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찬송이 될지라 (원수만이 외쳐 부르는 사랑 노래)

(창 49:8, 개역)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나는 전설이다 (2007I Am Legend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2884

요약정보
스릴러, 공포 |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 97 분 | 개봉 2007-12-12 |
홈페이지
국내 wwws.kr.warnerbros.com/iamlegend/ | 해외 iamlegend.warnerbros.com
제작/배급
워너 브라더스(제작),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배급)
감독
프랜시스 로렌스
출연
윌 스미스 (로버트 네빌 역), 앨리스 브라가 (안나 역), 찰리 타한 (에단 역), 샐리 리차드슨 (조이 역), 윌로우 스미스 (말리 역)  출연 더보기







미인도 (2008)  美人圖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6334

요약정보
드라마 | 한국 | 108 분 | 개봉 2008-11-13 |
제작/배급
이룸영화사㈜(제작), 영화사참(제작), CJ엔터테인먼트(배급)
감독
전윤수
출연
김규리 (신윤복 역), 김영호 (김홍도 역), 김남길 (강무 역), 추자현 (설화 역), 한명구 (정조 역)  출연 더보기
 



 
 
 

스승님 제 그림은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그림으로 그 누구도 해치려고 마음먹은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어째서 오도 하시는 것입니까. 그저 자연스러운 인간. 사랑하기때문에 유혹받고 흔들리는 그 연약한 마음이 아름다워서 그렸을뿐입니다. 다른이는 몰라도 스승님만은 알아주실줄 알았습니다




미인도 라는 한국영화와
나는 전설이다 라는 미쿡영화를 봤다.

두 영화 속에서 나오는 공통점인

우리가 더럽고 속되고 병들었다 라고 판단해서 뜯어 고칠려는 그 더러움이 도리어 가장 아름다움이였고
반대로 그렇게 판단하고 정의를 추구할려는 그 의로움이 바로 악마적아였다는 것이다.

가장 성스럽고 거룩한 것이 가장 더러운 것이며
가장 더럽고 추하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 가장 아름다움이다 라는

그 팔을 어긋맞게 하는 사랑

사랑 앞에서는 그 근원들이 엑스레이처럼 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소경이 건강한척 했고
그들의 죄 연구 대상이였던 날때부터 소경이 비로소 참 빛을 외친다.

이 실로암 소경을 미끼로 삼아서 빛을 외친적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인간들의 본다고 하는 가면을 하나 하나 벗겨버리는 것이다.

충돌과 거치는 부딧힘을 통해서 누가 과연 동행자인지를 밝히신다.

구약때나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교회는 가증한 인간들만 다 모으셨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으신다.
찬양자를 찾으신다.

누구도 예상 못한 원수들이 찬양자였고
찬양자이다 라고 자부하면서 늘 찬양하던 자들은
찬양자가 아님을 그 자리에서 밝히심과 동시에 그 같은 자리에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는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음성과 소리와 노래를 안다.
양도 목자의 음성과 소리와 노래를 안다.

둘 만의 싸인과 표적인 십자가로써 말이다.

================================================


유다는 찬송이 될지라 (원수만이 외쳐 노래 부르는 사랑)

(창 49:8, 개역)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성(거룩하고 성스러운)과 속(더럽고 속된 것) 사이에서 피어나는 불가능한 사랑


모든 인간들은 성과 속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선악에 따먹혀서 보게 된 눈이요 갇혀버린 구조이다.

[정녕 죽으리라]에 따먹혀 버렸고
[죄의 소원]에 따먹혀서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에 다스림을 받게 되는, 죄에 갇혀버린, 죄에 의해 따먹혀버린 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결국 선을 행하는 것이 죄의 소원에 갇혀버린 꼴이다. 다른 해석이 나올수 없기에 선을 행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먹음직? 먹는 것 마다 먹힘을 당하고, 보암직? 보는 것 마다 모든 시선을 빼앗기며, 지혜로울 정도로 탐스러운? 소유하고 가질려고 챙길때마다 시험에 따먹혀 버린다. 그러니 가인 본인이 또는 모든 인간 본인이 아무리 성경까지 동원해서 나온 해석인 선이란? 선이 아니라 죄를 인위적으로 덮을려는 처세술(왜곡된 시선)을 겨우 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해석 당할 리가 없는 성경말씀이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말씀까지 얄밉게 나서가면서 그 죄의 소원에 더더욱 갇히도록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도록 하신다. 말씀이 인간의 돕는자가 아닌 도리어 훼방꾼처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는 말씀 때문에 더더욱 돈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도록 모든 인간을 돈에 따먹혀 버리도록 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인간이 나오면 나올수록 말씀을 지킨자가 아니라 도리어 말씀을 등 돌린자임을 부자청년을 통해서 밝혀내신다. 그럼 대뜸 나오는 소리는 그럼 우리보고 우짜란 말인가? 우야란 말이고? 외에는 나올 말이 없다. 진작 카지? 그 자아가 처음부터 없었던 따먹힘 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창 2:17, 개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주며 확정해주듯이 증거되는 사건이
두 제사 곧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이다.

