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단절성(십자가) (눅 12:13-21)

 

소유가 바탕에 깔린 삶이냐? 십자가의 죽음이 바탕에 깔린 삶이냐?
 

(12:13,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2:14, 개역)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복음과 비복음의 차이성은 이 단절성에 의해 좌우 됩니다.

소유란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꾸 잇고 잇고 잇는 그 연속성이요

끊임 없이 제공되는 뚝뚝뚝 단절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소유(역사,시공간,개방)에게서 단절(묵시,죽음)은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본디 바리새인의 누룩을 좋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연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싫어할 자가 없습니다.

부자청년이 오죽하면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율법을 지킨 것을 내세우겠습니까
?

혹 부족한 것 있으면 말하라 내가 다 이루겠다는 겁니다.

다들 이런 부자청년을 부러워 죽을 판국입니다
.
율법사가 큰 계명이 뭐냐고 묻는 의도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니요
?

 

오히려 바리새인의 주장처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예수님을

바리새인의 심정과 똑같이

우리는 조심할려고 무척이나 애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심할 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부러워 죽을 판국이고

 

정작 조심할 것은 예수님의 막사심 아닙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매국노와 죄인의 친구이니 말입니다.

 

세리? 오늘날 한국사회로 치면 친일파 아닙니까?

한국교회 곧 기독교 천주교가 가장 우선수로 두는 일이 친일세력 척결 아닙니까?

매국노의 친구요

각종 죄인인 살인마 사이코패쓰 강도 성범죄자 도둑놈 과의 친구이니

 

바리새인의 주장이 정확하게 우리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자에 대한 한중일 한국 중국 일본의 합작 에니메이션을 봤습니다.

보니까 완전 바리새인이더군요

니체가 말한 초인입니다 초인(예수를 모델로 삼은)

겸손한자 초인 말입니다.

위버멘스 겸손한 자 초인 곧 창조적인 인간
반대말은 최후의 인간 즉 근대인간(피곤에 빠진 무기력한 인간)
즉 강요된 선택(자유의지)에 빠진 인간

 

바리새인은 자나깨나 이스라엘 구원, 백성의 구원에만 전부를 바친 자들입니다.

백성을 걱정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꽹과리 라고 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구원을 막는 분입니다
.

유대인에게만 보냄을 받았다고 해 놓고서는

유대인들이 보는 코 앞에서 일부러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것도 철천지 원수들인 사마리아인을 구원합니다
.

이런 배신을 어디 한 두 번 때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백성만을 섬기고자 모범을 보일려고 하는 자들을 꽹과리 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합니다.

귀를 막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극심한 소음 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거 완전 물과 기름처럼 극과 극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또한 누룩임이 마찬가지인데

이건 또 아이러니에 빠지듯이 마치 내가 너희를 제대로 섬기는 자이다 라고 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누룩인데 누룩에게 누룩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참 말 안되지요?

 

아니 저들 바리새인과 똑같은데 바리새인과 똑같은 우리에게 구별이라는 차이를 두시겠다고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포를 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 책임질께 라고 말입니다.

 

그게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저들과 똑같은데 어떻게 구별시키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괭과리 인데 꽹과리인 우리를 꽹과리로부터 차별시키겠다는 선포입니다.

곧 전쟁입니다.

그렇다고 주여 나도 그 전쟁 참예할께요 라고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전쟁 자체를 원치 않는

초인과 반대되는 최후의 인간 즉 쾌락과 안일에 빠져버린 근대인(피로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기생라합처럼 민족을 배신하고 모태신앙?을 버리고
이단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극박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식입니다.

너희는 이 누룩에 포로되어 갇혔다.

나를 동의하든 말든 나는 무조건 끄집어 내겠다 라는 일방적인 선포에
아무도 응답치 않아도
오히려 밀어붙이시는 그 일하심에 저절로 구별이 되어버림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바리새인의 누룩이 좋다고 해도

창조자의 일방적인 선포 때문에

이 누룩이 저절로 단절 앞에서 무릎 꿇는 현장을 보기 싫어도 볼 수 밖에 없음에 놓여져 버린 겁니다.

 

쪼매만 동기부여하면 금방 초인이 되어서 꽹과리 치다가

쪼매만 부딧히면 왕창무너져 힘부쳐 낙담에 빠져버리는 허무인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이런 누룩인 우리 보고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니

 

엎친데 덮친격입니다.

