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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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2 21:31:50, 미래

창세기 11장 3절에서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 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역청과 진흙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

(창 11:1, 개역)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개역)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개역)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개역)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의 행동은 법적이지 않는 행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즉 선악적인 행동 뿐이며 모든 행동은 반드시 자기가 하나님(영웅신) 됨을 추구하도록 죄의 소원이 덮쳐진 육의 생각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법적이지 않으면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늘 염두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행동을 법화 시키고 철두철미한 완공불락의 캐슬 요새와 같아야 비로소 안심에 들어가는 이유는 모든 사고방식이 타인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 때문입니다.  

가인이 그래서 법적인 보호조치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법적인 보호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마표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미움받는 저주의 십자가의 버림을 받아도 상관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미래의 예수님의 완료된 십자가의 사랑을 미리 앞당겨 받은 자가 바로 아벨이요 아벨은 그냥 아무이유없이 미움받은 죽음만 남기고 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이마표가 정작 법적으로 자기를 보호할 지는 몰라도
그 이마표로 자기의 죄를 정당화 하는 법적인 구실에 도리어 얽매이게 됩니다.
(율법이 가입 됨으로써 죄를 더하게 되듯, 가인은 무슨 짓을 해도 미운짓만 골라서 하는 죄의 소원이 덮친줄도 모르고 그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법적인 보호막인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를 스스로 가리우는 위선적인 모순속에 철저하게 빠지는 모든 완벽한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는 그야말로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는 모습이 됩니다. 늘 결핍)

법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넘어 뜨리는 올무인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마표를 줌으로써 가인을 보호할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가인의 사고방식을 퍼트려서 세상이 악하다 라는 것을 증거함으로써 선악의 법으로 자기를 챙기는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정당화 하는 겁니다.
(지혜는 그 하시는 일로 옳다 함을 받듯 무조건 지혜가 옳은 겁니다. 심판이 옳았습니다. )

이런 자들을 퍼트려 놓음으로 말미암아 빛이 벌리시는 전쟁에 어두움의 실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법만 붙들려는 이런 가인의 후예들이 노아의 홍수심판을 의식하고 약속이 벌리는 전쟁의 상대적인 행동으로써 법으로 완전 무장한 성을 쌓는데 있어서 반작용으로 나오는 행동이 바로 자기 이름들이 흩어지는 것은 방지하기 위한 결속력을 성 쌓기에 전념합니다. 바벨탑 곧 구원의 문(하늘의 통로=구원에 대한 결핍채우기)을 제작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을 의식한 상대적인 행동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함, 원수 갚음도 여호와께 속함, 인간은 어떤 권리도 없음)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리고 아주 중요하게 잘 언급해 주신 질문처럼 진흙으로는 부족해서 역청으로

(창 6:14, 개역)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창 11:3, 개역)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4:10, 개역)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출 2:3, 개역)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사 34:9, 개역)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으로 하는 이유는

진흙으로는 결핍하기 때문에 그 결핍을 더 강한 것을 통해서 채울려는 상대적인 행동이겠지요 즉 선악적인 법적 행동입니다. 선악적인 행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1 : 850 아세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 총 850명 과의 대결에서 (왕상 18: 19-46)
850명의 행동은 동일하게 선악적인 행동입니다.
즉 작은 소리면 안된다는 상대적인 큰 소리이고
지성이면 감천이기에 자기열심을 그냥 내면 안되고 울부짖음이라는 자학(자해-인간의 회개를 받지 않는 이유는 자해이기 때문, 메조키즘)을 극대화 하는

(왕상 18:28, 개역)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신에게 자기고통 자기아픔 자기눈물 자기충성으로 지극정성의 모습은 상대적인 대충 그까이꺼 대충의 비정성이면 안된다는 의식 깔린 상대적 행동 입니다. (좀더 나은 행동, 선한 행동, 신에게 가까운 신을 닮은 행동)

바로 이것을 엘리야는 놓치지 않고 공격합니다.

