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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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4 08:04:46,
왜 주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고 가나안땅으로 들어와서 점령하게 한것인지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

애굽의 번성이 그냥 번성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잔재성으로 번성한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에덴동산을 철폐시킨 의미가 사라집니다.

마치 노아홍수를 통해서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 은혜의 조치를 인간들은 다시 바벨탑을 세움으로써 은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노아홍수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추어버리는 겁니다. 그 바벨탑 쌓기의 원조가 바로 가인의 에녹성 쌓기이고 결국 바벨탑을 쌓는 인간은 국가라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국가인 인간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 라는 예정과 예비하심을 무시하는데 일관하게 됩니다.

결국 천국은 바로 이런 인간의 나라 와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은혜를 양보 못하는 취지입니다. (곧 전쟁이란 한 쪽의 심판이 확실해야 한 쪽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서 평화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번성이라는 것은 허물어 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과연 번성인지 아닌지를 허물어 보면 압니다. 허물기 까지는 쭈욱 쭈욱 높이 높이 번성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더 이상의 번성이 없을 것이다 라고 여길 정도로 다 속아넘어가야 허물어 뜨리는 것이 의미가 있겠지요.)

사랑의 나라는 인간의 선악의 법에서는 살 수 없도록 조치한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침투 하듯이 또 침노당하듯이, 인간의 나라와 약속의 나라는 서로가 대립적인 전쟁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육의 소욕은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을 방해하는 겁니다.

2009-02-14 08:16:06,
창3:22절에서 선악을 아는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란 부분에서 우리란 부분좀 설명해 주십시요
그리고 주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먹은것이 문제인가요

답변 :

이 구절을 이용해서 써먹는 방법이 바로 우리 라는 단어가 복수이니까 삼위일체를 적용하는데 써먹곤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이 우리 라는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좀 위험한 발언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은 예수님 말고는 알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뱀을 방치 하심으로써 선악을 아는 것에 도전을 할 수 밖에 없는 권세 아래에 가두기 위해서 뱀이 활용이 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먹은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렇게 되면 뱀의 말 안 듣고 안 먹으면 됩니다. 조건을 반대로 갖추면 되겠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럴 권세가 없습니다. 이미 뱀의 권세가 이미 강하기에
죄악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미 죄가 아담과 하와를 다루고 있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다스릴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죄 곧 사망을 다스리는 입장이 못 되기에 사망 아래에서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행동이 바로 선악과를 먹게 된 겁니다.

자 이제 부터가 중요합니다. 이제 사랑은 바로 이런 자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약속이 진행이 되었다는 겁니다.

마귀는 에덴동산 파괴 자체 만으로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우기지만
정작 주님의 시작은 이제부터 창조의 시작인 겁니다.

창조 되었다는 것을 피조물인 인간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차이로써 창조를 알도록 하시는 은혜가 바로 비창조 세계 속에서 뽑혀나와서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엑소더스 탈출로 인한 비창조 세계에서 뽑혀나와서 창조로 들어가는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들이 창조 조차도 선악적인 법으로 보는 이유는 창조가 완벽한데 미흡했기 때문에 깨어진 것 아니냐 라고 법적으로 보겠지만 존재론적으로 말이죠.

그러나 창조란 창조 해 놓고 완료 되었으니 손 때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를 낳고 아이 자체가 완료이니까 손 때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랑이라는 관계성으로 먹이고 입히고 간섭을 하는 겁니다. 그 간섭이 사랑인 겁니다.

그래서 너가 어떻게 창조 되었는지 아느냐 라고 계속적으로 간섭하는 겁니다.

오히려 완료 되게 창조 했다면 간섭 하지 말아야 되지 않느냐가 바로 선악인 겁니다.

은혜로만 창조된 피조물이 선악의 법으로 따지게 되면
창조를 운운하면서 창조를 빌미로 삼아서 늘 창조자의 마음을 찌르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자 곧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려며는
가짜 아버지 손에서 커봐야 하는 겁니다.(몽학선생)
그래서 그 차이를 느껴봐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선악 이라는 법의 아버지, 또는 가짜 남편인 율법이라는 전남편)
(그래서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은 이 선악의 내막을 제대로 알아라고 준 겁니다. 죄 아래 있음을 말이죠. 그런데 어설프게 아니까 율법 흉내를 내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 흉내가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대로 알게 되니까(롬 7-8장) 율법이 나를 곤고케 함을 알게 되고 비로소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이고(율법 뒤에 숨어본들 소용 없음, 거룩한 무화과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리우는 짖 일 뿐임) 오로지 율법 외에 다른 한 의 가 외부에서 선물로써 주어짐으로써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결국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예수 밖에는 즉 모든 인간을 율법 아래에 가두었기 때문에 예수 밖인 율법 아래에서는 정죄함 뿐임을 그 정죄함 뿐인 율법을 남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율법의 정죄함을 두지 않을려고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비로소 늦게서야 자기자신에게 적용 시켜 보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남이 아닌 자신이 바로 악마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원수에게만 사랑이 의미가 있고, 그 죄인 중의 괴수에게만 구원자가 의미있는 겁니다.)