 

조심하라를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누룩 잘 보라 이 누룩이 어떻게 되는 것을 잘 보라 라는 겁니다.

이 누룩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말입니다.

 

즉 누룩에서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가 왕노릇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포가 일방적으로 선전포고가 됩니다.

그 죄가 왕노릇하는 그 누룩이 왕노릇하는 세상에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상황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차이 그 구별 그 분별로써 얼룩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누룩 보다 더욱더 그 발효의 확장성이 더 뛰어난 확장 팽창성

리좀 보다 더 뛰어난 증폭성

이스트 보다 빵을 더 크게 부풀리게 하는 과잉잉여성

쾌락보다 쾌락을 넘어서는 향유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이해하기 쉽게 쾌락은 850 1로 바알아세라 무당을 엘리야가 이겼지만

뿔난 이세벨가 이스라엘 선지자를 다 죽여버림으로써

엘리야는 나 혼자 남았다고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하는 상황이 쾌락입니다.

성취는 성취인데 도리어 허무로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이 쾌락을 넘어서는 쾌락인 향유는 7천명이라는 단절의 팽창 증폭 확장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쾌락의 전복인 셈입니다.


즉 소유인 쾌락은 원인 있는 결과로써 곧 허무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단절인 향유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채널돌리기로
그 심각하던 역사적(시공간) 상황이 졸지에 향유(묵시)로 인해 전복되는 겁니다.
그러니 심각할게 전혀 없는 기쁨인 겁니다.

쾌락은 쾌락을 대상으로 했기에
나의 원인으로 인한 결과로 행함이 개입이 되었지만(내가 믿어야 그 대상물이 믿겨지는)

향유는 거꾸로 그 원인인 나를 삭제시켜버림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 믿음으로 부터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얼룩입니다.
 

그 남은자 7천은 그 어떤 접촉점이 다 단절된

내 열심히 특심 조차도 일체 포함되지 않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믿음(묵시)의 대상물이 되어 완료를 누리는 것이고
내가 행함으로써 대상물로 삼아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었습니다. 라는
원인 있는 결과를
나 너 도무지 모른다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라고 단절당해 버리는 겁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7천 속에 놓여지는 일방적인 사랑 용서 긍휼로써만

들어오는 단절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쾌락을 넘어선 향유입니다. 주이상스 라고도 하고요.
교회를 넘어선 신부, 행함을 넘어선 믿음, 등등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봐버렸네

나 이제 죽었도다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스라엘 자체가 선택된 구원받은 백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쾌락 곧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부정하여 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오히려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얼굴을 보고서는 비로소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쾌락을 넘어선 향유입니다.

 

이스라엘을 넘어선 남은자요

이스라엘 속에 있는 새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단절로써 말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단절 말입니다.

 

이 단절이 안나오는 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자신이 사랑해야 한다는 소유로 보는 겁니다.

믿음도 소유해야지요 열심도 소유해야지요
심지어 단절도 소유해야지요? 십자가도 소유해야지요?
모조리 다 소유의 대상물로 삼는 것이 역사 입니다.
묵시가 아닌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단절이 아닌

뭔가를 잇고 잇고 이어야 하는 것들을 내 쪽에서 많이 설치하는 겁니다.

마치 인터넷 기사가 점봇대에 통신망을 깔 듯이 자꾸 자꾸 선을 까는 겁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온 통 전기줄입니다.
전세계의 통신망을 자꾸 자꾸 늘려서 확장 시키는 겁니다. 누룩처럼 유비쿼터 무소부재

 

그런데 진짜 무소부재를 만나니 구원은 커녕 지금 당장 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단절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

 

그것이 지난 시간 본문에 나오는 회개 자기부인입니다.

 

아니 우리는 회개 자체도 모른다니깐요?

회개 할 줄도 모르고

자기부인 할 줄도 모르는게 우리인데

어떻게 단절시키겠다는 겁니까?

 

일일이 네트워크를 가위로 짤라야 하나요?

 

걱정 마세요 그것이 성령의 숙제입니다.

 

의도적으로 회개를 해 본들 그거 회개 아닙니다.

어차피 내가 하는 회개는 회개도 아닌 겁니다.

내 쪽으로 끌어당겨 회개 해 봤자?

