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 (2010)

영화 감상 2010. 5. 25. 13:10

[후사(부활) 없음: 부활삭제당함 ] 으로써 증거 되는 부활


인간이 유독 기댈 것은 인간 뿐이다.

어제 로빈훗 이라는 영화를 봤다.
강이아빠는 기존의 로빈훗과 별다른 것 없어 재미없다고 했다.
이미 다 알수 있는 기존의 스토리에서 별로 벗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비유라는 것이 생각났다.
기존의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서 그것을 소재로 소스로 가져와서 전혀다른 지혜로 펼쳐진다면 새롭게 느껴지고 잉여성이 커질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기존에 다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보편성의 이야기요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는 익히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써 전혀 낯설고 도통 알수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즉 패쓰워드를 걸어버려서 어떤 누구도 그 비밀을 풀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나도 뭐 별 그렇게 재미난 것은 없었으나
처음부분부터 나온 아들 개념 곧 후사 개념을 다루었던 부분부터 꼿혀버려서
부활의 관점이 계속 의식이 되더니만
끝까지 부활 개념이 떨어지지 않은채 보게 되었다.
마침 부활 개념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살펴본바가 있어서 그랬던가 싶었다.

성경에 항상 약올리듯이 인간의 결핍성을 자극하고 유발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후사] 라는 단어다.

그런데 단순히 그냥 후사 라고 하면 끌리지 않는다.

역으로 [후사가 없다]라는 의미로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쳐들어 온다.

후사가 없다. 라는 말은 아들이 없다. 물려줄 기업이 없다 라는 뜻이다.
(이 후사가 곧 가정이요, 가정의 확대가 사회요, 사회의 확대가 국가가 된다. 인간의 후사의 저장창고는 국가다. 인간이 자기 재물을 쌓을 창고를 크게 짖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 집착하는 것은 곧 재물을 쌓을 창고, 재물이 곧 기업이요 후사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 두 주인을 섬길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후사 전쟁, 곧 약속전쟁이 벌어진다. 이미 두 후사의 싸움(이스마엘 vs 이삭)의 확대가 애굽의 장자 쳐버리기 이다. 약속 전쟁이다. 인간의 부활인 후사 곧 장자를 쳐 버림으로써 이스라엘은 다른 후사를 바라보는 자들이다. 인간의 모든 부활을 쳐 버리는 다른 부활 곧 십자가이다.)

그런데 후사는 곧 부활이 된다.곧 원천이요 고향 본향이요 뿌리요 근원지가 된다.

아무리 자신이 당대의 의인이요 영웅이요 힘이 센 자라고 해도 후사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고전 15:13, 개역)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14, 개역)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5, 개역)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 15:16, 개역)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8, 개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9, 개역)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개역)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 15:24, 개역)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 15:28, 개역)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9, 개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고전 15:30, 개역)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즉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부활이 없다면 즉 완료가 없다면 그것은 미완료일 뿐이다.
아무리 지금 현재가 좋아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것이다.

아들 이라는 말은 곧 기업이요 후사 라는 뜻이다.

영화가 이 부활개념인 후사 개념을 들고와서 국가의 미래와 연관시킨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이 생각났다. 아무리 자신이 지금현재의 북한체제를 유지해 왔어도
지금 제대로 후사를 확고하게 물려주지 못하면 김정일은 무용지물인 것이다.

어떤 왕이
후사가 약골이 될까봐 아버지 왕은 아들 왕자를 아작내 버린다.
즉 부활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부활 다운 아들이 되지 않는 아들은 곧 부활은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다.
백성이 봐도 누가봐도 아 저것이 제대로 부활 답다 라는 후사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부활관이다. 후사관이다.

즉 아들(후사)은 부활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강해도 아들(후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부활관에 집착성과 결핍성 채우기를 유발케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곧 인간 특히 모든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의 부활관 곧 족보를 뒤짚어 엎으면서 상대적으로 증거한다.

예수님의 족보의 특징이 바로 부재성이다. 그래서 다섯 여인 에게서 라는 인간자신들의 부활관에서 빼버린 그 버린돌들을 오히려 성경은 집어 넣는다.
예수님의 부활에 후사에 족보에 넣는다.

즉 인간의 부활관은 행함의 잇기 이다. 육체의 잇기이다. 육체의 부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부재성의 잇기이다. 부재성이기에 없음에서 없음으로 연결한다.
없는데 어떻게 이을수가 있다는 말인가? 없는데?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불가능성을 처음부터 들이대었다. 그것도 후사가 있다는 족보 속에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대립시켜버렸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의 낳았더라 족보에 대립된 아벨의 죽었더라 족보이다.

문제는 동행이 에녹이 속한 족보에 있다는 것이다.
죽은자 같으나 산자의 족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나와 브닌나의 대립을 의도적으로 후사가 있는 자의 족보 속에
탁란 시켜서 한나의 족보인 예수님의 족보를 삽입시켜 버린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이다.

부재성으로써 부재성을 잇는 부재성의 부활족보이다.

이 부활족보에 반드시 차이성으로써 상대적인 인간의 부활이 가짜로써 동원이 되고 배경으로 깔려야 한다.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을 펼치기 위해서 애굽이라는 배경이 깔려야 하듯이 말이다.

빛은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한다.
그래서 바벨탑은 수직적으로 발전하면 안된다. 수평적으로 퍼져서 배경이 되기 위해 퍼져야 한다. 가인에게 이마표를 준 이유도 그러하다.