그래가지고 하늘에까지 들리겠느냐? (소리 작다 더 크게 모기 소리네 잠 온다 잠 와)
라고 놀려먹습니다. 즉 선악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발하는 겁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며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단 주위에서 뛰어 놀았고 이에 오정쯤 되어 엘리야는 저들에게 "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길을 가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모르니 큰 소리로 부르라"고 조롱하였다.

(왕상 18:27, 개역)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또 충성 봉사 라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모습을 그렇게 해서 신이 움직이겠느냐 더 열심으로 더 충성과 더 봉사함으로 깨끗함과 성화됨을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해야 되지 않느냐 라고 놀려 먹습니다. 즉 상대적인 선악적인 행동으로 큰 소리의 반대인 그렇게 작게 소리 내어서는 신이 안움직인다 라는 선악의 사고방식을 곧 법의 사고방식을 공격하는 겁니다.

엘리야는 저들의 선악의 생각에 반대로 행동을 합니다.
즉 역사에서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어리석고 미련하게만 보이는 묵시적인 약속만을 붙잡습니다.

제단에 불 붙이기 대결로써 누가 신을 제대로 움직이냐 누구의 신이 진짜냐
신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 라는 시합에

정작 불 붙일려는 그 제단 장작에 물을 붓기 함으로써
또 저쪽 상대방의 선악의 판단을 유발케 해서 (무시받는 일만,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엘리야의 행동을 저들의 선악에서는 도저히 해석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려고 십자가에 가니까
더더욱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어리석다 라고 무시하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아무도 해석 못하는 비밀로 만들 듯이 (죄를 유발케 하는 십자가의 실족케 하는 지혜)

엘리야는 불이 붙어야할 제단에 물을 붓는 아주 반대적인 행동을 합니다.

(왕상 18:30, 개역)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왕상 18:31, 개역)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왕상 18:32, 개역)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개역)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개역)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왕상 18:35, 개역)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왕상 18:36, 개역)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개역)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개역)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개역)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40, 개역)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약속이란 약속을 실행하는 자가 그 약속을 반드시 완성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반대로 이 약속을 실행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못 이루는 자는 바로 우상으로써
우상은 약속을 못 지킨다는 의미가 됩니다.

자 이런 엘리야의 행동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드러내는 영의 일에 동원됩니다.
누가 참 신이신 약속을 완성할 자이신가? 를 들추어냄과 동시에 또 누가 약속을 못 지키는 우상인 허상인가를 가려내는 두 패의 선을 긋는 일에 동원되는 겁니다.

한쪽은 인간만이 하는 선악의 범주에서 벗어난 적 없는 행동이고
또 다른 한쪽은 오로지 인간의 행함이 철저하게 배재가 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해낸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물 속에서 죽음 속에서 건져낸 일입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동시에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이 물을 부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곧 약속을 담은(이스라엘과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약속의 자녀는 죽음 속에서 곧 물 속에서 태어난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세도 물에서 곧 죽음에서 건짐 받고, 노아도 물 홍수 속을 통과 한 자이고, 출애굽의 이스라엘은 홍해를 가르고 물 속을 통과한 죽음을 이기는 긍휼을 입음 당한자들인데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과 약속한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 이신 전쟁의 신 때문이다 겁니다.)

그럼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늘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십자가)의 의미를 담은 제사만을(자기부인) 통해서 저쪽 바알 선지자의 인간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자신의 치심인 희생의 피로써 참 신의 의미를 받은 자들로써 이 십자가의 피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인 죄악을 지독하게 미워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의해 파라오 왕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입니다.
(죽음 회피가 아닌 죽음과 맞딱뜨려 싸우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투기 질투는 지옥의 불보다 더 잔인하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라는 누가 센가 맞짱뜨자 라는 넉넉한 이김으로 전리품을 획득한 바로 약속의 성취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은 반드시 선악을 아는 자의 사고방식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반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반대로 이 약속을 무시하는 자는 선악만을 고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악취나는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자 그럼 역청을 다시 살펴 보면
노아 방주는 일종의 방수를 위한 재료로서 사용되었구요

이런 역청의 의미를 바벨탑을 쌓는데 있어서 자기들의 방주를 제작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자기 스스로 챙기는 수단으로써 자기유익 챙기기로 이용하는 겁니다.

