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을 사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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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5:1, 개역)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2, 개역)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 55:3, 개역)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사 55:4, 개역)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사 55:5, 개역)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사 55:6, 개역)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개역)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1, 쉬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사 55:2, 쉬운)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사 55:3, 쉬운)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다윗에게 약속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사 55:4, 쉬운) 『보아라. 내가 다윗을 온 민족 앞에서 내 증인으로 삼았고, 많은 나라의 통치자와 지휘관으로 세웠다.』
(사 55:5, 쉬운) 『많은 나라들이 너희에게 복종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너희 하나님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너희를 높이셨다.』
(사 55:6, 쉬운) 『너희는 찾을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여호와를 불러라.』
(사 55:7, 쉬운) 『악한 사람은 그 길에서 돌이키고, 죄인은 자기의 악한 생각을 버려라. 여호와께 돌아오너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다.』

이윤자 권사임이 질문하신 젖과 포도주를 사라 라는 의미가 나중에 알고보니 너무너무 중요한 의미라서 다시한번 더 생각하게 된 기쁨을 누릴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젖과 꿀이란 가나안 땅이라는 약속의 땅을 언뜻 생각날 정도로 그런 그림자를 동원해서 실체되신 예수님 나라를 겨냥한 약속을 두고 말함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약속)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 차이성으로 약속이 아닌 것을 가지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비언약입니다. 이 비언약의 속성을 광야에서 모조리 들추어 내십니다. 이 비언약의 요소는 절대로 약속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땅의 것입니다. 그 분리성이 바로 광야에서 펼쳐졌듯이 우리 또한 이 비언약의 요소를 들추임을 받는 광야교회로써 왜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는 가짜 젖과 포도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 55:2에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 라는

이 좋은 것이 뭔가 라는 것을 광야라는 인생에서 밝히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밝히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마귀가 심은 겁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비언약적 요소인데 이것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못들어가는 것이 약속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나를 위한 양식이요 나를 위한 구원이요 나를 위한 천국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나타납니다. 마귀가 심은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숙제는 이 마귀가 심은 것을 들추어냄과 동시에 주님이 따로 준비한 좋은 것을 심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마귀가 심은 좋은것에 길들여 졌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이 새로 준비한 좋은 것 기름진 것을 먹이신다고 했을때에 주님은 이 두 가지 숙제를 다 해결하셔야만 하는 겁니다.

먼저 이 좋은 것(젖과 포도주)가 뭘까요?
비언약에서는 이 좋은 것은 자기를 위한 땅의 양식이요 마귀가 심은 것으로써는 내 배를 불리우는 떡이요(경제), 나만 이뻐해주고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편애이고(종교), 나만을 높이 높이 높여주는 나를 자랑하고 나의 이름을 떨치게 하는 영웅담이 되게 하는(정치) 것이 바로 인간과 마귀와 이 땅의 것에 해당 되는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은 이 비언약의 소욕을 방해하는 걸림돌로써 새롭게 준비된 좋은 것입니다.
마 7장에서는 이 좋은 것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 좋은 것이 눅 11장에서는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 2장)

(마 7:11, 개역)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약속의 좋은 것으로 인해서 상대적인 차이가 나버린 비언약의 배부름은 결국 아무리 먹어도 쉼이 없고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 그 자체인 갈증 결핍이고 쉼이 없는 수고, 즉 무거운 짐만 계속 더 점점 더 가중케만 되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되는 올무인 겁니다.
(경제-땅의 양식(결핍) vs 하늘의 양식(주님의 살과 피=안식(주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심))

둘째로 그 배고픔(가난함)에 기적을 바라는 요소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편애를 소유할려는 종교적 욕망을 부추기는 악한세대의 기적인 선민과 구원과 선택으로 다가오는 편애는
정작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버림받는 모습으로써의 아무도 보기를 원치 않는 싫어버린바 된 버림받는 지독한 미움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저주(버림)입니다.
(종교-자기구원 자기사랑 자기유익 자기편애 vs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지독한 미움의 저주의 십자가)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악의 실체인 자기가 곧 하나님됨을 추구하는 가장 높이 되고자 하는 왕 영웅 임금이 될 수 있게 하는 젖과 포도주를 주님은 반대로 나를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드시는 왕이 아닌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정치-왕이란 섬기는 자,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