그 회개는 단절(자기부인)이 아니라 도리어 누룩인 셈입니다.

골방에서의 기도가 아니라

남들 다 듣기도록 하는 대로에서의 기도인 셈입니다.

나 회개 했는데 뭐 잘못 되었는데 라는 식입니다.

비밀성이 단절성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괜히 회개하는 바람에 지옥에 갈 판국인 겁니다.
제발 회개 하지 마세요 지옥갑니다.
회개는 나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거꾸로 회개로 부터 대상물로 취급당하는 회개당하세요.
회개의 대상물인 사람은 뭘 해도 다 회개 입니다.

결국 단절성을 우리가 흉내낼수가 있는가
?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단절인 겁니다.

가능하면 그게 무슨 단절입니까?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절입니다.

 

다 알면 그게 무슨 패쓰워드 비밀입니까? 아무리 해도 모르기에 비밀입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 라고 하니까 진짜로 골방에서 기도해놓고서는

나는 골방에서 기도 했잖아요 라고 과시 합니다.

그게 무슨 비밀입니까?

그게 무슨 회개 입니까? 회개 자체가 죽는다는 뜻인데?
살아있으면 회개 안했다는 증거 잖아요!!
그러니 괜히 회개 해서 회개를 거부한 셈이요, 회개를 안한 것이 되는 겁니다.

 

골방이라는 의미처럼 비밀이 되어야 증폭이 됩니다.

그런데 내 쪽에서는 아무리 해도 비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없는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 붙어있으니까? 이미 말 자체가 안됩니다.

떨어져 있으면 왼손 오른손이라고 붙일수가 없습니다.

 

이어져 있는데 어떻게 끊어져 있다고 여겨라?

 

그런데 붙어 있으면서도 모르게 하라 라는 단절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보통 자기를 부인해야 될까 말까인데

그런 자기부인은 불교가 도사이잖습니까?

 

모르게 하는게 안됩니다 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비밀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손떼라 라는 겁니다.

 

3일이라는 간격의 창조성을 인간이 만들줄 모르는 셈이다는 겁니다.

아예 포기하세요

손 놓으세요

 

그럼 가능한 말만 하세요 불가능한 것 말하지 말고요 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이 불가능을 주님이 왜 하시는지

그래서 예수님과 나와 비교케 하시는 성령의 간섭을 보자라는 겁니다.

그 성령의 탄식을 듣자 말이죠

마땅히 하실 말을 외치시는 그 성령의 외침말입니다.

아무도 안듣는 그 마땅히 할 말을

우리가 마땅히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듣기는 그 세미한 음성을 우리 영혼이 울려퍼지도록 간담이 다 녹게하는 그 소리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의 내용과 이어지는 겁니다.

단절 된 듯이 보이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누룩은 결국 소유의 확장력입니다.

거기에 비해 단절은 소유보다 더한 확장력인 비소유성입니다.

그렇다고 무소요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소유한 것의 확장력이 아닌

예수님이 소유한 것의 확장력이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십자가의 확장력이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내 재산을 형이 부당하게 많이 가져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분배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경제가 편파적인 부익부 빈익빈이 된 것이 문제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바른 정의를 실현하는 예수님이 공정한 재판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치 굶어죽는 아이에게 돌을 떡덩이 되게 해 달라

그것이 메시아의 의미이다는 식입니다.

굶주림 가난을 해결하는 자

이런 경제 문제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내가 너희 소유물이나 나누어주는 재판장으로 보이냐? 라는 냉소적인 반응이십니다.

 

예수님이 너무 지나치신 말을 하지 않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작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듯이

정의롭게 공정한 저울로 소유물을 나누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부도덕하다는 겁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이 다 이런 식입니다.

공정하게 소유물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누룩이다는 겁니다.

 

누가 몇억을 세월호 피해자에게 기부 구제금을 주었다고 하던데

그것 조심하라고 누룩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100억을 기부하는 자가 100억명이 생겨버리면 금장 잊어버리는 겁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단절을 느끼는 것이

사랑을 긍휼을 용서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받았기에 줄 뿐인 겁니다. 언론이 그것을 괜히 부풀려서 꽹과리로 만드는 겁니다.

불안과 공포와 무기력함을 희망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인간 쪽에서의 시도입니다.

뭐 그게 전부이니 말릴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게 전부인 겁니다.

