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The Road (2009)  
 
요약정보 스릴러, SF, 드라마 | 미국 | 111 분 | 개봉 2010-01-07 | 
홈페이지 국내 www.the-road.co.kr/index.htm | 해외 www.theroad-movie.com
감독 존 힐코트
출연 비고 모르텐슨 (남자 역), 샤를리즈 테론 (여자 역),
가이 피어스 (베테랑 역), 로버트 듀발 (노인 역), 코디 스미스 맥피 (소년 역)  

줄거리 생략 : 아래 사이트 참고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31272





영화를 보고난 후

영화 더 로드를 봤다. 뭐 성경을 뛰어넘는다는둥 하는 소리와 또 종말 곧 죽음을 생각하는 부류의 영화라서 보게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화는 재미 없다. 소설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야 또 홍보에 속았구나

그러나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 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할수 있었다.

전도서 7장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냐하면 인간이란 이 죽음 마저도 우쨋던 간에 미화 할려는 의식이 참으로 강하다.
(살고자하는 욕망 죽고자 하는 욕망)
죽음 조차도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마침 요한복음에 대해 수련회강의를 들은 터라
딱 마침맞게 연결점을 힌트 삼을수 있었다.

늘 궁금한게 왜 선한목자는 삯꾼목자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왜 죽었뿌리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목숨을 내어줌에 대해서는 모든 삯꾼목자들이 다 외치는 설교요 해석이다.

이번 강의에서 요한복음은 왜 초반부에는 그렇게 화려한 빛이라고 떠벌리고서는 마지막 부분에는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더이상 나타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 아 이거구나 라고 힌트 얻었고
마침 이 영화가 다시한번더 확증을 해 주었다.

왜 홀연히 떠나가야만 하는가? 늘 곁에 있어주질 않는가?

그것은 바로 육을 가지고서 영을 증거하는데 그 차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로드 라는 영화에서 세상종말이라는 이미 저주와 심판이 실행되어진 죽음의 환경속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과연 죽음이라는 이미 종말이라는 환경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생명의 축복일까 죽음의 저주일까?

살아남은자끼리 서로 먹고 먹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과연 이 아이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참 재미있게도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과거 라는 것이 있다.

반대로 이미 세상종말을 격은 저주의 땅(상황)에서 태어난 아들은 과거가 없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척박한 환경에서 이 아들만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과거 경험을 동원한다. 그럴수 밖에 없는 처지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날때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과거가 없는 아들은 그 낯선사람의 손을 잡을 정도로 공포와 두려움 보다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친구를 삼고자 나누고자 한다.

이처럼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역사 경험이 없는 미래 뿐인 아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과거가 있는 아버지를 당황스럽고 난처하게 만든다.

믿을게 따로 있지 죽음을 믿나? 인간을 믿나? 괴물을 믿나? 마귀를 믿나?

그러나 아들은 과거가 없다 그래서 일단 친구인지 아닌지 과거가 없다는 이유로 역사와 경험을 체험하고자 하는 실험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유일한 더 로드 즉 길은 과거 삭제 만이 유일한 길이다는 것이다.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과거라는 육은 떠나주고 퇴장 되어 주는 것이 길이다는 것이다.
(과거 없는 아들이 아버지의 과거를 삭제케 하는 미래인 것이다. 아들 땜에 아버지가 산다.  이 영화는 꺼꾸로 부성애라는 사랑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왜 육으로 오셨는가? 육으로 오셨다는 것이 영이다.
그리고 모든 육의 마침이 되었다. 홀연히 떠나버렸다.

남아 있는 양들은 당황스럽다.

이제 같은 운명의 양이 아닌 이상은 선한목자의 목숨버리심을 알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육이라는 과거 삭제 만이 유일한 길이다.


왜 예수님께서 육으로 오셔야만 할까? 이것만이 영이다. 과거를 삭제, 육을 삭제하러 오신 것이다. 근원 파재끼기

그런데 인간들은 육에서 영의 길을 가겠다고 영적존재가 될려고 한다. 영의 실적 높이 단계 단계 쌓기.

정작 예수님이 육이 되신 사건만인 영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육체라는 역사, 과거, 경험, 실적, 자취를 모두다 파재끼고 지워버리고 삭제하는 판국에
인간은 반대로 영적인 실적을 쌓겠다고 계명지키기에 나선다. 사랑은 없으면서 사랑 모양은 모든 구색을 다 갖추는 식이다. 능력은 없으면서 모양은 완벽하게

인간에게 지킴의 구색을 허용하는 계명이란 없다. 계명은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다. 계시이기 때문이다.
계명은 계명 스스로 지킨다. 말씀은 말씀 스스로가 지킬 뿐이다.

그 말씀이 육이 되셨다.