144000명의 인 맞은 자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짐승표 666 를 받은 자들이 배경으로 깔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은 독점성이다. 일방적이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 뿐이다.
여러명이 될 수 없다. 이 하나 뿐인 아들을 위해서 가짜 아들이 배경 곧 빽그라운드로 깔려야 한다.

양자는 아들이 아니다는 뜻이다. 양자는 부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후사 : 진짜 아들, 진짜 부활) 때문에 부활에 참예 당한 자가 된 것을 양자라고 한다. 양자의 특징은 전혀 자신들에게서 부활이 나올수 없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부활도 아니면서 남의 부활을 증거한다.
남의 부활을 증거함에 있어서 상대적이고 차이나는 인간의 부활에 시비를 걸 수밖에 없다.
물과 기름처럼 썩을 수 없음을 차이성으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라고 한다. 전혀 아름답지 않고 가는 곳 마다 소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후사를 모조리 다 거부하는 화목이 아닌 검을 주는 증거를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그 동네의 후사들을 모조리 다 빼앗가 가버린다.

후사가 없는 동네는 미래를 상실했기에 아무리 지금 풍요함을 누려도 소용이 없다.

죽은 도시 이다.


영화 로빈훗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부활에 집착하는지 여실히 보게 된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후사로 삼고 그 사람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을 볼때에

후사가 없다 라는 성경말씀이 생각 난다.

이 땅에서는 후사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반드시 이 땅에서 후사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부활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그리고 성공한다. 고맙게도 그렇게 공들여 만든 후사 곧 부활을 예수님은 부재성을 깨뜨린다.

예수님의 부활은 임금(아버지)의 부재성으로 아들(후사:부활)의 부재성으로 이룬다.

참 신기하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없애 버리는데 인간은 성공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완료로써 더 견고하고
자신들이 이루었기에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들이 고발했기에 그 고발로써 이루어진 부활이요, 후사 다.

솔로몬의 지혜 재판은

바로 고소자가 반드시 등장하고 그 고소자 소원대로 아들이 법적으로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소장 조차도 무용지물인 부재성으로써 아들 곧 후사가 진짜 부활 진짜 후사 진짜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 진짜 후사 앞에 우리는 그져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인 철저한 단절로써 미래가 없기에 완료가 없기에 기업이 업쇼기에 후사가 없기에
죽은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소멸의 자리에서
후사가 없는 자리에서
처음자리에서 예수님의 후사 곧 아들 되심(부재성:제물되심), 주 되심을 목격케 된다.

그리고 덮쳐진다. 팔 복의 사람이 이미 완료로써 되어버린다.

부재성(빈자리)으로써의 부활로써
인간의 부활을 깔보듯이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너끈히 넉넉히 이겼노라고 말이다.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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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고로 일만달란트 탕감한 용서의 왕 비유에서 참 재미있는 것은
정작 용서 받은자는 없다. 부재성이다. 빈자리이다. 숨어있고 은폐되어 있다.

오히려 용서 받은 자는 없는채 숨어버린채
용서 하는 임금과 그 용서를 무용지물로 여기는 자 이 두 세력으로써
뻔뻔스럽게 비유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를 외치고 있다.
(인간의 용서 개념은 정작 누가 용서받았는가 라는 용서를 부재성으로 볼 수가 없다.
부활 조차도 부재성으로 볼수가 없다. 그런 용서 그런 부활은 안믿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뻔뻔스럽다. 이것을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한다.
그것을 미쁘심이라고 하고 그 미쁘심에 상대적인 것을 시험들었다 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인 곧 용서와 부활조차도 부재성이 아닌 있음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시험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을 때 조차도 부활할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정신으로 똘똘똘 뭉쳐있었다. 인간이 그래서 실험정신으로 가득찬 과학이라는 종교에 시험들어버렸고
교회라는 인간의 부활관으로 가득찬 종교집단에 시험들어 버렸다.)

참 재미있다. 신기하고 놀랍다.

용서 받은 자는 숨어 있고 그 용서를 중심으로 양쪽의 숨어있던 세력이 등장한다.
평상시 있을 거라고 여겨졌던 용서 받은 자는 그 순간 만큼은 은닉되어 버리고
그 용서를 중심으로 양쪽의 숨겨져 있던 세력이 가시화 되는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 라는 본향은 항상 이 땅에서 무가치하고 무시받는 부재성으로써 증거된다.
(이런 하나님 나라는 창기와 세리가 누구 누구 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말은 부재성으로만 증거됨에 있어서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를 들추어내는 방식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재성인 하나님 나라에 딱 맞는 인간은 불의한 자 곧 죄인 뿐이다. 의사에게는 건강한자가 필요 없다.)

그래서 스스로 시험들어서 스스로 그 본향, 뿌리, 근원지,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리도록 하는 방식으로써 삐딱하게 증거된다. 시험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후사가 없는 자리에서
이미 죽은자리에서
부재성의 자리에서
나그네 자리에서
분향과 뿌리와 근원이자 처음자리가 찾아오심에 고마움의 뿌쓰래기임을 느끼는 자는
부재성으로써 다가온 그 후사없음의 부활이 너무 너무 미쁜 믿음직 스럽고 든든하고 안정스럽기 짝이 없음에 감탄해 한다.

나 같은 지옥 마땅히 가야할 비천한 개 에게도 목숨을 내어주시다니요?

비로소 자기 목숨이 부끄러워지고 미워진다.
그 내어주신 목숨 때문이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영생(생명) 조차도 부재성으로써 증거 된다. 누가복음은 그것을 잃어버림으로써 증거했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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