이 두 제사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죽음과 죄가 덮쳐진 구조를 말해준다.
죽음과 죄에 의해 따먹혀진 인간의 이미지이다.

아니 제사 자체가 항상 곡식(식물)이 태워지든 피(동물)를 흘려 찢겨지든
그 사이에서 뛰어드는 산 제사가 없는 이상,
완료된 믿음이 미래(묵시)에서 뛰어들지 아니하는 이상,
제사 드리는 본인의 제사 행위에 따먹혀 버려 그 시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메섹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스데반을 죽인 그 의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가인의 제사도 아니요 아벨의 제사도 아닌 십자가의 죽음의 완료가 비로소 그의 선악 눈의 비닐을 벗겨버린다. 비로소 보게 되는 인물의 제사이다. 그 인물의 제사가 아벨에게 뛰어든 것이다. 방금 전에 스데반집사를 죽여놓은 원수인 자에게서 나오는 찬송만이 진정한 찬양인 것이다. 원수가 외치는 사랑.)

선을 행하고 죄를 짖이 아니할려는 자아에게 따먹혀버림당한 이상 더더욱 그 자아라는 허구는 원치 않는 죄 아래로 더 깊게 쪼여들어와서 목숨을 막아버린다. 몸 뚱아리 라는 육을 치기 때문에 결국 또 타협하게 된다. 지들끼리 생쇼를 한다. 막고 타협하고 풀어주고, 지가 지를 구원한답시고 괴물을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아름답게 탐스럽게 하면 할수록 괴물은 억지로 억지로 그 죄를 참아볼려고 해도 도리어 그 억압하고 누르고 쇠고랑 채워 참아본들 그 모든 사슬은 다 끊어지기 마련일 정도로 더욱더 결렬하다. 더 강하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제사가 가인의 제사이다.
가인에게 덮쳐진 죄의 소원은 우리에게 죄의 소원이 뭔가를 보여주고자 가인을 동원시킨 것이다. 가인같이 되지 말자 라는 소리는 더더욱 가인처럼 되자, 가인과 똑같이 하자는 말과 같다.

가인은 죄의 소원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기록이 되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꼴에 같은 인간이라고 저 인간은 되지 말고 이 인간은 되자라는 식으로 감사하게도 꼭 가인의 시선을 그대로 똑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도 성경을 안다고 하니 그런 해석이 나오지, 모르면 그런 해석이 나오겠는가? 가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무관심이 그런 판단 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몰라도 소용없다. 그 이야기를 본 이상, 그 이야기를 들은 이상, 그 이야기의 배경인 이 땅에 발붙인 이상, 모든 인간은 그 과거의 사건이 덮쳐진채로, 그 이야기에 따먹힌채로 벗어날 길이 없이 갇혀버렸다.

구조를 설정한 그 잠식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구조의 잠식 당했음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그 구조의 설정을 즉 예정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그 설정을 벗어나고자 몸부림 치는 가인이 반드시 그 구조에 깔아놓는다. 바로 행함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왜? 믿음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행함을 대조시키는가 하면 평생을 행함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오히려 믿음을 말하고자 다 소비되었던 것임을 증거한다.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이 아니요 주님이다 라는 것이다.

찬송이란 바로 가장 더러운 자인 원수가 그것도 가장 악날했던 부정한자의 위치에서 부르게 되는 것이 찬양이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없다.

그래서 유다 만이 찬송이 되는 것이다.

유다가 왜 찬송이 되어야만 하는가? 미래에 예수님이 개입되는 족보이기 때문에? 아니다 틀렸다.

예수님이 개입하는 이유가 바로 유다가 가장 예수님을 욕한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양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예정된 것이다.

뭐라고? 우찌 욕한 자가 찬양자가 되는가?
그렇다면 한 입에서 동시에 찬양과 저주를 외치는 것을 유도하고 조장하는 말이 아닌가?

라고

(약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대뜸 성경을 본 구절이 생각이 나서 반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해보자.

