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불(소멸) 속에서만 만지는 몸

자기부인 자기부정 자기소멸 속에서만 만져지는 몸
(예수의 영(성령)이 하는 일은 딱 하나 불 속(십자가)에 다 집어 넣기)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05 17:49:19,

친구 클릭해서 님 홈피에 들어가 보려고 하니 쪽지 보내기 홈피 보기 기타등등이 안 뜨네요
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 홈은 잘 모르겠고, 쪽지는 되는가 봅니다. 지금 제가 받았으니까요
쪽지로 계속 보내던가? 제 메일로 보내시면 됩니다.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언제든지 질문 주세요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05 18:05:55,

눅24:36~43 에서 주님이 죽은 뒤에 육체를 가지고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육체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가 육체를 입고 나타날수도 사라질수도 있는건가요 
일단 텍스트적으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홈에 못 들어가게 된다면
님이 글 올리는 http://crosslamb.tistory.com 이곳에 글을 올려 주십시오

샬롬 입니다 ^^

답변 :

(눅 24:36, 개역)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 24:37, 개역)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 24: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9, 개역)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40,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 24:41, 개역)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 24:42, 개역)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눅 24:43, 개역)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무지 어려운 질문을 하셨는데 그냥 제가 아는 식으로 답변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자체와 성경 전체는 영(말씀)의 활동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활동의 상대적인 대상은 바로 육입니다.

그렇다면 육인 인간들이 그동안 영에 대한 해석을 들추어내시는 식으로 그릇 속에 가득한 것을 거꾸로 들어서 빼내시는 방식으로 그들의 언어로 다가와서 알려주시는 배려 입니다.
안 알려주면 더 이상 말 할 필요 없지요.  
예수님이 진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먹고 마시고(생선을 먹었다고 나오죠) 만지작 거릴수 있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눅 24:39, 개역)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자 그렇다면 그동안 육체인 인간들이 파악한 영은 다 틀렸다는 겁니다.

만질 수 없고 또 그 영은 먹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일종의 귀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해 왔다는 겁니다.
(심지어 한국의 제사를 보면 조상신 먹으라고 음식을 바치지만 정작 제사 후에 그 음식을 먹는 자들은 사람입니다. 귀신이 먹지를 않지요)

자 그렇다면 귀신도 일종의 인간의 선악개념에서 나온 것이 됩니다.

그런식으로 예수님을 보는 시각 조차도 선악개념에서 나왔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영이다는 겁니다.

선악을 지적하는 영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추상적 개념) 죽음 뒤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조차도 법적인 선악개념이라서 자기유익의 탐욕(육적)을 깔아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선악적이다는 겁니다. 사랑하면 그 만큼 그에 따른 보상과 댓가를 노린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 뒤에서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여전히 제자들과 동행했던 그 사랑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이 못 알아봤으니까요
즉 아마 얼굴이 바뀌어서 다른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겁니다.
즉 과거의 그 예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지란 그 사람을 고정화 시킨 겁니다.
그런데 그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달라진 것은 바로 죽음을 이긴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완료된 이미지 이기에 더 이상
인간들이 예수님을 두 번 씩이나 죽일 수 있는 만만한 이미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결국 그 이전의 이미지란 죽음을 향하기 위한 얼굴 모양이였고 이미지 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죽인 겁니다. 싫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찾아오신 이미지는 각기 제 갈 길로 간 양같은 자들에게 목자로써 나타난 이미지입니다. 아들에게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버지입니다.
마치 탕자가 그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무시하고 마음껏 탕진하다가
아버지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버지의 품은 든든한 기업과 같은 이미지 임을 알고 돌아오듯이
자기자신의 이미지가 강할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무시했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자기자신의 이미지가(선악)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을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이미지는 전혀 다른 이미지요
아버지의 긍휼은 자기자신이 그 긍휼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임을 알았을때에
심판 받아 지옥감이 마땅함을 알았을때에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버지가 있기에 보이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다면 보일 리가 없지요

