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성화라는 거룩의 결핍성)을 채울려는 종교꾼의 처세술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3-18 23:16:25,
가나안땅에서 야곱은 이삭에게 축복을 받는다 축복을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누리는게 문제다 축복은 주님을 믿는자에게 이미 다 주셨다 이 축복을 누릴려고 하고 하고 현실로 만들려고 하면 가나안땅을 떠나는것이다 밧담아람으로 떠나는것이다 축복 받은 사람은 하란으로 가야한다 아내를 얻기 위해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 그리고 소유를 얻기 위해 축복이 만들어지는곳은 하란땅이고 누릴곳은 가나안땅이다

답변 :

언약이란 사적인 행보와 사적인 축복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의 축복관과 같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 훨씬 낫겠지요.

언약이란 창 3장 15절의 구체화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소모품이 야곱입니다.

소모품에게 무슨 축복이 있나요? ㅋㅋㅋ 아이고 배꼽 잡네

이 약속에 동원되었다는 그 자체로 감지덕지할 정도로 기쁜 것인데?
소유 되면 축복이고 소유 안되면 저주? 누리면 축복이고 못 누리면 저주?

그런 말도 안되는 뻔한 사기에 놀아나는 것도 아무나 못합니다.

지옥 가기로 작정 된자에게만 누릴수 있는 마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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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20:41,
이것을 가지고 하란에 있으면 라반이 한번 움직이면 다 뺏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한것이다 여기서는 분명히 라반과 야곱이 계약을 맺어가지고 얻었기에 야곱은 자기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라반은 자기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야곱의 소유를 뺏으려면 야곱하나만 쫓아 내면 된다 그렇기에 하란땅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수 없으므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가나안땅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서 성경의 원리가 있다

답변 :

인간 소유를 위해 또는 인간 축복을 위해서 언약이 동원되지 않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는 곧 언약의 행보와 같습니다.
언약의 행보에서는 반드시 두 패 곧 비언약과 언약의 세계로 나누어지는 현상이 동반됩니다. 야곱의 행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동원되는 겁니다.
이것은 나중에 법궤의 행보와도 같은 뉘앙스로 작용이 되고 또 이것은 예수님의 행보와도 같습니다. 즉 땅 중심의 움직임이 아니라. 비언약을 숙성 시키고 숙성시킨 비언약을 깨뜨리는 행보입니다. 그렇기에 죄악이 관영한 곳에는 반드시 언약이 투입이 됩니다.

가짜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주님의 자녀가 투입이 됩니다. 그래서 그 가짜 하나님의 가짜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주님의 전쟁의 방식을 동원하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는 취지입니다. 소유를 꼭 획득해야 복이 아니라. 그 전쟁을 한다는 전쟁자가 되었다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그래서 반드시 야곱이라는 이름이 지워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전쟁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실지로 전쟁자는 아닙니다. 전쟁자가 누구입니다 라고 외치는 광야소리일 뿐입니다. 전쟁자는 여호와 뿐이거든요. 인간에게는 전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저들의 비언약성은 반드시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고편으로 작용하는 원리입니다. 가깝게는 애굽나라의 실체를 드러내는 미리 맛보기요.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이 바로 애굽나라와 똑같은 마귀였다는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즉 신약의 개념에서 인간이라는 육은 곧 영의 원수다 라는 겁니다. 이 육을 겨냥해서 싸우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육이 성화되면 정당화 된다고 우겨본들 소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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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24:19,
성경은 주님의 모형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다 하나님 품안에서는 별볼일이 없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것과 똑같다 우리는 축복을 받았지만 단지 현실화 시키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것이다 하나님 자녀에겐 축복을 다 주신것이다 단지 내가 누리지 못하는것이다 주님이 세상으로 오셔서 제일먼저 아내로써 교회를 얻으셨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얻으셨고 영접하는자 그 이름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답변 :

형상론을 외치는 놈들의 특징은 기여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로서 증거하면 바보 취급당하니까 반드시 가시화 시킬려는 탐욕 때문에 늘 형상론이 언급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성경 조차도 주님의 모형 곧 그림자 라고 우기고 있네요?

