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12 17:23:41,

사도행전 21장 11절에서 아가로가 바울에게 성령에 임한 말씀을 했는데도 왜 바울은 죽을것을 각오하였노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아가보의 예언 08.01.12 20:31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아가보에게 임한 성령은 곧 바울의 운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주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운명과 연관된 자임을 밝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아가보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 성령을 소유했기에 그 예언대로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저 무당이나 마찬가지 이겠지요.

 

그러나 사도행전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아가보에게 바울이 알려주는 성령의 메시지는

정작 바울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가보는 도리어 그 성령이 알려주는 내용을 믿어야 할 판국입니다.

 

남 걱정 할게 아니라. 본인이 정작 그 성령으로 인해서 알게된 메시지의

방향성은 십자가에 있다 라는 것을 도리어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마지막에도 바울이 성령의 인도로써 수많은 지역에 복음의 메시지를 알려 줬지만

그 뿌려진 복음이 복음답게 될려면 바울이 증거한 사람들은 다 믿어야 겠지요.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바울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스스로 귀 없는 자와 귀 있는자를 가려내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증거한 바울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인 겁니다.

 

내가 증거 했으니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성령을 자기 소유로 봐서 그런 겁니다.

그 반대로 성령의 소유가 되어서 복음의 현장에 목격을 하면

아 복음이 이 두 패로 나누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나누는 일이 바로 약속이 벌리는 일이구나 임을

바울은 새롭게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한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증거합니다.

여지껏 돌아다닌 곳에서의 복음을 듣는 자를 성령은 두 패로 나누었단다 너는 믿느냐?

라는 성령의 질문에 바울은 아 나는 아니군요 성령님이 지금껏 증거하셨군요.

그래서 이사야 예언대로 성취 하시는 군요. 들을 귀 있는자 듣고 들을 귀 없는자는 못 듣는 군요. 제가 비로소 이제야 그 예언의 말씀이 성령님이 성취하심을 보게 됩니다.

제가 하는게 아니라 영들이 가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라는

고백이 바울이 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가보도 성령을 받았기에 성령이 바울을 어떻게 죽인다는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주는게 아니라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인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을 받은 아가보에게 약속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약속은 바울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려 줬기에

그런 인간의 걱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약속이 벌리시는 일관된 일의 방향성을 아가보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부분으로만 알던 아가보는 이 약속이 벌리는 큰 숲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영의 일은 절대로 인간이 못합니다. 그것이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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