그리고 모든 육의 마침이 되신 것이 바로 처소마련이다.

완료란 운명론이나 숙명론이란 예정론 처럼 인간이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완료란 모든 인간을 못 밖겠다는 것 외에는 예정된 것이 없다.

과거를 삭제 곧 육을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비로소 다윗은 드디어 찬양을 외친다.

내 과거가 사라졌군요 라고 회개와 눈물과 금식과 기도는 멈춰버린다.
그리고 이 꺽으신 뼈로 인해서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베푼다.

꺽으신 뼈로 인해서 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삭의 제사 곧 예수님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모친의 죄중에 태어난 육을 끊어주었다. 육의 마침이다. 저주의 종지부이다.
더 이상 고소자에게 고소당할 육체가 없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렸다.

후손이 부모를 살리는 셈이다.

미래가 과거를 삭제해준 셈이다. 그래서 완료다. 완료 된 이상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다.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과거가 삭제된 완료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율법(시공간에 저촉되는 육체를 겨냥한 죄 아래 가두심 곧 행함이라는 사적인 실적과 원인 결과물)의 마침에
성령이라는 처소는 보증수표이다. 곧 보혜사이다.

확정적인 더이상 다른 인증권이 없는 예수님이 친히 예비한 보장한 유일한 하늘에서의 발행권이다.

이제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처소에 발을 들여놓을수 없다.
육의 사람은 절대로 갈수 없다.
그 처소는 오로지 유일한 육으로 오신 영인 예수님이 그 사람의 과거를 홀라당 홀연히 다 태워버린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것도 아주 아주 얄밉게도 절대로 과거를 삭제 당하지 않는 자 앞에서 그 차이성을 뻔뻔스럽게 비교하고 까발리고 들추어내고 육됨을 유발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도저히 육인 인간에 거룩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 소경 중에 소경, 과부 중에 과부, 이방인 중에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문둥병자. 창녀 중에 창녀, 세리 중에 세리, 강도 중에 강도, 이스라엘 중에 망한자. 이스라엘 중에 비천한자.
고아 중에 고아, 과부 중에 과부, 나그네 중에 나그네 등등만을 골라 골라서

자신의 치밀하고 세밀한 한치 오차 없는 과거 삭제 육의 삭제의 인자가 들리는 십자가의 피의 영광성을 바로 죄인 중에 괴수를 활용해서
제대로 지우고 삭제하고 차단하고 단절했음을

보라는 듯이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가장 의인이라고 칭송 받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의인 중에 의인, 성화론자 중에 수준 높은 성화론자 등등의
코 앞에서 철저하게 모순 되는 흑백의 차이로써 드러내신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날때부터 소경, 죄인 삭개오 세리 등등 도저히 용서 불가능한자를 동원해서
도리어 저들의 용서못함의 미움을 역전으로 뒤짚어 씌인다. 마치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이
육으로 오신 예수님의 기준에서 실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이 영이고
반대로 인간이 영적인간이 될려고 하는 것이 육인가 라는 그 대비성을 볼때에

소위 영적이다 라는 해석이 우찌 육인 인간에게서 포착되고 해석이 될 것인가
도리어 육으로 와서 육의 종지부를 찍어버리는 그 삭제 만이 과거삭제 만이 유일한 처소요 사랑임을

예수님은 십자가만 남겨버리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이제 어떤 접촉점이 없이

오히려 철저하고 한치 오차 없는 저 십자가 라는 단절성만이 접촉은 커녕 삭제 삭제 뿐인 저 단절성만이 유일한 성령의 활동이다.
이 일을 인간에게 맡긴적도 없고 일체 양보도 없다. 도리어 멱살 잡혀 성령의 단절성을 똑똑히 보는 목격자로써 그 단절성 곧 과거 삭제만을 당할 뿐이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선한목자란 과거라는 육을 삭제하는 분이다.
그러나 삯꾼은 그 과거의 경험을 미래를 뚫는 기술로 활용하라고 더욱더 기술연마를 요구한다. 육의 가능성이다.
육의 단절성이 아니기에 자기목숨을 사랑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선한목자의 운명과 같지 아니한자요 양도 아니다.

같은 운명이 바로 완료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인자가 들려야 하심으로써 다 이루셨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이제 양은 과거가 삭제 당하는 미래 뿐인 완료만 남아있을 뿐이다.

같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 처럼

성령이라는 처소를 예비하셨을 뿐이다.(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하늘의 성전)

그래서 교회(눈에 보이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에 속을 필요가 전혀 전혀 네버 네버 없다.


길(Road)이란 다른 모든 길을 막음으로써(삭제,파재껴 파헤침) 단 하나 만의 유일한 길이 드러난다. 다른 길과의 차이성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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