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이발사가 가위를 포기 못하듯
종교인이 거룩을 포기 한다면 곧 죽음입니다.
(종교라는 영생을=선악나무를 포기하는 종교꾼은 없음. 선악나무를 괜히 먹이신게 아님)
가위를 통해서 자아를 증거하는 유일한 수단인 겁니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11 22:32:04,

이 말을 들으면서 전 그 사람의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것 같더군요

난 하나님을 매개체로 잘난 사람만 받아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란 욕심과 자신이 그만큼의 수준에 있다라고 말하는것 같습니다

자신은 사람을 언약 관계외엔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도 하나님의 원리인가요 암튼 이래 저래 주님을 많이 모방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9-02-11 22:35:02,

자기 소견은 피력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이나 제대로 가르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자랑과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걸 알았기에 세상적인것을 포기할수 있었다 이것을 증거라고 할수도 있겠지만요 제가 너무 삐딱하게 듣는건가요 ㅋ

답변 :

인간이란 항상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인을 투사 해 본 후 그 타인으로부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흡수하여 뽑아 먹은 후에 다시 자아로 회귀한 후 타인을 단물 빨아먹고 뱉어 버립니다.

이 방식이 바로 마귀의 세가지 시험 속에 나타난 마귀의 모습 즉 선악의 모습입니다.

그 선악의 전당이 바로 육체 라는 전당입니다.

인간은 자아와 일치가 된 육체를 살리는 방법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단 신과 같이 되는 몸이 되기까지는 어쩔수 없이 이 육체를 최종적으로 목적으로 삼아서 신의 몸을 달성한 후에는 그때서야 가차없이 버려도 상관이 없지만 어떻든 간에 그때까지는 어쩔수 없이 이 저주받은 육체를 이끌고 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치가 되는 짖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라든지 삼위일체 라는 절대적진리라고 형성한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이 둘은 마귀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고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했으니 자신만은 면죄부와 심판에서 제외가 된다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는 선택사상을 개입 시키는 겁니다. 삼위일체 라는 정삼각형의 절대진리를 주장함으로써 그 정삼각형을 말한 인간 자아도 빼버리지 말아달라는 일치사상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성경은 항상 자아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출발 합니다.

즉 인간을 빼버리는 데부터 출발하기에 정작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십자가란 너가 왜 죄인이며 일치 될 수 없으며 지옥가야만 하며 죽은자이며
하나님과 단절된 자인줄을 제대로 확정짖는 사건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일치화 시킬려는 신학 신앙 정치 경제 믿기 율법지키기 말씀지키기 기도 금식 찬양 교회다니니 교회 세우기 충성봉사 이 모든 것이 허상인 죄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오직 누구만이 제대로 율법을 지키고 기도하시고 금식하시고 누가 이루었는가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겁니다.

차이성이니까 말이죠.

그런데도 일치성을 주장하는 성화론자들은 태생이 그렇게 나무가 그렇기에 그 나물에 그 밥이기에 어쩔수 없습니다.

선악의 인간은 성경을 해석해도 항상 선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선에 두는 인간이지 악에 둘 수 없습니다.

여기에 비해 예수님은 저주와 심판과 죽음과 죄와 악에 자신을 두었습니다.

이제 누가 과연 선인지 악인지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시비를 가려달라고 소송을 걸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복수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과부가 되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귀찮게 해서라도 그 복수의 원한을 풀고자 소송을 끝까지 걸어서 진위를 가려내어 달라고 호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주는 가르침이요 바로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취지이지 인간의 기도란 그저 소원 빌기요 소원 빌다 안되면 그만인 겁니다.

왜 그만인고 하니 신체가 피곤해져서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해서라도 참과 거짓의 진위를 가려내겠다는데 신체자체를 올인해 버립니다. 즉 그 과부가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다는 것이지 인간이 흉내내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예수님 혼자 선악을 알고 예수님 혼자 이 일을 완성할 수 있기에 그 혜택을 잉여로써 누릴 입장에 놓여있지

소유할 입장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만약 소유하게 되면 다시 그 소유물을 지키고 빼앗기지 않을려고 사수하게 되고 방어하게 되는 또 선악에 빠져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의 신앙 지식 신학 또 질문에서 언급한 수준 또는 하나님과 자청한 한 패거리 되기 정치술 등은 누려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사랑이 없기에 두려워서, 요일 4:18)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적인 행위이다는 겁니다. 선악이죠.

