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은 원래 틀려야 하고 앞으로도 틀려야만 합니다.
옳아야 할 법이 그에게는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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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6 09:16:38,

창 27:1에 보면 눈이 어두웠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적분별력이라 봐야 할까요 만약 영적 분별력이라고 본다면 이삭에 대해  성경에서 그 뒤에 이렇다 할 얘기가 없으니까 180세 까지 영적 분별력 없이 살아 갔다는 말일까요

그것도 주님과의 관계성이니 주님에게 맡기고 궁금해 할일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다가 궁금해서 올려 봅니다

답변 :

(창 27:1, 개역)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2, 개역)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렇게 과다하게 해석을 임의적으로 붙이고픈 이유는 인간이 단어 문자 부호 문자표 마저도 하나 하나 간섭하고 싶고 소유하고싶은 완벽주의로써 불안해서 그런 겁니다.

남들에게 미흡함이 비취어지면 공격받게 되고 그 공격으로 인해 유익이나 덕쌓이는 것이 아닌 공든탑이 무너질까봐 두려워서 그런겁니다.

답은 2절에 나옵니다. 나이가 들어서 늙어 죽을때가 왔다는 것을 안 겁니다.
즉 눈이란 어둡다는 상대적인 밝음과 대비시킨 그 소모적인 한계점에 다다른 겁니다.

모세는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죽이신다는 겁니다.
영적 분별이니 뭐니 하는 것이 의미조차 없는 겁니다. 죽이시는 마당에 말이죠.
즉 영적분별 조차도 성령의 은사 조차도 자꾸 잉여로 안 보고 소유물로 보고 그 소유물로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영적분별을 할줄 모르면 안된다는 둥의 사기를 치는 겁니다.

(신 34:7, 개역)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참 아이러니 하고 재미있는 것이 정작 누가 그동안 약속의 땅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보이는 것처럼 누구 혼자만이 외쳤습니까? 그것 때문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무릎 꿇힘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들어가야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지 않을까요?

영적 분별 운운하는 인간들 말처럼 모세가 들어가야 영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일부러 뺍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속이란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약속이 배태시킨 잉여란 인간의 공로가 삽입 될 수 없는 철저한 단절입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그가 실수한게 아니라.
이삭 자체가 평생을 잉여적으로 산 겁니다. 하는 짖은 아브라함이 하는 짖과 똑같습니다.
아내 인신매매처럼 팔아 넘기는 것은 지아버지랑 같습니다.

그렇다고 잉여(은혜)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눈이 어두워서 벌어지는 실수가 잉여에 훼방이 되질 않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더더욱 부각시키게 되는 겁니다.

이삭은 이제 죽음이 닥쳐오기 전에
눈이 어두워진 상황에서 약속의 전수를 해야할 부모의 의무를 지닙니다.

이미 어두워졌다는 것을 야곱이 속이는 데 이용합니다.

물론 속였다고 성공 합니다.

그러나 이삭이든 야곱이든 약속이란 인간에 의해 좌우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속이든 또는 속든 상관없이 진행되고 완료적이다는 겁니다.

이삭은 팔을 어긋맞게 함으로써

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는 의미로써 약속을 증거 합니다.

즉 부재성을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그 속에 이삭 본인 조차도 틀렸다는 그 부재성을 지닌채로 증거해야 합니다.
(예로 바리새인에게서 기적이란 이미 고정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뭐뭐 아니요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뭐뭐 이다 로 증거하기에
이 표적은 부재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이 외의 기적 따위란 인간의 소유성 육의 소유를 부채질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세대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악한 세대를 규정하는 표적인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악한 세상에서 기적을 요구할 뿐이지 그 악한 세상에서 빠져나오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는 갇혀있지 않기에 구원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건강한자에게 의시가 필요 없듯이,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9은 유대사회로 다시 적응할려고 들어갔고 나머지 한 명 사마리아인 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유일한 잉여란 바로 유대인 9명의 잉여(기적)가 아니요를 드러낸 비로소 자신을 고침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줄 아는 자가 주님이 찾는 잃어버린 양인 겁니다. 99마리 필요 없고 한 마리 양을 그렇게 찾는 것이 바로 부재성을 앞장세운 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유일한 표적인 십자가입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이삭은 십자가 아닌 것과 십자가 인 것을 둘 다 드러내면서 비로소 팔을 어긋맞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언약성을 드러냅니다.

야곱 또한 아버지를 속여 가면서 취득한 장자권이 자기의 소유개념에서 유지될줄 알았는데
정작 그렇게 취득한 소유권은 얍복강가에서 형 에서에게 다 내어줄 뿐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할례 곧 자신의 육의 생각 곧 눈에 보이는 방식의 복 개념이 깨어지는
육체의 성기 중심의 환도뼈가 우르르 무너짐을 통해서

그 깨어지는 틈을 통해서 약속의 의미가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육의 단절 육의 교체당함을 통해서

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는 식으로

깨어진 그 육의 통로의 차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없는 존재가 창조됩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원래 없는 존재가(이삭도 마찬가지) 어떻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지를 구약 전체에서 보여주고 설사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혈통적 이스라엘이 무색해 해 버렸다 손 치더라도 전혀 훼방된적 없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또 새언약의 백성으로써 새이스라엘을 창조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재화 시키는 겁니다. 거짓으로 또는 악한 세대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동안 무시했던 그 소외된 어리석은 십자가의 사랑을
높이 높이 세워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런 큰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삭이든 야곱이든 자기 주변의 보이는 영역 외에는 모릅니다.
신이 아니기에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양과 같을 뿐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약속이 취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부재성을 가지고서 더더욱 빛을 드러내시는데 있어서 하등 문제 없도록
약속 스스로 이루시는 겁니다.