예수님은 정작 죽었는데? 인간들은 구약이라는 옛언약을 기여이 끌고와서 축복이라는 것을 정당화 할려는 겁니다. 그래야 보람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보람을 갖지 않으면 왜 믿느냐 라는 거죠? 이것은 세상 사람보다도 더 못한 기본도 안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게 바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을 받던 바리새인이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기본도 안되어 있다는 것이 들통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합니다.

뭐뭐 보다 더 나은 뭐뭐

이것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라는 바리케이트를 치시고
반드시 바리케이트를 치신 그 단절성과 차단과 막아버림을 직시하는 그 끊어짐 건널수 없는 입장에서 우리는 틀렸고

도리어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이라는 담벼락을 넘어서 내려오심으로써 찾아오심으로써 다가온다는 것에서 그 바리케이트의 의미가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뭐뭐 보다 더 나은 뭐뭐는 예수님의 찾아오심 곧 예수님의 숙제 외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치신 바리케이트를 반드시 넘어서서 예수님을 찾아가겠다는 그 옛언약의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이을려고 일치성을 추구한다는 자체가

휴 ~~~ 지금 이 부분을 수백번 반복해도 님도 똑같고 그 목사도 똑같이 못알아먹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것 하나 때문에 계속 빙빙 도는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옛언약은 새언약에 붙일수 없습니다. 헌 술을 새 부대에 집어넣다가는 둘 다 터집니다.

누린다는 의미는 바로 이 단절성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마 9:17,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지옥과 천국을 둘 다 주님은 보전하시는데 인간들은 지옥을 없애버리고 천국만 만들어 낼려는 발상을 하는 겁니다. 이유는 딱 하나? 돈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하나님, 선택의 하나님은 바로 마귀사상이요,
지옥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저주의 십자가만을 증거하시는 것이, 인간 중에는 없고(단절) 성령 만이 약속대로 오셔서 증거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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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31:07,
그리고 이제 소유에 해당하는 말씀의 풍성함을 얻는다 이건 삶을 통해 성취하는것이다 말씀을 이룰때마다 소유가 풍성해 지는것이다 성경은 그래서 원리로 보라는것이다 우리도 성경을 통해 적용을 시키면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품에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도 세상에 혈과 육을 입고 예수님처럼 똑같이 온것이다 우리도 아내 자녀가 있어야 하고 소유도 만들어내고 충만도 있어야 한다 소유는 말씀이다 말씀을 얼마만큼 내가 소유하고 부지런히 여기에서  내가 얻어내냐 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답변 :

얼마나 조건적이고 법적입니까? 행해서 그에 따른 보상이 없으면 행하지 않겠다는 뜻 아닙니까? 아마 이 말을 또 전달하면 또 처세술로 다른 방안의 대안들을 마련할 것입니다.

아니 ? 소유 없으면 못 누립니까? 뭐 그런 누림이 어디 있나요? 정작 사도들의 누림은 아무것도 없는 소유단절로써 나타나는데?

이미 그렇게 뻔뻔 스럽게 외치는 이유는 교회를 목사가 접수 해버린 조폭과 같은 발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구역만 접수할려고 하지 않겠지요. 소유하면 할수록 결핍성은 더 커지기 때문에 다른 것도 접수할려고 할 겁니다. 교회가 이미 인간의 손에 장악을 당했기에 저런 놈들이 설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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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33:31,
소유(말씀)을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복을 현실화 시켜야 한다 소유는 생명을 위한것들이다 천국에 가는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천국에 가서 어떻게 살것이냐가 중요하다 돕는 베필을 통해서 자녀를 통해서 소유를 얻어서 가서 누리는게 중요하다 주님도 세상에서 교회와 아들들과 말씀을 성취하신것을 가지고 세상에 사신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신것이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계신다

답변 :

서서히 본색이 드러나네요. 뭔가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면 부담이 됩니다.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되고 더군다나 대접을 섭하게 해주면 안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노리고 등쳐먹는 것이 종교 수천년 역사 아닙니까?

