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의 인간과 십자가(묵시적사건)만 앞장세우는 예수님

2008-01-14 20:17:34

우리가 우리 시간을 안 살고 주님이 시간을 살려고 해도 주님이 주지 않으면 결국 우리 시간을 살아가는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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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21:45:11

우리가 우리 시간을 안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 하기에 뒤의 주님의 시간도 역시 불가입니다.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불가능의 표현이듯이
반대로 예수 밖에는 무조건 정죄함 뿐인 선악체제이기에 여기에서 벗어남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의 숙제 뿐이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시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의미가 바로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라는 표현입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즉 인간은 시간을 정치화 경제화 종교화 시킵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시간이 인간을 다루고 놀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 때문에 정치적으로 놀수 밖에 없고, 경제적으로 놀수 밖에 없고, 종교적으로 놀수 밖에 없습니다. 갇혀버렸습니다. 막혔습니다. 이것을 뚫을 자는 없죠.

그래서 잡히지 않는 시간을 소유했다는 착각속에서만 놀수 밖에 없는 시간에 철저하게 갇혀버린 의미만이 인간에게 놓여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막힌 것을 뚫어야 한다는 그 결핍성만이 더더욱 현실로써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압박합니다.

즉 시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종교화 시킨 유명한 말이 있는데 세뇌 당해 버린 말이 곧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겠지요.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시간, 주님의 시간 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으로써 저는 판명이 된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영원하다 라는 의미인데

그 영원이 시간적인 영원성이 아니라
관계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 나의 소유 개념에서(내 신체를 기준으로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재료로 하여서 미래 라는 것까지 그 소유를 확대하고픈 겁니다. 그런데 미래는 내가 소유해 버리면 더 이상의 미래가 아니라 소유된 현재이고 다시 미래는 또 다시 미래로써 소유되지 않은채로 남습니다. 이것은 곧 저는 선악과를 따먹은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죄악에 갇혀 버린 모습으로써 설명하고 싶네요. 하나님을 정복하고픈 곧 소유하고픈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추구합니다. 그 내막을 까발린 것이 십자가라는 사건(묵시)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거죠. 죄의 소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정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미래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결정되어버리면 과거에 이미 판정된 결과로써만
자기들의 미래가 닥쳐올 뿐입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서
십자가의 사건까지 발생함으로써 인간의 미래는 고정화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역사를 깨뜨린 묵시만이 인간들에게 닥쳐올 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만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덮어버린 것이 바로
이미 창세전에 언약으로써 예정된 일인 겁니다.

자 그럼 질문 속에 예수님의 시간 속에 우리가 들어간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시간마저도 자기 구원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고 저는 봅니다. 즉 오늘날 모든 신학의 사고방식입니다.
즉 자아가 여전히 고수된 채로 들어간다는 전제성이지요. (이것은 이미 종교의 대표성인 유대교에서 드러났고, 현대의 최고의 종교인 불교가 늘 꿈꾸는 허상입니다.)

예수님의 시간 속에 들어갈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자기 육이 못 박혀야 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이 육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은 자기부인을 하는 일에 동원됩니다. 즉 육의 차단이지요. 지우개 단절 분리 구별 등등등

자 그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해석을 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성에 놓였다는 이 의미는 십자가에서만 해석 됩니다.

왜냐하면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원성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시공간이 소모품으로써 도구로써 사용이 되는 겁니다.

결국 사랑만이 나타내기 위한 소품인데 인간은 시공간을 잡을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십자가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피를 앞장세우는 길만이, 즉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가 사랑을 알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대신 십자가(매맞음)를 지심이 아니면 사랑에 차단 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미리 그 심판(매맞음-저주)성을 자기 신체에 담고서 이 땅에 이 역사에 출현합니다.

그럼 이 땅은 이 역사는 이 선지자를 중심으로 인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태양과 달이 멈추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모습 등등은

시공간을 이 인자 중심으로 소모되는 소품으로서 사용되기에
선지자들은 저주를 자기신체에 담아서 미래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 매를 맞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더더욱 시공간의 알리바이를 확보하여서
돌을 던질 수밖에 없도록 감추어진 죄의 소원을 선지자에게 다 퍼붓습니다.

바로 이 사건만을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전체로써 모든 사건에 확정된 채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인간은 확정된 언약의 사건 보다
자기만의 고유 영역과 침범 당하기 싫은 시간을 따로 설정하고 거기서 신을 만들어내는
강퍅한 마음이 이미 정해진 채로써 반드시 그 역할을 하고서 누락되어야만 하는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마치 마귀가 자기 멋대로 행동 못하고 철저하게 마귀를 이용해 먹을데로 다 이용해 사용하듯이 말이죠)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그럼 처음부터 예정된 대로만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해 버리면 자아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나요?
설사 머리로 인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정해진 대로 행동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 묵시는
사랑의 관계성에서는 무지 무지 넘치는 사랑만 부각이 되지

자아성은 일체 개입이 되지 않는 철저하게 소외된 입장이기에 자기의 고유영역인 시공간이
따로 마련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종교를 가진다. 또는 신을 믿는다 라는 그 믿음도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투자입니다. 그 투자한 만큼 자기 영역을 따로 구비하여서
소유하고 확보하겠다는 발상인데

예수님의 믿음만큼은 안 속습니다.
왜냐 예수님의 믿음은 그런 투자가 아니기에
아예 자기 살과 피를 그냥 더 허비해 버렸습니다.
아무런 댓가성 없이

앞으로 미래에 너희들이 나를 더더욱 믿어주길 바래 라는 댓가를 바라고 허비한게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은 허비되는 겁니다.

오로지 한 놈만 패기 위한 겁니다. 죄입니다.

결국 역사란 묵시에 의해서 밝혀져야만 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죄의 실체를 역사(시공간)속에서 철저하게 다 까발려져야만 하는 겁니다.

즉 이 역사(시공간)를 공격하는 묵시(사랑=말씀=계시=십자가)는
왜 역사가 타버려야만 하는 가를 사랑을 통해서만 증명됩니다.

그래서 새창조 새하늘 새땅의 대조로써

사랑은 오로지 죄를 통해서만 증명이 되는 겁니다.

철저한 불공평으로만 증명되는 편애이기에

생명의 나무는 선악과 나무로써만 구별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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