 욕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와서 담아버린다.

아벨처럼 아벨 자체가 상자로 다가와서 가인의 죄악을 미리 담고자 달려온다.
그것을 미리 앞당겨 믿음으로 미래의 완료가 덮쳐져서 드려지는 제사이기에

이것에 담기기를 거부하고자 안색이 변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와서 담아버린다니 말이 되는가? 그래서 나를 죄인 취급하는 제사, 그리고 아벨이라는 죄를 담는 박스, 그리고 십자가라는 박스가 계속 계속 미래에서 온다면 인간은 모두다 안색이 변할 수 밖에 없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바로 할례를 그렇게 다루었다.
할례를 지키면 지킬수록 마음판의 할례를 지킬수가 없어서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다.

즉 율법이란 예수님 혼자 완료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안색이 변한다. 아벨의 제사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영원한 가해자의 자리에서만 있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은 은혜인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은혜로 곧 사랑으로 해석이 되겠는가?

예수님 혼자만이 아벨제사이고 우리는 그 제사에 감사하면 된다.
비록 안색이 변한 가인처럼 그 믿음의 제사를 거부하는 짖인 성화론이든 새생명의 삶이든 하나님나라 운동이든 뭐든지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울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완료를 통과 하지 못하고 그저 불 속에서 다 타버리는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필연화 하는 자는 없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그 죽음을 발생시킨 영원한 가해자로서만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났다.

완료(사랑) 되었으니 너의 완료(사랑) 손 놓으라고 알려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눈 녹듯이 녹는 그 사랑

주홍빛 보다 더 검은 죄를 먹보다 더 검은 자신의 피로써 다 칠해 버리신다.(사 1:18)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롬 8:1)

허다한 허물을 덮어버리는 더 추가할 필요가 없는 완료된 피 로써 말이다. (약 5:20/ 벧전 4:8)

(요 21:3, 개역)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4, 개역)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 21:6, 개역)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7, 개역)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8, 개역)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요 21:9, 개역)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요 21:11, 개역)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 21:1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 21:13, 개역)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 21:14, 개역)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개역)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에게 생명의 세계로 파 묻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완료이다. 십자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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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사를 보고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어 피해를 낳고 그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를 또 양산해 내는 죄악의 잉여

(약 1:15, 개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즉 사망의 권세 이다. 권세란 무조건 이다는 이유도 조건도 없는 지옥의 잉여성을 드러낸다.

결국 유대인들은 지금 다시 나치가 했던 그 행동 그대로 팔레스틴에게 퍼붓고 있다.

바로 이것이 법의 세계이다. 법의 세계란 지옥 권세가 사망의 권세가 어떠한가를 이유도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국의 잉여는 이유도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 마저도 죽였던 이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는
법 밖의 세계
고정화 되고 필연화 된 규범 밖의 세계

바로 움직이고 찾아오고 흘러 흘러서 스며드는 물같이 흐르는 촉촉한 흐물 흐물한 사랑의 세계가 무조건적으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사랑으로서 다가온다. 이것이 유일한 표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악한세대처럼 지옥사람처럼 기적을 또 고정화하고 필연화 해서 요구한다.
구재불능이다.

법 밖의 세계를 아무리 줘도 줘도 입에 먹여줘도 모른다. 나무가 달라서 이다. 태생이 달라서 이다.

염소인줄로만 알았던 자가 바로 양이였고
양인줄로만 철두철미하게 믿었던 자가 염소 였음이

바로 종말(잉여)의 활동으로서만, 외부의 운동력으로서만 드러나는 것이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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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생체실험 ‘나치 죽음의 의사’ 하임 사망

http://news.empas.com/issue/show.tsp/cp_hn/6675/20090206n08761/

한겨레  기사전송 2009-02-06 14:17 | 최종수정 2009-02-06 14:37 

 

[한겨레] 2차 세계대전 동안 생체실험을 통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한 나치의 ‘죽음의 의사’ 아리베르트 하임이 정의의 심판을 피한 채, 지난 92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와 <뉴욕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나치의 마우타우센 수용소에서 마취하지 않은 채 유대인 수용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장기를 적출하고, 심장에 휘발유나 독극물을 주사한 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측정하는 등 잔혹한 생체실험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940년대에 히틀러의 친위대에 들어간 하임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잔학 행위를 저지른 뒤, 종전과 함께 미군에 붙잡혔지만 2년 뒤 석방됐다. 이후, 독일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하다 1962년 독일 당국이 그의 전범 혐의를 포착하고 체포 움직임을 보이자 행적을 감췄다. 나치 전범중 최고 거물인 하임은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를 거쳐 이집트로 갔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타렉 파리드 후세인이라는 가명으로 살다가 1992년 8월 10일 카이로에서 직장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임이 머물렀다는 카이로의 호텔 방에서는 그의 이집트 여권과 거주허가 신청서, 개인 편지들이 담긴 서류 가방이 발견됐다. 호텔 주인은 하임이 나치 전범인줄 몰랐다며, 그가 ‘타렉 아저씨’라고 불리는 가족 같은 손님이었다고 말했다. 카이로의 지인들은 하임이 생전에 아마추어 사진가로 항상 주변 사진을 찍으면서도, 남이 자신의 사진을 절대 찍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하임의 아들인 뤼디거는 지난 90년 직장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카이로에 왔었으며, 그의 임종도 지켜봤다고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뤼디거는 하임의 사망이 확정되면, 하임의 명의인 120만 유로(약 21억원)의 통장 등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나치 전범 추적자인 에프라임 주로프는 보도 내용이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만 하임의 무덤과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그가 죽었다고 확인할 수 없다며, “만약 하임이 처벌 받지 않은 채 삶을 마감했다며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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