일종의 카톨릭 사고 물론 전체 종교가 전체 인간의 사고가 그러합니다만
성자 잉여 공로설과 같은 겁니다.
한 명의 영웅과 같은 존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그래서 그 한 명의 성자를 제대로 대우 해야한다는 전형적인? 마귀사상이 아닌지요? 이것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나타난 인간의 메시야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을 깨뜨리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잉여는커녕 지옥을 심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키는 그 방식에서 못 벗어나도록 율법 아래에 가두어 버린 겁니다.
심지어 누리자 라는 것도 누리는 것을 지키자 라고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저 목사이군요. 뭘 해도 안 지키면 불안한 겁니다. 누리는 것도 지키고 못 누리면 불안한 것죠.

누린다는 의미는 육체가 해석 못합니다.

그리고 누린다는 것을 전담하시는 성령은 바로 지우기와 삭제 단절 차단으로서만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쳐버리고 죽여버리고 목숨을 잃도록 하는 겁니다. 육의 소욕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어떻게 사는 것도 감당 못하면서 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여전히 지키는 개념을 천국에 까지 들고갈려고요? 어련들 하시겠어요? 어지간히 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할 것 같을 까요? 그러니 뻔한 거짓말 아닌가요? 이런 마치 선하게 비치는 이미지? 고민하는 그 모습이 남에게 착하게 비추게 하는 것이 종교 사기 아닙니까? 그래서 종교적인 겁니다.

오늘도 어떻게 착하고 선한 이미지로 남을 속일까? 이 부지런함에 절대로 그들은 게으를수가 없습니다.

쓸데 없는 고민, 금욕주의 금주주의 금세속주의

그러나 정작 세리 강도 창녀와 거리가 먼 인간일 뿐입니다.

세리 강도 창녀에게도 짖밟혀도 상관 없는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정작 영접해야할 자칭 깨끗한 백성은 영접지 않고 더럽기 짝이 없는 살인자 수준의 개버러지도 못한 벌레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겁니다. 이유는? 바로 부재성입니다.

혈통으로나(할례) 육정으로나(자기가설정한이웃사랑실천) 사람의 뜻(목사의 성경해석)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십자가에서 자기 독생자를 버리심의 뜻)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개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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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36:36,
자기의 소유들과 함께 누린다 자기의 아내 자녀들과 함께 자기가 얻은것들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것이지 세상에서 누리는게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준비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서 약속안으로 들어가서 주님 품안에서 우리가 누리는것이지 여기에서 할수 있는게 아니다 여기 세상에선 뺏기는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을 잘 가지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서 누릴때에 영원한것이 되는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것이다

답변 :

결국 목사들의 노림수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고단수는 아니지만 워낙 단순하고 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파장이 더 크고 효과와 실적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즉 단순하면 할수록 더욱더 대중적입니다. 고단수라면 말이 어렵고 멀리 느껴지기에 가까이 하기가 힘듭니다.

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인 그 단순함이야 말로 진짜 고단수 사기꾼이겠지요. 유화술을 잘 부려야 하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유는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겠지요, 인간의 숙제) 도리어 축출해 버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 들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축출(버림)받는가 라는 거룩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심판입니다. 심판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해석은 대부분 사기쳐서 돈 빼앗기게 됩니다. 돈을 빼앗겼다 라고 여겨지면 비로소 축출의 의미를 알겠지만 복이라고 여겨버리면 무슨 소리 알 길이 없지요. 이스라엘을 전부 버리기 위해서 반드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족보 형성이 목적이 아니라, 약속의 족보인 아벨의 족보를 형성하기 위함입니다. 아벨은 죽었더라 족보입니다. 즉 인간은 심판 받아 마땅한 죽어야 될 자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족보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육체를 못 밖는 그 기준인 새언약을 완성 합니다. 구약의 참선지자들은 심판을 자신의 신체에 담고서 새언약의 완성을 이미 완료로써 외친 겁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죽었더라 족보에 들어간 것을 기뻐서 놀려먹듯이 자랑합니다. 넉넉히 이긴다고 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기에. 그것을 죽었더라 족보로써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목사는 가인의 족보처럼 살았더라 족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복음을 모르니까 교회를 이용해 구원 챙기는 집단이 되자 라고 처세술을 가르치고 있으니 서로가 속고 속이는 끼리 끼리 모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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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40:30,
그래서 여기에선 부족함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것이다 전부 복을 물질로 생각하기에 문제이다 난 아무것도 안해도 되고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식이 문제다 내게 돕는 베필이 있다면 자녀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에 자녀가 있으면 먹일 소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를 돕는 베필은 교회이다 왜 교회가 우리의 구원을 돕는 베필이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자녀가 나온다 교회안에서 말씀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낼수 있다 축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현실화 시키는 노력을 하라 그리고 그것이 되어지면 빨리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라

