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손은 이방여자와 결혼해야만 하는가?

 

며칠전 어머니께서 물으신 질문이다.

그리고 이틀전에는 왜 룻이 이방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고 했는가?

 

갑자기 안 보이던 부분들이 보여서

이제는 궁금증이 활발해 지셨다.

 

어머니께서 입다가 왜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데 있어서

왜 하필이면 강아지가 아니라 자기 딸이며

더 기가막힌 것은 마치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딸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가?

 

어머니 놀라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삼손은 결혼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여자와 결혼을 하는 겁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자기 힘인 머리카락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블레셋 속으로 집어 넣는

늑대 소굴에 집어넣는 방식이 결혼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볼려고 하는 마음도 없고
기도하는 자도 없고
도리어 피하고 썩여살고 그냥 좋은게 좋은식으로
그때 그때 달라요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살지
하나님의 원수라는 인식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사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싸울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
싸움을 붙이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전쟁을 보라고 그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머리카락은 그런 의미에서 결혼을 성사 시키는 의미인줄로

삼손도 블레셋 쪽도 다 같이 오해토록 한 겁니다.

 

마치 입다가 자신의 서러운 기생아들 그리고 서자 라는 그래서 쫏겨난 그 서러움을

한 방에 다 날려버리고

이제야 자신이 인정받을수 있는 길을

힘으로 얻을수 있다고 여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입다든 삼손이든

둘 다 오해를 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의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끌어들이는 방식이

머리카락으로 성사되는 결혼과

힘으로 이스라엘로부터 인정받는 서자요 기생아들이라는 서러움을

 

이스라엘 구원의 방식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원수를 끌어들이는 그 매개역할을

바로 소위 은사라고 하는 그 사람만의 특별한 재주가

원수를 글어들이든, 늑대소굴에 속 집어넣는

 

은사와 하나님의 원수가 한 세트를 구성함으로써

그 간격(검열,차이,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 간격 속에서 바로 사랑 곧 십자가의 용서가 출현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입다의 이름없는 딸의 죽음은 이스라엘 장로를 끌어들이는 것이고

삼손의 머리카락은 또는 수수께끼는 블레셋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써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이 정치성(비인간적인, 잔인한 살인고문과 같은)

 

법적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한 쪽 오른 쪽은 변호사, 또 다른 한 쪽 왼쪽은 검사

그리고 그 둘 사이 그 중앙에 재판관의 형식을 띰으로써

 

보잘 것 없는 무능한 잉여를

왕의 자리에 까지 끌어올려서

 

왕 스스로의 지혜를 발현코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용서의 왕의 용서를 자랑하는데 이용되는 소모품으로써

왕의 재판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저번에 말한 그리심산(축복산) 에발산(저주산)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세겜(율법 선포)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룻이 이방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어머니 나오미가 외쳐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거꾸로 이방여자 룻이 외치는 것은

 

야 며느리들아 이제 씨를 뿌릴 남자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이 죽여버렸단다.

여자 구실 할려면 딴데로 너 가고픈 데로 가라

한 쪽 며느리를 갈길로 갔지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아니 너 신입이 너 돌았니~~ 비정상 아니니? 비인간 아니니?

내 꼬라지 보고도 그런 소리 하니?

나의 하나님은 남자들을 다 죽여서 씨가 말랐어?

 

그러니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 곧 참 하나님 맞당께요

 

야가 큰일날 소리를 하네 그려

 

에라이 모르겠다 막살아라 니 마음대로 했뿌라

 

육의 씨앗을 단절 시켜 버리는 하나님잉께 진짜 맞당께요

 

아니 가짜를 잇고 잇고 잇는 하나님이면 그게 가짜이지 진짠겨?