진흙이라는 미흡한 결핍보다 완벽한 강한 결속력을 추구하는 역청으로 대신하고
여기서 대신한다는 말이 선악적인 생각을 염두한 거죠 (더 크고 더 세고 더 높은 것으로 세우는데 진흙은 쓸모가치가 미흡한 자아 확대에 도움이 안 됨)
또 돌보다 벽돌을 구워서 돌을 대신하는 항상 미완료를 완벽하게 추구할려는 결핍채우기의 행동이기에
늘 미완료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인 선악체제 라는 죄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밑 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 신 됨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지옥의 뱃속을 채우겠다는 발상)

결국 돌 대신 벽돌을 구워서 견고히 견고히
또 진흙으로가 아닌 역청으로써 초강력순간접착제로 결속력을 추구하여 더 높고 강력한 힘의 집결은

인간과 인간을 역어서 하나가 되는 인간의 연합이 하나가 된 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국가의 체제의 모토가 됩니다.

벽돌 하나 하나를 인간으로 보면, 미흡한 돌 같은 인간이 아니라
초강력 울트라 영웅인 인간 하나 하나가 신으로써 역여져 쌓아 올린 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탑 자체가 인간입니다. 가인의 성 자체가 인간 자신의 욕망을 채운 자기 육의 확대 입니다.

진흙으로는 모자라고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겁니다.
역청은 곧 인간 자체 또는 그들의 언어로써 서로 서로가 접착제로 인간 탑을 쌓는데 평생을 매진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네트워크-인간의 언어 곧 정보망 지혜롭게 할만큼 탐나는 완벽한 정보연합연결망체제)

결국 인간은 재료 하나 하나를 선택하고 사용하고 도구를 삼는 의미 조차도 (레고 장난감)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사고방식인 선악의 행동에서 한치도 벗어난적 없는 철저한 죄 아래 갇힌
죽기를 무서워서 나온 행동이다는 겁니다. 모든 행동이 죽음에서 비롯된 죽음 회피용입니다. (가인의 이마표)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인간 탑 쌓기가 바로 다니엘 2장에 나타난 인간 금신상이 바로 인간 자체가 우상 입니다.(골 3장 탐심은 인간 육체에서 비롯, 모든 우상은 인간의 손에서 비롯, 그래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에 없음)

(막 14:58, 개역)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단 2:31, 개역)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단 2:32, 개역)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단 2:33, 개역)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 2:34, 개역)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 2:35, 개역)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리고 이런 가증한 우상 곧 인간 탑쌓기의 사고방식이 약속을 무시하는 현장 속에 놓이게 된 것을 보면 주님이 두 패로 나누시는 그 현장인 영(종말의 영)의 일을 펼치시구나 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마 24:14, 개역)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빛이 증거 되는 곳에서 비로소 어두움의 실체도 드러납니다.
(편애도 미움도 주님에게서만 내막이 드러나지 인간은 이 어떤 쪽도 해석 조차도 불가능한 철저하게 소외된 입장 뿐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드러나는 곳에는 생명의 나무가 증거됨으로
이 세상은 이 두 나무와 그 두 나무의 열매들이
두 패로 나누어지는 마당터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아버지의 뜻대로 펼쳐보이심)

오늘날 교회를 세우는 인간의 모습도 진흙을 대신한 역청과 돌을 대신한 벽돌을 굽어서 탑세우기를 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행동 곧 선악법의 행동으로 예배,찬양,기도,설교,헌금,봉사 등으로 죄를 짖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저 인간의 열심으로만 가득 채워 쌓을려는 인간의 결속력만이 가득한 인간 금신상이 바로 오늘날 힘을 결집시켜서 하늘의 통로(바벨탑)로 삼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 곧 종교적인 모든 행동을 포함한 선악의 행동들인 법체제 갖추기입니다.

이런 인간의 죄인 어두움의 실체를 놓치지 않고서 죄의 모든 내막을 까발리는 것이 바로 유일한 사랑인 십자가 뿐입니다. (모든 육의 소욕을 까발리는 유일한 영의 심판 행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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