자 이렇게 해서 가짜 왕과 가짜 신과 가짜 양식과 가짜 언약과 가짜 거룩 등이 이 광야에서 들추어 지는 겁니다. 사랑은 이 지적하시는 땅과 하늘의 차이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이 땅의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 사랑으로써
도리어 이 가짜인 땅의 것을 가지고 약속에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려는 탐심 곧 우상을
예수님 나라에서도 주장할려는 자일 것입니다.

결국 젖과 포도주는 인간들이 먹고 마시기에 기분좋아라가 주시는 땅의 양식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 인 땅의 것을 걸러내고 갈라내고 차단 막아서는 걸림돌인 십자가입니다,

이 젖과 꿀 이라는 좋은 것을 사람의 뜻으로 해석한 자들을 광야에서 다 걸러내시는데 있어서 그 젖과 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그들의 탐심을 자극하니까, 숨겨진 마귀가 심은 것이 드러나니까) 또 실족케 되어 (자기를 위한 살과 피가 아니라서 실망하여 분노케 만드는 안색이 변하게 되는) 젖과 꿀 곧 약속의 거부자로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젖과 꿀이란 결국 자기 배를 위하여 좋은 것으로 생각한 우상화 된 인간의 뜻인 육의 생각을 드러냄과
또 젖과 꿀이라는 좋은 것을 통하여 주님 자신의 살과 피로써만 먹이시고 마시우게 하겠다는 약속의 고집이 담겨진 의미로

이 두 의미를 드러내면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을 남기기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정 하신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질투인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의 의미만을 드러내신 겁니다.

(롬 5:8, 개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결국 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육인 우리 인간이 얼마나 좋아하는 것이 아닌 싫어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내고, 또 말로는 원한다고 하지만 정작 아무도 원치 않아 고개를 돌렸고, 무조건 싫어버린바 된 침뱉고 때리고 갈기갈기 찢어버려서 쓰레기 취급하여 버리고 내팽개쳐버린 멀리 멀리하고픈 무조건 지독하게 미워한 역설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좋은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인 약속 성취입니다. (부활해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주님의 살과 피는 인간의 소욕을 박살내면서 다가오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죽도록 미워할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증거물로(증거궤에 담고) 증거하시는 약속(피)이기에 아무도 이 약속을 감당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반드시 비언약의 속성(원수됨, 원망의 증거)를 동원해서 그 차이성으로서 언약(피)을 사랑으로써 증거하신 겁니다.

우리가 우리를 칭찬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도저히 용서 불가능 한 것을 용서하는 자기 사랑을 확정하고자

우리를 더더욱 원수로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그 원수가 바로 우상 조각가인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비언약) vs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 둘을 상극으로 대치 시킴으로써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자신이 약속을 성취하는 열심과 vs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는 열심으로인해 서로 두 상반된 정반대의 모습에서 약속의 성취가 됨으로써 아브라함을 원수로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반전으로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자신이 완성하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이라는 기업을 주시는데 그 기업이 바로 자기자신 그 자체로써 다가오는 관계성입니다.

(눅 6:32, 개역)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 6:33, 개역)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개역)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 6:35, 개역)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6, 개역)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결국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아브라함이라는 원수라는 대상으로 두심으로써 다가오는
언약의 완성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원수인 아브라함이요 그 원수에게 값없이 주어진 피값이 바로 약속으로 다가온 누구 누구의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이 누구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면 원수 될 리도 없고 그와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 될 리도 없습니다.

