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는 토기장이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6-29 22:20:26, 미래

예레미야 18장 19장을 보면 토기장이의 그릇이 나오는데

토기장이의 뜻과 부합되지 않으면 깨뜨린다고 나오고 계시록에 가서도 철장 권세로 깨부순다고 나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데 어리숙한  사람에게 시온산에 아무나 거하게 하며 장자가 되게 하겠느냐

주님은 무조건 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다

주님의 뜻에 맞지 않고 우상숭배하면 질투의 하나님이기에 철저하게 깨 부순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훈련받으며  절저하게 거룩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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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6-29 22:29:25, 미래

그 말은 맞는것 같지만 님과 그동안 대화하면서 주님을 느낀건  그것조차도 우리가 할수 없기에 주님의 긍휼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들로 생각되거든요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일방적인 편애로 주님이 다루시는것 아닌가요

주님이 주님의 자녀로 다루실때 자녀가 잘못되면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자기 자아를 죽여서 주님께 맡길때까지 다루신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봐야 하나요

그리고 주님의 조건에 맞아야   자녀로 인정하지 아무나 사랑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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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예를들어 만약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외친다고 했을때에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절대주권을 외칠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빌미로 도리어 역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용할까요?

토기장이란 그릇을 일단 소외 시킵니다.
소외 당하는 그릇은 이 땅에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버림받는 유일한 분입니다.

또 무조건이라는 의미는 그 대상자가 다룰 수 있는 입장에서 이미 떠난 문제이고
소외 되었다는 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무조건이란 오로지 무조건화 시키는 주체자에게서만 나올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토기장이를 운운한다는 자체는 곧
듣는 이스라엘이 아 우리가 토기장이의 마음을 몰랐구나 이제부터 토기장이 마음을 선지자 말을 통해서 알도록 하자 라는 취지로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너희들은 그릇 주제에 반드시 토기장이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 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도리어 렘 18-19장에서 나타난 토기장이란 그릇을 짖는데 있어서
유일하게 토기장이를 의식하는 그릇은 예레미야 본인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예레미야 그릇을 만들까요?

중간에 낑긴 미끼가 된 운명으로써 예레미야 그릇을 만드시는 토기장이입니다.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호소를 합니다.

주여 왜 저들은 여호와의 말씀은 안 듣는 것입니까?

(렘 18: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렘 18: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예레미야는 정작 토기장이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토기장이의 마음을
자기 혼자만 듣도록 모두 귀를 막아 버렸고 자기에만 들려오니까
정작 그릇으로 굽히는 자는 예레미야 본인 뿐입니다.

그리고 토기장이 라는 여호와를 증거하는 피조물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도록 하십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 곳에서의 외침은
선지자 본인들도 의미 없지 않느냐 라는 회의가 들 정도로 무의미한 외침으로 다가 옵니다.

이것이 바로 위의 질문에서 언급한 질투입니다.

질투란 왜 버리느냐 라는 문제를 놓고 투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는 입장에서
질문에 나타난 표현대로 우상을 섬기는데 있어서 양보없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레미야 서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데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투쟁하십니다.
그 마음을 남이 아닌 예레미야도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투쟁을 하시는 여호와를 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결국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창작하고 있는 토기장이의 모습이고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 토기장이에게 버림받는 진노를 당하는 그릇으로써
끝까지 반항하는 모습인 겁니다.

이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의 투쟁이
예레미야에게 까지 확대(? 겨우 한 사람에게 퍼진 것 뿐인데?) 됨으로써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당하는 버림받는 진노의 그릇의 입장에 철저하게 놓이게 됩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화냥년 취급해서 불에 태울려는 상황에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말은 딱 하나만 놓고 투쟁을 합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불의한 재물로서 맺은 약속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도 사도행전의 바울처럼 그 상황에 놓이게 됨으로써 자기가 한 것이 없이 성령이 모든 예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저 믿어야할 판국이었지 자기가 전도해서 남을 돌이키는 입장이 못되는 소외된 입장 뿐인 겁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붙잡거나 돌이키고자 하는 여호와의 활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약속만을 절대 포기 못하는 데 있어서의 이스라엘에게서 도리어 버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약속만을 붙잡고 오로지 언약만을 붙드는데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는 다말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왜 다말은 약속만을(부정한 모습으로만 나타난 불륜의 스캔들) 붙잡을까요?

사실은 우리는 미리 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막상 그 상황
곧 유다의 입장에서 그 이유와 해결점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습니다.

오로지 약속 하나에만 미쳐 있는 다말이 그 약속을 붙듬으로써
정작 다말을 불태워 죽일려고 했던 유다를 도리어 살려내는 사랑이 되고 만 겁니다.
저주에 뛰어드심 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원수에게 뛰어듬.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만을 붙들고 실행하시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소외 당할 수밖에 없고
또 이스라엘은 이 약속만을 붙잡고 실행하시는 여호와가 못마땅해서
자기들만의 하나님인 토기장이를 새로 구축하고 있습니다(국가 이스라엘 역사체제).