 

정작 기부 당사자는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아는데 말이죠.

 

재산 소유물이 부당하게 나누어 졌다 라는 것을

세상 재판관에게 호소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요 그것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예수님께 호소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거 해결 하러 온 분이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호구로 본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자꾸 호구로 보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예수님에게까지 그것을 억울하다고 호소 했을까요?

 

그럼 그거 해결해 주면

 

그거 해결해 준다고 또 피해봤다고 억울하다고 호소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결국 예수라는 작자를 철저하게 이용꺼리 밖에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13:1, 개역)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13: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같은 맥락에서

억울하게 빌라도의 손에서 죽은 유대인이 제사 중에 살해 당해

그의 피가 제사 재물이 묻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호소를 합니다.

일반 이방인의 제사에서는 그것이 자기 신들에게 호소할 문제가 되기에

예수님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왔는가?

예수 자신의 입으로 유대인 곧

내 백성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했기에

이것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된 입장에서

예수님께 아주 아주 당연히 억울하다고 호소를 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발생할 수가 있고

이 일을 막아야 할 입장에 놓였기에 예수님이 도와 주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노 라고 하십니다.

 

분명 바로 뒷 구절(13:4)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몇 명이 죽었는데

저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에 무너져 죽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해석은 그 다음 니 차례다 라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께 죄 지은 행동이 있어서 심판 받았다고 하는 해석을

그 다음 너 차례인데? 라는 입장에서 심판을 운운 할 수가 있느냐 라고 반문하시는 겁니다.

 

그 구절 바로 앞에는

유대인의 피가 빌라도의 살인으로 인해 제사 재물에 묻게 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원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 라는 질문입니다.

 

마귀의 3가지 질문의 시험과 똑같습니다.

 

아니 이 당연한 물음을 마귀의 시험으로 몰아붙이면 너무하잖아요?

그럼 이거 빼고 묻고 도와달라고 할게 뭐 있나요?

이게 인간의 삶에서의 전부인데?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겁니다. 인간의 삶의 전부이다고 주장하는 것

 

 

!! 이게 정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전부이다는 것.

 

이런 불쌍한 민초들, 이런 나 같은 인간 좀 쳐다봐 달라 라는 겁니다.

아지매 ~~ 손 좀 잡아 주이소 마 ~~~~~~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삶의 전부인 누룩보다

더 심한 확장성이 여기 있자나 자나 자나 있잖아 ~~~~

 

바로 그 빌라도 손에 내가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비밀이요 단절이니 뚝뚝 끊어져 버립니다.

 

단절입니다.

 

믄 말을 못해요

심심하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도 이들 손에 죽으러 왔거든 해 버리면

무슨 소리를 그 앞에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입을 띠지 말라는 소리와 같은데 말입니다.

 

아니 언제는 구하라 매?

두드리라 매?

찾으라 매?

 

어렵게 찾고 찾아서 두드리고 구하니까

하는 소리가 그 다음 내가 죽을 차례인데 우짜지~~~~~

 

실컷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줘서

실컷 따라잡고 따라잡아 기여이 찾아내서 왜 도망치냐고 물으니까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너희 임금 삼고자 하는 도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처럼 너희의 재판관으로 세울려고 하는도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전혀 안맞는 겁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과 전혀 맞지를 않을까요?

 

그래서 지적하십니다.

 

소유가 아니다 라고

 

몸 자체가 소유 라는 출처를 말하고 있는데

몸이 자꾸 딴 소유를 자꾸 자기가 알아서 챙길려고 한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나요?

몸 자체가 주머니인데

그 주머니에 다른 자잴구래한 온갖 주머니를 주섬 주섬 옆에 만들어서

그 주머니를 채울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림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상상해 보세요

마트에서 큰 비닐봉지에54 돈주고 산 물건을 집어넣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큰 봉지에 물건을 안 넣고

큰 봉지 옆에 작은 봉지를 본드 붙여가지고 주렁 주렁 옆에 수십게 달아서

그 작은 봉지에 채울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봉지가 봉지의 기능을 상실한채

소유물을 가득 채우는 용도로써

 

자꾸 예수님을 물건 정확하게 나누는 재판관

먹고 배불러 임금삼고자 하는 모습

실로암 망대 무너져 누구의 죄냐? 난 안죽었으니 죄 없는 거잖아!

