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단절 : 숨기시고 vs 나타내심 (눅 10:17-24)

보고자 해도 못 보고 듣고자 해도 못들은
슬기롭고 지혜로운자에게는 감추고 어린아이 같이 어리석고 미련한 자에게는 나타내는 비밀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뭔가를 감추고 숨긴다는 것은
그 외부적인 작용 때문에
내부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내부는 외부로 인해 결정됩니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결정하듯이 말입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심은 것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노를 담으면 진노를
긍휼을 담으면 긍휼을 나타내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숨기시고] [나타내심] 으로 표현했습니다.

칠십인의 제자들이 돌아오면서 기뻐합니다.
그 기쁨의 작용이 외부적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외부로부터 권세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외부의 영향 때문에
사탄이 떨어지는 외부의 작용을

내부에서 인식을 하고 그런 능력이 내부에서 해석을 하니 기쁨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아무리 숨길려고 감추고자 해도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가득차게 된 내부는 그것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표출되면서 기쁨으로 가득찬 내부는 얼굴로써 숨기지 못하고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모든 것의 원인 제공자인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아니 기쁨의 제공자께서 기뻐하지 말라니요?

그렇다고 기뻐하지 말고, 그럼 울라는 뜻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쁨의 기쁨으로 더 깊게 들어가 버립니다.

기쁨 조차도 상대적인 사단의 떨어짐으로 인한 결과물입니다.
얼마나 약발이 바짝 오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할 수준 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는 해석 범주 밖에 안되는 겁니다.


즉 마귀에게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마귀가 전혀 시기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칠십인이 예수님의 12제자처럼 서로가 누가 크냐 라는 논쟁으로
바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가능성이 내포된 겁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도
사단을 물리치는 기쁨을 누려도
1초 만에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는 순간 제명이 되듯이 말입니다.
물위를 걸어도 물속에 빠뜨리시는 주님 앞에
그 기쁨은 순간적으로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해주셔야 하는 겁니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원천(근본 근원)은 그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기쁨의 근원은 더욱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 기쁨의 기쁨은 놀랍게도 나에게 기쁨의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기뻐하는 그 자아가 애초부터 없었던 때입니다.

자아가 없었던 때, 선악의 인식이 있기 전.

그러니 시간을 거꾸로 돌릴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단절 된 겁니다.

그 단절 속으로 들어가보자 라는 겁니다.
애굽왕을 강퍅케 해서 사단이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할게 아니라

더 큰 기쁨 곧 단절 속으로 들어가 보니
바로 광야이다는 겁니다.


광야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심판 속에서
목마름 속에서
양식 없음 속에서

원망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당연히 없죠. 그래서 단절 즉 광야인 겁니다.

선악의 의식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곳. 단절의 단절인 곳
바로 불 속 입니다.
그 불 속에 들어가면
죄 아닌 게 없습니다.
무조건 죄 입니다.
뭐든지 다 죄 입니다.
그래서 회개케 되고
비로소 광야에서 장대나무에 달린 그 인자를 쳐다보게 됩니다.
자기를 쳐다 볼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 광야에서 예비하신 기쁨이 있는 겁니다.

애굽 왕 바로 왕의 강퍅함 보다, 더 강퍅한 나의 죄악을 담는 그릇인 언약궤가
나를 쪽쪽 원치도 않는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다니고
양식 없는 곳만 골라다녀서

그 죄악 10가지 이상을 담아 (애굽의 10번의 재앙과 대비시킨)
반드시 언약궤어 넣어서 그 위에 피를 뿌리는 기쁨이다는 겁니다.

그 기쁨을 기뻐할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사탄 떨어지는 것 말고
남이 아닌 나의 죄악을 담는 기쁨말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악하기에 증거궤에 언약궤에 법궤에 담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하는 기쁨의 원천인 겁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 용서만을 준비한 겁니다.