이삭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약속이 흔들리거나 손해보지 않습니다.
진행하던 발길이 멈추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인간에게 좌우가 되는냥 가르치는 그런 놈들이 바로 이 말씀을 그렇게 자기들의 해석으로 정당화 하는데 있어서 말씀에 도리어 걸려든 겁니다.

자기 탐욕대로 해석 할 수 밖에 없도록 하셨기에
자기들이 잘못 해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태생이 다르기에 나무가 다르기에 그 아비의 그 자식이라고
마귀 자식인냥 해석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설사 해석할 줄 안다고 해도 방향성이 이미 다르기에 자기유익으로 끌어당기는 식일 뿐입니다.

그 당시 180세 정도면 오늘날 100살의 쇼를 할머니 수준입니다.
그 할머니에게 영적분별을 요구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속으로 솔직하게 그냥 가라고 바랄뿐이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힘없고 돈 없고 건강없는 자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날 목사들이 영적분별을 강요할까요?
간단합니다. 자기들이 영적분별하라는 말의 정당화 고정화인 그 목사의 자리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소모적인 누락의 자리로 못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위치로 본 겁니다.

그게 바로 탐욕인 겁니다. 그 탐욕이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를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하는 위치인 신의 자리에 있고픈 겁니다.

자기도 미쳤고 남도 미쳐버리게 만드는 짖입니다. 이런 결백증 완전주의적인 정신병자를 양성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깨뜨려지면서 그 균열에서 드러나는 교회가 아니라.
도리어 깨어질까봐 가인처럼 성을 더더욱 곤고하게 세우는 그것이 바벨탑의 원조가 되는
그런 교회를 세우고픈 꿈이 곧 자아와 그 교회와의 일치성을 꿈꾸는 겁니다.

허망한 것에 정신 팔리도록 말이지요.

질문을 다시 읽어보니 님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목사가 가르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님이 이미 종교적인 용어인 영적분별이라는 용어를 쓴 것을 봐서 이미 그 종교단체의 영향력이 있는 겁니다.

불교의 스님들도 쓰는 용어이고 이해되는 단어인 영적분별이라는 용어는 결국은 종교꾼들의 자기 가리우는데 쓰는 용어이지(선악과와 무화과나뭇잎) 정작 자신이 부정당하고 발가벗김 당하는데 사용하는 종교꾼들은 없습니다.

모세의 눈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과
이삭의 눈 어두운 것

상관없이 이 둘은 모조리 다 부정 당하고

깨어져야 합니다.

그 깨어지는 그 두 균열 사이에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가 비로소 교회가 되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잉여란 없습니다.

열매란 조건도 법도 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할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 태어난 연합입니다.

죽음이라는 무 속에서 어떻게 생명이 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못 하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은태 만들고 죽은자와 방불케 만드시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는 그 무와 죽음 속에서 부각이 되는 겁니다.

참 성전이란 참 이스라엘이란 참 자유자의 자식이란

보이는 허망한 것이 깨어지는 그 순간에
두 균열 사이에서 피어나는 잉여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만

골라 골라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교회란 교회 스스로 교회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육의 자랑이 됩니다.

말씀이 늘 교회를 깨뜨리면서 교회를 창조하시는 겁니다.

구약의 남은자란 그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을 깨뜨려 남은자를 형성 하고 또 그 남은자 속에서 또 다시 깨뜨려서 남은자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약속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그 깨어진 두 조각을 통해서

뭐뭐는 아니요  뭐뭐 이다.

가인은 아니요      아벨 이다.
이스마엘은 아니요  이삭 이다.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유대인은 아니요    개같은 이방인 한명의 여자이다.

라고  그 깨어진 틈에서 새창조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분별 이라고 분리작업입니다. 우리는 못하나 주님은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늘 틀렸을 뿐이고 주님은 항상 옳을 뿐인 겁니다.
(또 잔머리 굴러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있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의도적으로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죄인입니다.
그리고 틀린 짖만 하겠다는 것이 또 자기를 옳게 할려는 짖 입니다.
마귀자식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법으로 행함으로 듣는 법 입니다.
성경은 이미 그것조차 다 예정한 겁니다.)

나는 늘 틀렸다는 것만이 예정 되었다는 것을 믿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옳다 속에 묻어갈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의 항상 옳음은 모세도 틀렸고 이삭도 틀렸고 야곱도 틀렸고 유다도 틀리도록 하시는 예정 뿐인 겁니다.

(그렇기에 선민사상이야 말로 가장 악마적인 겁니다. 마4장에 3가지 시험을 통해 나타난 마귀의 사상이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들추어 내신 은혜(잉여)의 승리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의 전리품이고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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