여기서 종말이 구체화 됩니다.

종말이란 약속 외에는 다 멸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종말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즉 불의한 재물인 불륜의 증거 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신체에 담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종말은 이스라엘에게는 반드시 취소 시켜야만 하는 걸림돌입니다.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예레미야는 눈에 보이는 가시입니다.

자 그럼 예레미야 18장 19장은 토기장이의 권한이 버림에 초점을 두고 진행이 되는데
정작 버림받는 자는 예레미야 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다름 아닌 하나님이 버리시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심판의 형벌을 받는
그에게 모든 죄악을 모조리 다 감당시키시는 모습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자 결론적으로
그 목사는 이것을 모릅니다.

철저하게 악을 버리는 훈련을 하면 이쁜짓으로 인해 긍휼의 그릇이 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노의 그릇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자기 의)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이쁜짓을 통해서 마땅히 선택받아야 라고 여길 수밖에 없도록
육의 자랑이 작용을 하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에이 그럼 난 빨리 포기 할래 그리고 어차피 내 손에서 안 될 일을 내가 미쳤다고 훈련해? 소용도 없는데 라고

마치 자기 스스로 포기한 것이 자기부인냥 나중에 육의 변명이 안 나올 것 같지만(왜 자기가 자기 스스로 절망 속으로 집어 넣었기에 설마 변명하겠는가? 라고 착각)

그러나 이를 갈며 주님을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심어버리십니다.
아니 창세전에 심겨진 그 마음이 드디어 본색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즉 선하게 훈련 한다고 선을 추구해도 또는 악하게 미리 포기해버려야지 라는 이 두 입장이 정작 자기자신만을 쳐다보고 하는 행동이기에 이것이 악한 진노의 그릇이다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 홀로 긍휼의 그릇으로써
모든 진노의 저주를 자신이 홀로 담당케 하나님이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에

모든 시선을 집중토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쳐다 보냐 안 보냐로 결정 나지
자기의 선한 행동이냐 악한 행동이냐 라는 것은 여전히 나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묵시적인 사건에는 관심 없고 자기 안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으로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자신을 치심 외에는 의가 없는데

자기가 자기자신을 치시고 버리시고 제물로 홀라당 다 태워버리시는 낮아지심
죽기까지 복종 하심 외에는 의가 없는데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행동을 성화되게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지적받을 일을 자기가 미리 없애버리겠다는 취지입니다.

이게 가장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지적받는 다는 것이 사랑의 관계성인데 사생아가 아닌 자녀이기 때문인데
지금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이나
또 지금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나

최종적인 의미를 나 때문에 버림받고 저주 받은 하나님의 자기 치심인 십자가를 나의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완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자기를 더 이상 지적받을 꺼리가 없는 자로써 계속 훈련 중인 이쁜 모습을 자기가 갖추는 겁니다.(미완료)

겂없이 주어진 긍휼을 자기가 쪽팔린다고 없애 버리는 일을 하고 있어서
긍휼의 피를 가장 무시하는 자로 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지독한 미움을 받은 악령의 거짓 선지자의 영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같은 양상으로써

종말(완성)로써 확정되고 있습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심

이 편애와 미움은 인간쪽에서 교체 시킬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토기장이에게 버림받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정작 내가 버림받지 않을려고 성화할려는 내 숙제에 정신팔려 있기 보다

왜 예수님만 버리시는지
왜 예수님만 죽음의 형벌을 받는지

나의 죽음 나의 버림이 문제가 아니라
 
왜 내가 아니고 당신입니까?

왜 버림 받을 이유없는 독생자 아들이 버림받는 독생자의 버림을
왜 죽음의 형벌을 받을 이유를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그 의인의 죽음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음과 죽음으로써 동행의 십자가 길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동행자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는 이상
그 무거운 짐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맷돌을 머리에 씌우는 꼴입니다.

단 한 개라도 그 훈련 중에 제대로 훈련 받은게 있냐 라고 물어보세요 단 하나만 제대로 완성한 것 단 한 개만이라도?
사랑이 없기에 결핍을 채울려고 하는 겁니다.
완료된 완성된 것 아니면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그 목사에게 지금 날 가르칠거나 남보고 훈련하라고 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고 하세요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쳐다보고 하는 일에는 선이냐 악이냐 라는 판단을 일체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유와 조건을 만들겠다면 이 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한 예수님이 증거를 세상에서 도리어 칭찬받고자 하는 주님의 종말을 역으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유 없이 무조건 현장에서 잡힌 중간에 끼인 미끼로써 배후세력인 악의 세력과 그것을 들추어내시는 약속이 벌리시는 일에 중간에 배치된 소모품 이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미말에 구경꺼리가 된 피조물의 영광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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