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사랑

주님의 해석이 무조건 옳았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 해석은 무조건 틀리도록만 하시는 것이 사랑
(넌 무조건 틀렸다 라고 말해주는 사랑)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07 07:55:59, 이삭도 결국 편애라는 얘기구 관계성이란 말이군요 성화론자들도 이삭의 부분에서 물어보면 또 걸리겠군요 열매론자들이니...  그런데 이어령 비어령이라 이삭의 계보로 야곱이 이어지니 이삭은 그리소도의 모형이고 이삭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주님이 오시기전까진 어차피 다 부분이고 모양이다 하면 할말이 없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수 밖에 없다 왜냐 하면 모세가 율법이었기에 율법도 그리스도의 모형이기에 그렇게 말한다면 이것 또한 할말이 없구요

2009-02-07 08:00:31, 성경해석이란게 영으로 한다지만 결국 이것 또한 낱말맞추이기에 주님 외엔 역시 온전하게 하나도 없네요

주님의 관계성 편애가 덮지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지 말라고 말려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것이니 말입니다

답변 :

인간의 해석이란 정치적입니다. 즉 일치성인 하나를 추구하기 위해서 잔머리를 꾀하는 겁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법을 지켜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자기의 법도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자기 법을 내세우기 위해서 상대방의 법을 야합하는 겁니다.

내 소원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정당화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관심 없고 성경 문자의 소원을 파악했기에(전문가들임) 거룩하라를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거룩하다를 지켜 줄테니 내 소원 이루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의 소원이 뭔고 하니 선악입니다.

그 선악으로 거룩 하라를 성경 속에서 찾아낸 겁니다.

모형론이든 그림자이든 실체가 예수님이다 는 둥은
요즘 왠만한 이단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이야기 안하면 정치적인 유행에 밀려나기 때문에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도 그런 기본적인 지식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정치적인 성향이 남들이 주장하지 않는 특별한 자기들만의 주장이 뭔가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입지를 굳히는 자기 색깔만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 초년생이 회사에 들어가자 마자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일단 선배들의 주장들을 다 듣고 인정해 주고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구축한 뒤에 비로소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이전 까지는 흡수통합의 과정으로써 스폰지처럼 앞선 선배들의 주장을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한 빼고 거르고 삽일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 당시의 이단인 바리새인도 그런과정을 통해서 그 당시의 신학을 구축했듯이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의 성향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이단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바리새인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 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말하면 자동적으로 이단이 아닌 겁니까?

결국은 그 당시에도 성령님 혼자만이 밝혀낸 아무도 그들 바리새인의 마귀성을 들추어 낼 수 없듯이
오늘날도 점점점 진화성을 다 갖춘 기독교의 마귀성을 지적할 자는 성령 뿐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으로 지적하지
누구다나 다 아는 사실로써 지적해 본들
정치적으로 그 부분을 수정해 버리면 그만인 겁니다.

지독한 편애이든 지독한 미움이든 우리 쪽에서는 무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갖춘다는 자체가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성향을 잘못이라고 지적해 본든 무정치적이다는 것 조차도 조건화 되어 버리기에
무정치 또한 정치인 것이기 때문인 거죠.

결국 인간 자체는 조건적인 선악의 인간이다는 겁니다.

이런 선악의 인간을 멸망 시키는 것이 유일한 사랑입니다.

언약이란 이런 선악을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진멸하는 것이
이미 완료 된 채로 더 이상의 미완료가 없이

정해진 바를 이룬 겁니다.

빠져나갈 자가 없습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에
상대적인 비언약은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궁리를 펼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노아홍수를 보고서야 바벨탑을 세울 필요성을 느낀 것처럼 말이죠.

결국 오늘날 교회란 이 종말을 빠져나갈 궁리인 잔머리만 굴리는 곳입니다.
그 잔머리 속에 성화하면 종말 피할 수 있다는 둥
종말을 맞이하더라도 천국은 안심하고 도착할 수 있다는 둥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심판을 빠져나갈 궁리와 잔 꾀와 술수와 속임수를 남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 조차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욕심의 잉여로써 활동할 수 밖에 없고
지옥의 시민으로써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짖이 없기 때문에
그 지옥 나무의 지옥열매 다운 짖만 하도록 되어 있는

지독한 미움을 이유도 없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무 조건 없이 하는 겁니다.


해석이라는 결과와 성과와 실적을 인간은 자아(선악)에 두는 이상은
아무리 바른 결과라고 해도
반드시 뒤 엎어버리는 반대의 양상으로 성령은 일(차이성, 분리, 구별, 삭제, 나누기)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일은 실적 없이도 이미 이룬 채로 일하십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사랑 외에는 답이 없도록 하시고

반대로 사랑 빼고 저들은 행함에 원인과 결과와 답이 되도록 주장하도록 악령을 집어 넣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의 성경이란 행함만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성경 자체가 그들에게 다른 해석을 못하도록 하십니다. 마치 에서처럼 신비롭게 무조건 미워하는 식입니다.

님이 질문에서 그런 결과를 도출해서
주님 외에 없다. 또는 주님과의 관계성으로 이미 완료되고 끝난 문제이다 라고 해본들

인간이란 또 선악과 결부 시켜 고정화 시키도록 되어 있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고정화(자기 소유) 된 것을 또 부서버리는 식으로
흔들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유동적으로(사랑은 움직이는 것) 만들어서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완료한 죽음이 최종적인 잉여로써 결정된 이상

지금 눈에 벌어지는 모든 사소한 것들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도록
늘 사건을 실제상황으로 터트리시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유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덮쳐 오는 그 사랑 앞에
매일 매일 사랑을 새롭게 하는 그 사랑만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리는 것 뿐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뭐뭐뭐 ~~ 아니요  뭐뭐 ~~ 이다.

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만 옳은지를

이 양쪽을 다 누리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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