유대인을 죽이는 빌라도의 폭력에서 구원해 달라 라는 이런 것들을

 

채울려는 용도로 에수님을 이용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접근해 오는 겁니다.

 

이런 다가옴 접근 만남 접속 터치 다 차단하시고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심 만나주심 만져주심은 뭔고 하니

단절입니다.

비닐 봉지 밑바닥에 구멍을 다 뻥뻥 내 버리는 겁니다.

다 쏟아지는 거죠

그 쏟아지는 것을 보니

분명 좋은 것으로 주머니 봉지에 넣었는데

쏟아져 버린 것들을 보니 다 누룩이요

억지로 팽창 과장이 된 썩을것들이 까가득 그동안 주머니에 채워져 있었던 겁니다.

똥 떵 어 리

 

자꾸 큰 봉지에 쓸데 없이 작은 봉지를 만들어서

그 작은 봉지를 더덕 더덕 붙인 그 안에

뭔가 공정하고 도덕적이며 바른 삶들을 정의롭게 채워달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노 라고 하십니다.

 

그런 작은 봉지 다 뜯어내서 버리고

정작 너

너 자신 이라는 큰 봉지에

예수 나를 담을수 있겠냐고 물으십니다.

 

완전 돌직구죠

 

그 딴 자잴구잴한 것 다 치워버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딱 이 하나에 돌직구 빵 날려 버리는 겁니다.

 

너 나를 담아라 라는 겁니다.

 

나 라는 큰봉다리에 소유의 많고 적음을 맨날 맨날 따지다가?

갑자기 예수님 자신을 담아라 라고 해 버리면

 

이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마리아처럼

약혼 한 것이 다 깨어지고

율법으로 촘촘하게 매트릭스가 깔려버린 사회에서

돌삐 맞아 죽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어딜 가도 말입니다.

 

어딜 감히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가

하늘의 전쟁의 구조에 놓여진 문제에 비할바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당연히 내가 잘못 들었나? 안 듣끼네 라고 의심을 하고서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코자 냅따 엘리사벳 할머니 한테 가니까

맞더라 말이죠.

그래서 그 심각성이 다 날라가 버리고

그런 누룩들이 다 날라가 버리고

진짜 심각한 하늘의 전쟁을 오히려 빨리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고

이제는 거꾸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재촉합니다. 빨리 빨리 급속도로

 

진짜 확장성 앞에 누룩 같은 시답지도 않는 확장력은

확장성에 끼일 꺼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신들만의 전쟁에 의해 빌라도 손에 죽게 되었다고 울부짖을 때

예수님의 전쟁은 더 큰 전쟁으로 확장시켜 버립니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거든?

 

이래 되어 버리면 빌라도를 멸망시켜 달라는 기도 요청이 뭐가 됩니까?

예수님 본인이 빌라도 손으로 죽으러

이 땅에 내려왔다는 목적이니

 

더 큰 그림 앞에서 자그마한 그림들이 입을 못 띠는 겁니다.

 

약속을 담아야 할 몸들이

쓰잘데 없는 봉다리를 만들어가 주섬 주섬 붙여서

그 봉지에 정의를 담아야 한다고 우기고

공정을 담아야 한다고 우기고

바른 판결을 담아야 한다고 우기는 와 중에

 

나 보다도 더 억울하게 죽으러 왔거든 이라고 선언해 버리면

 

나의 호소가 뭐 됩니까?

 

똥 되지 뭐

 

 

그런 것들이 나 보다 먼저 있지도 않을 것을 봐버린 겁니다.

나 보다 먼저 있었던 유일한 것을 봐 버리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단절만을 외치는데 말입니다.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 부분만 딱 떼내면 불교의 부처가 심심하면 하는 소리죠

무소유 라고

그런데 무소유를 왜 소유할까요?

그것이 그들은 깨끗하다 라는 계보학으로 보는 겁니다.
위생학 위상학적으로 깔끔하다는 거죠.

 

그러나 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그리고서 비유(단절)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란 단절의 확장성이라고 했습니다.