그 입구녕 속에서 나온 말들을 한 번 기억해 보자. 한 입에서 찬송 했던 적이 있는가?
그래 그래 옳다 옳다 ! 찬송한 적은 없지만 욕한 적이 없다 치자 !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이 말에 어떻게 해서든 [없는 자아]를 있는냥 갑자기 챙기기에 바쁘다. 고로 시험 들었다. 걸려 들었고 이미 따먹혀진 그 구조를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발설하게 된다. (바리새인이 격렬하게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방해하고 막아서면 설수록 그 새로운 해석에 기가막힌 중요 재료가 된다. 오히려 바리새인의 반항이 없다면 모호한 해석이 바리새인 때문에 또렷하고 명료하게 보인다. 역시 빛은 캄캄한 어두움에 빛나야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하는 증표요 싸인이요 보증수요인 흔적이다. 즉 아주 돕고도 돕는 손발벗고 나서는 최고의 공로자가 된다. 가룟유다가 아무리 벗어날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미 말려들었다. 그 최고의 공로자가 이미 되었기에 너가 맡은 바를 이제 개시하렴 이라고 주님이 리모콘을 누르면 아무리 멀리 있는 가룟유다도 기록된대로 스타트 하게 되는 것이다.)

가인은 그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더더욱 결렬하게 반항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벨은 저절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외친다. 어떤 누구도 아벨이 불쌍하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인만이 발버둥 치는 그 모습에 공감하여 비로소 그 주범자 곧 배후세력을 공격한다.

그 배후세력이 마귀인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화를 내는 소리가 마귀 때문에 화를 내는가? 천만의 말씀 !

모두다 하나님을 그 배후인물로 보고 화를 낸다. 왜 안 막고 뭐하느냐? 방치하느냐? 라고 따진다.

이 따지고 따지는 모습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아벨은 더더욱 완료성이 명료해 진다.

아무리 봐도 더 낫다. 더 나은 제사이다. 완료성이 미래에서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사울과 스데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 봤는데
이제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유다는 반드시 다말을 욕해야만 한다.
누가 봐도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다말은 욕 먹을 만 하다.

우리도 욕하자, 의심하자, 불태워 죽여버리자. 그런적 없다 라는 소리 하지 말자.
우리는 늘 욕하고 있다.

다말은 아무리 봐도 더럽다. 그 행동도 더럽고(우찌 그런 발상을 하는가?)
그 모든 이미지가 더럽기 짝이 없다.
반드시 더러운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이 나올수 없다.

그래서 화냥년이라는 욕을 외치면서 불태워 죽여야만 한다.

그 욕이 그 원수성이 어떻게 어떻게 찬양으로 바뀌는가?

반드시 찬양은 욕한 자의 입에서만 나오도록 한다.
반드시 사랑은 원수의 몸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 (죄인 중의 괴수인 괴물의 몸에서)
반드시 동행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충돌과 부딧힘과 거친반석과 걸림돌에서 나온다.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은 도저히 쳐다볼수 없는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차마 단 한 구석도 없는 싫어버린다 된 이미지이다. 모든 이가 고개를 돌려버리는 처참한 모습이요 모든 이들이 풍채도 아름다움도 없는 도리어 악마같고 어두움 중에 어두움이요 괴물의 이미지라고 확정지은 곳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흠모할 모양 없는 형상)
반드시 지혜는 어떤 누구도 동의를 못하는 곳에서 나온다. 즉 어리석음이요 미련함이다.
반드시 믿음은 행함에서 나온다. 어떤 누구도 행할 수 없는 행함에서만 나온다. 즉 모든 이가 손가락질 하는 행함에서만 말이다.(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님을 마귀의 손에 넘기우는 죄값을 치르는 제물삼으심이 바로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표현하셨다, 바로 이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피에 더러운 기생이 온 국가와 온 민족과 심지어 자기 가족도 비방받는 피에 접붙이는 전쟁붙이기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반드시 화평은 검이라는 칼 전쟁 속의 피비린내나는 싸움과 다툼과 불화 곧 똥파리(영화제목)에서 나온다. 불화케 만드는 불지름이다. 전쟁을 아예 때려붓는 것이다. 모조리 피 전쟁에 말려들도록 말이다.(마리아의 찬양)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왜 그런가?
반드시 왜 그래야만 하는가?
바로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어떤 누구도 힐문 못하는, 마귀조차도 송사 못하는 더 나은 것에 덮쳐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용납할 수 없고 수긍이 안된다. 힐문 못하기는커녕 더 힐문 꺼리요 조롱꺼리요 비방거리가 된다. 송사 못하기는커녕 송사에 더욱더 불 붙이는 벌집을 건드리는 셈이다.

누가 봐도 불 보듯 뻔한 내용인데 이 어리석음에 말려들 인간이 있으랴?
있다.

성령 받은 자이다.