선악 그리고 율법은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그런 자가 바로 [우리]에 해당 되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아라는 것이 선악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상
우리에 해당 되지 못하고 자아라는 개별성으로 따로국밥처럼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오로지 선과 악 그리고 율법을 다 완료한 자 만이 이 우리 라는 관계성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이 우리는 유일하게 예수 안에서만 완료 됩니다. 그것도 나 라는 자아가 아닌
예수님 홀로만이 완료해서 예수 밖과 예수 안으로 나누어 지는 그 의미 속에서
예수 밖 이라는 악 즉 지독한 미움을 완료해서 주어지고
예수 안 이라는 선 즉 지독한 편애를 완료하심으로써 주어지는

바로 십자가의 사건으로 사랑(새언약)을 다 이루심으로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 중 하나 가 되었다 라고 했기에

두 패거리 중에 하나의 편이 된 겁니다.
즉 창 2장의 한 몸이 되는 원리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따로국밥을 챙겨먹는 방식에서 하나의 편이 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와의 하나 한 몸 된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 2장에 언급한 한 몸의 의미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귀처럼 하나님 자리를 넘보다가 쫏겨난 것처럼
그 아비의 그 자식이라고 마귀처럼 하나님 같이 될려다가 쫏겨난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소유하게 된 겁니다.

창세전의 마귀들의 심판하고자 하는 지독한 미움과 창조를 통한 지독한 편애를
창조를 통해서 이 둘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결국 타작마당을 창조한 겁니다. 그것을 알고 마귀는 이 타작마당을 방해하는 겁니다. 아예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성공 합니다.
그런데 웬걸 전혀 손상입지 않고 창조의 원리 다 추구하시고 자기백성 데리고 천국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즉 지독한 미움 속에 다 들어 갔는데 성공 했습니다. 누가? 마귀가? 천만의 말씀
하나님이 다 성공 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성공 하신 겁니다. 예정대로 된 겁니다.
그런데 지독한 미움과 지독한 편애 중에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인 영생 곧 예수님의 사랑을 먹을려고 영생할려고 먹게 되면
두 패 중에 한 패로 나누어진 것이 무색해 지고
두 패로 나누어진 것이 무의미 하게 된 겁니다.
(창 3:15절은 두 패로 나누겠다는 약속이고 그 뒤로부터의 모든 사건은 두 패 나누기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이 그 선두인 겁니다.)

또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즉 예수님의 살과 피 조차도 두 패로 나누기 위한 목적이지 두 패를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을 괜히 나누인게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추방한 겁니다.

(창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약속을 문자적으로는 일단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패로 나누어놓는 이 약속을 무색케 할려고

양쪽 다 취하는 방식이
일단 마귀에게 속아서 선악을 알게 되었지만 (지옥에 가게 된 운명)

어떻게 해서든 생명나무를 따먹어서 천국을 자기 손에서 해결할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지옥도 천국도 두 패로 나누어짐이 없이
즉 지옥이 땡기는 사람인가의 약속의 개시 또는 천국이 땡기는 사람인가의 약속의 개시인
두 세계에서의 끌어당김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지옥도 천국도 자기 행동에 따른 여부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개인의 행함의 여부로 두어 버린 겁니다.
즉 여전히 생명나무를 따먹고자 하는 열심을 추구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도 말이죠.

결국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미 결정난 사항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선악을 이미 알기에 이미 결정났기에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제는 미지의 개척지로써 선택하고픈 겁니다.
그래서 비록 죽지만 그 죽음 뒤의 선악세계 뒤의 세계는 보험회사 보험들 듯이 선택하고픈 겁니다. 그것도 선악적으로 좋은 의미를 두어서 영생한다는 절대지존을 추구하고픈 겁니다.

십자가 라는 골때리는 복잡한 방식 말고 구지 남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자기가 직접 따먹겠다는 겁니다. 영생을 말이죠.

그것도 아주 선한 방식을 추구해서 그 선한 방식이 행함입니다. 행함.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 중에 하나 가 되었으니] 의 방식처럼 되는 겁니다.

위의 내용을 다른 분들에게 좀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의 핵심을 다룬 문제입니다.

아무튼 창 2장의 한 몸 개념과 창 3장 15절의 약속과 그 약속을 언약으로 적용시킨 의미가 아닌가 해보는 저의 사적인 잠기 일시적인 소견들을 나열해 봤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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