이 피 때문에 어린양의 피 때문에 졸지에 그 어린양의 피의 도착적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원치 않아도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 받아서
우리의 죄악을 들통나 그 원망의 증거물을
증거궤에 담겨져 그 죄값을 죄증거물을 유통 증여 교환 바꿔치기 환전하기 위해
들켜야 하고 잡혀야 한다는 겁니다.

왜 기쁨의 원천 때문에 우리는 당해야 하고 잡혀야 하는 겁니다.

죄 값은 잡혀야 교환이라는 흐름이 우발적으로 발생합니다.

한 밤 중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몰래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저는 다른 바리새인의 해석 보다는 차이나게
예수님 당신은 진짜 구원자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렵게 찾아온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냉정한 소리를 합니다.
아니 제대로 하신 정답인데
우리의 귀에만 냉정 할 수밖에 없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인 겁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절이다는 겁니다.
단절로써만 소통하겠다는 겁니다.
진정한 소통은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이 니고데모처럼 우리들도 요한복음을 보는 시각입니다.
순 엉터리 시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한 거듭남이란 단절을 말하는 겁니다.
그 거듭남을 니고데모는 자신의 숙제로 자기 행함의 문제로 인식하는 반면

예수님은 그 거듭남을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단절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 간격은 점점점 좁혀 지기는커녕 더욱더 그 간격이 너무 너무 벌어지는 겁니다.
무슨 수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밖에 안들리는데?

예수님은 창세전에 계획된 십자가라는 모태를 이루시겠다는 소리인데?

무슨 수로 이 이해력의 간격을 좁히겠습니까?

땅의 시선과 하늘의 시선에서는 그 어떤 접촉점이 없는 단절을 요한복음이 말하는데
단절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자는 없고
주여 저는 단절된 죄인입니다.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는 없고

도리어 다들 소통했다는 식입니다.
그런 식으로 요한복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되찾을까요?

그러니 더욱더 단절의 단절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늘인 적이 없는데
늘 땅이였을 뿐인데
어떻게 하늘의 인식을 가지게 됩니까?
그런 단절성도 거치지도 않고 어떻게 하늘의 의식으로
요한복음을 즉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이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태어났거든요
그 태에서 말입니다.

그들 자신이 태를 증거하는 증거물이요
어린아이의 원인이 태 곧 십자가 태 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지 나 맞잖아 라고 자꾸 예수믿는 정당성을 교리화 하거나
떠벌리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믿는 티를 낸다는 것이 전혀 관계없는 자이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엉뚱한 태를 말하고 있으니
십자가 라는 태를 그 간격을
그 삼일이라는 간격을
무슨 수로 그 속에서 태어나겠습니까?

엄마를 택하는 자식이 있느냐 말입니다.
언약을 자신이 택하는 자는 없습니다.

오로지 언약의 생산물로써 나타냄을 당할 뿐인 겁니다.

(요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 다가옴을 거부하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다가가는 방식은 오로지 처음자리라는 빈터를 제시하는 겁니다.

너 나의 태에서 태어난 자식 맞니?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라

99마리 양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찾기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버릴 줄 모르는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가 아닌 겁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의 양을 버리는 겁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는 겁니다.

왜?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고자 말이죠.


이렇게 맞물려 있습니다.


대부분의 거짓 목자는 바로 이 부분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증거입니다.

십자가라는 인자가 나무에 달리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99마리의 양을 차단하는 그 단절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교인 100명 중에 99명을 짤라내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99명으로 부터 쫏겨나는 그 한 명을 성도를 찾아 헤매는 목사는 없습니다.
어차피 같은 시선으로 눈에 가시였던 놈 잘 짤렸다고 손뼉치고 기뻐할 뿐입니다.

그것을 들키면 안되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찾는 척 하면서도

99마리의 양도 같이 챙기고자 하는
개방성을 추구하지

도대체 단절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철저한 단절성 곧 거리두기는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을 거리두는 것으로써
자기 영역을 보호한 겁니다.

그런 식으로

기껏 짜르는 놈은 엉뚱한 놈 짜르고
자기에게 덤비는 놈이나 짜르니까 말이지요.

