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이면 늘 평상시 처럼 강아지가 아닙니까?



어머니께서 사사기 입다 부분을 읽고 이렇게 외치신다.


십자가의 정치성(잔인한 고문) 때문입니다.

늘 변함없이 맞아주던 꼬리치며 달려드는 강아지 일줄 알았다.
그런데 딸이 춤을 추며 뛰어나온다.

어머니 왈 : 그런 와중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마치 죽음을 기다렸다는냥 죽음을 더욱더 재촉하는 말을 하네?
                 좀 좀 가만히 있지 ~~잉.

자작극이다. 피의 자작극에 말려들었다.
용서는 그냥 베풀어 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이스라엘 장로를 끌어들여야 하듯이 말이다.


동네 구석에서 벌어진 일을 가장높은 솔로몬 왕의 지혜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총리는 그래서 뺑뺑이를 돌립니다.

삼(세 번) 이라는 간격으로 공백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빈터에서 유일한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더욱더, 외설적인 법보다 더 외설적인 법으로 만들기 위해 다말사건이 개입이 되어야
최고의 자리 요셉의 지혜에 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철저한 냉혈하기 짝이 없는 잔인한 고문이다.

그래야 야곱까지 올라온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더 나은 외설성

더 나은 용서(7번 용서가 아닌 무한대 용서 - 피값)


이 십자가의 용서의 법에 선악의 법이 맞물려야 하듯이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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