반드시 구원은 심판의 자리에서만 이루어짐 보게 된다.
반드시 축복은 저주의 산(에발산)에서만 외쳐진다. 다른 산은 축복을 외칠 수가 없다.
반드시 생명은 죽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죽음의 자리에서만 생명을 보게 된다.
반드시 은사는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하나됨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공동체를 매일 매일 깨뜨리는 듯이 위기 속으로 광야 속으로 처음근원의 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 속으로 사람들이 싫어하고 밉상받는 원망의 소리만 외쳐지는 곳으로만 몰고간다.
반드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만 골라 골라 찾아 간다. 그 맹렬한 지옥의 문은 교회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원수의 문을 여는 유일한 것이 교회다. 지옥의 문을 도리어 닫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예수님)를 미워한다는 그 악함을 또렷히 증명하도록 되어 있다. 교회(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은 인간들의 악마성을 뚜껑 여는 것이다.
반드시 자녀는 사생아에게 없는 매로써만 증거 된다. 사생아 라는 존재가 없다면 매를 댈 필요 조차 없다. 그러나 사생아가 있다라는 이유만으로 이유 없이 자녀에게 매를 대신다. 자녀의 행동 여부에서 나오는 매가 아니다. 오로지 사생아 때문에 가해지는 매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못박는 십자가이다.
반드시 선한목자는 삯꾼들의 양등쳐먹기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목숨 내어줌이다.
반드시 얻음, 되찾음은 잃어버림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자는 찾게 되고,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어버리게 된다.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요 15:13, 개역)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란

왕 하나 깨끗하면 아무리 더러운 백성도 깨끗이 씻음받는 명료하고 뚜렷한 미흡함이 없고 완료된 더 나은 제사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되도 않는 허접하고 모호한 잡것들의 제사를 왕 같은 제사장의 제사와 대조하고 비교하는 그 차이성을 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자기자신이 바치고 드린다는 되도 않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행함들이 왜 완료인 믿음과 차이나는지를 뼈속까지 속속 누리면서 말이다.

거룩한 나라 라는 이 집단성에 인간의 거룩은 절대로 집단적이지 않다. 그저 남들 다 더러워도 나 하나는 그 거룩이 돋보이기를 원한다. 사적으로 소유된 사적 거룩이다. 더더욱 남들이 거룩해 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인의 해석이다(성화론이 그래서 가장 악마적이다). 그 가인의 범주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벗어날수도 없다. 그래서 거룩은 반드시 추하디 추한 더러움 속에서 온다. 외면해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얼굴이 타버린 일그러진 형상이다. 다말의 더러움이 도저히 인간의 선악에서 유다의 해석에서 나올 수 없는 거룩함이라는 것을 반드시 유다 지 입으로 외치도록 되어 있다. 욕한 당사자가 그 법적으로 욕하고 판단한 그 확정된 정죄를 뒤짚고 쌍수를 들고 찬미하고 환영하고 기뻐 춤을 출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거룩이다. 아무리 봐도 추하고 속되고 더럽기 짝이 없는데 말이다. 아비가 자기자식을 제물로 바치다니? 말이 되는가? 기생이 나라와 민족과 친척을 적군에게 팔아먹다니 말이 되는가?

이것이 우찌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가?

오히려 악하고 악한 짖만 골라고하고, 더럽고 속 된 것만 골라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슨 행함이요 무슨 믿음인가?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행함이요 믿음이다.

그 속된 것이 아름다움으로 증거된다고 하니 도대체 성경은 덕은커녕 상종 불가이다.

반드시 생명의 양식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그 살인과 피해자를 죽이는 그 살인행동으로써 주어지는 양식이라면 누가 먹겠는가? 살인자 되는데?

괜히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의 11 제자들과 가룟유다로부터 맹렬하고 격분한 지탄과 욕을 먹게 된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창녀는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그 여인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아름다운 노래로 영원히 남겨진다.

살인자를 기념하다니?
살인자 원수를 노래하다니?
비천한 더러운 여자를 하늘 높이 높이시다니?
쓰레기 탕자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가치있다고 동네 잔치 까지 벌리시는 잃어버린 1원짜리 동전 찾았다고 이 세상의 모든 돈을 허비하시면서까지 잔치를 벌리시는 피 값을 치르는 사랑은 반드시 쓰레기 탕자에게만 벌어지는 잃어버린자에게만 부으시는 선택이요 죄인만을 부르시는 구원이다.

그래서 자기 목숨값 피 값을 무가치하게 어리석게 허비하는 그 모습이
12제자들의 극렬하게 격분된 강렬한 반발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부어지는 그 값비싼 향유를 깨뜨림 곧 충돌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장 기쁨의 노래로 높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노래 아니하고서는 못 배긴다.
내 노래 나의 찬양을 늘 틀렸음을
내가 욕한 저 창녀의 노래가 내 노래 보다 훨씬 나은 노래요 옳다고

이제 우리가 그 화냥년이라고 욕한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을 찬양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은 그 자리
그 원수의 자리에서 내가 죽인 예수님이 참사랑이라고 찬양하며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