만약 누가 공격하더라도 이거 내 소유물이 아니야 라고 내어주면 그 공격자가 결국 십자가를 감당할 재간이 없기에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를 소유했다가는 남들로부터 공격받을까 싶어서 뱉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의 알리바이가 형성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지독한 미움받은 자의 티를 자연스럽게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 나무의 그 열매이거든요.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열릴수 없듯이 말이죠.

그러나 지독한 편애를 받은 자는 선악이 아니기에 항상 선악적인 윤리의 부재성 도덕의 부재성 율법의 부재성으로 항상 선악적인 인간들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부재성을 가리울려는 행동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으로부터 사생아가 아닌 사랑받는 자식임이 바로 매를 맞음으로, 지키는 행위가 아님을 매 맞는 그 관계성을 드러내는 매를 대시는 자로 인하여 사랑받는 자임이 드러납니다.

매가 중요한게 아니라, 매 대시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매 맞는 자체의 행위를 두고 저들은 비방하고 비웃도록 되어 있고

자식만은 아버지가 자신을 아버지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랑함을 매 맞음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그 매맞음이 버림 이라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지혜입니다. 사랑입니다.

도리어 선악은 저들이 꽉 잡고 있기에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날 때 마다 비웃을 자세만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되어 있고

반대로 아버지는 자기 자식들은 부정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도록 그 부정적인 자리를 마련해 두신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탕자는 그 아버지의 어리석은 지혜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는 반대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긍휼과 용서를 바라고

반대로 맏이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앞뒤 맞지 않는 모순적인 행위에 비방을 하는
자신은 옷 벗지 않는 완벽함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님의 질문 속에 나타난 그런 자들의 하나님의 모방이란

노아가 헐벗은 모습을 보고 자신은 정작 옷 입었다고 아버지를 비방하는 것과 같은
미리 자신의 방어를 미리 갖춘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벌거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는 관계를
정작 함과 그의 열매 가나안은 아버지 의로움 따로 내 의로움 따로 고로 아버지 벗음은 따로 내 벗음도 따로

따로 따로 국밥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법의 관계이지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겁니다.

법은 사랑은 목졸라 죽이는 가인의 모습이고
사랑은 법에서는 목졸려 죽는 아벨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미완료로 취급하고 법으로 지킬려는 자는
어쩔수 없이 하나님의 주권과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점점점 가득 높이 두껍게 넓게 소유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더 가질려고 더 소유할려고 더 빼앗을려고 하기에 점점점 성화되어야 하는 겁니다. 가지만 가질수록 결핍성이 더욱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마표를 받은 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가 이미 완료로써 덮쳐진 자는 죽음마저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니 다 가져라 라고 다 줘버리고 소유할려는 자들에게 빼앗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천국마저도 저들은 소유를 해야하기에 법이고
그 법에 의해 죽는 자가 정작 천국을 누리는 아벨인데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게도 죽음으로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스데반이 천국을 누리게 되자 뭐가 즐겁다고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돌삐 던지는 저들을 향해 불쌍하다고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말라고 긍휼을 도리어 용서를 바랄까요?

정작 반대의 양상으로 돌 던지는 자들에게 살려달라고 해야 할 판국에
정작 살려달라고 해야할 자는 하나님이기에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몰라서 그렇다 라고 여유만만입니다.

성령을 입게된 사도들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미말에 구경꾼이 된 자신들의 운명이 뭐가 기쁘다고 자랑을 할까요?
감사함으로 넘친다고 기쁨으로 넉넉한 승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작 남들은 그런 운명이 될까봐 일부러 피해 피해 갈려는 운명인데 말이죠.

즉 질문 속에 나타난 저들의 모습이 정말 정말 두려움과 공포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그 사망의 권세에 눌려서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눈에 보이는 거룩이란 거룩은 모조리 다 소유할려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 ... 』

그래서 성령의 소유는 그 반대의 육체의 소욕의 반대의 양상으로 가는 겁니다.
일치성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드러납니다.