비밀인데

골방인데

골방의 기도가 오히려

대로에서 기도하는 것 보다

더 온 동네 우주 하늘에 닿는 제대로 울려 퍼지는 확장성의 기도라고

 

비유는 모르도록 하는 단절인데

알 사람은 다 알도록 하는 패쓰워드를 걸게 하는 것이 비유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모르도록 차단하고

정작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사람 즉 제자들에게

저절로 알게 하는(약속한 성령이 오시면 아무리 어려운 비유도 다 술술 저절로 알게 되는)
이것이 단절성이다 라고

 

 

한 어떤 부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소유가 많아서 창고를 지어서 그 소유를 넉넉하게 만드니까

 

이런 소리를 부자가 합니다.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게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다들 이렇게 되고자 저축도 하고

보험도 들고

부처를 믿든

예수를 믿든 다 이런 삶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전부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노골적으로 인간의 삶의 전부를 한마디로 돌직구 날려버렸습니다.

 

인간의 삶의 전부는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딱 이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이거 외에는 인간의 삶 전부를 제대로 표현한게 없습니다.

 

이 당연한 것을 예수님은 누룩이다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여기 문장에 각자의 직업이나 기능에 맞게

물건을 다른 말로 옮겨보세요

 

바리새인이라면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신앙을 많이 쌓아 두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또는 경찰관은 여러해 쓸 범죄잡는 공적을 많이 쌓아 두면

또는 의사라면 여러해 쓸 의술기술로 환자를 많이 고친 업적을 쌓아 두면

 

종교인이라면 성화를 많이 쌓아 두면

부자 청년은 선한행위를 많이 쌓아 두면

 

이런 것들이 막힌 담을 뚫을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단절을 허물기는커녕 더 확장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단절이 되어야 하고

오히려 막힌 담 넘어에서 오는 쓰나미가 몰려옴으로써

도리어 단절이 더욱더 확장이 되는 겁니다.

 

저런 쓰잘데 없는 작은 봉다리를 다 싹쓸이 쓸어버리는 겁니다.

정작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봉다리는 심판을 담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미이다는 겁니다.

내 영혼아! 에서 이 영혼에 담아야 하는 것은

곧 심판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단절을 담아야 합니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지롱 이라는 심판성을 담아야 하는 것이

영혼이라는 봉다리요

 

생명이라는 봉다리인 겁니다.

 

해탈 아닙니다.

해탈 해서 뭐하게요? 혼자 독자적인 사후세계를 가져서 뭐하게요?

 

심판이라는 단절의 확장성을 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아니면 다 울리는 꽹과리 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에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인간의 삶 전부를 한마디로 정의한 그 내용에

못땟게 못뗏게 찬물을 확 부어버립니다.

 

제단에 불을 붙일려는 바알 아세라의 잇기 소유 개방 잇기 잇기에

오히려 기름이 아닌 물을 뿌리는 겁니다.

 

나는 망해도 싸다 라는 겁니다.

화로가 화로다 나는 심판받아 마땅하구나

 

못땟게 못뗏게 찬물을 확 부으면서

그래 그래 그랬었어요?

그런데 오늘밤 네 영혼 도로 찾으면 우짤레?

그렇게 모은 것 딴 사람이 어부지리로 가져가면 우짤래?

실컷 힘 쓴 것 남 좋으라고 했으니 우짤래?

 

마치 빌라도 손에 구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 긴박하고 간절함에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는데 우짤래?

 

라는 식입니다.

 

이것만을 확장 시키겠다는 겁니다.

 

누룩 보다 더 빠르게 더 풍요롭게 더 팽창력이 크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말입니다.

십자가

 

수십년 그렇게 어렵게 착실하게 힘들여서 모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남 주겠다는 겁니다.

 

부자 청년에게 가난한자에게 다 주라는 겁니다.

그게 율법정신맞잖아요?

그런데 근심하고 등돌려 갑니다.

 

율법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써만 완성되지

되도 않는 율법지키기 따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꽹과리 소음입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더 꽹과리 소리만 더 크게 날 뿐입니다.

 

아니 이런 예수님 앞에서

 

내 형이 재산을 정당치 못하게 너무 많이 가져갔다고

공정하게 나눠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조롱받고 십자가에 발과 손이 꽁꽁꽁 묶여

못 박히신 그 앞에서

 

내 손에 조그마한 가시가 찔렸다고 아무리 손톱깍기로 뽑을려고 해도 안된다고

아프다고 빼 달라고 울고불고하는 소리와 같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누구인지 전혀 안 보이고

 

자신이 보고픈 예수로 해석해서 예수님을 보겠다는 심뽀인 겁니다.