보일 수 없는 분이 즉 귀신과 같은 분이 보인다는 것은
비로소 자기자신이 육체임을 제대로 보는 자입니다.
비로소 피조물의 자리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신이기에 하나님이기에 상대방이 자기 이해력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귀신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래서 영인줄 알았는데

바로 그런 모든 판단을 무너뜨리는

그래서 예수님은 만져 보라

(눅 24:39, 개역)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나는 있다고 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너가 신의 자리(선악의 법 자리)에서 피조물 자리로 교체 당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는 분인 영원한 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없애버렸기에 없애는데 성공했기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육의 고정화 된 생각을 엎어버렸기에

인간이 가진 특히 배반하고 도망친 각기 제 갈길로 간 그 제자들이 스스로 끊어버린 그래서 심지어 그 배반으로 죽어버린 없어진 예수님이

전혀 없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서 영원히 견고하게 듬직하게 안정감있게
그것도 복수하겠다고 지금 나타난게 아니라
다정하게 함께 먹고 마시고 나누고 배려해주는 모습으로 왔고 그 분이 바로 너 앞에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인식과 눈으로 포착하여서 자기 스스로 고정화 시키고 단념화 시킨 개념들이 다 무너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귀신이나 영이라는 개념들은 다 육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이란 딱 한 분 뿐입니다.

그동안 아무도 알지 못한 영을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져보고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인간들은 수세기 동안 영이 무엇인지 육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의 개념들을 저마다 다 지식화되어서 소유한 입장입니다.

그거 무너뜨린자가 영이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만져보라는 그 음성으로 인해서 무너진

자근 자근 짖밟아버린 나의 육적인 생각들을 말이죠.
(어제 수요설교 http://crossvillage.tistory.com/500   떠는 자 (이사야 66: 1- 2) )

그리고 앞으로 고정화 시켜서 이것이 육이다. 이것이 영이다 라고 고정화 시켜본들
소용이 없음을

정작 나는 학생이고 예수님은 선생이다는 그 관계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 와도 범사가 족하다는 그 관계성에 놓여졌다는 것이 영이다는 겁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창조물

나는 아니고 예수님은 무조건 맞다는 것을
나는 틀렸고 예수님은 옳았다는 것
나는 죄인일 뿐이고 예수님은 죽음이 묻지 않는 의인(믿음으로 살리라)일 뿐이다는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이 사랑을 영 이라고 하며 이 영 외에는 다 거짓이다는 육이다는 겁니다.

위의 구절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물 위를 걷자 (마 14:28-33)

풍랑이 일어서 베드로가 몇 발자국 걷다가 정작 풍랑을 보자마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둘 다 물 위를 걷는 관계가 아닙니다.

정작 사랑의 관계임을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방식이 하나를 빠뜨리는 식입니다.

넌 물에 빠진자 일 뿐이고
난 그 죽음에 빠진자를 건지는 자 이다 라는

바로 원수를 사랑하여 용서하는 의미를 이런 관계로 증거하시는 겁니다.

다른 언약은 없습니다. 바로 이 관계만을 드러내는 언약 뿐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의 완성인 십자가는 우리를 더더욱 원수로 만들어서
더더욱 사랑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성화론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물 위에 같이 걷는 관계가 되고픈 겁니다.

그게 바로 선악적이고 육적입니다.


그러나 정작 영광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물 위를 같이 걷는 그런 관계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고 했지요

너가 생각한 육과 영은 틀렸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 같은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사는 그 몸으로써

너희들의 몸은 버려야할 대상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 몸은 기껏 영을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고 육도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는
신이 된 육체이기에

버려야 할 대상의 몸이라고 자신의 몸을 새 몸이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새 몸이라고 해서 신상품이라는 뜻이 아니라(그래되면 또 육적인 선악의 판단이지요)

새 몸이란 옛 몸의 상대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전혀 선악의 법적인 의식이 더 이상 없는 몸이다는 겁니다.