그 성령의 행전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이 바로

부정한 자를 높이고 정당하다는 자를 낮추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또 선악으로 해석하는 인간들이 과거에 해방신학으로 민중신학 등등으로 사회의 집권층과 그 권력에 눌려 억압층으로 해석을 해서 희년운동을 펼치는 방식이 이미 다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운동하던 그 자체가 도리어 집권층에 해당되는 모습을 갖춘 자들이 바로 운동을 펼친자들이였죠. 사회적 현상이라서 사회가 변화니까 금방 들통이 났지만
종교적인 것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2000년 이상을 버티기로 일관했기에 잘 안 드러나죠.

그 정도로 완벽하게 방어체제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외부에서 깨뜨리는 작업 또한 그 상당한 역사가 있어야 할 정도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그 당싱 유대교의 악마성을 예수님이 깨뜨리지 않는 이상 안깨어집니다.

지금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이미 다 가짜입니다.

그 나머지는 가짜를 인테리어 로 꾸민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짜들이 양성이 되어야 그 차이로 핍박받는 잉여품이 생성이 되는 겁니다.

하필이면 왜 형인 가인의 손에 죽도록 하시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육체의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인간의 가정 교회 국가 일체 허용하지 않겠다는 가장 기본 단위 구성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진짜 형은 있기에 죽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진짜 맏이는 가인이 아니라 예수님이기에 그 진짜 맏이를 보여주시고자
가짜 맏이에게 죽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가인으로써 예수님을 아벨처럼 비록 죽였지만
통회케 하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의 진짜 맏이는 예수님임을 알고 예수님이 더 이상 허물치 않겠다는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내 믿음이 굳이 필요 없이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누리는 겁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의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에 도저히 그 용서가 믿겨지지 않고
또 설사 그 용서를 이용해서 소유로 삼을려고 해도
자기 믿음으로 소유 되질 않고 예수님의 믿음을 가질수가 없기에 경쟁하고자 예수님을 믿음을 꺽고자 성화라는 소유심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눈꼴 시러운 것이 탕자 곧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이유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금가락지 살진소 좋은 옷 때문에 얼굴에 안색이 변하여서 아버지의 사랑에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 자신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치셔서 아벨이 되어버렸고
모든 인간들은 가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이룬 것이 새언약이고 십자가입니다.

이제 긍휼을 바라지 않는 자는 법을 쥐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을 쥐겠다는 발상은 가해자 됨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계속 피해자로만 남기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비로소 가해자임을 십자가의 새언약을 통해서 알게 됨으로써
정작 피해자 되신 예수님의 이유도 묻지 않는 용서 때문에
그저 그 긍휼에 감사하고 그 사랑만을 누리도록 되어 있도록 되어 있기에

더 이상 자기를 챙길 이유가 없어서 자유를 누리는 사랑이라는 든든한 처소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이런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인간의 지혜로 어리석음을 빼버리는 교리나 신학이나 완벽한 신앙과
완벽한 성화를 아무리 갖추어도
사랑 앞에서는 다 허물어져 버릴
허상인 법을 잔뜩 끌어모아서 바벨탑 쌓기 밖에 안되는 겁니다.

천국가봐도 소용 없습니다. 여전히 바벨탑 이라는 자기영역을 또 소유하고파 할 것 뻔하기에
미리 지옥을 마련해 둔 겁니다. 그것은 지옥에서나 할 짓이기에 지옥에 가서 하라고 말이죠.

고맙게도 그 차이성을 미리 우리는 교회에서 발견 합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갑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 매국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천국과 지옥이

천국 스스로가 선택한 자의 결과물 잉여물이 누구이며
지옥 스스로가 선택한 자의 결과물 잉여물이 누구인지를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겁니다.

교회 속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보도록 알려주신 겁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하나는 거룩을 갖춘 자요

하나는 아무리 아무리 해도 거룩과 먼 자인 비거룩한 자입니다.

자 이제 거룩이 외부에서 덮칩니다. 그 거룩은 자신의 거룩을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를 선택 할까요?


사랑은 원수마저 용서 합니다.

사랑은 원수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증거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통해서 아 의사 맞구나를 드러내듯이

선악을 아는 인간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은혜를

은혜자는 누구를 통해서 자신의 은혜를 드러낼까요?


바로 법에 의한 철저한 죄인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에게만이 십자가는 의미 있고
소경이 아닌 자에게는 빛의 창조자가 의미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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