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5. 용서의 대상(무능한 무익한 종의 자리)를 해석 못하는 인간

십자가의 죽음(심판 저주) 을 해석할 길이 없는 인간

가치있는 용서자가 될려는 우상의 사고방식과 그 반대인 용서의 대상이 되는 어리석고 좁은길로 인도하는 성령의 일의 차이(눅 17:1-10)

잃어버림의 의미(십자가, 요나의 표적, 버림받음. 피 흘리심)를 해석할 길이 단절된 부자와 제자들 모든 인간들

인간은 부자처럼 모든 가치를 자기 구원과 연결된 [선택]으로 해석, VS 반대인 성령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버림]으로 심판으로 해석을 할 수 빆에 없도록 다른 해석 안되도록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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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5. 무능한자(약한 자) 새창조(처음자리)하는 성령의 일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인간의 성전과 십자가의 영으로 창조하는 성령의 전의 차이

가치있는 주인이 될려는 인간 vs 무익한 종이 되러 오신 예수님
(높고자 - 유익,구원,선민도 챙김) vs (낮고자 - 목숨을 잃어버림, 버림,저주, 심판받음)
(강한자 될려고 함, 자기 챙기기-시험) vs (약한자 만들기 죄인 만들기, 미쁘시사, 주님만 크게 보임)

(눅 17:1, 개정)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 17:2, 개정)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눅 17:3, 개정)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개정)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5, 개정)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개정)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7, 개정)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눅 17:8, 개정)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9, 개정)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눅 17:10, 개정)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인간의 행함의 의미는 항상 그 가치에 따른 보상을 노리고 있지만
성령의 일은 당연히 할 것을 해 놓고도 무익함이 아닌 가치성을 따지는 것에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의미임

그래서 인간은 행하면 더 골치아픔 생색내기 바쁘기에 입을 자크 채워야함
아예 무능한 자 잃어버린자를 찾으시고 새롭게 창조해 버림 무익한 종 무능한 자
약한자로 새로 창조 그래야 첫사랑만 크게 보이게 됨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처음 사랑

(고후 13:9, 개정)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약할때 강함 되신 온전한 미완료가 없는 그 완료를 보는 자리가 유일한 처음자리인 첫사랑의 자리 무능의 자리

(고후 4:16,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래서 후패하는 곳으로만 골라서 인도하심 왜? 새로운 것을 보라고 무능한 자리로만 골라서 인도하심
이것이 성령의 전인 광야교회

그러나 인간이 세우는 교회는 우상 교회 자기를 쳐다보라고 가능성의 자리로만 골라서 인도함
무익한 종이 아닌 가치 있는 자가 되어라고 시험드는 자리(자기챙기기,처음자리 무시)로만 골라서 인도함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 포로된자 갇힌자 눈먼자 눌린자의 자리를 무시하는 곳으로만 인도하는 인간의 손으로 세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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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용서의 관계 
                  
2009년 3월 15일                                마가복음 11:20-26                  

(막 11:20, 개역)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막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막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인간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죽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로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지만 실은 죽은 것입니다. 이 죽은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요?

이점을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일을 벌리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들을 데리고 산 자로 만들려고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저주시킨 일에 제자들을 합류시키는 것도 이런 취지 때문입니다. 제 철이 안되어서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가 베드로가 나중에 와서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저주받아 밑에서부터 말라 죽어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실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인간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이미 죽은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이 죽어있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런 당황스러운 일을 발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은 그 예수님만이 아시는 흐름 속으로 끼어들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산이 들러서 바다에 빠트리는 일’도 믿음이 있는 자라면 능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의 가능’이 제자들을 더욱 더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무화과 나무의 경우는 자기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산이 들러서 바다에 빠지는 일’은 제자들 당사자들이 행해야만 하는 자기 일로 다가왔습니다.