 

그러니 그런 소유욕에 예수님은 전혀 안 맞습니다.

 

정태호씨 안녕히 계세요

예수씨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을 보고 구름같이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다들 예수씨 안녕히 계세요 라고 다 등돌리고 돌아서 가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신났습니다. 제자들이라고 안 봐줍니다.

왜 너희들도 가지 왜? 왜 안가고 있니?

 

아예 보내버릴려고 작정한 듯이 보챕니다.

 

단절로써만 만나겠다는 겁니다.

어제 만나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매일 매일을 오로지 단절로써만 만나겠다는 겁니다.

 

아니 단절 자체가 만남이 불가능한데

만남을 단절로써만 성사시킨다는 것은

 

오로지 성령으로써만, 약속한 성령으로써만 만남이 성사되지

 

인간의 접근으로는 통할수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오직 피로만 만나겠다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심
내 귀중한 영혼을 무시하심으로만 만나겠다는 겁니다.

무능으로만

 

인간 자체가 봉다리로써 그릇으로써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진노든 긍휼이든 사용하겠다는 것인데

 

거꾸로 인간이 소유물로써 자기를 위하여 예수라는 소유물을 담겠다고 하니

서로 서로가 안 맞는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할 말 다 하시고

그런 안 맞는 대화 속에서

원하시는대로 맞춤맞게 제대로 다 일하셨습니다.

 

이제 인간만 멘붕이 된 채로 붕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다 날려버려서 빌라도 손에

폭군의 소유가 되도록 하겠다고 하니

그네언니의 소유가 되도록 하겠다고 하니

 

이거 우짭니까?

아니 재물이 문제입니까?

오늘밤 내 영혼이 사라지는데?

 

아니 처음부터 사라졌었습니다.

괜히 시공간이 생겨버리니까

그 공간을 채울려고 바둥바둥 하다가

세월 끝나는 겁니다.

 

어차피 그런 인생 예수님이 아예 시간을 압축시켜서 비유로 말씀하시니까

 

인간들 !! 당황하셨어요 !! 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게 하는 위험한 복음입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복음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전혀 소통 꺼리가 없는

 

오로지 단절 뿐인 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여기에 육의 활동은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성경말씀을 인용해 외치고 있는 겁니다.

 

만신(최고의 무당)이라는 다큐영화를 봤는데

만신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최고의 무당 만신의 삶의 전부는

오로지 인간을 위한 인간만을 위해 살 뿐입니다.

오로지 인간을 위한 기도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똑같습니다.

 

미신이니 뭐니 악마종교니 아무리 쫏아내었어도

정작 쫏아낸 그들이 도로 찾더라 말이죠

이런 인간의 이중성을 그대로 용서하고 받아주는

민족의 종교를 왜 외면하냐고 호소하면서

 

니캉 내캉 친하게 지내자 라는 내용이던데

 

이것이 영혼이 또는 생명이

소유물을 원하고 있지

 

본인이 심판을 담는 그릇임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시공간이라는 주머니에 쓸데 없는 주체가 생겨나서

그런 것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라진 것들입니다.

창고 재산 백날 늘려보고 백날 모아보세요

다 남들이 차지할 것들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딱 하나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썩을 것들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만이 처음부터 있었던

나 보다 먼저 있었던 겁니다.

 

이것만 남기고자 다른 되도 않는 심각한냥 나타나 몰입케 해놓고서는
모든 것을 다 단절 시키는 겁니다
.
알고보니 심각한게 아닌 것들이 심각한척 조작했던 겁니다.
그래서 단절이 감사한 겁니다.

유일한 소통이요 흐름이요 동앗줄이기 때문입니다.

 

 

 

 


 

 

 

 

 

 

 

 

 

 



누룩의 확장이냐? 단절의 확장이냐? (12:1-12)


2014/04/19 13:3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누룩의 확장일까? 단절(걸림돌,불가능성)의 확장일까?


마땅히 할 말 (12:1-12)


(12:1, 개역)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12:2, 개역)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개역)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12:4, 개역)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2:5, 개역)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12:6, 개역)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12:7, 개역)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12:8, 개역)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12:9, 개역)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12:10, 개역)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1, 개역)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12, 개역)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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