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3. 불의한 재물로 들추어지는 주인과 한 몸은 누구? 누구? 누구 누구 누구?

불의한 재물(십자가)로 밝혀지는 두 주인(돈이냐 하나님이냐)과 다른 몸과 한 몸(나무와 열매)(눅 16:1-18)

http://media.woorich.net/passofday/passofday090320luk43.mp3



(눅 16:1, 개역)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2, 개역)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 16:3, 개역)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눅 16:4, 개역)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눅 16:5, 개역)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눅 16:6, 개역)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 16:7, 개역)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4, 개역)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6, 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7, 개역)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눅 16:18, 개역)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김대식 2009/03/14 13:48   

불의한 청지기 비유

다음 시간에 할 것 미리 적어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 남의 빚을 탕감하는데 매진한다. 즉 용서다. 그런데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비리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용서를 할 꺼면 자기의 것으로 용서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꾼들이 다 할 줄 아는 짖이다. 이것으로 접근하여 일치성을 보일려는 베드로가 책망당한다. 몇번 용서 할까요? 7번? 주님은 70곱하기 7 무한대 하라고 한다. 즉 너는 남을 용서할 입장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용서 받아야할 입장이다. 남 용서할 입장이 못되는데도 불구하고 건방지게 용서할려고 해? 용서 받아야 할 놈이. 주제 넘는 짖을 한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로 부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건방지다 라고 귓싸대기 맞을 짖임을 지적받는다.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즉 주인의 재산으로 장난치는 것이다. 남의 빚을 탕감한다.
그야말로 불의함 이다. 이 불륜으로 증거되는 것이 십자가다.

이 불륜을 저지를수 있는 분은 딱 한 분이다. 예수님 자신의 지혜를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와 주인의 일방적으로 칭찬하는 지혜와 일치 시킨다.

다말이 불륜에 충성했다. 요셉 또한 고리대업으로 이 불륜의 지혜로 뺑뺑이 돌리는 첩자 유발 사건을 벌린다. 여기에 유다가 뛰어든다. 자기 목숨을 걸고 이 불륜에 충성한다. 곧 죽음이다.

죽음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거짓이다.

수많은 목사들은 생명에 충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삯꾼들이다.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지혜로운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는 죽음 곧 불의함에 대한 충성이다. 십자가다.

정작 사람들이 또는 종교군들이 운운하는 천국이니 생명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전혀 미래성이 없다.

종말이란 곧 심판이다. 심판만이 유일한 미래요 종말이다.

이 심판에 충성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잠언에 가장 작고 지혜로운 동물 네가지가 나온다.(잠 30:24)

그들의 지혜는 심판에 대한 준비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개미의 지혜는 겨울에 대한 준비이다.(미래 곧 종말에 대한 심판에 대한 준비)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는 심판에 대한 준비 이다. 이것이 미래가 덮친자의 특징이다. 십자가만이 십자가의 심판만이 십자가의 죽음만이 유일한 미래이기 때문이요 현실이다.

마 25장의 3가지 비유 또한 종말을 미리 앞당겨 당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로써 증거 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 말이다. 그리고 미래가 이미 덮쳤기에 작은 것에 충성 된자가 충성된 종의 비유에 나타난다. 그러나 미래가 덮쳐지지 않는 자는 땅에 달란트를 파 묻도록 되어 있다. 자기의 미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솔로몬 재판에서 정작 불의한 재판관의 판결에 자기의 죽음을 뛰어드는 자는 참 사랑이였고. 어차피 내 아기도 아니니까 판결 잘 했다고 나의 미래도 안 될테니 차라리 두 동강 내어서 죽여라고 한 자는 가짜 엄마였다.

이것이 불의한 재판관과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 여자의 비유이다. 기도란 바로 성도인지 아닌지 진짜 엄마인지 가짜 엄마인지 가려내는 것이다. 심판에 뛰어드는 자가 아기의 진짜 엄마이고 죽음에 뛰어들지 않고 법으로 자기를 옹호하는 자가 가짜 엄마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다구치고 못살게 구는 한풀이 하는 여자와 같다. 그 불의한 법정 판결에도 끝까지 끝까지 죽어 마땅한 자기 아기에게 뛰어드는 엄마가 진짜 사랑이다. 이 불의함에 충성치 않으면서 누가 정의로운 것이 충성하겠는가? 간신들만 따라붙을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