과연 이 일이 가능할까요? 가능한지 아니한지 시험해보는 식으로 산보고 명령하는 자는 이미 믿음없는 상태에서 벌리는 일이기 때문에 뭘해도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즉 참으로 신앙이 있는 자는 이런 일을 실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이런 경우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채 그냥 예수님이 반가운 나머지 배에서 뛰어내려 예수님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이 때는 물 위를 잘 걸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살피는 순간, 그는 물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물에 빠지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요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비정상적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기다린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정상이요, 물에 빠지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정반대되는 사고방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정상으로 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를 당부했습니다. 용서가 안되고 실패하는 경우는 쌀알갱이처럼 자기 자신만을 포기못하게 되면 아무리 용서해준다해도 결국 자신의 최후의 알갱이마저 공격하면 그 때는 더 이상 용서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끄집어 낸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평가할 때, 알갱이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가지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란 모두 어떤 흐름 위에서 그 흐름을 타고 살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바라보는 것도 흐름이요 지나온 자취나 흔적 같은 것을 길게 늘이뜨리는 것도 흐름입니다. 즉 인간이란 당구공 같은 덩어리가 아니라 죽처럼 퍼져서 그 흐름 안에 흐르는 힘으로부터 조종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마치 나침반처럼 말입니다.

나침반은 어디를 두어서 바늘은 북쪽을 가르키는데 이는 거기에 보이지 않는 자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할 때, “네가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했느냐”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너를 조종하고 너를 지배하고 너를 힘들게 하고 너를 기쁘게 하고 너에게 사는 보람과 좌절을 일으키는 그런 성질의 힘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식으로 하십니다.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속되어 있는 분위기에 합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점은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무화과나무란 같이 예수님의 흐름 속에 합류되어 있는 피조물입니다. 구약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말하는 당나귀’ 같은 것도 예수님 흐름에 귀속되어 있는 짐승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에게 꾸중 들었던 풍랑과 바람도 예수님의 흐름에 합류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흐름에 합류되어 있으면 거기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탁자 위에 있는 잔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 개미들 한테는 신기하지만 우리 인간들에게는 여상한 일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 눈에는 산이 들러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기적이지만, 만약에 그 산과 바다 모두다 예수님의 흐름에 쓸어담겼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들 자신들이 죄로 죽은 자인줄 모르고 나름대로 흐름을 고수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광야에서 많은 구약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성경에는 믿음에 화합치 못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독자적인 알갱이같은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 흐름에 참여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이는 만나나 매일같이 주어졌고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흐름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만약에 포기하지 아니하면 그저 관찰자로 남을 뿐입니다. 그렇데 되면 자신들의 알갱이같은 인생을 힘들게 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흐름 안에서 따로 자기 흐름을 갖겠다는 독자성을 붙잡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용서라는 것은
라t서라는 것은 매쏟아드들난ㅁgm짐객새생이더ER 못하는 일들이 일어남이 예수님을 통해서 벌어짐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드리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과 무화과 나무는 동일한 운명이 됩니다. 무화과 나무가 자기에게 들이닥칠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미리 열매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화과 나무에게 있어 스스로 내놓은 운명은 아예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저주를 방비하고, 축복을 타내기 위해서 나름대로 대비책과 열심히 살아도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믿을 뿐입니다. 자신의 운명은 자기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사건을 유발되느냐에 달려 있음을 믿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되어지지 아니하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돌아가는 와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자기 주장의 옳음을 우기는 식으로 버티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심보에 저주로서 다가오십니다. 즉 세상 되어가는 모든 것이 우리 인간 위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런 현실에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여전히 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아버지에게 기도해야만 하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의심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앞장세워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면서 “의심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 안되는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실까요? 그것은 죄용서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받을 대상으로 보지를 않고,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용서를 알때까지 계속해서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제자들 앞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 다루심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되풀이 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을 수 없기에 못믿겠다는 인간들의 주장은, 믿을 만한 것만 믿고 나머지는 안 믿어야만 된다고 인간들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의미를 모르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 자체를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되고 더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다는 그 ‘용서’까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됩니다.

즉 접촉은 하면서도 전혀 접촉점은 형성되지 않는 사태가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일을 통해서 계속 되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나 ‘용서’의 의미가 보다 근원적으로 재검토해야 될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요,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진정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는 남의 그 어떠한 것도 용서하게 되는데 이는 모든 진정한 용서가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오직 저주를 베푸시는 예수님에게서만 용서가 베풀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자신을 무화과 나무처럼 예수님이 흐름 안으로 들어가되 자신의 흐름을 버리고 들어가게 된 자에게만 그 안에서 “용서하라”는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만의 인생, 나를 위한 인생, 나에 의한 인생이 곧 죽은 자의 인생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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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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