오늘날 십자가를 주장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조차도 내가 증거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로 남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해야 생존의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외치는 자들이 거듭남 이라는 테마로
자신들의 존재 정당성을 잡아버렸듯이

이미 그런 모습을 니고데모가 우리를 대신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잡힘 당해야 하고, 들통 남을 당해야 하고, 걸려 들어야 하는데 주객이 뒤바껴 버린 겁니다.
왜? 나는 내 존재가 너무 너무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고
창세전에 예비된 어린양은 너무 너무 거리가 먼, 단절 된 붕뜨는 소리인 겁니다.

아니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 반대로 지금 당장 주의 이름으로 사탄을 쫏아내는 그 기쁨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겁니다.
무엇이 현실입니까? 내가 개입이 되었고, 참예가 되었고, 동참된 겁니다.
그런 나를 쏙 빼버리는 것은 전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붕 뜨는 소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 붕 뜨는 소리를 기뻐하라뇨?
그래서 광야가 현실로 개입해야 하는 겁니다.
단절 간격 곧 검열이 나를 스캔해서 나를 삭제시키는 작업을 지금 실시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을 기뻐하라는 겁니다.

저런 것들은 기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기쁨의 더 근원인 기쁨을 봐야합니다.
주님께서 제시해 주십니다.


듣고 싶어 했던 자들도 못들었고
보고 싶어 했던 자들도 못봤던
그 기쁨의 근원인 기쁨의 기쁨 말입니다.

바로 간격(검열) 입니다. 즉 단절입니다. 기쁨 기쁨 기쁨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의 간격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단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단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근심하며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단절


바로 하늘의 뜻, 하늘에서 나는 소리 인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이제 땅에서 났던 소리는 들통을 당하는 겁니다.
왜 땅의 소리인지 그 차이를 하늘의 소리와 대조를 당하기 위해
하나의 세트를 이루게 됩니다.

오직 기쁨은 
내 기뻐하는 자 내 사랑하는 자 라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로써만 증명이 됩니다.

이것만이 기쁨의 원천인 기쁨의 기쁨입니다.

모든 기쁨은 여기가 바로 출처인 겁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인 우리들이 듣기에도 보통 미친 소리가 아닌데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 유대인들에게서는
이거 가만히 뒀다가는 안되는 보통 보통 미친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대로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저쪽이 단절시키겠다고 나오는 판국에
오히려 계시를 받은자 외에는 없다 라고 예수님 쪽에서 단절의 단절을 아예 선언하고 나오시는 겁니다.
참으로 적반하장처럼 유대인들은 기가막힌 겁니다.
그들의 증거는 결국 무구한 역사 가 그 증거인데

계시 앞에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남은자가 된 유대인을 무구한 역사가 증거하는데
과연 그 얼토당토 않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혼자만의 주장 앞에
무구한 역사가 무너지겠느냐 말입니다.

계시와 vs 유대민족의 역사의 대립 입니다.

그것도 그냥 계시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 라는 한 인물 이라는 계시 입니다.
계시가 인물이라는 것도 유대인이 듣고 비웃을 소리이겠지만요
믿음이 인물이라고 하니 무슨 소리인줄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믿는다고 하는 자가 결국 예수님과의 경쟁자로써 대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도 누구인지도 모를뿐더러

그의 아들 예수님도 누구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알았잖아? 더하면 더했지 더욱더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이 배신 때릴 줄이야 ~~~~~~~~


즉 단절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이 모르는 판국이면 이방인인 우리야 단절이 되어도 보통 단절이 된게 아닙니다.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배격했다면 그 어떤 믿음을 소유해도 그야말로 단절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십자가 믿고 예수님 믿고 모든 것을 다 끌여들여서 믿어도 안될 놈은 안된다는 겁니다.

오로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 받은자 외에는 안됩니다.