사자가 어린양과 뛰도는 배고파서 잡아먹을 필요 없는
또 어린양은 사자가 전혀 두렵지 않는

바로 그런 선악을 전혀 모르는 그런 관계처럼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몸은 그러한 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으로써 증거되는 영인데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전체가 천사들과 영의 활동으로만 진행 되고
도리어 육은 전혀 할 일이 없는
도리어 자근자근 밟혀버리는 식입니다.

육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자근 자근 밟혀버리고 무시당하고 철저하게 소외 당하는 식인데
영의 세계에서는 반대로 육체가 십자가의 영에 의해서 철저하게 자근 자근 무시당하는 식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영이 일을 다 처리하고
육은 철저하게 무능으로 일관 합니다.

또 육은 그 영의 일에 나는 무능했습니다 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늘 질질질 끌려다는 식으로만 증거 됩니다.

그래서 육이 있기는 있는 거죠
무능화 된 육으로써 항복 항복입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바로 죄인 곧 고아 과부 나그네 일 뿐인 모습으로써 증거 되는 겁니다.

지금 누가복음 24장도 그런 관점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생각하는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로 취급하면서
예수님을 무능화 시키는데 여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바로 그런 인간들의 육적인 생각을 무능화 시키는데
할 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만져보라 또 먹기도 하시고

그래서 놀라고 떨게 되는 겁니다.

무조건 무조건 자기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허탈하게 고기 잡으러 가고 3년 동안 따라 다닌 것이 무색해 져 버렸고
아무것도 아니다고

자기들이 그렇게 취급해 버렸습니다. 무능한 짖 거리를 했다고 말이죠.
그저 눈에 안 보인다고 말이죠.
죽어버렸다고 말이죠.
여전히 예수님이 나타나도 기가 허 해서 헛것을 보거나
귀신한테 홀려서 그렇다고 취급해 버립니다.
여전히 무시 무능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밖아 버리자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 됩니다.
자신들이 무효화 시켜 각기 제 갈길로 가버린 흩어져 버린 제자들이(끝났다 고 선언했던)
다시 예수님이 모으십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무시가 아니라 능력이 되는 겁니다.
아무도 금지할 법이 없이 되어버린 겁니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막을 자가 없도록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흘러 흘러 넘칩니다.

선악의 법으로 사랑을 이룰려고 했던 자들의 결과는 그저 무시와 무기력 뿐이였는데

예수님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열매 맺어야 맺는 열매가 아니라.
처음부터 맺어진 열매였고 어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열매 것을

제자들은 똑똑히 봐야 하는 겁니다.
나의 열매는 틀렸고 예수님의 열매가 옳았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가지일 뿐이고 예수님은 나무입니다. 무조건 나무입니다 나무는 무조건 열매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 선악의 법이 아니기에

그래서 만져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 참고 위에서 언급한 본문을 이제야 찾았는데

(마 14:26, 개역)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막 6:49, 개역)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즉 인간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취급했고 자신들은 정상으로 봤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이 바로 유령이다는 겁니다. 비정상인데 왜 자꾸 정상이라고 우기냐 라는 거죠.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의사로써 그 유령인 인간들을 고치러 말이죠.

의사 필요 없다는 인간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분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아무 무의미 하니까요.

그러나 병든 자에게는 의사만이 유일한 의미가 됩니다.

자신을 무의미한 유령임을 아는 자는 비로소 예수님을 만진자만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 즉 예수님의 몸을 만진자 만이 자신의 몸이 후패해져야할 몸인줄 비로소 알게되는 겁니다.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새로운 몸을 만진자는 낙심할 수 조차도 없습니다.(낙심이란 없는 자기를 쳐다볼때만 있음)

* 다시 질문을 보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가 육체를 입고 나타날수도 사라질수도 있는건가요?

디 아더스 라는 영화를 보면 뒤바뀐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이 유령이고 유령인줄 알았는데 아니였다는 것을)

우리가 죽은 뒤에는 육도 없고 몸도 없고 영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피조물이기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
주님 따로 있고 나 따로 있는 그런 의미는 더 이상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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