답변 :

돕는다 라는 뜻은 잉여적이다 즉 예상 밖이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거룩이라는 잉여를 누릴수 있는 자는 육의 지움을 당하는 그 자체가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유 자체가 지키기를 주장하고 원인의 결과요 실적과 공적으로 인한 결과를 만들어내어야 불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에 의해 발생된 그리스도인들은 정작 환도뼈가 뿌러져서 비로소 누리게 되는 육의 삭제된 지움당한 것을 누리는 겁니다. 땅에서 난 적 없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피를 보게 됩니다. 맛을 누리게 아니라, 주님의 희생과 사랑과 용서를 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키는 것이 없고 왠 용서요 왠 사랑입니까? 라고 되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누린자는 죽어도 상관없는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것을 마치 행함의 차원에서 강요할 수 없고 행하라 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목사 니가 먼저 죽어봐라 라고 나와야 합니다. 먼저 죽었기에 따라 죽도록 해야 하는 집단자살이 일어나야겠지요. 다행히도 서로가 그런 속임수에는 안 놀아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고 피하고 상호기만 상호위선 상호인정 으로 서로가 정치적인 처세술로만 의례적으로 하는 말로써 넘겨버립니다.

또 그래주기를 목사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고마운 거죠, 만약 진짜로 복음을 위해서 죽으라 라고 해서 죽어버리면 목사는 그 다음부터 부담이 팍 듭니다. 설교고 예배고 기도고 찬양이고 뭐고 다 죄가 되어버립니다. 먼저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할 입장에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목사가 워낙 믿음이 좋기 때문에 안 일어난다고 믿고 외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뻥치고 사기치고 속여도 되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는 오로지 돈이라는 잉여만 나오지 믿음의 행함은 안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워낙 목사들이 믿음이 좋아서 얼마든지 사기치는 거죠. 바로 이런 현상이 마귀의 세계도 잉여적으로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그저 말 뿐입니다. 행함?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행하는 취사선택용입니다. 처세술이지요.

교회는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반대편에서 십자가를 훼방하고 방해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집단투쟁임을 봐야 하는 겁니다.

이런 구제불능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떻게 교회(야곱)를 환도뼈(육의통로:남성성기)를 쳐서(할례:마음판의 할례 곧 세례 곧 십자가) 이스마엘(10명아들,지파)과 이삭(요셉)을
 남은자로써 뽑아내는가? 그 깨어진 틈 사이로 나타난 잉여를 드러내기 위해서 깨어지도록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구원해주는 공간으로 보는 자들은 우상을 제대로 만난것이고 그 교회를 심는 목사를 제대로 악령을 보는 기회가 됩니다.

왜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교회는 틀렸고 예수님의 피가 왜 옳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재성으로 교회(비언약)를 가지고 언약을 증거하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두 패 였듯이 교회도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넣는 겁니다. 목사도 가라지 수두룩 합니다. 아마 다수 대 1 로만 주님이 일하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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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45:32,
가나안땅은 그리스도 품이다

천국에 가서도 누릴수 있는 소유가 없다면 다 허당이다 야곱처럼 그리스도 처럼 자기의 혈육이 아닌 주님의 영적인것들을 소유하고 들어가서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 마저 배치하는분도

주님이기에 내려 놓을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들 말데로 얻게 되는것 아닌가요 그들은 능동태이지만 우리는 수동태일수 밖에 없지 안하 합니다

답변 :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의 품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이란 거룩한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거룩성 비언약성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원수의 성문을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땅 중심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묵시의 반대속성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해서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배격하고 죽이는 원수의 자리에 설때까지 그들의 언약을 어떤 식으로 자기 탐욕화 하는가? 약속을 어떤식으로 비언약화 하는가를 보여주는 타작마당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판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 심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이스라엘 전체는 멸망으로 치닫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식으로 역사는 묵시에 의해서 심판받아 마땅함을 드러내는 겁니다.