안돼 ~~~~~~~~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이 막혀버렸다면

우리 또한 막혀 버린 겁니다. 철저한 차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거룩인 겁니다. 그 이전 까지는 거룩의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실제가 왔습니다.
실제가 오니 비로소 상속자가 왔다고 드디어 죽이겠다고 한 것이 유대인입니다.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이유인 겁니다.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아들을 보고서 비로소 새롭게 등장한 속내인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속내가 있었을 줄 본인들이 알았느냐 말이죠.
이런 판국인데 이방인인 우리는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겠습니까? 우리일까 보냐?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 

믿음 좋은 자가
그 막힌 담을 뚫고자

그럴듯한 해석을 해서 개방시켜본들
그 단절은 그 어떤 이유로도 개방이 되지 않는 겁니다.


비밀은 안 풀립니다. 숨기시지 나타내지 않습니다.
안생겨요 안생겨 안풀려요 안풀려 ~~~~~~

십자가 들이댄다고 그 막힌 단절의 담이 뚫힐까요?

문이 개방이 될까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 라고
가스펠 부른다고 개방이 되느냐 말입니다.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20, 개역)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개역)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평화란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오는 겁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평화가 있단 말입니까?

그 평화를 미리 앞당겨 그 완료됨을 누리는
미리 그 가나안 땅을 갈라먹는

전쟁 시작도 안했는데 미리 갈라먹는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즉 개방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의 단절로써

전쟁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그 땅을 갈라먹는 가운데서
믿음이라는 언약에 속하지 않는 12지파의 이스라엘 중에

11 지파를 짤라내는 겁니다.

유다 지파 빼고는 다들 슬슬 뺍니다.
자기가 알아서들 다 빼버리는 겁니다. 안 짤라도 자기 스스로 나가 버립니다.

단 지파는 아예 전쟁 자체가 없는 저 쪽 구석을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즉 웃기고 있네
전쟁도 하지도 않았는데 뭘 미리 땅을 차지하느냐?완 전 미친자들이구만
그래도 이스라엘로 태어났으니 우짜노 뭐
하긴 해야겠고
안하면 들통나겠고
어 가나안 족속이 전혀 없는 저 쪽 구석이 있구나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네
음 척박한 곳이지만

전쟁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죽는 것 보단 낫지
이것이 평화지 괜히 평화겠어?
저런 미치광이 전쟁광들과 어울릴 필요도 없고 말야

세례 곧 할례라는 주님의 살과 피를 뜯어먹는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눈치 보면서 빵 한 덩어리를 뜯어먹는데

다들 찔끔 찔끔 잘라먹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왔던 새로 온 친구가 제일 마지막에 그 빵을 먹는데


어 이상하다? 너거들 왜 안먹노 너거 그런 애들이 아닌걸 내가 아는데 하고

남아있는 거의 원본이나 마찬가지인 그 빵덩어리를

마침 배가 고팠다는냥 맛나게 개걸스럽게 먹습니다.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놈 주님의 살과 피를 자기 죄를 살피고 먹으라고 했는데
눈치 없이 저렇게 조심스럽지 못하게 먹으면 우짜노? 수준 낮게 말야!

마치 이 모습이 사사 입다 사건처럼 보입니다. 사실 사사기 내용이 다 그렇죠 뭐

또 얼마전에 어머니께서 왜 유다만 그렇게 많은 땅을 차지 했냐고 물었을 때
아무도 차지 할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저 미련한 놈 그곳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저런 무식한 전쟁광들
이라고 다들 거부했기 때문에 혼자 그 땅을 다 차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아무도 좋은 땅을 차지 할려고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좋은 땅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절의 단절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땅 자체가 걸러내는 간격 즉 단절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3일이라는 간격(검열)에 걸려들어 다들 미끄러지는 겁니다.
길가에 뿌려지고
돌짝밭에 뿌려지고
가시밭에 뿌려지는 겁니다.
오직 좋은 밭에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맺는 겁니다. 배가의 증폭인 겁니다.

서로 서로가 개방 소통만을 입으로는 외치면서 말하지만. 그런다고 막힌 담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 격입니다.