결국 누구 누구라는 피조물은 오직 창조주의 약속성취를 드러내는 대상인 원수로만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은 필요 없고 죄인만 필요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우리를 원수 만들기 라는 불가능한 일만을 하시는 창조(사랑)자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인간 쪽에서 출발한 인간의 손에서 창작된 하나님일 뿐입니다.

사랑할 만 해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사랑할 만한 구석이나 모습은 일체 없는
그래서 오죽 못나고 못난이고 가망없고 기대할 가치가 없었다면 값없이 사라 라고 할 정도로 무의미한 한 낱 안개요 허무한 수에 칠 가치 없는 피조물이기에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으로 다가오는 사랑인 피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사랑을 받기에 이것이 약속의 의미와 정반대의 모습을 갖추는 도리어 피를 모독하는 모습 뿐인 땅의 생각만을 고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죄인에게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주제인 젖과 포도주를 사셔서 공짜로 주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언약행위입니다.

정작 믿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뿐인데 자신의 공로를 숨기시고 비밀로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은 비로소 자신에게는 아무리 봐도 믿음이 나올수 있는 구석이 없음을 알고
이 비밀의 낯설음을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쳐다봄으로써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믿음은 곧 예수님의 믿음이 덮쳐진 완성된 완료로써 더 이상 추가할 사항이 없는
십자가의 영광으로써 다가온 믿음입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자신에게서 나온 믿음이 얼마나 거짓이고 엉터리임을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 그 무화과 나뭇잎이 벗겨지는 노출을 당함으로써
자기가 자기 믿음을 믿고 실행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님이 이미 다 완료로써 펼쳐진 믿음으로써 날마다 다가오는 약속을 누리는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강한 믿음 보다 더 강하신 믿음으로 나의 믿음을 거부하시면서 다가온 믿음입니다. 나 보다 강하신 믿음이 옳았습니다 라고 육의 소욕이 참패하고 영의 소욕이 승리한 그 현장인 십자가의 사건 현장이 현실로써 구체화 되는 완성으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나의 믿음과 결코 썩여질수 없는 그 믿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나 보다 무조건 옳았습니다. 나 보다 강하십니다. 라는 그 차이성을 현재화 하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바로 뒤에 마태복음 12장에 이어서 안식의 주인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바로 안식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젖과 꿀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양식이라고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먹고 마시라 라고 하십니다.
만약 이 생명을 주는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결국 이사야가 젖과 포도주를 언급하면서 값이 공짜로 사라 라고 언급을 해도 인간 곧 육의 반응은 반드시 아무도 안 산다 라는 것을 이미 앞당겨 반증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의 의미가 더더욱 부각이 되는 약속 스스로만이 이 땅의 어떤 인간의 육의 호응이 없어도 넉넉하게 완료된 채로 증거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 라고 비로소 자신은 썩을 양식을 일체 줄 이유가 없다 라고 그 차이성을 제대로 증거하시니까

수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온 자들이 이 살과 피를 먹으라 라는 말에
비로서 다 떨어져 다시는 동행치 않는 겁니다.

주와 함께 먹고 마시지 않는 안식의 주인을 드디어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약속의 진면목입니다.

젖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로써
주님이 마신 쓴 잔과 쓴 나물인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따를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도 이 십자가를 돈없이 값치르고 공짜로 살 자는 이 땅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실자는 없습니다.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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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포도주와 젖을 사라 라는 말은 너는 때려죽어도 못 살걸? 이라는 말이다.
회개 하라 라는 말도 너는 때려죽어도 회개 못할걸 이라는 말이다.
즉 육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두 패로 가른다는 뜻이다.
이미 창세전에 결정난 그 완료를 비로소 포장을 뜯겠다는 것이다. 안식도 주인이 와서 개봉해야 비로소 두패로 나누어진다. 그 전까지는 알수 없다. 안식을 누려라 라는 말도 너 자체로써는 안식이 없다는 뜻이다. 누가 너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느냐 에 달린 외부사건에 의한 결정이다. 십자가 사건 뿐이다.

들을 귀와 들을 귀 없는 자로 가르는 것이 약속성취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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