소유란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이다 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이미 육의 인간입니다. 육이 말하는 영적이다 라는 표현은 다 사기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육만 육입니다. 예수님이 소유에 대해서 말한적 없습니다. 도리어 24장로는 면류관을 반납합니다. 왜 소유를 자꾸 말해야 하는가? 일종의 미끼를 던져야 낚이는 법입니다. 그 목사는 지금 유혹의 차원에서 미끼를 던지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들만 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게 꼿힌자들은 저런 사기꾼의 말에 넘어 갈 리가 없고요. 또 반드시 넘어가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 생겨야만 타작마당 다운 겁니다. 400 대 1(미가야 선지자) 850 대 1(엘리야) 반드시 역사는 다수이고 계시는 소수로써 보이도록 합니다. 타자마당의 거룩성을 주님 혼자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가 과연 단 한 사람을 노리고 미끼를 던지는 법은 없습니다. 다수를 노리는 겁니다. 만약 단 한 사람을 노리고 미끼를 던진다면 처음부터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지금 당장의 생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것이 교회이듯이 많이 낚을려고 밑밥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그만큼 시급하고 불안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정신병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그런 주장입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 처방을 자기가 내려본들 어차피 병은 여전합니다. 늘 불안해 하기에 남을 속이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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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23:47:00,
주님은 수동적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 적극성도 주님이 불어 넣어 주셔야 움직이지 제가 움직일수 부분도 아닌지 않을까요 그저 우리는 주님이 정해준 길로 갈뿐이고...

답변 :

수동적이다 적극적이다 라는 그 기준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보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눈에 보이는 인간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성령=예수의 영)을 기준으로 봅니다.

왜 저런 주장들이 유행하는가 하면 사람들 다루어 보겠다는 취지입니다. 삼일교회 전병욱이라는 자가 젊은대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이제는 한물 갔지만) 젊은 친구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치면서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론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갓 고등학교(어릴수록 종교성이 강함)를 졸업한 학생들의 그 종교성을 잘 자극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이런 종교심리는 특히 장애인들에게 잘 써먹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티셔츠에 문구를 쌔기면서까지 무시당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울수 있는 당당함을 갖추라고 장애인들에게 특히 결핍적으로 나타나는 자존심을 세워주고자 하는데 이용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장애인들은 결핍이 더욱더 커집니다. 이런식으로 대학생들을 장애인 취급하는 심리를 자극하는 거죠. 종교는 마약입니다.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인간도 없고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 안움지기는 인간은 없습니다.

죄란 인간의 하기 여부로 죄가 되는게 아니라
죄가 인간을 다룹니다.

결국 인간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뭐든지 자존심이 상해지기 때문에 그 자존심을 키워주는 말처럼 가장 결핍을 채워주는 말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결핍의 구멍은 더욱더 커집니다. 현대인은 특히 현대교인 현대종교인은 자존심 외에는 없습니다.

신앙을 자존심 세우기와 연결 시키는 것이 성화론입니다.

유치하게 하나님께 다 떠맡기는 그런 유아틱한 신앙에서 벗어나라 라고 외치지만
정작 그런 자가 가장 유아적인 결핍의 구멍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그런 놈 자존심 한번 건드리면 미치고 환장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곱게 크다보니 사회생활을 해 본적도 없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적이 없다 보니 늘 대우받는 입장의 자리에만 있다보니 조그마한 일에도 잘 삐치고 시셈하고 자기 변명의 달인이고 그래서 정치술과 인맥의 달인으로써 처세술만 부리다 보니 정말 유아틱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제대로 짖밟혀 봤다면 성화론 그거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짖밟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화론 주장하는 자기를 인정해 달라는 애걸복걸하는 영혼의 치료사 영적인 아버지 취급해주지 않으면 잘 삐칩니다. 그래서 밟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 차립니다. 정신병은 감금해야 하듯이. 마약 먹은 놈들은 정신 차릴때까지 패야 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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