(약 3:8, 개역)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9, 개역)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약 3:12, 개역)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3, 개역)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개역)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개역)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개역)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약 3:17, 개역)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개역)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단절이 소통으로 개방되지 않습니다.


막힌 담도 단절도 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었던 겁니다.

마귀도 예수님이 해결할 문제이지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갇혀있음을 들통나야할 판국인 겁니다.

죄를 이길 자는 없습니다.

죄를 이길려고 할게 아니라


누가 이기셨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도리어 죄에 갇혀야만 한다는 겁니다.

전쟁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를 이길려고 하는 겁니까?
전쟁 하라는게 아니라 전쟁 속에 심판 속에 저주 속에 종말 속에 들어감을 당하게 되면
전쟁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기 위해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전쟁을 누가 하시는 가를 보기 위해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마귀 이겨서 뭐하게요?
내 죄악을 이겨서 뭐하게요? 그 다음 더 큰 죄악이 덤치면 우짤려고?

답답해서 전쟁하고픈 마음이 생겼다가도

전혀 전쟁 한 적도 없이 이겨버리는 그 사건을 보기 위해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이 불의함에 충성하는지를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칼도 아니요
모세도 아닌


지팡이가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돠 하는
그 요물스러운 지팡이의 활약상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다
아주 아주 말도 안되는 전쟁승리를 말입니다.


그 정도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지
우리가 전쟁하면 어떻게 하면 이기느냐 라는 강박과 
그로 인한 힘을 탐내는 것 밖에 더하겠습니까?

닭이 베드로를 건지고

지팡이가 이스라엘을 건지고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유다를 건지는

나무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죄인을 건지는 그 현장을 보라는 겁니다.

아니 죽는데, 아니 죽어가는 양반이 본인도 못건지는데 남을 우찌 건진다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못 믿는 겁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본인 부터 건지면 또 몰라 믿음이라는 가능성이 생기겠지만
아예 믿을수 없도록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식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십자가 입니까?

그것도
다른 한 쪽 강도와 한 세트를 이루면서 말입니다.
반드시 십자가는 세명이 달려야 하는 겁니다.
딸랑 한 명이 아닌 겁니다.

혼자가 아니야

죽음은 혼자 죽지 누가 함께 죽어주냐 말이죠.
죽음이 얼마나 개별적입니까?
즉 지금 살았다고 우기면서 숨쉬고 있는 우리들 또한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개별적입니까?

누가 내 대신 살아 주던가요?
누가 내 대신 살아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죽음도 누가 내 대신 죽어주지 않습니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입니다.

더욱이 죽는 그 순간인 한 순간도 그런 판국인데
지금 시간을 흘러보내면서 지금 이 순간 살았다고 하는 우리들은
누가 내 대신 살아주는 구나 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누가 나와 함께 살아주는 구나 라고도 여기지 않고요
즉 그 말은 매일 매일 한 순간 한순간을 누가 살려주시는 구나 라고 여기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고 한 인물을 제시하니까 비로소 어법파괴라고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내 숙제요 내 문제인데 왜 자꾸 남의 문제 남의 숙제인냥 말하냐 라는 거죠.

누가 살려주시는 구나를 의식한다면 난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매일 매일 죽어 있는 상태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살았는데 누가 날 보고 죽었다고 하느냐 말이죠.

죽었다는 것은 무시해도 괜찮다 라는 것인데

무시 당해 보세요 가만히 있나? 성질 나오지

그래서 진짜 기쁨의 원천은 바로 함께 동행이라는 광야 속에서 기쁨의 원천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물론 아무도 안 기쁘고 예수님 혼자 기쁘죠

피 뿌려 주실려고 원망을 그렇게 담았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예수님 혼자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실려고
혼자 기쁜 겁니다.
아무도 그 기쁨이 왜 기쁨인지를 모릅니다.
철저한 단절의 단절입니다.