 

그래서 룻은 다윗의 족보에 접붙임 당해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육을 멸망시키는 하나님

그 단절 속에서

유일한 예수님의 족보에 연합되는 룻

 

이것이 할례 곧 십자가의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 속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육을 모조리 차단 당하는

 

삼손처럼 머리카락 짤리고 눈 뽑히고

그래서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루는

 

입다는 옷을 찢는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힘자랑이 이스라엘장로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이름없는 딸이 바꿔치기 해서 이스라엘 장로에게서 빼내어야 할 정도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안될 정도로

갇혀있는 그 현실

 

사망이 왕노릇해야 은혜를 왕노릇케 하는 전복이 벌어지는 새현실.

 

그 현실은 오직 잔인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

모두다 그 간격으로써 배치 당하는 역할로써 작용한 겁니다.

 

주인공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요

나머지는 다 누락 당해야할 소모품(은사)으로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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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중에 이런 대화를 했다.
어제 책보다 또 몰입당하는 바람에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저번에 얼룩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 그림에 얼룩이 있으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고 명화이라고 해도
그 얼룩에 모든 시선에 꼿혀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현미경을 들여다 보는 관찰자가 그 속의 벌레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벌레가 그 관찰자를 쳐다보고 있듯이

모든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얼룩의 기능인 응시 입니다.

이번에는 좀 더 확대가 되어서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 제목이 [진짜] 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의 모델을 가난한 [진짜] 귀족을 모델로 삼아서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고서는 다들 [가짜]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시나 [진짜]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 모델을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는
날라리 기생과 거들먹거리는 청년을 귀족 옷을 입혀서 그림을 그렸더니
다들 [진짜 ] 맞네 라고 하는 겁니다.

화가는 그 두 그림의 간격을 통해서
절대로 좁힐수 없는 간격을 체헴케 되는데
바로 그림 밖의 배경도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진짜를 그려도 그 그림이 더 큰 밖의 배경에서는 가짜가 되는 겁니다.
도리어 가짜를 그리니까 그 가짜 그림이 더 큰 밖의 배경 풍경 속에서는 진짜가 되는 겁니다.
이 간격을 발견한 겁니다.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으로 오니까 다들 가짜라고 하고
누가 봐도 가짜인 로마를 끌여들여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 얼룩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이 얼룩으로써 작용이 되어야 하는데?
긍휼히 여겨 용서하시는 이가 없으니
거꾸로 얼룩을 제거 할려고 달려들게 되는 겁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결국 그것이 도리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얼룩을 제거하고 삭제 지울려고 한 것이
도리어 더 삭제되기는 커녕 확대 팽창 증식 증폭되어 잉여는 퍼져나가 만개해 버린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성당에서 청소하다가? 성당의 예수님을 그린 얼굴을 실수로 잘못해서 훼손시켜
우스꽝스럽게 그 위에 덧칠을 한 할머니로 인해

오히려 그 소식을 듣고 그 성당이 관광으로 유명해져 버린 겁니다.
재미난 그림이라는 둥
원숭이 그림이라는 둥

그게 작년? 몇년전의 이야기인데
최근에는 그 할머니를 소송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가족으로 부터 말입니다.

모든 예수님의 그림은 다 가짜입니다. 다 상상한 얼굴이니까 말입니다.

가짜 예수님의 사진을 놓고 법적인 공방까지 가는 겁니다.


결국 얼룩이란 제거 삭제 지우고 싶어서 미쳐 환장하게끔 안달케 만드는 약을바짝 올리는 응시물입니다.
그래서 지울려고 다가갔는데
도리어 지울려고 간 놈이 도리어 삭제 당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결혼을 통해 왕비가 된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제거할려고 달려들다가 도리어 본인이 제거 당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응시물로서의 얼룩이요
교회라는 성도요
예수님이라는 얼룩이요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라는 밝히 보이는 응시 입니다.

이 은사(성령의 선물)을 제거 삭제 단절 지워버리고 싶어서 눈에 확 꼿혀버리도록

얼룩으로써 작용케 하시는 겁니다.

구경꺼리, 쓰레기, 찌끄래기, 잉여물, 얼룩

미말에 성령의 선물로써의 은사가 말입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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