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의 성전(진노의 그릇)도 세우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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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20:57:41,

교회는 천국을 미리 사는곳이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답변 :

아닙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미움 받기도 되어 있는 교회와 또 하나는 사랑 받기로 되어 있는 교회 입니다. 두 그릇,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드시 잃어버림의 의미를 아는 자 곧 남은자를 뽑아내십니다. 새창조죠 자 그렇다면 이 새창조를 알려면 헌창조와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갈라짐의 현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모든 교회의 신학과 교리는 언약을 모르고 그저 구원을 시켜주는 중보노릇으로 장사를 하는 강도의 소굴일 뿐입니다. 강도의 소굴인 교회와 그 정반대인 잃어버림의 의미를 아는 교회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지옥을 미리 누리도록 되어 있는 악령의 성전(거짓 교회)도 반드시 세우셨습니다.

사도도 두 종류 입니다. 선지자도 두 종류 입니다. 반드시 한 쪽은 지옥의 잉여로 또 반드시 다른 한 쪽은 천국의 잉여로서 활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괜히 깔아 놓으신게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교회 즉 한 몸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한 몸과 차이나는 다른 몸도 반드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가 나와 한 몸이다 라고 내세우시는 자가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런 자가 나와 한 몸도 아니면서 반드시 한 몸이라고 외치는 가짜 몸 또는 다른 몸이 반드시 있음을 말씀 하십니다.

복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참 복음은 반드시 다른 복음이 있어야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가짜 복음이 있어야 진짜 복음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인간의 입이 아닌 성령으로써만 증거하셨듯이
반드시 악령에 의해서 적그리스도 또한 증거되는 그 상황을 통해서 참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만 완성하신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써 약속이 다 이루어지심에 따라서 반드시 그 전에 없었던 지옥 또한 완성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스스로가 이 두세계의 백성을 가르고 나누는 분류작업 곧 거룩(성화)를 실시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성화란 장난치는 것 뿐이고 비언약을 유발할 줄 모르는 인간의 자기애 라는 우상짓만 할 뿐입니다.

잃어버림의 의미(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를 모르는 자는 원인 없는 결과인 잉여(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손으로 세운 천국의 허상에 빠져 자신의 원인만을 찾아 그 결과에 중독되어 헤매이는 지옥만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죽었다가(잃어버렸다가) 되찾은(살아난) 경험 (즉 부활이란 반드시 죽음에서 부활이다.)이 없으면
반드시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가진 자를 미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요셉)

그렇기에 구원을 말할때는 반드시 심판 속에서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그 심판(버림)을 볼 줄 모르고 구원만 딸랑 챙기는 자는 가짜교회라는 겁니다.

생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음을 통한 생명 증거 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죽음을 해석할 줄 모르는 자는 죽음 아래에 있는 자 입니다.

또 예수님의 의를 증거할려면 반드시 율법 속에 갇힘을 증거해야 합니다.
율법 속에 갇혀있음을 모른채 [율법 외에 한 의]를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율법 속에 갇힘 입니다. 죄를 더하게 하는 율법 입니다.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또 자유를 제대로 아는 자는 제대로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는 갇힘을 아는 자 입니다.
갇힌 적도 없는 인간이 무슨 자유를 운운 하겠습니까?

그래서 희년 즉 기쁜날 기쁜해 기쁜소식이란
포로된 자에게만 자유가 의미가 있고, 눈먼 자에게만 눈 떠서 보이는 것이 의미가 있고, 눌린 자에게만 놓임을 당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고아 된 적 없고 과부 된 적 없고 나그네 된 적 없는 자의 예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원인 없는 결과인 잉여가 처음자리요 이 처음자리를 가짜교회는 반드시 무시하게 되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에서 처음자리 첫사랑에 놓여진 무능자를 반드시 교회에 익숙한 직분자와 교회일의 종사자들이 반드시 무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구약은 곧 이스라엘 내부에서 첫사랑 고아 과부 나그네의 무능자를 누가 핍박하는가? 이스라엘이 핍박하는 내부전쟁의 양상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더욱더 구체화 되는 것이 다윗언약이고 그 다윗언약대로 오신 예수님이 남이 아닌 유대인에게 죽임을 지독한 미움을 당하는 그 계획 곧 하나님의 뜻이 바로 어리석은 지혜로서 모든 인간의 똑똑하다 라는 지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만 구원자가 의미가 있듯이 의인 곧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왜 이렇게 두 패로 나눌까요?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예수님의 가치에 모든 촛점이 놓여진 것이지
인간에게는 어떤 촛점도 없습니다. 즉 창조주 토기장이라는 증거요 인간은 피조물 즉 따질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무능자 곧 피조물에게만 창조주가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주 흉내내는 인간들은 아무리 성경지식 습득해도 자기가 곧 선악을 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아가 우상인 겁니다. 그런 자아가 터득한 구원 생명 십자가 성령 은사 믿음 소망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이 거짓이 되는 겁니다. 세상이 아닌 이스라엘(교회) 안에서 분리 구별 구분 차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 참고로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계 17:4, 개역)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7:5, 개역)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여기서 음녀는 제사장의 딸입니다.

[참고글 계17장 설교 문 중에서

음녀라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거룩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그 거룩을 배신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레위기 21:9에 보면, “어떤 제사장의 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의 이 보통 여느 과 다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특수 시스템을 가진 국가 내에서 ‘거룩’을 매일같이 생산해내는 일을 하는 가정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내놓은 거룩을 가장 가까운 관계선에서 배반이 발생시킨 셈이 됩니다. 즉 ‘음녀’라는 말은 최고 경지의 거룩을 노골적으로 대들고 거부하는 그런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에 대해서는 인간들의 자기 규정을 가지고서는 접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껏 음녀란 어두운 밤 골목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창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를 다 담아 낸게 아닙니다. 거룩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결국 교회란 교회 그 자체 또는 몸이라고 해서 그 지체인 몸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지체의 머리 몸의 머리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끼요 소모품으로써 증거 하는 누락을 나타낼 뿐이고
그 누락됨을 누리는 것인데

반대로 교회 자체의 몸을 누리게 되면 머리 따로 몸 따로인 겁니다. 몸 때문에 머리가 있게 되는 거죠
몸의 누림 때문에 머리가 있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몸은 가짜 몸이고 머리 때문에 몸이 누락되는 몸이 진짜 그리스도와 한 몸 입니다.

예로 사실상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러한데요 유독 이것을 흉내내는 자들은 아무리 흉내내어도 다른것이 차이가 나고 가짜임이 더욱더 분명해 집니다.

뭔고 하니 믿음의 선배 특히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망해야 한다고 누락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구원받을 조건을 갖춘 자기를 알아달라고 예수님 마저도 이용해서
부자청년처럼 또는 율법사 처럼 어느계명이 크냐라고 묻고 바리세인처럼 몇번 금식 등등의 실적 행적 행위 명령어 지킴을 자꾸 내세우는 겁니다.

누락의 의미 잃어버림의 의미 처음자리의 의미 무능자의 의미 등등 아예 모르는 겁니다.
율법은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의 완성이기에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 시형제결혼법 등등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이 완성해서 우리가 비로소 약자로써 보호 받고 예수님의 이웃으로써 즉 원수죠 사랑받는 것인데

따로 국밥 처럼 구원 딸랑 챙길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구원자 드러내는 차원의 누락인데 말이죠. 의사를 드러내는 차원에서의 환자인데, 사랑자를 드러내는 차원에서의 원수인데, 죽음보다 강한 자를 드러내기 위한 차원에서의 무능자인데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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