바깥에 있는 우리는 전혀 죽지 않아 있는데
우리를 살리겠다고 의도적으로 죽으러 가서
장대 높이 달리겠다고 하니

아니 누가 건져달라고 했나요?

도리어 건져줘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물에 빠진 자는 인자 되신 예수님이고

물 바깥에 있는 자는 우리인데


누가 누구를 건져야 하는 겁니까?

베드로가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사탄이라고 욕먹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물에 빠졌습니까?
누가 갇혔습니까?

갇힌 자에게만 예수님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듯이

그런데 누가 갇혔다는 말입니까?
마귀에게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
나와 보세요?

아무도 쪽팔려서 나오겠습니까?
저 마귀 걸린 놈입니다 라고 나와보세요
교회에서 당장 짤리지!

그런 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구는 마귀다 라고 해야
모든 사람이 호응 합니다.

예수는 바알세불 걸린 마귀 중의 마귀 대마왕이다 라고 하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겁니다.

내가 하고팠던 말을 감히 용기 내지 못했는데
바리새인이 대신 외쳐주니까
누구든지 다 호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귀인 겁니다.

물에 빠지러 가시는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장대 높이 달려 죽으시러 가시는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도리어 거꾸로 너희들이 물에 빠져있고
너희들이 죽어 있는 상태라고

불 바깥의 시선이 아니라
심판 바깥의 시선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의 시선으로
심판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슬기롭고 지혜있는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어린아이란 모든 책임을 니 아버지 누꼬 라고

그 책임자 곧 출처를 말하는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 출처가 바로 불 속, 심판 속, 저주 속인 십자가라는 태 라는 것을 증거하지만

말할 필요 조차 없이 저쪽에서 그렇게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슬기롭고 지혜있는 자는 자신의 슬기로움과 지혜로 자기가 자신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출처 자체가 없는 겁니다.

다 큰 어른 보고 너 아버지 누꼬?
나는 너 상대 안할란다. 너 아버지 데리고 온나 라고 하지 않고

너가 책임지라고 넌 어른이 된 성인이야 라고 도리어 아버지를 배제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심이 되는 겁니다.

책임 질게 없기에

또한 갇혀있음을 직시하기에

책임질자가 외부에 있지만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심은 책임질자가 외부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출처를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호자가 필요없는 겁니다.
관계자가 필요없는 겁니다.

출처를 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9마리의 양이 그러합니다. 출처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출처를 말해야만 하는 양입니다.

그래서 공명 커플 사귐이 있는 겁니다. 관계망입니다.
잃어버림 자체가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관계성인 겁니다.

어린아이는 니 엄마 누꼬? 누가 너의 태이고? 라는 관계성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확장 확대인 겁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아는 자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자도 없다는 겁니다.


둘이만 니캉 내캉만 알자 라는 겁니다.


그 단절성의 단절이 출처로써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고, 단절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신다는 겁니다.

그 단절의 출처가 바로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 단절의 단절이라는 출처를 뽐내고 자랑하고파서

즉 둘의 사귐을 온천하 만방에 알리며 자랑하고파서

의도적으로 약올라 배아파 하는 쪽인 마귀와 99마리 양과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자를 배치시키는 겁니다.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자는 적은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광야에서 다 탈락 시키는 겁니다.
사귐의 관계 때문에 다 걸러내는 겁니다.
이 간격을 무슨 수로 넘어서겠습니까?


왜 15일 늦으면 한 달 만에 갈 길을
왜 40년 동안의 간격이 벌어진 겁니다.
검열 당하는 겁니다. 철저하게 가려내고 가려내는 겁니다.
슬기로운 자들 다 탈락 입니다. 모세도 탈락입니다.

지혜로운자들 다 탈락 입니다.

오로지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심바 된 겁니다.

이 단절성이(검열) 피사랑입니다.

얼마나 그 모태가 모태다운지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이 되는 진노의 그릇으로써 말입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마귀는 그렇게 99마리 양 다움을 표출해야만 하고

슬기롭고 지혜롭다고 자랑질 해야만 하고

니고데모처럼 몰래 찾아와서 거듭남의 비밀을 자기숙제인냥 풀려고 달려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

즉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간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 간격에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삼 일이라는 그 간격(검열)에 다 단절 당하는 겁니다.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관계 말입니다.


어~~~떻게 ~~~ 어~~~ 떻게  독생자 예수를

원수인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단 말입니까?

어~~~떻게 ~

그 관계 그 정치성 그 잔인한 살인고문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자에게만
나타내심바 되고
그 십자가라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의 모태가 아닌 자는

아무리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의 비밀을 캐 낼려고 해도

비밀을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차피 썩은 동앗줄입니다.

숨기신바 된 겁니다.


기여이 돌려 보내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런 냉혹함이 없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사람 하나 꼬셔서 교인 만들겠다는 종교돈벌이 밖에 안되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그 돈벌이를 위해 더 큰 종교기술 종교지식을 습득할려고 했기에

툭 하고 걸려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걸림돌에 부딧힌 겁니다.


지금 장대 높이 달려 죽으시러 가시겠다는 그 판국에
십자가 지식 하나 습득해서 종교적인 소망 그 야망 하나를 달성해 보겠다는 것이

그만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겁니다.


십자가라는 지뢰 밭에 걸려 터진 겁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까는게 아니라

지뢰를 까는 겁니다.


어리석은 어린아이만이 그 무시 무시한 살벌한 지뢰밭을
마음껏 뛰놀고 있지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는 그 지뢰 밭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부자청년 등돌이고 가버리게하는 복음입니다.

단절의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해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폭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에베소 2장에 이 평화를 말하기 위해

3장은 철저하게 갇혔다 라고 합니다.
사도인 바울은 철저하게 단절이 되었다는 겁니다.

매인바 된 쇠사슬에 꽁꽁꽁 묶인 바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에 꽁꽁꽁 말입니다.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 내 사랑이 떠날수 없게 ~~~

사랑 자체가 도착적인 겁니다. 스토커 입니다.

그런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그들의 죽음의 터 위에서

교회는

즉 성도는 어린아이처럼 그 지뢰 밭을 마음껏 뛰어 노는 겁니다.

그 관계를 나태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다른이에게는 철저하게 숨겨진바 된 겁니다.

오직 계시를 받은 자 에게만 그 관계는 십자가(잔인한 고문, 귀한 고난 = 정치성)로써 표출 되는 겁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기 (눅 10: 1-16)

2014/01/06 12:3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기 (눅 10: 1-16)



(눅 10:1, 개역)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개역)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 10:4, 개역)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 10:5,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 10:6, 개역) 『막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7, 개역)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10:8,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눅 10:9, 개역)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눅 10:10,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 10:11, 개역)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 10:1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3, 개역)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4, 개역)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5,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눅 10:16, 개역)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칠십인을 택해 각기 각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케 하십니다.

칠십인을 세워 파견하시는 이유는

이들을 영접하라고 파견하시는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아무도 이들을 영접할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영접할자가 없는데 왜 보내냐?


영접할자 없으면 주님이 손해 아닌가?

주님은 손해 볼게 전혀 없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것은 인간 쪽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초막셋 아파트 세채를 지어서 머리 둘 곳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또 수 많은 부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대형 교회를 세우겠다고 해도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즉 집을 마련해 준들 안계시겠다, 안 살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꾸 집 지어 드리겠다는

다윗처럼 자꾸 집 지어 본들


피 묻은 손으로 지을 뿐인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착하게

교회에 충성 봉사이웃사랑 실천 하겠다고 해 본들


다 피 묻은 손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부하시는게 당연한 겁니다.


머리 둘 곳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인데

자꾸 머리 둘 곳을 만들겠다고 시근 없이 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는 아무도 모르는 단절성 때문이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그 이유를 알고

비로소 성령이 임한자는

머릴 둘 곳을 만드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머리를 둘 곳이 없도록 만드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